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문) 총공회 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하여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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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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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1. (질문) 총공회 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하여 599
총공회 사이트에서 많은 신앙의 유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20년 정도 총공회 교단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미국,영국 다음으로 해외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 7,000명정도의 선교사가
해외 오지에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성경에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 있으며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성경에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 지체의 역할이 다르듯이 총공회는 백목사님때부터 주일학교에
특별히 주력하여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이루었고 타교단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주일학교에 진력하느라 해외선교에 대하여는 부족
하였는지요, 아니면 한국도 완전 복음화가 이루어 지지않아 국내전도에
더 주력하느라 그런지요? 타교단에서도 약간은 의아해합니다.
제가 공회와 교단의 깊은 뜻을 몰라 부족하여 질문하오니 가르쳐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답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때 선교 위주로 방향을 잡는 것
1.우선 일반적인 '선교'의 분위기를 살피겠습니다.
①'선교'란 누가 말을 하고 언제 말을 해도 좋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또 미개 종족들의 박해 속에서 생명을 내놓고 복음에 취하여 복음을 전하다 복음 때문에 죽는 길을 선교라고 합니다. 죽으려 했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에 살아나온 이들이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나라 100년 선교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그 박해 그 고난, 이후 찾아온 복음의 전성기로 오늘까지를 잠깐 훑어봐도 교회가 왜 그렇게 선교위주 선교유일 선교전력으로 나가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②교회사는 선교역사이므로 '선교' 없는 교회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단과 교회들이 선교를 대외적 표어 중 제일로 걸고 진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유독 총공회 교회들만 선교라는 말이 없고 심지어 선교라는 발음도 서툴어 그 분위기가 외부 교단에서 볼 때 어색하기 이를 데가 없고 또 대단히 편협되고 수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다행히 백목사님 사후 서울과 대구공회 교회들을 중심으로 '선교'라는 말과 행동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공회의 대외 인식이 호전될 것이며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③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할 교회로서는 무어라 해도 선교 이상이 없습니다.
또한 선교의 특별한 의미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우리 교회에게 이웃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가장 확실한 사랑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란 누가 말을 하고 언제 말을 해도 좋은 것이라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선교의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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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제 총공회 시각에서 보는 '선교'로 집중해보겠습니다.
①'선교'라는 표현과 그 비슷한 종류의 표현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불편해 합니다.
'성경'은 성경에 성경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성서라고 미화하고 승격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라 하던 시절의 성경은 정확무오였고 지금 성서는 이름만 고종 '황제'처럼 한껏 올라갔을 뿐이지 교양도덕서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을 성경 그대로 다 믿고 살려는 교회가 있습니까? 주일 문제 하나만을 가지고 예를 들어도 공회 소속 교회들과 같이 이전 의미로 주일을 지키면 바로 '율법주의적 이단'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성경에 전도는 전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도라는 말이 미화되고 치장되어 지금은 '선교'로 한껏 부풀려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라는 표현이 없던 초대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받고 줄줄이 사선을 넘어 순직과 순교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지금은 선교는 홍수가 났지만 전도는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습니다. 전도의 변질 전도의 치장 전도의 과시로 나타난 것이 선교라는 표현이기 때문에 선교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도 그렇게 괴로워하는 곳이 공회소속 교회들입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을 '메세지'라 하고, 찬양대를 '성가대'라 하며, 연보를 '헌금'이라 하고, 설교 강단을 정원처럼 꾸미고 예배당을 성당처럼 건축미 위주로 만들어 가는 모든 것을 괴로워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선교도 같은 맥락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공회의 신앙노선은 선교의 본래 의미인 '전도'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습니다.
선교를 노래하는 모든 교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구이며 또 선교의 근거로 잡고 있는 성구를 하나 소개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교회가 외향적이 되면 결국 알맹이 없는 외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동일한 성구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온 전국으로 이웃나라와 세계 끝까지로 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성경을 읽으면 멀리만 가는 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중국으로 선교를 갔다면 보통 선교사가 되고 인도네시아까지 갔다면 좀더 의미 있는 선교사가 되고 아프리카 중앙으로 갔다고 하면 최고의 선교사가 되는 편입니다.
우리는 이 성구를 대할 때마다 내 속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성령의 요동침이 내 속에 있는지? 자기 속의 영감과 진리의 충만을 먼저 살펴보게 됩니다. 내 속에 뜨거움을 가졌으면 저절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영감도 자기 속에 계신 자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도 별로 없는 이들이 선교지를 다녀온 선배들의 경험담을 무용담으로 듣고 신세계에 대한 청년들의 경험 경력 과정인 줄 알고 일시 동경심이 유발될 때 그것이 성령의 충만으로 생각하고 진행해버리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주로 신학교의 교회사 시간이 그런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만, 순서가 너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에 팔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격하여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아프리카로 먼저 가고 인도네시아로 먼저 갈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자기 주변 자기 가정 자기 교회 내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바로 위에 있는 성구입니다.
가정 구원에는 애쓰지 않고 친구들에게는 복음 전파할 기회를 가지지 않고 바로 휙 날라 비행기를 타면 '선교사'라는 이름은 붙겠지만 성경은 네가 네 속에 하나님을 참으로 뜨겁게 붙들었는가? 네가 네 속에 너를 붙든 성령에게 붙들려 네 식구에게 네 친구에게 네 주변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뜨거움으로 미친 사람처럼 되었는가? 주변에서 전한 세월과 노력이 넘쳐서 그 다음 이웃 마을로 더 멀리 더 멀리 가다보니 성령이 로마까지 데려다 놓았기 때문에 떠밀리고 붙들려 그곳까지 갔는가?
아니면 강대국의 땅 따먹기처럼, 오늘 대기업의 북한 선점 달리기처럼, 책상에 지도를 펴고 여러 계획과 아이디어로 머리를 번쩍이다가 볼펜 끝으로 찍은 곳을 전략적으로 먹고 들어가는 하나의 점령법, 영업망 확장 비지니스로 복음을 대하고 교회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가게 되면, 오늘에 차고 넘치는 선교의 의미는 거의 다 거품처럼 보이게 되고 그 선교라는 단어와 표현 속에 보이는 진노받을 일들이 너무 강하게 비치어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참으로 순수한 선교사들에게는 죄송하나 대세는 분명히 그러합니다.
심지어 미국으로 선교가는 한국의 수많은 목사님들, 지금 우리 공회 안에도 많습니다. 심지어 미국으로 이민 간 자기 교회 교인들의 예배보는 곳에 집회를 가면서 선교헌금을 거두고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 그분들은 확실히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죄인들일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선교의 의미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전부 선교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다시 선교를 한다면 타종교를 전하겠다는 말이냐고 힐난을 한다면, 할 말이 없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들만큼 잘 나지를 못하면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선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옆집 선교입니다. 뒷집 선교입니다. 교회의 전도회를 전부 선교회로 이름을 개칭해서라도 전부 선교사가 되고 싶고 선교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못이겨 죽기를 자청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이면 선교사는 될찌라도 그런 분들은 스스로 그렇게 칭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심정이 아니라 남들이 먼저 점령하고 남들이 먼저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처진다고 생각하는 열등감의 발로로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정한 선교사, 진정한 선교란 오늘날 그 희귀함이 내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정도의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③선교라는 이름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더 큰 근본적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이 자기에게서 밖을 향하면 외향이 되고 자기 내부로 들어가면 내향이 됩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 그 성령 하나님 앞에 자신을 우선 내어놓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신앙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밖으로 쫓아 다니며 나처럼 믿으라고 하기 전, 과연 날 구원하느라 죽으신 예수님, 그 십자가, 그렇게 죽음으로 주신 이 구원을 생각할 때 과연 내가 주님을 죽인 이 죄를 이제는 해결했느냐는 자성이며 자책입니다.
남 속에 있는 사탄을 몰아내기 전, 내 속에는 더 강하고 더 못된 사탄이 들어 있습니다. 내 속에 사탄은 내 것이라 보호하고 남 속에 있는 사탄을 몰아내러 다닌다면 이것 참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주님 대속 앞에 고개 들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속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원수, 그 원수가 바로 자기 속에 들어 앉았으니 이 원수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이 생각에 잠기게 되면 옆집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속에 당장 날 죽일 불치병에 근심이 되어 옆 돌아 볼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라는 이름은 자기를 깨끗하게 했고, 자기 주변을 전도했으며 자기 교회와 자기 속한 주위 여러 범위를 주 앞으로 돌려 세웠고, 이제 환경과 입장 교통과 언어 모든 면에서 다시 돌아 오지 못할 정도의 먼 곳까지를 이 복음으로 가서 전해야겠다는 필연적 순서, 환경적 인도, 하나님의 뜨거운 인도의 단계가 그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이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숨은 7천이 있을 것이니 있기는 있을 것이나, 나타나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는 엘리야처럼 한 사람이나 될까 할 정도라고 판단됩니다.
④진정한 선교, 가장 급한 선교는 바로 자기 속에 아직도 말씀이 없는 오지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오지, 그곳이 선교지라고 일컫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근접도 하지 못하도록 버려지고 잊혀진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학자라면 자기가 평생 닦은 학문을 보배로 알고 사는 법이니 그 학문과 배치되는 것이면 하나님도 말씀도 배척해 버릴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선교는 자기 속에 가장 깊이 묻어놓고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장벽을 쳐놓은 바로 그 지식세계를 파헤치는 선교가 필요할 것입니다.
잘난 자존심 하나로 사는 사람, 교회 내 어떤 복음운동에 필요한 일이 있어도 자기 자존심 문제가 생기면 다 팽개치는 우리 목사님들이 있고 우리 장로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결정을 번복할망정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들일 수가 없다면 그 자존심이 바로 선교할 첫째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허다한 우리 내부 선교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 속에 미개척지 내 속에 옛사람의 심성을 복음으로 뒤바꾸지 않고 이것들을 내 속에 있는 내부 적으로 남겨둔 사람이 성경을 두고 멀리 멀리 떠나서 전도를 한다면, 그들은 그 사람을 천사와 같이 볼찌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속에 있는 너나 먼저 고치라고 하실런지....
자꾸 이 면을 생각하여 자기를 고치고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먼저 가까이 가게 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고, 받은 다음 외부로 전할 생각으로 전도의 방향과 순서를 잡다보니까 서부교회와 총공회 소속의 교회들은 선교라는 말은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부교회의 주일학교 전도역사도, 교인 가정에 있는 학생들을 다 불러냈고, 친척 이웃 집 아이들을 다 데려나왔으며, 그래도 힘이 남고 자리는 비었기에 동네 불신자 가정으로 들어갔으며 주변 인근 학교를 전부 다 휩쓸고도 반사들이 남고 시간이 남고 복음의 사명이 남았기 때문에 옆동네로 나갔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세계 최대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하다보니 그리 되었고, 가다보니 남들이 붙인 이름이 그리 되었습니다.
(깁바울선교사) 선교에 대하여 605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은 있습니다.
단점을 들추어서 말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 자체나 선교지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에 주님의 책망을 받을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교 사역을 합니다.
우리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도 무흠하고 완전하여 선교사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잘못된 것, 부족한 것은 주님의 대속 공로에 맡기고 주님의 강권하시는 인도를 따라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나, 나의 가족, 나의 교회, 나의 교단
나와의 관계만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중심한 관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켜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19절-20절)
모든 말과 모든 글은 이 말씀을 더욱 조명하여야 복을 받습니다.
총공회에 어느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를 선교에 관련하여 하였는데 교인 중에 한 분이 "백 목사님께서는 선교에 대하여 별 말씀이 없었는데"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있는 말씀은 어쩌고" 하였답니다.
총공회는 굉장한 부자입니다.
자칭, 타칭 최고의 부자입니다.
세계 최고라고 얼마나 자랑합니까.
얼마나 고급 양식이 가득한지 곡간에서 꾸역 꾸역 삐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 있는 형제는 물이 없어 목 마르고 양식이 없어 굶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양식을 곡간에 가득 채워 놓고 자기 배만 살찌우고 형제를 돌아 보지 않습니다.
총공회가 무슨 부자이냐고요,
예! 말씀의 부자입니다.
아버지가 선한 일 하라고 유산을 많이 물려 주니까
재산 싸움만 했지
권세 싸움만 했지
시간 낭비만 했지
정력 낭비만 했지
교인들 헛된 일에 희생시켰지
이제는 주님께 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교의 소식이 들리고 선교의 문이 열려 있는데
아직도도 선교에 대해서 이 핑계, 저 핑계 된다면 주님께서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지에 한 번이라도 가 보시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도 선입감이 달라 집니다.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러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특히 총공회 교리는 선교지에 가면 더욱 진가가 발휘됩니다.
생전에 처음 먹어 보는 최고의 양식,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다 성자라서 목회합니까.
한국의 목회자들이 다 완전자라서 목회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도 부족하고 불충하지만 맡은 달란트 대로 각자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일을 위하여 일하면서 주님 안에서 희로애락을 가집니다.
한국의 교회도 잘 못하는 목회자가 있으니 하고 한국 목회자 전부를 판단하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목회자는 어떤 심정일까요.
세상 말에 "밑 빠진 독에도 콩나물은 자란다"는 말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아무리 잘 못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 교회는 자라 가고
있습니다.
뒷짐지고 가만히 구경만 하면서 빈정거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글을 읽고 그 결과가
선교의 마음이 닫힌 것과
선교의 마음이 열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주님이 기뻐 하실까요.
지도자는 결과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면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백 목사님께서 다 하실 수 없던 선교,
이제 제자된 우리가 이루어 드린다면 잘 못된 것일까요.
선교를
백 목사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까
선교도 백 목사님 핑계대지맙시다.
백 목사님을 욕되게 하지 맙시다.
백 목사님은 우리에게 빠진 것이 없이 다 주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켜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19절-20절)
우리에게 최상위의 법은 성경입니다.
(답변) 공회의 신앙노선이 599번 답변의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1.교계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시각을 이곳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백영희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연구하는 곳이며, 이 문답방의 답변자는 그 신앙노선에서 답변하는 것이 오늘 교계 현실에서 너무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공회 신앙노선이며, 452번의 답변에서 말씀드린 입장은 선교에 대한 공회의 신앙노선입니다. 453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외부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는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모든 교계가 선교에 관해서는 질문자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유독 공회의 신앙노선만은 아직도 백영희목사님의 이런 신앙노선에 충실하다는 점은 대단한 착각이라고 지적을 받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2.그렇지만 굳이 452번의 답변으로 '선교'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선교에 대하여 희귀하게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잇는 공회의 신앙노선을 단호하게 발표할 때는 질문자의 지적을 몰라서가 아니며 또한 질문자의 선한 중심을 오해해서도 아닙니다. '선교'에 대하여 총평을 하라고 한다면 452번의 답변으로 요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목사님의 지시가 있어 옳든 그르든 따르는 것으로 혹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이곳은 '연구실'입니다. 그분의 신앙노선이 성경대로라는 확인과 확정이 있을 때만 그분의 신앙노선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왕 옳은 것이면 앞에 나온 깨달음으로 표현과 주장을 맞추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3.총공회가 가진 보배로 선교 전선에 나설 것을 촉구하심은 '앞날의 숙제'로 받고 있습니다.
선교에 대하여 많은 좋은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총공회가 특별히 선교에 나서야 할 점도 말씀하셨습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합니다. 괜히 질문자를 위해 헛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바람직한 순서로 말한다면, 백목사님 사후, 전 공회의 교역자들이 이제 특별히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노릇할 만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내부적으로는 서로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기로 하고 이후의 모든 힘은 전부 외부를 향해 받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서부교회는 부산에 마련했던 30여 지교회 예정지를 개교회로 지원했어야 했고, 공회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된 국내 전도를 인식하고 국외로까지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지만 어느 교단보다 자생력과 결집력 그리고 단호한 복음의 확신과 추진력을 가졌기 때문에 바로만 되었다면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리 되었더라도 '선교'라는 용어는 452번에서 말한 취지를 늘 생각하며 안팎으로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회의 진로에 대하여 질문자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고 또 동감을 하실 내용을 이미 1997년 10월 17일에 요약하고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연구실/정리방/9번 글 (강론) 공회인의 나갈 길 - 1997.10.17. " 01/05/18
다시 본 초대교회 백영희목회연구소 연구부 이 영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