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질문) 타종교인과의 교류는? (쉬/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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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10. (질문) 타종교인과의 교류는? (쉬/352)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물론 저에게는 총공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수중에서도 극보수 진영에서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이단이 뭔지 왜 않좋은지는 기초적이지만 분별력도 있고, 정서상 맞지도 아니하여 그런곳에 가지도 아니하여 이단과 접촉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형님이 천주교 신부님인데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때 문상을 갔다가 친구형님인 신부님과 인연이 되어 가끔씩 대화를 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 신부님과 처음 만나 악수를 하였을 때 왠지 목사님을 대하는 듯 마음이 편하여 종교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으로 끌려 그 이후부터 존경하는 마음도 든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기회로 늦은 나이에 대학공부를 하는 과정에 같은 학과에서 알게 된 동료 학생 중 늦깍기로 공부를 하러 온 스님(신앙차원을 떠나 인격을 존중하는 과정에 표현상 존칭을 쓰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학생들에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 많은 정보도 전해주고 또 인생을 논함에 있어 진지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매력으로 동료들의 마음을 끌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인간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신앙이 달라서 그런지 서먹서먹하기만 합니다. 물론 그분은 저의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아도…종교에 대한 논쟁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에는 상관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학우로서 인간적으로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그리고 편지나 이메일로도 교신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열고 싶은데 많은 갈등이 생기는군요.
물론 직장 동료중 이단(안상홍증인의 하나님)에 속한 사람도 있는데 열성신도여서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전하고 권하고 있으나…. 그렇게 할수록 점점 경계하게 되고 담을 쌓게 되어 같이 근무를 하면서 어쩔 수 없는 대화는 해야 하지만 점심도 같이 먹지 않고 대화도 거의 안한답니다. 같은 밥 먹은 한식구와 같은 직장동료인데도 왠지 거리감과 이질감이 있어 빨리 청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랍니다. 물론 그 동료의 인품은 나무랄데도 없고 이해와 양보심도 많지만 그 동료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세상에 살다보면 각양 각생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구별하여 사귀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되지만…. 나름대로 보통사람들 보다 인격적으로는 남들보다 자재할줄 알고 인품과 인격이 훌륭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저의 생각으로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서요…….그리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신앙양심에 죄가 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하여 그들을 폄하하거나 멸시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비를 베푼 것 같이 내 신앙생활이 변함이 없다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베푼 것만큼 나도 베푸는 것이 어떨는지… 목사님의 진솔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진솔을 원하시면, 질문자께 미안해도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다른 종교나 다른 신앙으로 사는 사람을 만날 최소한의 자격은 있습니다.
이단이나 타 종교에 빠질 사람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정신없는 주장에 현혹될 정도도 아니지만, 그 사람들과 사회 생활로 만나는 정도라면, 그들과 접촉하는 데 특별히 금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2.신부나 승려를 피할 것은 없지만 인간적으로 끌린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신앙이 스스로 확고하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나 피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와 접촉하는 가운데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끌려져 우리를 따르게 되든지 아니면 우리가 가까이 해도 그들이 스스로 우리에게 동화될까 하여 피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접촉하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끌린다면 무엇인가 내 속에는 다른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술 담배 하는 친구를 가까이 하면서 나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술 담배를 끊는데 도움이 되면 좋은데, 술과 담배는 전혀 별개로 하여 그들은 즐기고 나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냥 친구로서는 가까와진다면 무엇인가 고장난 부분이 내 속에 하나쯤 있을 것 같습니다.
3.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을 가까이 한 것은, 남편 다섯 둔 그가 돌이키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버리지 않고 또 남편 다섯이나 둔 사마리아 여인을 배척하지 않았던 것은 음행을 버리는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고 또 남편 다섯을 데리고 산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음행에 가까이 간 것이 아니며 남편 다섯을 데리고 사는 생활로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승려나 신부를 만나면서 그들 인격과 생활에 베어있고 저려있는 이교성이 나로 인하여 조금씩 엷어지게 된다면 '전도'적 접촉이 될 것이고 그들의 이교성을 내가 조금씩 묻어오게 된다면 생사문제가 걸릴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중립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고로 서로가 접촉하게 되면 묻히고 묻어오는 것은 반드시 있게 됩니다. 없다고 한다면 이미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승려는 고기 먹는다고 사람먹은 것으로 치지 않으며 돌 앞에 앉아야만 극락간다고 믿지 않습니다. 신부도 교황은 정확무오한 천사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 봉사와 자기 수양을 말하는 도덕주의로 다 변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개는 극단적인 논쟁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좋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4.미혹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아무리 현대적 의미로 포장을 한다해도 부자 하나 죽이면 가난한 사람 백명이 행복해진다 하여 마구 학살했던 사람들이고 기독교는 종자를 없애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이 잘못되었으면 이름을 완전히 바꾸든지 아니면 과거를 완전히 정죄를 해야 하지만, 그들의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토대 위에 오늘의 정권은 잡아놓고 대외적으로는 슬슬 미사여구로 포장해버리고 있습니다.
불교는, 수도 없이 소중한 남의 인생을 돌 앞에 앉혀 놓았고 그러지 않고는 지옥 염라대왕에게 목이 날라간다고 협박했던 선배들이 천문학적 재산과 문화재를 넘겨주고 그 이상의 액수로 계산해야 할 상표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오늘의 승려들이 그런 주장에서 넘어온 재산을 거머쥐고는 전혀 달리 살고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기들이 옳다면 혹세무민하여 착취한 재산과 불도를 전부 민중에게 돌려주고 새로 출발해야 양심일 것입니다.
천주교도, 중세기 1천년 수도 없는 사람을 마녀라 하여 태워죽인 역사에 없는 처절한 살인백정들입니다. 연보 소리 듣고 지옥가고 천국간다고 하여 오늘의 천주교가 세계 제1의 조직으로 형성이 되었는데, 천주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신부라면 천주교와 신부라는 이름을 버려야 양심일 것이고 그런 신부라면 그렇게 형성된 천주교의 이익금에서 자기 생활과 오늘의 성당 유지비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김정일이라는 인물이 얼굴 한번 환하게 웃고 듣기 좋은 말 몇 번 하고 나니까 남한에 김정일 오빠 부대가 생기고 그 사람과도 대화할 만한 여지가 있다고 난리들이지만, 그를 잘못 알았습니다. 수도 없는 사람을 한 칼에 다 죽이고도 웃을 수 있는 그 사람과 오늘 웃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그 사람과는 둘이 아니고 한 사람입니다. 과거 화형으로 천주교를 유지하며 돌부처 앞에 뭇사람을 극락가라고 앉혀놓은 그들과 그런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의 친근한 이웃으로 와닿은 그들과는 사람은 달라도 그 속에 연결된 선은 아직도 하나입니다.
그분들이 인성이 좋고 사회성이 좋은 것은 얼른 들어봐도 이해되고 또 사귈 만합니다만 그들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는 그들이 잡고 있는 연결선은 아직도 불교와 천주교입니다. 그들은 분리하여 대할 수 있어도 그들과 분리할 수 없는 그들 속의 종교들은 질문자께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상대할 만큼 그리 만만한 도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수천년을 이어올 때는 온갖 풍상과 변하는 시대에서도 살아남는 논리와 변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부모와 자식의 비유는 모든 상담에서 제일로 내놓을 수 있는 성경원리입니다.
부모라면, 혹 부모의 입장을 연상해 보실 수 있다면, 아직은 모범적이고 또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역시 우리 아이와 같이 착하고 모범적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아이 아버지가 비디오방 오락방 등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현재까지는 분명히 두 아이가 다 안심할 수 있는 모범생이라 하지만 앞날이 구만리요 인생길이 몇번이나 갑자기 바뀔지 모르겠고 또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만에 하나 친구집에 갔다가 눈을 뜨게 되는 날에는... 등등 여러 앞날의 가능성을 두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서 함께 놀고 숙제하는 정도에서 허락하면 안되겠니, 이 정도가 우선 미봉책이라도 정답이겠지요? 부모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울린다면 언제 하루아침에 어찌 될런지?
내 딸 아이가 사귀고 싶은 친구 엄마가 만일 다방이나 주류업소 주인이라면 외동 딸에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말이 어디 한 두가지겠으며 주의 당부 할 말이 적겠습니까? 또 그 말을 다 했다고 그다음 안심하겠습니까? 가장 좋기는 그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접하며 우리 가정의 정상적이고 바른 환경으로 영향을 받기 원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아이가 물드는 경우를 생각하면 얼마나 조바심이 날까요?
6.교계가 인정하는 정상급의 인물들도 줄타기를 하다가 물구덩이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 교계가 아주 기독교를 대표한다 하며 불교 유교 천주교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한번 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원래부터 우리보다 신앙이 못해서가 아니며 그분들이 우리처럼 순수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모두들 그 길로 나갈 때 자기 집 어른들에게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승려나 신부가 현직을 벗기 전이라면, 단순히 전도할 대상으로 극히 조심하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분들의 인성이 어떻게 극진하거나 또 마음에 들지라도 현직에 있다는 것은 그들 속에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상의 유입처가 있고 그곳에서 흘러나와 그들 속에 녹아있는 유해화학물질이 일산화탄소라면 무색무취하지만 맡은 이들에게는 단번에 절명시키는 치명입니다.
참고로, 승려나 신부직을 벗은 분이라면 질문자 정도시면 충분히 사귀어 볼 정도라고 봅니다. 벗을 때는 끌려올 수 있는 준비가 되었고 아직 직업으로 가진 정도가 아니라면 불교나 천주교 정도는 끈 떨어진 연과 같습니다. 주어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단'이라는 쪽은 종교가 되기 위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물불 모르는 돌쇠와 같습니다. 시간소비가 심할 것입니다.
(재질문) 말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감사드리며... 한가지만...
목사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고 타종교인과의 만남은 사실 신앙에 득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답니다. 될 수 있는대로 안만나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그러나 지금부터 얼마간은 안 만날 수 없는 사정에 있군요. 좋든 싫든 대화를 해야 하고 천주교 신부야 친구로 인하여 만나면 안부 묻고 인사드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고 하면 자연스러운데 승려는 좀 만만치 않군요. 그분은 제복을 입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한답시고 합장을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그 합장에 응답하여 같이 합장을 합니다.
그분은 저의 신앙을 잘 모릅니다. 사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특별히 기독교인이라고 주위에 나타내지 않으면 잘 모르잖아요. 만약 우리집이나 사무실에 승려가 시주하러 왔을 경우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정중히 돌려 보냅니다. 시주하러 온 승려는 지나가는 사람이니까 아무상관이 없지만 학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같이 있다보면 이야기도 하게 되고 (나만 외톨이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인품이나 성격 그리고 사상도 알게 되고 종교인이라서 학우들이 특별대접도 해주고 그런답니다.
그분이 그의 관례대로 합장을 하면 저도 같이 응대해야 옳은 것인지 그리고 호칭도 불러주는 것이 예의인지 처음에는 호칭을 부르는 것이 목구멍에서 나올려고 하다가 다시 들어가 애를 먹었답니다. "저기 있잔아요"라고 간접적인 말을 쓰다가 보니 그분에게 미안한 감도 듭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남들처럼 정확한 명칭으로 호칭을 불러 준답니다.
만약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힌다면 그분은 아마 저를 생각해서라도 대화를 자재할려고 할 것 같군요.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겪은 바로는 순수한 이미지와 진솔하다는 느낌을 받아 왠지 덮어 놓고 단절하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나는 기독교인이요하고 대화를 단절해버리면 다른 학우들이 기독교인은 너무 배타적이야 사람까지 가려 사귀나? 하는 오해를 사고 왕따 당할 것 같아서 그냥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분위기를 맞춘답니다.
순수한 학생이면 순수하게 지낼수도 있지만 모두 주간에는 직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순수한 마음보다는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학우들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더러 있을 건데 표시가 나지 않군요) 타종교인의 직책에 대한 호칭을 불러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의식과 관례(합장)에 따라 인사를 하는 것등 이런 것들도 신앙양심에 죄가 될 수 있을까요?
(답변) 불교식 인사이니 못하고, '-님'은 얼굴을 보고 부르는 사회적 인사법
1.'합장'은 불교식 인사입니다.
승려가 상대방에게 불교식으로 합장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입니다. 그는 승려이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한 일원입니다. 사회적 인사를 해도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속세를 떠났기 때문에 불교적으로만 살고 상대하겠다면 일반 학교를 다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논리지요. 반대로 믿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 아무에게나 '샬롬'이라는 것도 실례입니다. 물론 전도를 하겠다는 뜻이면 상관없습니다. 그 승려는 요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캠퍼스 안에서 승려복과 합장 인사를 가지고 분위기를 몰아가는 기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 탓할 것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상대방에게 요구치 않으면서 모두들 목사님으로 부르도록 분위기를 유도해 간다면 그 분의 '실력'이겠지요? 그분은 그분 실력으로 자기 마음먹은 대로 몰아가고, 우리는 믿는 사람이니 따라 갈 것, 못 갈 것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스님'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야 정상적 신앙인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개는 소를 만나면 '멍멍' 인사를 하고, 소는 '엄매 엄매'인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소가 '멍멍'으로 인사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스러울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내적으로 우리 기독교만 옳기 때문에 천하만민이 우리 기독교식으로만 인사를 해야 합니다만, 우리는 상대방의 자유를 그렇게 침범하지 않습니다. '전도'를 통해서는 상대방의 범위를 넘어가서 전합니다만, 그 외의 일로는 침범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승려는 불도식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는 기독교식으로 인사를 하든지 아니면 일반 사회 사람만나는 식으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승복을 입고 학교 안에서 합장하며 돌아다니는 것이 그는 그의 직업에 충실한 직업행위입니다. 여기에 한두사람 부화뇌동을 하니까 친구들 분위기가 그냥 상대방 배려라는 입장과 또 한번 해 보는 식으로 유행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위기 유행에 휩쓸리는 환경 속에서 꼭 필요할 때 그것을 제동하고 나서지 못한다면, 생명없이 강물 물결 따라 이리 저리 굽이치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일을 가지고 앞장 서서 나설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변과 너무 같아지려다 보면 내 속에 있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어느 사회 어느 유행에라도 찬물을 슬쩍 끼얹는 분은 없지 않습니다. 합장 인사에 합장으로 대할 수 없는 것은 양심일 것이고, 다른 분이 혹 이상하다 하면, 불교를 믿기 전에는 불도식 인사는 내 양심이 아닐 것 같다 하면 될 것입니다. 유교인 만났을 때 유교식으로? 이북 대표 만났을 때는 '수령님 만세'?, 나찌 만났을 때는 '하일 힛틀러'?, 일본 우익 만났을 때는 '천황 만세'? 호주 사람들 만났을 때는 코를 비비고,
헤아릴 수 없는 인사법이 난무하는 세상에, 다 따라 갈 수도 없거니와, 애교로 해 줄 수 있는 것도 가끔 있고, 종교색채를 확실히 드러낸 것이나 일반 양심으로 허락치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2.호칭은 상관없습니다.
10살짜리 꼬마가 목사님에게 기독교를 반대한다는 뜻으로 '김목사'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유명사는 자신이 이름으로 짓는 것이고 남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는 식은 2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직접 만나서 부를 때는 그 사람을 위주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님'자를 붙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없는 자리에서는 고유명사는 지은 쪽을 중심으로 불러주지만 '님'자는 부르는 내가 존경하고 싶으면 붙이고 그렇지 않으면 빼는 것입니다.
목사님 없는 자리에서도 '김목사님'이라고 한다면 존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냥 '김목사'라고 한다면 일반 표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