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질문) 장로님이 설교하는 것은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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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3. (질문) 장로님이 설교하는 것은 561
우리 공회에는 장로님이 공식설교(주일 오전,오후,삼일 예배)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목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개척 교회) 2)목사님이 해외 출장 중 자리가 비었을 때 3)수습 목사가 파견되기 전 등의 조건이 아닐 때에는 공식적으로 예배에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복음과 상황 5.9,10월호'에서는 설교에 은사 받은 사람이 설교를 해야하며 목사들은 강단권을 개방하라고 했습니다. 대중 설교도 평신도가 주도하는 예를 실어 놓았습니다.누구나 설교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화란에서 장로님의 설교는 목사님의 원고를 읽는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일반교단 신학자에게 문의를 해 보았습니다. 위의 조건(3가지)외에는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공회법에서는 가능한 일인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몇 교회에서는 장로님이 목사님을 초빙하지 않고(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본인이 설교를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목사님의 할 일과 장로님이 할 일은 박병진, 교회정치통람에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우리 공회의 입장을 발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개교회에서 임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또 담임 목사님이 부목사,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설교를 장로님에게 부탁하여 장로님은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부목사님이 한 부서의 설교를 장로님에게 부탁하여 설교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
(답변) 장로교의 형식적인 교회 운영안과 백목사님의 실질적인 교회 운영안의 차이입니다.
1.우리 공회의 원칙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는 것이 공회의 원칙입니다. 설교 뿐 아니고 거의 모든 교회의 교훈과 행정, 또 어떤 직책에도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장로님이 목회자를 초빙하지 않고 직접 설교를 맡고 또 더 나아가 직접 목회를 하고 또 더 나아가 자신이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의 할 일에 대하여는, 목사님은 주로 설교와 목회 전반을 장로님은 그 보조와 협조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명확한 선은 없습니다. 사실 목회까지 나갈 형편이나 실력이 되지 않는 분들이 교회에서 장로직에 계신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부목사님이 한 부서의 설교를 장로님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부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밑에 부목사님 전도사님이 다 계셔도 장로님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많이 계셔도 그 밑에 있는 주일학교 반사선생님이나 평신도가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박병진, 교회 정치 통람'의 모든 이론에 대하여는 거의 전부를 잘못 깨달았고 교회를 잘못 인도하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 공회의 입장입니다.
2.장로교의 헌법에 대하여 공회는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거의 무시하고 있습니다.
장로교가 교회 헌법을 만들어 목사의 할 일과 장로의 할 일, 그리고 각 교회와 노회 총회가 각각 가지는 권리, 치리 등 전반에 대하여 교회를 타락 탈선케 하는 제도적 장치들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것이 공회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공회는 장로교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이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장로교에서 출발했고 장로교의 신앙정통을 이었다는 것까지를 인정하나, 그기에 머물지 않고 장로교의 단점인 많은 교회 행정을 거의 전부를 고쳐 나간 것이 공회이며 이런 특별한 이유가 있어 굳이 '총공회'라는 이름을 추가한 것입니다.
장로교는 쉽게 말하면 의회민주주의입니다. 대단히 위험하고 교단이 통째로 타락하며 제도적으로 잘못될 수밖에 없는 제도라는 것이 공회의 입장입니다. 서구사람들의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의식에서는 일정 기간 건전하게 이용될 수도 있지만 교회의 역사가 속화 타락으로 계속된 이유가 바로 이 제도에 있습니다. 의회민주주의란, 숫자의 정치입니다. 법도 숫자에서 나오고 목적 달성도 숫자에서 나옵니다. 결국 숫자가 정의고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정치가가 휩쓸 곳이지 진리가 주도하고 영감이 권위가 있고 옳은 것이 서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꼭 같습니다.
장로교의 헌법을 들고 박범진박사님은 많은 원리를 설명하고 있지만, 장로교의 근본 교리와 행정의 모든 원칙, 그리고 그 세부사항까지도 장로교 대의원 숫자만 확보하면 모조리 다 바꿀 수 있습니다. 박범진박사님이 말하는 대로 장로교는 이것이다가 아니고 장로교의 대의원 숫자가 이것이다 하는 것이 헌법이 되고 그 헌법에 다른 말을 하는 박범진박사님은 그 대의원 숫자가 불법도 만들 수 있고 또 제명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잘못된 인간 헌법은 고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대의원 숫자가 먼저 존재하고 그 숫자가 법을 만들고 진리를 바꿀 수 있으니 대의원 숫자를 확보할 수 있는 기술과 섭외력이 곧 장로교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회 제도는 뚜렷한 대안이며 장점 뿐이겠는가 라고 반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 제도는 어떻게 정해 놓아도 결국 그 사람과 그 교회가 운용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제도는 잘되면 좋고 잘되지 않으면 전체가 타락해도 일부분은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에 의하여 움직이는 현 장로교의 제도는 잘 될 수 있는 때도 잘 되지 않도록 제도가 막고 있고 잘못될 때는 전부가 잘못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회제도를 절대화 한다거나 또는 더 이상 손 댈 데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백목사님 자신도 평생 한번도 중단없이 계속 손을 보고 연구하여 나간 것이 공회 제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원칙 몇 가지는 시대나 경우에 상관없이 바뀌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공회제도는 바로 이 원칙입니다.
성경법으로 법을 삼고, 결의는 전원이 일치가 되어야 하며, 교단은 교권이 자리잡지 못하게 하라는 비상존기구화가 3대 행정원칙입니다. 이렇게 3가지 원칙만은 확실하게 지켰고 또 앞으로도 지켜진다면 공회 행정이 될 것이고 만일 이 3가지 원칙에 문제가 있으면 공회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게 됩니다. 이 3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그 세부 구체적인 사안은 얼마든지 변경 수정해 볼 수 있습니다.
3.장로교의 제도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너무 양이 많아 다음 다른 질문에서 받겠고 이번 질문에서는 장로님의 교회 설교에 대한 공회의 간단한 원칙, 그리고 관련된 공회의 행정 원칙 몇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시고 문제가 되거나 반론이 가능한 여러 경우를 가지고 다시 질문하셨으면 합니다.
(재질문) 추가 질문
공회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여태가지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군요. 복음과 상황 10월호를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어떤 장로님께서 우리 공회의 입장을 대변하듯 하는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공회의 시각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고신에 나오실 때 이런 장로법의 모순을 아시고 이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고 보겠습니다. 반론을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공회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문법인데 이제 성문화시켜서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임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것으로 봅니다. 위의 입장이, 갈라진 세 교단(우리 총공회)의 공식적인 입장인지 아니면 목사님의 개인적인,목사님께서 소속된 교단의 입장인지 한번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위와 같은 시각은 목회자 곧 목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굳이 장로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또 집사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모두가 설교자가 되고 모두가 행정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둘째,
굳이 장로회가 아니라면(성격상) 예수교 한국 총공회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일반 성도들이 기존 장로회와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셋째,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으면 여자 성도는 어떻게 합니까? 어린 아이를 설교자로 세울 수 있습니까? 이들도 위의 주장 대로면 세울 수 있습니다.
넷째,
동성연애자는 설교할 수 있습니까?
다섯째,
성도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위의 주장을 과연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설교를 한다고 해도 정말 진리와 은헤가 가득찬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여섯째,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굳이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안해도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개 교회에서 사람을 키우면 되지 않습니까? 위의 주장대로면 우리는 일반 장로회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교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자신 있게 우리 공회의 입장을 표시해야 합니다. 말과 글은 일치해야 합니다. 자신이 장로교도가 아닌데 장로회교도라 하면 이중성을 나타내며 말과 글에 있어 진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이라면 우리 공회는 예수교 한국 총공회의 간판이 우리 신앙을 잘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공회법이면 공회를 위해서도 이런 것이 일부 목사님만 아는 것으로 거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자료를 정리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제일 시급한 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있으면 우리 공회는 이런 공회법을 가지고 있다고 정정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라고 봅니다.
(답변1) 1.총공회의 공식적 입장과 발표에 대한 몇 가지 설명
시원스럽게 지적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답변자의 주장이 옳다면 총공회는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설교나 여러 행정적인 면을 그렇게 인식하고 처리한다면 장로교라 할 수 없습니다. 답변 내용이 공회 안에서 가지는 위치를 확인하시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답변의 편리대로 분류하였습니다.
1.답변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정리한 '총공회적 입장발표'는 없었습니다.
①공회 행정의 특수성은 총공회적 입장 발표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다만 참고할 뿐입니다.
세상 행정원칙으로 교단을 운영하는 일반 교단의 경우라면 '교단적 입장'은 서류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개인의 생각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공회는 그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 문서화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치 않는 교회입니다. 심지어 교역자회의록이나 총공회회의록이 있다해도 그 당시 그런 현실 속에서 공회가 조처한 내용이 이러했으니 참고하라는 정도입니다. 불문법적 운영은 다음 답변에서 계속하기로 하고.
질문하신 내용에 국한을 하자면, 예배 중 설교를 장로님이나 일반 교인들이 맡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두고 공회의 입장을 질문 답변했습니다. 답변자의 설명은 총공회가 수십년간 해 내려온 사실이며 신앙이며 행정입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이나 직분에 대한 공회의 입장, 공회의 신앙노선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정리해 본 적도 없고 또 발표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설명에 문제가 있다면 앞으로 공회 진로를 수정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의논할 일입니다. 물론 개교회적으로 이런 공회의 원칙을 반대하여 목사님만 설교하게 하는 원칙을 세운 교회가 더러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있습니다.
②총공회의 입장은 가장 옳은 것, 가장 바른 것이 바로 총공회의 공식입장입니다.
총공회의 공식적인 입장 발표는 거의 존재치 않는다는 설명을 앞에서 드렸습니다. 사실 총공회의 진정한 '공식적 입장'은 백목사님 생전에는 목회설교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이 바로 총공회의 진정한 공식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백목사님 사후에는 여러 공회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공식적 입장을 각 공회별로 발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전처럼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그대로 수용하고 나갈 수도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회적 발표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대구공회나 서울공회는 전자에 속하고 기타 공회는 아직까지 후자에 속합니다. 전자에 속하는 대구나 서울공회조차도 의지는 있으나 대외적으로 어떤 공회적 입장을 발표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 대외적 발표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현재로서 어렵습니다. 서울공회에서 '헌법'을 통한 발표, 부산공회(2)의 총공회 성격에 대한 언급, 대구공회가 12.12.발표문이라고 이름했던 공회운영안 등을 1-2차례 발표한 적이 있었으나 한 순간의 욱하는 심정으로 나온 것이어서 스스로 폐기하거나 취소하였고 아니면 없었던 것으로 돌려버리는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특히 교리나 행정 원칙에 관한 한 그러합니다. 따라서 수정된 발표가 없다면 기존 입장이 유지되거나 최소한 부정되지는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총공회는 답변자가 설명한 공회의 입장과 같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③우선 총공회에는 답변자의 설명을 반대한 경우가 아직까지 거의 없습니다.
이곳의 모든 답변은 'yilee@pkist.net'으로 기록하는 본인의 사견이며 개인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을 '백영희목회연구회'로 운영하며 활동하는 내용은 특별히 개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경우는 전부 '백영희신앙노선'에서 보고 적고 있습니다. 즉, 이곳의 주장이 총공회의 본 신앙노선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고 전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백영희신앙노선이라는 단정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라도 이의하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이곳을 개인적으로 비난하거나 감정풀이로 말싸움을 한 경우는 있어도, 이곳이 총공회의 교리 신조 행정이 이러하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는 총공회 소속 모든 공회와 교회들이 반론을 펴고 있지 못합니다. 이유는 백영희목사님의 신앙노선에 대한 교회사적 교리사적 의미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하여 연구할 자세도 노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각 공회에는 이곳 답변자를 훨씬 능가할 세상과 신앙면에 실력있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맡고 있는 교회나 타 교계를 향해 눈을 돌리기 때문에 공회 신앙노선 연구를 외면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다행히 인터넷의 홈 운영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제는 더 이상 입장 표명을 미룰 수 없는 시대와 분위기가 되었고 이를 각 공회가 자각하기 시작하여 이제 부산공회(2)를 시작으로 각 공회가 홈을 운영하거나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홈을 운영하게 되면 즉시 공회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공개 입장 표명을 할 수밖에 없으니 이제 앞으로는 좀더 신중하겠지만 무언가 공개적 연구가 많아지리라 예상을 합니다.
④총공회의 원래 신앙노선은 그러하더라도, 미진함은 많을 것이니 이는 보충할 일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답변자의 답변은 개인 답변이라는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본 답변이 총공회의 가장 정확한 입장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총공회의 신앙노선은 중심만 옳을 뿐이지 그 내용에는 착오도 오해도 또 미진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시정을 요구하거나 질문자와 같이 지적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곳의 신앙이며 공회의 원리이며 백목사님의 단호한 입장입니다.
(답변2) 2. 설교를 중심으로 살펴본 공회의 '목사'관과 기타 공회적 행정노선
2.공회의 불문법 행정을 성문화시켜 어느 개인이 임의로 사용치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
총공회를 총공회라고 부르려면, 최소한 3가지 원칙은 지켜야 합니다. 그 중에 첫째 원칙이 모든 교회의 운영은 성경을 유일한 법으로 삼고 인간의 행정 처리는 참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성경 외에 따로이 사람끼리 정하는 법을 규정하지 않겠다는 2차적인 원칙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 교단들이 '헌법'이라는 이름과 여러 종류의 규칙을 정하여 교회를 운영하는 명문법 또는 성문법 원칙을 신앙노선 차원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어느 개인이 임의로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겠으나, 어느 한 개인이 교회를 마음대로 움직일 때는 규정 자체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그 규정을 가지고 그 교회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면까지를 봐야 합니다. 많은 숫자만 확보하면 교단도 교회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법은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숫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기도와 진리 연구에 있지 않고 사교술과 정치력입니다. 교회를 속화 타락시키는 가장 평범하고 빠른 길이며 오늘까지 교회 역사입니다.
어느 개인이 마음먹게 되면, 법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명문이 있든 없든 마찬가지인데 성문이 되면 그 성문의 규정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복음 운동이 막히고 변질된다는 단점이 하나 더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불문법이 완전이라거나 또는 타락의 소지가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니고 성문법은 그 규정이 세워지는 순간부터 영감 역사와 개인 개교회의 신앙자유를 막는 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니 이를 폐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보다 성경법이 유일이요 지상인데 그 성경법에 어느 법으로 더 보충을 해야겠느냐는 신앙의 노선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공회의 법은,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니 이런 점은 이리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로 원칙을 세우는 것으로 마칩니다. 다음에도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세운 규정은 변경 못할 법으로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으로 나아가는 공회의 의논이며 방향 설정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3.설교, 예배, 교회 행정에 특별한 직책을 지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직분이 필요없다는 주장
우리는 모두가 목사이며 장로이며 집사라는 것이 공회의 기본 시각입니다. 목사만 하나님의 종이며 목사만 말씀을 맡고 목사를 대적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일반 교회의 시각은 전혀 반대합니다. 신앙으로 사람을 기르는 사람이면 전부가 목사이고, 교회의 살림을 맡고 그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사라는 시각입니다. 전부가 어린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장로이며 또 그리 되어야 하고 그리 되지 않으면 성경 위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회에 전도부장이란 전도만 책임진 사람인가? 전도회 모든 부서에 부원이 되고 관심을 갖고 또 할 일을 다하여야 하며 동시에 전도부서에 관하여는 특별한 책임을 하나 더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회계부라면 공무원이 내 일만 하면 되고 내 일은 남이 하면 안 된다는 독점적 사고로 하듯 하지 않고 전도회의 모든 일이 다 내 일이요 내가 할 일이지만 회계부서는 남보다 좀 더 앞서서 하고 또 회계부의 일에는 다른 분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에 책임을 앞서 가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한 교회를 '목사' 직책 한 사람에게 위임 시켜 둘 일이 아닙니다. 온 교인이 전부 목사의 심정이라야 하고 목사의 책임을 가져야 하며 목사 노릇을 해야 합니다. 신약 구원의 특성이 그러합니다. 단, 각 자의 형편과 신앙의 범위가 있어 세상 직장을 가지다 보니까 그 중 한 사람에게 특별히 목사라는 이름까지 붙여놓고 그에게 특별히 한 직책에 가장 앞서 나가라고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잘하면 온 교인은 숨어 목사노릇을 하고, 만일 목사가 삐뚤어지면 전 교인이 그 목사의 삐뚤어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옳은 길을 찾고, 만일 꼭 함께 가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그 목사는 그가 옳다는 길로, 교인들은 자신들의 양심과 신앙으로 자신들의 길로 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공회는, 목사라는 직책을 일반 교단에 비하여 그렇게 특화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목사가 아니더라도 신앙으로 앞서 있기 때문에 대접 받을 수준에서 대접받는 것이지 그가 목사 자격증을 땄다고 하여 그날부터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시무투표라든지 목사 대접과 예우에 있어 이런 신앙흐름은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목사가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장로님 역시 교회의 한 이름을 가진 교인으로 꼭 장로님이라는 이름으로 할 일이 있을 때 그 '명의 사용' 때문에 주로 장로님을 세우는 것이지 장로님이 온 교인을 치리하고 다스려야 할 사람이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력있는 목사님은 목사님 이전에 실력이 있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고 신앙있는 장로님을 대우하는 것은 그의 신앙 때문에 대우하지 장로님이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대접하는 일반인이 다윗이 사울을 끝까지 존대하듯 한다면 그것은 그의 신앙이며 그가 받을 복입니다. 그러나 공회적으로는 목사를 특별 대우하라거나 장로님을 특별히 인정하라는 식은 전혀 없습니다.
구약적 직분 직책 개념보다 신약의 실질적이고 내용적인 신앙 내적 실체에 따라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5.여자분이나 어린 아이까지도 설교자로 세우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이런 점에서 질문하신 말씀과 같이 여자 분이나 어린 아이까지도 설교를 맡을 수 있거나 또 맡기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백목사님은 평생에 여자 분들에게 설교를 비롯 공식 예배 전체를 다 맡기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서부교회 추순덕집사님이나 나인숙권사님 이말출권사님의 설교는 아직까지 공회 어떤 교역자도 그 수준이나 그 은혜에 이른 분이 없다고 본 답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총공회 목회자 양성원' 과정을 마치고 성경 100독을 끝낸 분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만, 말씀 능력과 말씀 은혜와 그 말씀이 교인들에게 양식이 되는 일에 목사님들보다 여집사님들이 더 은혜가 있었으니 목사님들이 자진해서 그 여집사님들에게 배우고 또 가르침을 받으려 찾아 다닌 것은 서부교회의 평범한 사실입니다. 지금도 부산공회(2)로 운영되는 공회는 그 주도 목회자 거의 전부가 김효순권사님을 신앙의 지도자로 알고 백목사님 이상의 위치에서 무슨 명령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자세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회의 운영과 공회의 신앙노선까지도 그리하고 있으니 그분들은 스스로 신앙의 실제 어머니로 늘 따르고 있습니다. (문답방 질문답변 101-105을 참고)
이곳은 그분들의 판단과 노선이 아주 틀렸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신앙 차원과 신앙 실제에 있어서는 그 권사님의 말씀이 진정 은혜가 되고 옳아서 따르고 있으니 질문자의 지적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만들고 모세를 모세되게 한 지도자는 요게벳이었습니다.
또한 어린 주일학교 반사의 설교가 노련한 공회 원로 목사님보다 더 은혜스러워 그 반사를 큰 교회 목회자로 바로 내보낸 것이 공회의 행정이며 주일학생도 말씀을 전할 은혜가 있고 또 그리할 형편이면, 우리 공회는 그리 합니다. 주일학생은 장년반 강단에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거부합니다. 장로교 헌법의 일반적 규정에 의하여는 불법일지라도 우리는 성경에 옳으면 옳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연애자와 같은 이가 설교를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스데반을 죽인 바울이 다메섹에서 바로 설교하고 전도하는 것은? 이렇게 반문하겠습니다. 과거 죄로 말한다면 어떤 죄인이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로 그 사람의 형편이 설교를 할 수 없는 건강이나 설교를 할 수 없는 현재 진행 중인 죄 가운데 있을 때는 당연히 설교를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묻는다면 신학대학을 나와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거치고 '정식으로' 목사가 된 분 중에는 동성연애자가 없겠는가? 비록 7계명에 해당되는 동성연애는 아닐지라도 8개명에 해당되는 경제부정자로서 설교하는 목사의 숫자는 적겠는가? 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짓고 있는 죄라면 자숙해야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과거의 죄로 말한다면 없는 사람 없고 또 회개가 문제이지 그 과거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 아닌 사람으로 설교를 시키는 경우 동성연애자도 설교하겠다는 반론인 줄 압니다. 목사라도 그 이상의 죄인이 많습니다. 목사든 아니든 공개적으로 표시가 나고 또 현재 진행 중인 죄 가운데 있는 이라면 설교는 저절로 할 수 없는 것이겠고 다만 목사든 아니든 그 죄짓는 수준과 범위는 다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6.설교에 대한 공회의 입장은 신학교 대신 개교회의 교인 양육으로 나가는 입장이겠다는 반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학교의 폐해를 백목사님만큼 철저히 강하게 또 이치적으로 설명하는 분은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 답변자는 공회 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외부 세계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역시 신학교란 신앙을 삶는 곳이지 기르는 곳이 아닙니다. 신학은 어학과 학설공부이고 어학은 목회자로 하여금 공염불을 하게 하고 학설은 성경의 깊은 깨달음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하는 인의 장벽이라는 것이 공회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학벌이나 여러 세상 상식을 전부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말씀에 충실하고 충직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백영희목사님의 공회노선이었습니다.
공회 산하에 목회자 양성원을 두어 초기에는 여러 신학 과목들을 그 입문 수준에서라도 가르쳤지만 결국 그분의 결론은 신학은 책 목차나 잠깐 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옳겠다고 단정하여 신학의 여러 과목들을 거의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설교록 자기 연구로 모든 양성원 과정을 대신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어디서 양육할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한 학생에게 책과 노트 그리고 펜을 잡고 배우라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보를 하는 교인의 어려움을 알고 그 어려움 속에서 연보하는 교인의 아까운 마음을 알고 그리고도 연보해야 복받는 실감과 체험을 먼저 가지면 목회자는 저절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내보내어 세상을 알게 하고 그 세상 속에서 배운 말씀으로 실재 겪어 보고 그다음 목회자로 나가게 합니다. 이것을 산 교육 이것을 산 신앙의 양성법이라 합니다. 교계의 오해나 특별한 경우 등을 생각하여 양성원 과정을 두는 것이지 양성원이나 신학교가 목회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회 입장이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하여는 학벌에 목마른 공회들이 양성원 대신 신학교를 하고, 신학교도 외부 다른 진영의 교육부 허가된 신학대학들을 다니고 있지만, 공회의 본 노선으로 본다면 탈선이며 이탈입니다.
7.답변자의 설명대로라면 공회는 자기 정체성을 시급히 규정할 것
사실 설교 하나를 중심으로 살펴보아도 광범위한 점에서 총공회는 일반 장로교 교단이라 할 수 없는 본질적이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장로교에서 출발했으며 우리가 출발한 장로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의 신앙노선을 이어온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장로교 이름 뒤에 '총공회'라는 이름을 추가한 것은, 우리가 출발한 장로교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점을 수정 보완하였고 또 미비된 점을 바로 잡다 보니까 지금까지 내려 온 장로교의 신앙 성격이 대단히 많은 면으로 고쳐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 장로교 기존 장로교와는 더 발전되고 더 장성한 노선이 되었다는 표시를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총공회'라는 이름이 '예수교 장로회' 뒤에 붙은 것은 내적으로는 공회의 신앙노선에 정체성을 확인했다는 확신이며 외적으로는 이제 세계교회와 역사교회 앞에 공회의 신앙노선이 2천년 교회사의 앞날을 이제부터 맡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공회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점검도 확인도 전부 끝낸 상태입니다. 공회 내에서 아직도 공회의 여러 모습을 두고 일어나고 있는 반론들은 이미 공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주장들이 잘못된 것이며 과거에 있었던 폐습이라고 분명히 확정을 했는데도 대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의사소통 문제로 반복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혹 신앙본질 자체가 공회 신앙노선에 맞지를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으니 그런 분들이나 그런 공회는 외형적으로는 총공회 소속으로 분류했으나 실질적으로 공회 외부인이라 할 것입니다.
(재질문) 추가 질문 몇 가지
질문 4 목사와 장로의 시무 연령에 대해서 우리 공회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사망하실 때까지 시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타 교단은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모두 70세가 되면 은퇴를 하십니다. 왜 우리는 사망할 때까지 시무를 합니까?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공회법은 이 항목이 있습니까? 이런 공회법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파급되는 문제가 상당할 것으로 압니다. 또 모교회 담임 목사님이 정년(우리 공회)을 70으로 하고 은퇴를 준비하고 공포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공회법을 무시하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공회가 개개인의 돌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질문 5 명예 권사에 대해서
우리 공회에는 명예 권사를 둡니까? 명예 권사는 권사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개교회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여 명예 권사를 두었을 때 공회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질문 4,5에서 공회 속에 개교회가 임의적으로 하고 공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다면 공회의 위상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까? 이럴 때 공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말씀해 주십시요
질문 1에 대한 추가 질문
질문1에 대한 답변에 대해:
1)공회 전체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고
2)처음 순교의 용어를 쓰신 분이 목사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목사님의 심정을 알 듯 합니다. 더 이상 할 말은 많지만 여기에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자세한 설명으로 많은 의구심이 풀렸습니다.
제가 목사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백목사님이 순직과 순교의 용어를 본인에게 쓰여질 때 백목사님은 결국 순교를 하셔도 순직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교를 하셨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분은 너무나 겸손하셨기에 순교를 하셔도 분명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며 신문에 광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존재를 끝까지 숨겼을 것이라고 저는 분명 생각합니다. 답변하시는 목사님은 끝까지 순교라는 용어를 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순직이라 사용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순교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직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분은 그 분의 향기를 분명 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분을 정말 아름다운 주의 종임을 말없이 증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답변1) 귀한 지적이며 감사한 중심입니다.
1.그리 이해하시겠다면, 대단히 감사하고 또 답변자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목사님의 중심과 그 자세를 정확하게 짚어내셨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연구하고 확대하는 사명에 있기 때문에 주장할 뿐입니다. 이런 연구와 전파는 백목사님이 문제가 아니라 백목사님을 통해 전달된 이 시대의 '신앙향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분의 순교는 너무도 당연하고 또 정확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순교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순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산공회(1)로 분류할 분들은 거의 모든 공사용어에서 백목사님을 지칭할 때는 '순교하신'을 접두어로 부착하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친애하는 수령님'을 붙이듯 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래도 상관치 않고 있습니다.
2.순교라는 용어 사용은
답변자는 누구의 말을 듣지 않고 사망의 정황을 듣는 순간 순교라 했습니다. 이와같이 동시에 그리고 각각 자기대로 그리한 분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되도록 외부에 전하고 또 그리 하도록 한 책임은 분명히 있습니다. 신문에 대형 광로로까지 내보내는 것은 그분의 격노를 살 일입니다. 그러나 답변자의 신앙은 당시 그 격노를 사면서도 외칠 위치에 있었습니다. 동시에 늘 그분에게 가려 그분을 통해 받은 교리연구가 혼동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질문자의 시각은 답변자을 본연에 더욱 굳게 한다고 봅니다.
(답변2) 1. 은퇴제도, 공회의 개교회 통제 등에 대하여
1.목사와 장로의 시무 연령에 대해서
①은퇴는 육의 사람으로 일한 결과요, 속사람은 날로 새롭기 때문에 은퇴는 비성경적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육체로 일하는 불신 세계의 일은 정신노동자인 학자나 정치가든 육체노동자인 기술 건축인이든 결국 은퇴를 해야 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심신으로 된 육은 복음의 일을 하는데 방해만 되고 늘 이 육을 길들이느라고 애만 쓰게 되는 것이고 실제 일은 영이 합니다. 그 사람 속에 중생된 새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 새사람은 다시는 죽지 않는 영생의 생명으로 중생되었으니 이 사람은 늙거나 쇠하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몸으로 수종들 제사장들은 노쇠하면 물러가 쉬게 하였으나 신약과 같이 이제 육체로 수종들던 제사가 폐해지고 진리로 사람을 기르는 신령한 예배와 복음 전도의 시대에서는 은퇴가 없었습니다.
②자라나는 후배를 위해 선배의 직책 양보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잘난 아버지는 못난 아들을 잘난 아들로 길러갑니다. 바로 된 신앙의 사람은 아직도 서툰 신앙의 후배를 고쳐가며 길러갑니다. 따라서 바로 된 사람은 많을수록 아랫사람이 배워가고 자라가는 일에는 도움만 됩니다. 좋은 교수들이 많고 석학들이 많은 그 대학, 그 학과에 들어가야 이제 막 교수된 사람이 더 교수답고 더 학문의 깊음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꼭 한 가지 면에서는 선배가 은퇴를 해야 후배를 기른다는 이치가 해당됩니다. 실력여부를 떠나고 신앙여부를 떠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복음의 선한 결과가 있느냐는 여부를 떠나 자리를 한번씩 가져봄으로 경력과 이력을 쌓고 그런 간판으로 일을 해야 알아주는 세상식 사람 키우는 일에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단이 후배들을 위해 줄줄이 선배들이 순서를 따라 물러나지만, 우리는 바로된 선배는 죽는 날까지 모시고 싶고, 잘못된 선배는 정년도 오기 전 아직도 젊은데도 저절로 물러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무투표가 그것입니다.
③육체 세상도 60에 철든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철은 죽을 때야 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치고 돌아다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귀한 하나님의 종들은 너무도 하나님을 모르고 그랬어.... 라는 후회를 합니다. 이제는 진정 하나님을 좀 알 것 같아... 그러면서 눈을 감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진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70 나이로 정년을 삼는 일반 교회의 경우, 획일적으로 단정하지는 않겠으나 이제 정말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 정치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오랜 경험을 통해 알 때가 된 나이로 보고 싶습니다.
은퇴반대라는 말은 무능해도 죽는 날까지 모시라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은혜가 되고 또 목회의 실제 역사가 계속되는데도 또 더 나아지는데도 교단의 은퇴규정에 해당되어 무조건 그만 두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70세가 1979년이었습니다. 1982년부터 1989년의 80세까지 10년을 두고 이곳에서는 백목사님 평생의 전부가 농축되어 만들어진 이 시대의 복음 진수로 평하고 있습니다.
④공회의 은퇴없는 제도는 시무투표라는 제도와 함께 시행되고 있습니다.
70세 은퇴라면, 실력이 있고 점점 더 잘해도 은퇴하라는 제도입니다. 반대로 30대 40대 목회자이지만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 없도록 교회의 폐해가 심한데 아직도 그분을 수십년 더 모시고 있어야 하는 것은 70은퇴제도의 다른 면입니다.
공회는 70은퇴를 없애고 80이고 120이고 은혜가 되고 모세처럼 능력을 가진 분이면 성경에 의하여 계속 일을 하라는 것인데 동시에 은혜가 되지 않고 교회에 짐이 되는 교역자, 교회의 경제만 축내고 교인의 심령만 상하게 하는 분이 계신다면 70세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고 2년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서 안되면 시무투표를 통해 내보내라고 하고 있습니다.
1970년부터 시행되어 벌써 30년을 넘기고 있는 제도입니다. 물론 은퇴나 시무투표는 그 시행의 자세한 규정이 있기도 하고 또 애매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그 신앙노선의 관점이며 원칙입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교인들 앞에 부족하고 덕이 되지 않으며 교회에 해가 될 때는 은퇴 이전 물러서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동되는 것이니 1년이면 너무 혼동스럽게 3-4년이면 너무 교회에 피해가 오래 갈 수 있으니 2년 정도로 기간을 정하여 교회에 본인들이 짐이 되는지를 살피자는 교역자 스스로의 결의입니다. 그 대신 은퇴라는 비성경적 제도는 공회적으로 갖지 말자는 것입니다.
공회의 은퇴나 시무투표에 대한 자세한 시행을 알고 싶으시면 '공회의 모든 자료를 다 받아 보실 수 있는' 자료실의 '인증자료'를 신청하셨으면 합니다. 개인의 구체적인 이름이 너무 많아 무제한 공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백목사님 설교록 전문을 받아 보시고 '은퇴' '시무투표' 등으로 검색해 보시면 관련 내용을 아주 자세히 아실 것입니다.
파급되는 문제를 걱정하셨으나, 부산공회는 현재 목사님 생전 20여년 사후 10여년 그리 해 오고 있습니다. 서부교회의 경우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시무투표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으나 그 문제는 시무투표가 아니더라도 발생할 문제요 시무투표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안에서 더 크게 폭발했을 일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참으로 한시도 노력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원칙이며 교회의 교인들로서는 그 유를 찾아 볼 수 없도록 교회를 바로 세울 원칙일 것입니다.
2.서울공회와 대구공회의 경우는 은퇴를 70 또는 75세 안팎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대구공회와 서울공회를 총공회 명칭 하에 굳이 포함시키고 있는 바, 어디까지나 공회의 신앙에서 시작한 분들이요 또 과도기를 거치며 결국 공회라는 이름 범위를 크게 이탈할 분들이 아니어서 소망을 담고 주소록에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안에 있어서는, 공회의 본질적 신앙노선까지를 포함해서 대구와 서울공회는 원 공회 노선에서 떠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 질문한 내용에 해당되는 은퇴문제입니다. 백태영목사님이 백목사님 순교 직후에 바로 제기하고 나온 문제였습니다. 당시 은퇴를 시행하면 대구공회를 주도하는 다른 분들을 일거에 다 은퇴시키는 결과가 너무 뻔하게 보일 때입니다. 물론 그분 속으로만 가졌을 목적이니 객관화시킬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총공회 전체가 그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분 역시 은퇴에 해당될 나이로 접근하게 되자 은퇴의 연령이 70이 넘어도 해당되지 않는 예외가 생겨지고 결국 이런 문제와 복합되어 잠실동교회의 분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구공회와 서울공회는 백목사님 사후 즉시 시무투표 제도를 폐지 시켰고 이로 인하여 현재 법을 가장 많이 주장한 공회들이지만 법과 상관없이 운영되는 공회의 파행상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3.개개인의 행동이 공회의 원칙에 다를 때는
공회로서는 권면할 뿐 원칙적으로 어떤 처리나 치리를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도적질을 하다 감옥을 가는 정도로 뚜렷한 경우는 목사 직책을 없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이나 사회적으로까지 지탄받을 뚜렷한 행위가 아니라면, 권면과 권고에서 그치게 됩니다.
공회에서 개입을 많이 하게 되면, 백목사님 때와 같이 비교적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을 때는 상관이 없지만 오늘날과 같은 경우에는 누가 몇명의 대의원을 확보했느냐에 따라 모든 공회 결정은 결론나기 때문입니다. 부산공회(2)에 유리하면 세상 패륜에 있는 사람이라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게 되고, 부산공회(1)에 반대하게 되면 '말을 잘 듣지 않는' 죄를 신설해서라도 제거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사용되면 좋고 잘못 사용되면 문제가 생기는 인간의 여러 제도는 최대한 교회 행정에 있어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공회의 행정노선입니다. 어느 한 목회자가 그 교회가 인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결국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과 실력으로 그 목회자에 대한 처리를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각 교회에 가장 큰 자유와 책임을 맡긴 것이니 이런 점에서 총공회의 신앙노선은 흔히들 모르는 외부인들이 북한식 독재체제라고 하는데 실은 가장 완벽한 자유주의입니다.
4.그렇다면 공회의 위상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총공회라고 간판을 붙이고 총공회 신앙노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가장 1차적인 특징이 개인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권면은 하되 강제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교회의 결정과 판단을 다른 교회들 즉 공회가 나서서 권면하고 의견제시는 할지라도 강제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고 감화와 감동 그리고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경험을 통해 길러가시기 때문입니다. 실은 이 원칙이 모든 장로교 헌법의 첫 원리에 있습니다만 장로교가 이 원리를 바로 파악한 경우는 아직까지는 단 한 곳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백목사님은 교리 교훈 뿐이 아니라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교회사의 특별한 분일 것입니다.
공회란 그 위상을 각 소속 교회로 하여금 하위에 두고 명령 통제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공회란 각 교회가 함께 모여 의논하고 어느 것이 옳은지를 살펴보는 체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부산공회(2)가 홈페이지를 개설하며 그 첫장에 총공회의 연혁과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 바, 공회의 기본 개념 파악에는 실패한 듯 합니다. 특히 총공회와 개교회 사이에 지방공회를 표시한 도표가 있는 바, 이 역시 지방공회의 성격을 전혀 오해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구난방이 되고 방종과 방탕이 되지 않겠느냐는 반문도 예상됩니다. 제가 머리깎고 중이 된다면, 막을 교단 법이 있습니까? 결국 세상권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근본 신앙이기 때문에 통제를 해봐야 안되는 것입니다. 공회의 위상이란 제도적으로 개교회 위에 위치하면 이미 공회가 아닌 교단 본부가 됩니다.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은 바로 이 점을 과감히 해체한 것입니다. 성경을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 자신은 전국 교회 위에 일반 교단의 본부와 같은 권위로 비교될 수 없는 절대권을 가졌다는 주장을 대구공회에서 주로 했었습니다. 이는 목사님의 권위의 본질을 전혀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백목사님이 총공회의 공회장이 되었기 때문에 전국 교회를 절대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목사님의 신앙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왔고 그의 지도는 결과적으로 그 시대의 선지자와 같았기 때문에 전국교회와 교역자가 스스로 그렇게 따랐기 때문에 발생된 권위입니다.
5.명예권사에 대하여
권사제도에 명예권사를 두게 되면 그다음 공로권사가 나오게 되고 그 직제와 직위가 수도 없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교회는 벌써 세상 깊숙이 앉아 있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공회에서 권사제도를 도입한 것은 서부교회 권사님 4분을 세울 때입니다. 교회를 없는 데에서 만들어 낸 정도의 공로를 가진 분들에게 장로님보다 더 신앙으로 앞서 있는데도 장로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 권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이제 공회 교회들도 일반 교회들처럼 그 숫자를 늘려가고 그 이름을 분화하여 가고 있는 것은 공회의 신앙노선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단정하지 않습니다. 권사 제도 자체가 교회 목회를 위해 세울 수도 안 세울 수도, 또 그 숫자를 몇 명으로 해야 하는지 등 어떤 것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는 사람을 끌기 위해 많이 세워야 한다고 무조건 남발을 한다든지, 목회자가 언제 되도 될 사람을 이왕이면 내가 세워버려 내 공로 내 덕분으로 잡아 두어 자기의 지지자를 만드는 방법으로 사용한다든지, 교회의 경제 문제 등으로 재정 분담을 시킬 때 항상 주요 자금원으로 삼는다든지 등으로 사용한다면 바로 오늘 교계의 탈선상일 것입니다.
만일 이 이름이든 저 이름이든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의 신앙을 참으로 붙들었고 또 기르게 되었다면 다른 교회 다른 교역자가 자기 양심으로 행한 것을 두고 외부에서 논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훼방죄로 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앙노선적인 답변은 얼마든지 명백하게 발표하기를 원하나 개인의 양심으로 개인의 자기 판단으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한 것은 최대한 비판하지 않고 이해하는 자세를 가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