8. (질문) 직장인의 신우회 활동 3153
서기
교회
0
24
2023.03.13 21:34
8. (질문) 직장인의 신우회 활동 3153 직장(믿는 단체입니다)에서의 신우회 활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세상모임처럼 회비 거두고 봉사활동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지. 말씀으로 영혼을 세워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볼 때 항상 갈등을 느끼며, 또 한해를 보내면서" 이것이 아닌데 "하고 고민합니다. 구체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제목: 신앙생활은 소속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정상적인 교인의 신앙생활 모습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교회가 정상적이면 그 교회 교인은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그 교회에서 맡기는 여러 직책을 가져야 하고 또 그 교회에서 인도하는 대로 성경공부나 생활 속에서 실천할 일로 정신이 없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교인이라 한다면, 신앙이 어리면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신앙이 좀더 자라면 밤예배, 더 자라면 새벽예배까지 참석하게 됩니다. 또 성경읽기도 하루 1장에서 3장, 5장, 10장까지 자꾸 넓혀나갑니다. 맡은 일도 처음에는 예배당 뒷자리에 잠깐 앉았다가 뜨는 정도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앞자리로 앉게 되고, 안내나 청소당번을 하게 되고, 주교 반사나 차량운전을 하게 되고, 신앙이 더욱 자라게 되면 월급은 받지 않지만 마치 그 교회 월급받는 직원정도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 교회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시킨다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가정주부든 자기 바쁜 생활 속에서 틈을 내어 자기 교회 목사님의 지도를 따라 과제도 해야 하고 또 목표한 주변 전도도 해야 합니다. 아주 정상적인 교인이라면 자기 교회 목사님의 매번 설교를 잘 받아적었다가 생활 속에서 자기를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사람을 만드려고 남모르는 내면 투쟁을 하고 혹독한 자기 훈련에 몰입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2.이제 설명드린 내용대로 신앙생활이 진행되도록 만들어놓은 곳이 각 지역의 교회들입니다. 교회를 각 지역마다 각 지방마다 따로 따로 세워둔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표현을 사용해야 하지만, 평범한 교인을 상대로 지도를 할 때는 앞에서 설명하는 그런 모습으로 안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을 이렇게 말씀대로 길러 진정한 교인이 되게 하려고 교회를 세워놓은 것입니다. '교회 중심'이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은 자기 소속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지도는 단일 지도계통이 필요합니다. 그 지도계통은 바로 자기 소속 교회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교회가 자기 신앙을 지도하는 계통이 될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사람의 몸은 그 교회 소속을 해도 그가 속한 실제 그의 교회는 그가 신앙지도를 전적으로 맡기고 따라갈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또 교인이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면 소속 교회의 신앙지도를 따라 어리면 어린 대로, 자라면 자란 대로 한눈 팔 사이 없이 교회의 신앙지도를 부지런히 따라가야 합니다. 3.직장 내 신우회의 문제점 ①신앙의 소속과 활동은 한 계통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교회의 지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전념하는 정상적인 교인이라면, 직장 내 신우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소속 교회 교인으로도 열심히 활동하고 또 직장 내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현재 자기 교회 활동을 소홀리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우회 활동을 축소하면 교회 내 신앙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신우회란 대학생의 기독교 써클과도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 충실한 주일학생으로 또 중고등학생으로 자라가던 학생이 대학교를 들어가면 거의 그 대학교의 기독교계통 써클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 써클은 믿는 학생들이 신앙생활과 전도를 위해 모인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가입하는 것을 정상으로 알고 만일 가입을 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좀 이상하게 보일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있고 신앙에 앞선 선배나 선생님들 그리고 구역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앙생활을 막 출발하는 어린 학생들이나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 어린 신앙에게는 자기 교회의 신앙교육과 지도는 마치 시골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가정에서 자란 손주처럼 갑갑하게 느낄 때가 많은데, 신우회나 대학교 신앙써클의 경우는 같은 또래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데 여기에 서로를 적당하게 자극시켜 줄 남녀가 함께하는 좋은 분위기가 제공되고 또 이런 모임의 신앙지도자는 바로 한 해 위에 선배정도로 자신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지도자들이 그 팀을 이끄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소속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가지지 못한 묘한 맛, 신선한 느낌, 재미, 또 소속 학교나 직장에서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 이익, 그리고 교회 신앙생활에서는 생활 환경이 다양하여 어떤 일을 하려면 모두가 조금씩 감수해야 할 시간 조절이나 기타 여건들이 있는데 같은 부류만 모인 곳이기 때문에 신앙활동을 위해 손해 봐야 할 십자가가 없다는 것도 사실 이런 활동을 손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신앙생활은 대충하고 속으로는 신우회나 학교 써클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도 있고, 양쪽을 꼭같이 하는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 참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어떤 경우라 해도 자기 본 집을 중심으로 자기 친 부모님 밑에서 배우고 자라고 길러가야 하는 인격을 손해보고 잡탕으로 만들고 또 마땅히 집중해야 할 가정중심 활동을 분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우회나 신앙써클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③신앙의 내면을 깊숙히 아는 목회자들은 이런 점 때문에 속앓이를 대단히 하고 있습니다. 직장으로 말하면 '신우회', 또 학교로 말하면 '신앙써클'들이 짧은 눈으로 보면 복음운동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보다 넓은 눈으로 보면 복음 운동에 말로 표현못할 큰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진정한 목회자, 자기 교인에게 진정한 부모 심정을 가진 목회자들이면 모두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반 교회들은 평소 교회간 친목회 연합회 등으로 가정과 가정의 울타리라는 것을 너무 허물어 놓았기 때문에 신우회나 신앙써클의 이런 단점을 비판하기 어렵습니다. 가정과 가정이 이웃하고 살면서 밝게 웃고 인사하고 급할 때 서로 돕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이 애매하여 서로 가깝게 지내다 보면 이 가정이 자신들의 수준에서 자신들의 철학으로 자기 자녀를 기르고 싶은데 옆 가정과 너무 개방이 되어 오가다 보니까 영향을 받아 버리는 일로 속앓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용돈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싶은 가난한 가정과 자녀들에게 푸짐하게 용돈을 줘버려야 좋다는 씀씀이가 헤픈 가정이 가깝게 어울리다 보면 아이들에게 용돈 100원 하나를 가지고도 인격관리를 하려는 가정은 대단히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가정마다 체질이 다르고 교육의 방향이 다르며 주어진 경제여건과 교육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께서 그 교회 목회자의 실력과 신앙방향 그리고 그 교회의 역량 그리고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과 그 교회의 신앙전통 등에 따라서 자기 교회 교인을 자기 교회의 신앙노선에 따라 살얼음을 걷듯 살살 조심하며 길러가야 하는데, 신우회나 신앙써클은 단숨에 이런 분위기를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면을 지적하는 교역자들에게는 '교회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목회자의 교인욕심이라고 비판을 하는데 이 비판을 감당하는 교역자는 아직 일반 교계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지켜야 할 경계선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이들이 세계적인 양심가로 칭송을 받다 보니까, 지켜야 할 가정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부부들이 생겨서 양쪽 가정의 부부가 서로 경계선을 없애고 산다는 이야기를 선진국 사회 소식을 아는 분들은 평범한 일로 듣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개 돼지 같은 짐승들이라며 그런 소식을 듣는 것조차 민망해 하지만, 실은 한국교회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신우회나 학교의 신앙써클은 바로 그런 부부의 경계선, 그 가정의 부모 자녀의 교육의 내부 경계선을 허물고 넘나드는 것을 생활화 해버리고 있습니다. ④오늘은 세상도 교회도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것이 없도록 바뀌었습니다. 바꾸자는 말을 밑도 끝도 없이 했고, 새로운 시도는 전부 좋은 느낌으로 와 닿도록 말쟁이들이 백성을 유혹했고 교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로막힌 것은 무엇이든지 허물어야 좋다고 하여 '평화' '용서' '하나됨' '통일'이라는 용어가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까지 절대적인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어야 하는 것은 말씀을 어긴 죄를 허물어야 하고, 용서라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서 하나님께 회개를 해서 용서를 받게 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려서 살아 있는 나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지 그 반대로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 죽어 있는 송장과 공동묘지에 함께 눕는 것을 하나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완전히 미친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통일도 못난 놈이 잘난 사람에게 배우고 따라가서 통일이 되어야 하고, 실패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을 본받아서 통일을 해야 하듯이 불교가 회개를 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함으로 종교통일이 이루어져야 하고, 한신대나 장신대와 같이 정치집단으로 나가는 교회들이 교회의 순수한 복음운동으로 돌아와서 복음 유일주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통일들이 전부 빠꾸 기어를 넣고 후진을 하는 바람에 불교로 가는 통일, 기독교 정치주의로 타락하는 통일로 나가는 것이 오늘 교회의 말세 현상입니다. 바꾸어야 할 것을 바꾸어야 하는데 무조건 바꾸고 허물다가 이제는 가족의 경계선도 허물어버렸으니 이 가정과 저 가정의 부부의 경계선도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있고 저 교회가 있으며, 이런 목회자가 있고 저런 목회자가 있다면, 대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배우고 자라가는 환경이 따로 필요하여 어떤 교회는 하나님께서 대형교회를 만들어 그 사람을 대형교회 교인으로 소속을 시켰고, 어떤 교인은 10사람도 안되는 개척교회 교인으로 배치를 시켰습니다. 병신 부모 밑에 태어난 자녀가 부모를 버리고 부자집으로 양자갈 연구를 한다든지 아니면 학교에서 만난 부자집 아이들과 써클을 하고 어울리면서 집에 늦게 돌아가게 되면 집에서 자기 오도록 기다리고 화장실도 못가고 밥도 못해 먹는 부모가 불편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패륜일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 교회 소속 교인들의 영생을 준비하라고 오늘 이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그 교인들에게 주신 가정과 같습니다. 그 가정의 개념을 자꾸 허물고 바꾸어 오늘의 가정이나 부부는 가정이나 부부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신우회나 학생의 신앙써클 등의 문제를 놓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진정한 교회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⑤신우회나 학생써클 때문에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문제점도 많습니다. 앞에서는 주로 이런 신앙 활동들이 신앙의 본 계통을 흔들어 어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부모 외에 다른 세계를 접하게 하여 잡된 사상과 행동을 만드는 경우와 또 신앙에 장성한 교인이라도 자기가 지켜야 할 자기 가정과 자기 가족과의 접촉을 벗어나서 남의 가정 식구들과 경계를 허물어가며 하나가 되어가는 경우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데, 이 못지 않게 또 하나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을 세상 세력화'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힘을 합해 '종교계'라는 이름과 단체를 형성해서 정치권에다 대고 종교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한번 휘두르고 나면 우선 입맛은 달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매연가스는 그 종교계 중에서 기독교계에 관련된 이들은 전부 그 가스에 질식해서 죽을 수 있는 일산화탄소입니다. 종교계 안에서도 기독교계가 가장 활발하게 기독교계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국사회를 향해서 자연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교회 세금혜택 요구, 군종장교제도 운영안 등에 대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런 기독교계의 집단 행동과 요구가 정치권과 사회에 엄청나게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어 이런 맛을 들인 교계 지도자들이 기도는 폼잡느라고 하고, 속으로는 우리 기독교계가 단결만 했다 하면 이 사회를 쥐고 흔들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하나된 단체를 만드려고 지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쥐가 쥐약을 먹지 못해서 발광을 한다는 정도로 이곳 눈에는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들이 아주 생활 속에 작은 일로 예를 들어보면, 대학교 내에서 기독학생회 같은 운동, 또는 회사 내에 신우회와 같은 활동입니다. 세상 말로 전략적 차원에서도 무지하고 미련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진정 그 회사와 학교 내에서 기독교의 세력을 넓히려 한다면 기독교라는 사상집단은 외부적으로 단체를 결성해서 눈에 띄이게 할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처럼 내부적으로 단결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4.신앙의 본질은 자기와 하나님 관계에서 결판을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단체가 뭉쳐서 일을 한 것은 타락이나 탈선이었습니다. 완전히 죽은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남 몰래 하나님과 동행하던 숨은 아이 하나였거나 계집종 하나였거나 아니면 무명의 용사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과 세상이 다른 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 많이 모여야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을 해야 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체제나 조직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 범위는 오로지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는 면에서 결판이 나는데, 하나님이 동행하는 어린 아이 하나면 못 해 낼 일이 없고, 그대신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동행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그 많은 숫자는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역할을 하고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신우회나 학생 신앙써클 같은 곳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자기 교회에 대한 의리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한 사람의 몸 하나를 가지고 두곳에 걸쳐서 해야 할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실효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좋은 뜻으로 모였다 해도 벌써 각 교파 각 교단 각 교회에 소속된 천차만별의 신앙인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의 신앙운동을 한다면 이는 큰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우회가 사장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다는 보수정통 신앙노선의 교인도 있을 것이고, 신우회는 사장님이 노동자를 박해하지 않도록 회개하는 사람이 되게 기도하자는 회장님도 있을 것입니다. 신우회 회장이나 집행부 또는 그 주도 인원이 어떤 신앙상태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 신우회는 시민단체와 연계해서 애국단체 노릇도 할 것이고 혹 시민단체가 싫어하는 기독교 보수주의 순수 신앙노선을 주장하기도 할 것입니다. 신우회의 회장은 아무래도 그 회사 임시직으로 갖 들어온 '신앙있는 직원'이 되지는 못할 것이고, 그대신 폼만 잡고 신앙의 근방에도 가지 못한 어느 대형교회 장로님 직책에 있는 이사님이나 아니면 국장님이 맡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조용하게 예배만 드리는 순수한 곳이라 해도, 이미 직장 내의 신우회는 단 한 순간에 기독교 정치 세력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신앙노선의 향방이 극좌에서 극우로 오고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위험성이 있는 단체는 애당초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5.꼭 신우회를 만드려면, 그냥 '기도회' 이름 정도로 모였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중에서 일터라는 현실은 공동으로 주셨으나 자기가 다니는 직장을 하나님께서 기쁘하시도록 기도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기도하려면 장소나 시간이 곤란할 것이니, 각자 자기 신앙대로 기도하되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분위기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 회사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는 자유롭게 사용하라 하는 정도로만 운영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시간과 장소의 편리 이상으로 조직화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교회의 교권화 세속화 정치화 타락화의 과정을 밟는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6.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신우회 한 교회 교인들이 어느 회사나 학교에 함께 다니면서 그 직장이나 학교에서 신우회나 신앙써클을 만든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모든 우려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 해도 소속 교회의 지도 없이 교인들이 독자적으로 모임을 결성한다면, 이는 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암이라는 것은 몸을 지배하는 주인에게 통제를 받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조직입니다. 이렇게 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조직해서 교회의 지도를 받는다면 일단 교회의 기본 체제와 운영에 관한 원칙으로는 허용될 수 있지만, 여전히 조심할 문제는 있습니다. 한 교회 교인들이 직장이나 학교 안에서 뭉치는 모습이 외부 교인들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마치 하나의 폐쇄 조직처럼 보인다면 그런 행동 자체가 그들에게 우리를 경계하고 우리와 이질감을 느끼라는 통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다른 외부인들에게 신앙의 순수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순수하게 전도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 교회에서 배운대로 직장에 실행하려는 노력에 중심이 있음을 보여서 타 교인이나 외부인들이 볼 때, 이질감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인간 자기 실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연스럽고 부러운 모습을 보여 그 모임이 모일수록 주변에서 자꾸 그 모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끌려 들어가는 심리가 생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7.이렇게 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치 교회 차량에 교회 이름을 적는 것과 같습니다. 30년 전, 50년 전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나라는 불교나 유교의 나라였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표시를 극도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자신을 떳떳하게 목사라고 말하는 것이 쑥스럽고 부끄러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차칸이나 대중 식당이나 회사 또는 학교의 단체 식사 자리에서 기도하고 밥먹는 사람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시절 이곳 백영희신앙노선의 목회자들은 어디를 가도 성경을 남들이 보이도록 내놓고 다녔고 교인들도 어디를 가든 믿는 표시 내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한 학교 전교생 중에 기도하고 식사하는 학생이 이곳 신앙노선에 속한 학생 하나 뿐이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흔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6.25 점령지 속에서 이곳 신앙노선의 선배들은 종을 치고 예배 드렸고 성경을 인민군 점령시가지 않에서 옆구리에 끼고 활보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 믿는 사람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또 관계나 재계나 군 또는 일반 사회 정계에까지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 구멍가게 간판이나 회사 등에 기독교 표시를 해야 돈벌이에 도움이 되고 또 회사 내에서 프리미엄을 기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속 신앙을 기준으로 본다면 믿는다고 이름이나 가진 정도인데 외부로는 기독교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이 무슨 학교 뺏지 달고 다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차량들은 전부 큼직하게 '00교회'라고 써붙이고 또 개인 차량에도 교회나 CBS나 물고기 모양의 초대교회 문양을 달고 다니며 믿는 표시를 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시들이 기독교의 대외 홍보와 자신감을 드러내는 일에는 좋지만 그 표시를 붙인 차량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차량 외부에 있는 다른 운전자나 탑승객들이 그 차량 안을 들여다 볼 때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하는 선입관으로 관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또는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00교회'라고 써붙인 차량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표정, 먹는 모습, 앉은 자세 하나하나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고 염려하며 조심하는 분을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울고 싶자 치기'로 교회를 욕하다가 잊어버릴 만큼 되었는데 앞에 가는 교회 차량을 보고 한번 더 욕을 할 기회로 삼겠다고 걱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회 차량이 좋으면, 착취를 많이 했겠다고 욕을 합니다. 교회 차량이 검소하면 더럽고 추접고 궁색해 보인다고 또 무시할 것입니다. 과연 이 한국사회 일반인들에게 교인들이 은혜가 되어 그 모습에서 전도가 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자신을 경건하게 조심시켜야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우회를 결성하는 이들은 옛날 식인종이 있던 아프리카 오지에 돌아오지 못할 각오로 선교를 떠나는 자세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신우회와 관련하여 또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흥강사 초빙건입니다. 자기 교회 교인은 그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은혜받고 자라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영양 보충이나 특식을 위해 가족들이 외식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웃집 결혼 잔치에 초빙받을 일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기 가정 식사는 자기 가정 주부의 손에서 해결하는 것이 정식이고 기본이라야 합니다. 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자기 교회 목회자에게 은혜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듣는 즐거움만 추구하는 이들은 평소에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을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며 식당 소문을 들어보고 또 원거리까지 가서 맛을 보게 되는데, 이곳 저곳 목회자들을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는 심리 속에도 이런 면이 심각합니다. 심지어 이곳 목사님이 친구 목사님 초빙해서 몇 시간 설교시켜 경험과 경력을 쌓게 하고 또 강사비를 듬뿍 챙겨주면, 그다음에는 그 초빙받은 목사님이 자기가 잘 아는 다른 교회에 품앗이로 자기 초빙했던 친구 목사님을 강사로 갈 기회를 열어주어 또 그분에게 경험과 경력을 쌓게 하고 또 강사비도 듬뿍 받게 합니다. 교인들은 매일 듣는 자기 교회 목사 설교 대신 한번씩 이런 저런 요리사를 통해 음식맛에 길을 들이며 이런 것을 교회 교류 형제 사랑이라며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운전 기사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미료와 특식에 입맛을 버리기 때문에 자기 여자가 해주는 제 집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운전 기사들의 탈선이 시작되는 근본 이유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옆집 아저씨가 초코릿이나 사탕을 자꾸 주게되면 그 아이가 그 아저씨는 좋아하고 밥세끼만 먹이는 부모님에게는 속으로 반발심을 갖게 됩니다. 부흥회를 주로 많이 인도하는 목회자들은 한번 설교 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 교회 교인들에게 쓰더라도 병고치는데 필요한 약이나 주사를 주지 않고 입에 달콤한 말로 귀만 높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현상이 일반 교회들의 부흥강사 초빙인데, 사람에게 한번씩 긴장을 푸는 일은 극장에 데려가도 되지만 학생에게 공부를 하게 만들고 아이들을 사람으로 인격교육하는 일은 절제된 가정과 엄격한 교실 분위기가 1년 계속, 10년 계속 심지어 수십년 계속되어야 하고 그렇게 길러진 결과 훌륭한 학자가 나오고 또 제대로 된 인격적인 사람이 하나 배출됩니다. 오늘 교회들의 사람 기르기와 부흥회 인도, 신우회나 학생들의 신앙써클 등을 본다면 현장에서 당장에 찍어내는 1회용 컵라면 식이지 1년을 우려내고 몇 년을 우려서 내는 깊은 음식맛은 구경도 못하는 세상입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은 교인으로 하여금 자기 교회 신앙계통에 붙들려 마치 부모 자녀의 가정 교육 차원에서 자라가야 하는 면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한 형제라 해도 큰 집에 아이는 큰 아버지가 큰 아버지 철학과 원칙으로 길러야 하고 작은 집 아이는 작은 부모의 철학과 원칙으로 길러가야 그것이 가정입니다. 북한처럼 김씨든 박씨든 상관없이 노동당이 원하는 대로 기른다면 가정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집 아이를 우리 부부가 무식하다 하여 옆집 대학교수 부부가 자기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개입해서 우리 집 아이에게 교양을 가르치고 가정의 염치와 윤리를 가르친다면 이는 소탐대실이 됩니다. 잘 나도 못 나도 그 집 아이는 그 집 부모가 길러야 합니다. 물론 그 집 부모가 학교로 보내서 학교 교사에게 학습이라는 한 분야를 맡겨 기르는 것은 비록 교사가 학생을 맡았다 하지만 이는 부모가 맡긴 것이므로 부모의 교육의 일부분이고 부모의 교육의 방편일 뿐이므로 상관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개고기를 먹는 것은 나쁘다든지 아니면 개고기를 못먹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한다면 이는 명백한 월권이요 남의 집 아이의 인격 일부를 유괴 납치하여 세뇌교육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개고기를 좋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보신탕 집을 즐겨가는 가정도 있을 것이고, 부모가 동물애호가라는 철학을 가지고 자기 아이들에게 개를 먹는 사람은 식인종이라고 가르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 여러 종류의 부모들이 자기집 아이를 학교에 보낸 것은 부모의 철학과 성향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수학의 공식을 가르치고 영어라는 언어를 숙달시켜 달라고 보냈습니다. ------------------- 시간이 촉박하여 질서 없이 적었으나, 답변의 취지를 살펴주시고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