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질문) 교역자 청빙을 기도하며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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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질문) 교역자 청빙을 기도하며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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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질문) 교역자 청빙을 기도하며 379 서진교회 집사입니다. 저희 교회는 개척한 지 10년 된 공회 소속 교회로서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고 1년 넘게 지내고 있으며, 현재 적절한 교역자 보내 주시기를 기도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분을 보내 주실지 모르겠으나 교역자 청빙을 두고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기도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총공회 본연의 신앙 노선으로 볼 때 현 시점에서 가져야 할 가장 바람직한 교역자와 교인의 자세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알아야 될 것이 있다면 미리 알고 기도하고 준비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아는 만큼 기도의 간절성이 더해진다고 배웠습니다. (답변1) 1.교인께: 교역자가 없는 시대라 하신 때를 먼저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 *질문하시는 분의 특별한 입장을 고려하되 주로 우리 공회 소속 교인 전체에게 드리는 부탁입니다. -------------------------------------------------------------------- 1.교역자가 없는 시대라고 아시고 교회를 책임진 자신들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①바른 교역자란 교인을 지도하는 목자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다윗과 같은 목자 때문에 한 시대가 복을 받았습니다. 믿고 맡기고 따라만 가면 되었던 모세도 있었습니다. 목회자란 다윗과 같고 모세와 같아야 합니다. ②그러나 목자 없는 시대가 하나님이 주신 우리 현실입니다. 다윗과 같고 모세와 같은 목자가 꼭 되고자 하는 분들은 더러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과 같이 소원한 대로 진정한 목자가 된 분은 없는 시대입니다. 고라는 많고 발람도 많습니다. 삯을 위하여 목회 직업을 택한 이들이 참으로 많은 때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자는 백목사님 정도에서 일단 끝이 났다고 보일 정도입니다. ③목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교인이 목자 노릇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비록 목자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목자 없는 시대임이 자기 눈에 보인다면 이미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교회에 자신은 목자 대신 목자 자리를 지켜야 할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목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벌써 일반 목회자를 넘어서는 안목이기 때문입니다. 2.공회 소속 교인들의 착각 한 가지가 들어서 큰 병폐가 되어 있습니다. ①백목사님의 목회를 보고 들었던 분들이 자신들의 교역자를 그 수준에서 찾고 있습니다. 교역자의 자격기준으로 어느 교회 가릴 것 없이 백목사님 수준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목사님을 부활시키든지, 아니면 목회자 청빙을 포기해야 합니다. 백목사님 1/10에도 미치는 목회자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늘 우리 현실이며 이 시대입니다. 설교가 은혜롭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백목사님 밑에서도 은혜없다고 불평했던 교인들이 있었음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권위면 경제면 경력면이 고루 고루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 옳은 말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뜻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미루고 있는 분들이 키 인물 학벌 성격 능력 집안 신앙을 골고루 보다 보니까 나이 30을 넘기는 정말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을 모셔놓은 서부교회도 1년이 넘도록 부족한 교역자를 모시게 되었다고 불평들이 있었습니다. 한 교역자가 한 가지 갖추기도 어려운 것을 10가지씩이나 손꼽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스스로 불가능한 일을 두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②백목사님이 부활될 수 없고 현재로는 그만한 분이 없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좋은 분을 불러 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덜 좋은 분으로 만족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한 분은커녕 1/10 되는 분도 없습니다. 1/10만에라도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교회주의를 이단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교역자가 있고 교회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교역자 중에서 선택하면 정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교역자가 다 부족하며 못났습니다. 그러나 이 못난 것들을 붙들고 당신은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③서부교회 1/100 되는 교회가 백목사님을 청빙하고자 하는 것도 모순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으로만 말한다면 예수님을 청빙하고자 하는 포부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교역자는 아무리 부족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은 교역자 없는 교회가 되어보아야 아는 사실입니다. 백목사님을 모셔본들 이전처럼 또 다시 불평하고 불만할 분들은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셨던 당시 교인들 중에 결국은 예수님 모신 혜택을 예수님 생전에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실망하고 허무해서 돌아섰습니다. 3.교회의 본질, 교인이 은혜 받는 것은 사실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①은혜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예수님께 직접 받은 은혜보다 백목사님에게 더 큰 은혜를 받은 분들이 허다합니다. 백목사님께 받는 은혜로 기뻐하던 이들보다 다른 교역자에게 은혜받고 기뻐하는 이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많은 다른 진영에 우리가 가진 은혜와 기쁨을 가지고 우리 이상 충성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누구를 통해 어떤 은혜를 언제 얼마나 주실지는 단순히 우리 계산식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백목사님 없었던 수많은 시대에도 당대를 감당하며 하나님 은혜로만 살아온 분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백목사님 목회하던 서부교인 중에서도 목사님 생전부터 백목사님에게 이를 갈고 있던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덜 배우고 덜 받아서가 아니라 대개 그런 분들은 더 배웠고 더 받아서 그랬습니다. 오히려 지방에서 일년 1-2차례 집회만 참석하던 이들 중에서 진정 은혜로 살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②진정 말씀 은혜가 모자란다면 설교록과 재독으로 집에서 보충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부족하면 과외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 말씀이 심령을 채우지 못한다고 그렇게 수준높은 심령을 가졌다면 참으로 수준높은 설교록을 다시 읽으면 그 갈급을 다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입에다 떠 먹여주고 대신 씹어주고 대신 소화까지 다 시키라는 철없는 자세는 아닌지요? 예배시간에 한 말씀 주제로 받았으면 얼마든지 새겨서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교역자가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면, 실력없는 부모밑에 실력있는 자식 나온다는 예를 백목사님은 종종 들고 있습니다. 서부교인은 하나 힘써도 목사님이 아홉을 채워 열 은혜가 된다고 치고, 지교회는 교역자가 하나만 채우니 교인들이 아홉을 채워야 열 은혜가 된다는 계산을 예로 들었습니다. 꼭같이 하나 힘쓰는 교인으로서는 한 사람은 열에 살고 한 사람은 둘에 사니 다섯배 차이가 나겠습니다. 그러나 그 교인이 하늘나라 섰을 때 남의 등불에 밝은 줄 알았던 것은 제해지고 자기가 준비한 자기 불밝기로 계산을 할 것이니 두 사람은 꼭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거둔다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 힘쓰고도 제 실력이 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 서부교인들이었고, 오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꼭같이 하나 힘쓰고도 서부교인 1/5밖에 안된다고 부족감을 느껴 그들만큼 되려고 애썼던 분들이 서부교인만큼이나 실력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자기 교역자 하나 힘쓴 것에 자기가 아홉을 보태어 열이 되었던 것이고 외부로는 서부교인과 지방교인이 비슷하다고 계산될 때, 속으로는 지방교인이 서부교인보다 아홉배나 더 실력있는 사람으로 자라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백목사님 밑에 교역자들이 거진 지방교회를 거쳐 나온 이들인 이유입니다. 마지막까지 서부교회를 충성하던 많은 요직에 있던 분들이 사실 지방교회를 거쳐 올라간 이들임이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목사님의 마무리 지도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있을지라도 교인이 교인으로서 은혜생활하는 데에는 백목사님 없이도 아무 불편함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③사실 당연한 성경이며 교회사입니다. 신약교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동일한 종이며 교회사 역시 이 원칙을 벗어났던 중세 1천년의 타락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5백년 기독교의 기본은 하나님 앞에 모든 교인은 꼭같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복음운동을 위해 돕는 이들을 세운 것이 교역자입니다. 그러나 교역자가 구약의 제사장처럼 되어버리면 곤란합니다. 백목사님이 그렇게 우리 앞에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직책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른 교인 노릇을 잘 했을 때 그렇게 살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예였습니다. --------------------------------------------------------------------*여러 말씀에 지나침이 있었더라도 답변자의 수준에서 일반 교인을 상대하신다고 생각지 마시고, 설교록을 참고로 요약 전달한다면 이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 (답변2) 2.교역자께: 우리 교역자들은 사실 이 자리가 우리 자리가 아님을 인식하십시다., --------------------------------------------------------------------*교역자의 폐해를 지적하다보면, 글 쓰는 사람은 꼭 빠져버리고 그 외 교역자만 해당되는 글들이 되는 모순을 보게 됩니다. 이곳과 본 답변자는 '좋은 노선을 향하고자 하는 목표'만은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격과 자질은 그 목표에서 가장 멀리 있는 이들임을 우선 자인하오니 이 점 양해 바랍니다. ==================================================================== 교역자, 특히 우리 공회 교역자들의 대표단수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1.우리는 대량 실직 사회 속에서 가장 좋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삯꾼들입니다. ①거의 대개 우리 교역자는 사실 직장도 제대로 못 가질 사람들입니다. 현재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지 않는다면, 과연 현재만큼 밥 먹고 살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교인들이 은혜받지 못할 때 뒤로 돌아 앉아 하는 욕들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지적을 하고 나서기 전 우리가 먼저 인정하고 밝히는 것이 지혜로울 듯 합니다. 현재 성공적인 목회를 하며 승승장구하는 분들도 과연 그 성격 그 식대로 세상을 살았다면 밥 먹고 살았을까 싶은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교회 덕분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며 교인들이 연보한 돈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는 우리는 짐덩이들입니다. 혹 좋은 학벌과 유력한 경력으로 세상을 향해 좋은 기회가 있었겠다는 교역자들, 그분들도 현재 맡고 있는 교회보다 나은 직장 나은 형편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는 교회와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는 사람이 아니라 덕을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오늘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②고생했던 선배들의 목회생활과 오늘의 목회생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죄지을 돈이 없으면 없고 상대적 빈곤감이 있으면 있지 절대적 경제궁핍은 없어진 시대입니다. 오늘에도 절대궁핍이 있다면 목회와 상관없이 자신이 가진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정년퇴직까지 없는 상태에서 설교록만 잘 요약해서 전달해도 되는 공회교역자는 가장 좋은 조건에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과거 좋은 세상 경력을 가졌던 이들도 지금와서 생각한다면 이 길을 잘 택했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좋으면 끝이 없는 것이 인간 심리입니다. 일단 목회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 우리는 정상적인 목회자를 스스로 마음 속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어느 교회는 조건이 어떠하더라 하며 타락한 교회들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백목사님은 어떻게 사셨는지를 스스로 새겨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보다 못해 지적을 하고 나서면 백목사님이 우상이냐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교역자이니 스스로 자신을 비교해 보되 이왕이면 우리 시대에 우리가 알던 분 중에 한 분으로 백목사님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우리만은 목회자라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눈으로 보고들은 백목사님 모습만은 반드시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회 교인들 입에서 '총공회 안에 교역자다운 교역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는 말이 나온지는 참으로 오래 되었으며 그 책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③세상이 그리우면 세상으로 가는 것이 양심일 것입니다. 교회마다 뒤집고 들어가면 결국 월급 등 여러 세상 문제들입니다. 세상 문제가 문제된다면 깨끗하게 세상으로 나갑시다. 나가봐서 과연 세상이 좋으면 그냥 있을 것입니다. 돌아 오란다고 오겠습니까? 가 봐야 별 것 없어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우리는 교회 때문에 대단히 덕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설교를 들어 주러 앉아 있는 이들, 우리를 먹여 살리느라고 세상 험한 돈을 버는 이들, 다 각각 나름대로 잘 난 사람들이 교역자라는 극존칭으로 상대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몸둘 바를 몰라야 정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직장이 좋기 때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보다 나은 직장 지금보다 나은 목회 조건이 있다면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이동하거나 전직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고앉아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라야 비로소 조금이라도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2.교회를 주도하려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①현 교회를 두고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 그의 발언이 앞서야 합니다. 수십년 교회를 붙들고 나온 이들이 있는데, 어제 부임한 교역자가 강단을 탕탕 뚜드리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우리는 사실 문제가 발생되고 마찰을 거쳐 피를 보는 것을 순생과 순교라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구별할 일은, 진정 말씀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될 일이면 그리해야 할 것이나 무지하고 완고한 내 주관을 관철키 위해 발생되는 문제는 전부 죄가 될 뿐입니다. 경제문제 다음 많이 발생되는 교회와 교역자 간에 문제는 의견 충돌입니다. 집회가는 버스 선정 하나를 두고 교인과 교역자가 마찰이 발생하고 그것 때문에 감정이 상했다고 기어코 다른 시기에 다른 조건을 가지고 외부로 표출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 갈등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에는 그 이면에 과거 떡부스러기 갈라먹다 싸운 감정이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교역자가 자기 주장을 내세울 일은 알고보면 거의 없습니다. 공회 회의에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안건은 희귀합니다. 백목사님이 없는 이 시기 우리 모든 교역자들은 전부가 함께 소경이며 당달봉사입니다. 서로가 더듬어 네 발로 기어갈 때이지 누가 깃발을 들고 누가 안심하고 뒤 따를 때가 아니며 형편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를 두고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교인, 그는 그 교회 그 교역자보다 발언권에서 앞서야 할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는 사람임을 우리 교역자들이 먼저 인식을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만 그렇게 먹어도 벌써 교회는 안정을 찾고 진심으로 그리 상대할 때, 결국 교인은 몇 번하다보면 교역자의 의견을 구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맡으시라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맡는 일은 탈이 없으나 하나님도 강제치 않는 자유권을 박탈해 가며 설치는 교역자들 때문에 오늘 공회 소속 교회들은 함께 깨져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아마 맞을 것입니다. ②모름지기 신앙이란 결국 설득이며 교육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회 발족 원리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맡고 올 때 점령군으로 부임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대신 매 맞을 사람이 필요할 때 대신 맞아 주시라는 조건으로 부임한 동네북입니다. 교인끼리 발생되는 갈등에 교역자 한 사람이 죄인되고 매 맞으면 그냥 끝나버립니다. 오히려 그들이 미안해합니다. 이렇게 쌓아가는 것이 교역자의 교회 장악력입니다. 의도가 나쁘다 할지라도 방편은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노선문제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많이 듣습니다. 제 지식과 판단에서는 1992년 이후로 발생된 과거 10년의 모든 투쟁은 전부 교권투쟁이었지 노선투쟁이 아니었다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 교회 내부에서 교역자가 비록 교인을 상대로 하더라도 그 일은 과연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것은 거의 없습니다. 훗날에 되돌아보면 감정이었고 순간 판단착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하나님만 들이대면 되는 교역자의 병폐를 뜻깊게 새겨야 할 것같습니다. ③백목사님의 권위를 갖지 못한 강박관념, 공회 교역자들의 불치병입니다. 백목사님만큼 서부교인을 아껴 사랑하고 그 밑에 종의 종이 되었던 목회자도 없습니다. 그의 목회 내부는 항상 그러했습니다. 이런 피땀이 10번 있고 호령이 1번 있습니다. 숨은 피땀 10번은 보지 못하는 소경된 우리 교역자들이 1번의 호령을 쳐다보며 그리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좋은 복음을 받고도 이 복음이 막히게 된 내부 원인 첫째라고 할 것입니다. 서부교인을 호령하는 백목사님의 숨은 수십년 피땀은 보지 않고 그 권위가 담임교역자라는 직책에서만 나오는 줄로 생각하는 율법시대 사고방식이 문제입니다. 오늘은 신약입니다. 자리가 주는 권위, 직책이 담보하는 특권은 없습니다. 있다면 교인들이 인정할 때라야 있게 되는 것이 신약의 자유법적 원리입니다. 구약 제사장의 고생은 제거하고 구약 제사장의 권위만 오늘에 옮겨놓은 우리가 우리들 교회에 가장 큰 암덩어리들입니다. 진리 증거를 마음껏 하고 또 자신을 마음껏 죽이라고 준 것이 신약의 자유인데, 이 자유로 자기는 방종하게 만들고 남만 죽이는 권세로 자유하는 오늘 우리는 공회 교역자들입니다. 이 일이 익숙해져서 우리는 모든 교역자회, 총공회 여러 조직 운영에서 이미 뒷골목 어깨들과 견줄 수준에까지 와 있습니다.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체가 그렇다면, 비록 그렇지 않은 나라 할지라도 내가 앞서 저들의 잘못을 내 책임으로 지고 잿더미에 내려 앉아야 합니다. 3.이미 한국교회가 깊숙히 서구화되었습니다. 가속도로 다가오는 새시대를 봐야 합니다. ①교회가 완전히 빈껍데기만 남게 되는 시기가 이미 문을 열었습니다. 주일을 진정 지키는 교인이 거의 없는 시대, 교회가 단체로 주일을 범하는 시기에 진정 이 복음으로 걷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걸음은 최소한 백목사님 신앙출발의 초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 그 시작으로 돌아가려는 구심력이 없다면 세상을 향해 나가는 원심력에 교회는 송두리째 내던져질 때입니다. 최소한 교회가 주는 월급을 받고 사는 우리가 그 일선에서 노력치 않는다면 뿌리까지 뽑혀 희망없는 때가 되겠습니다. 교회가 크고 작고를 떠나 어느 한 모퉁이에라도 이 중심으로 목회할 교역자를 이해해 주고 지켜봐 줄 교인이 있다면 이 한 가지로 만족하고 황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②공회찬송가를 사용하고 공회간판을 걸도록 이해해주는 교회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문익환, 김재준과 같은 불신자들이 만든 찬송가를 가지고 예배보는 희안한 시대, 불교 회교와 손잡은 천주교, 그 천주교와 손잡고 한 자리 앉는 기장, 그 기장과 한 자리 앉고 멍에를 함께 매는 통합, 그 통합과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같이 하는 고신과 총신, 그 고신과 총신에 가서 신앙을 배우며 무슨 별별 프로그램을 다 가져오는 이런 교역자들이 차고 넘치는 우리 공회 안에서, 공회 머리되는 분들의 별별 타협과 이합집산에 전혀 흔들리지 않겠다는 이 한 가지 중심을 허용하고 지원할 마음이 있는 교회가 있다면, 우리 교역자로서는 그 교인들에게 목회할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황감하다고 해야 할 것같습니다. 진정 이 공회 원래 노선을 걸어려 하는 교역자가 있다면 그 길을 이해하고 협조할 교회는 제가 아는 대로는 한 교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진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또 약해도 최소한 신앙노선에서만은 확고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할 중심이 없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부임해야 할 것입니다. ③목회자 없는 시대에 목회자도 아닌 우리를 목회자로 받아주는 교회, 우리는 그런 교회에 대하여 감사할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두고는 살펴보고 의논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백목사님 사후로는 교역자와 같은 교역자가 저부터 시작해서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이런 때에, 그래도 교역자로 청빙해 주었다는 것은 황공할 일입니다. 사실 교역자이기 때문에 청빙한 것이 아니라 교역자가 되라고 기다려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교역자로 청빙받는 순간부터 참으로 큰 숙제가 생겼습니다. 교역자가 되어져야 하는 숙제인 것입니다. 이 숙제는 죽는 날까지도 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러니 지사충성외에는 다른 길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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