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질문) 설교자의 인격과 자세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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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질문) 설교자의 인격과 자세 1360

서기 0 17

5. (질문) 설교자의 인격과 자세 1360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는 하나님께 쓰임받기위한 준비로 설교자의 인격 문제와 자세 문제를 알고 싶습니다. 너무 광범위한 문제 같으나 평소에 백목사님이 주장했던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설교할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는 것은 어떠한지요?
습관적으로 해석해야할까요?
영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답변) 설교자의 인격이나 자격이란 사람으로는 갖출 수 없으나, 설교를 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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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답변이 다 그러하지만, 이번 질문에서 말씀하신 '설교'에 대하여도 백목사님이 직접 교훈했던 내용은 한이 없습니다. 일일이 다 출처와 인용을 표시할 수가 없어 답변자가 간단히 소개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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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는 '증거'입니다.

①설교는 배달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전달만 하면 되는 사람을 배달부라고 합니다. 배달 직업에 있는 사람은 포장만 상하지 않도록 전달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포장 안에 있는 그림이나 기계 설계도를 이해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설교는 증거라야 하는데 그 속에 든 것도 모르고 그냥 배달을 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대개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분들 중에 많습니다. 설교를 잘 하려고 준비를 하다 보니까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나 주석 또는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 내용을 많이 참고하게 됩니다. 자기가 준비하는 설교 내용에 좋은 문장, 유명한 표현, 중요한 교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정작 그 내용을 입으로 외치는 설교가가 자기 설교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배달이 아닌데 배달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②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내용을 파악하고 원리를 이해하며 전후좌우를 살펴 사람을 가르치면 강의라고 합니다. 강사는 배우는 사람에게 알아먹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길이 옳고 어느 길이 망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사람 중에서도 최고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면 교수라고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공산주의 원리를 제일 잘 가르치는 사람들은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교수들입니다. 공산주의로 지상낙원을 만드는 원리와 그 세부 사항을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아직도 북한 땅에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똘똘 뭉쳐진 젊은 청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강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철학과 교수들은 그 공산주의 사상을 강의하는 사람들이지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이미 교수급 지식인들 중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수이기 때문에 그냥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평양 봉수대교회 목사님은 설교가 아니고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학교 교수들이 교리를 강의하고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교계가 이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③설교는 '증거'입니다.

증거라는 것은 실제 겪어본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 배달은 우체국 배달원이나 택배 직원들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를 강의하는 것은 서울대 종교학과나 한신대 교수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아본 것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들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말씀대로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은 배달이나 강의는 될지라도 설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증거'라는 것은 직접 본 것, 직접 겪은 것, 직접 맛을 본 것, 직접 실행해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설교란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설교를 젖으로 비유하고 설교자를 젖먹이는 어머니로 비유합니다.

자기가 우선 자기를 위해 먹게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먹은 것은 그 인체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되는 동시에 그가 젖을 물려야 하는 아이를 위해 젖으로 돌아 나오게 됩니다. 엄마가 맛보지 못한 것은 아이도 맛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구경하지 못한 것은 아이도 구경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입에 넣은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하든지 반드시 아이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2.설교 준비의 첫 단계는 오로지 말씀 실행입니다.

①설교자의 자질 문제를 두고 많은 의견들을 듣고 있습니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목사도 한 방면에 전문인이기 때문에 4년제 대학교육에서 그칠 수 없고 최소한 대학원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상식입니다. 학식이 충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 모든 교파의 신학과정이 전부 대학 4년을 끝마치고 대학원 3년 과정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인품 도덕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두말 할 것 없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빼놓고 있습니다. 목사의 생명은 설교이고, 설교의 생명은 말씀대로 살아본 생활인데, 이 면을 살펴보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신학교 3년 학과목이 설교자를 양성하는 과정인데, 크게 나누면 성경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원어 설교훈련 및 상담입니다. 신학 과정이 어려워 겨우 통과하는 사람들은 배달부가 되고, 신학 과정을 비교적 좋은 학점으로 통과하는 사람들은 강사가 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②설교자는 일반 교인 시절에 만들어집니다.

가정을 가진 일반 교인이 가족들 속에서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러면서 말씀 때문에 가족들과 충돌이나 오해를 겪어보고, 오히려 가족들을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자기는 죄 되지 않은 것은 다 양보를 해야 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실제 그렇게 해 본 사람이 가정에 대한 면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배달이나 강의가 아니고 증거이니 곧 설교가 됩니다.

이해심이 많고 화목한 가정에서는 적은 경험을 하게 되고, 강퍅하고 모진 가정에서 환란 속에 믿고 나온 사람은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말씀으로 통과하는 그 가정 환경 자체가 설교의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현실만 주시라고 기도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날수록, 강한 시험을 만날수록 더욱더 감사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피땀 흘려 돈을 벌어본 그 사람이,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늘의 소망으로 연보를 힘껏 해 본 그 사람이, 교인들에게 연보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연보를 하고 복을 받아 본 사람이,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인들에게 복을 받으시라고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신학교 교과서를 읽고 강의를 받아적고 시험쳐서 졸업장과 목사자격증을 받습니다.

부모 밑에 철없이 놀다가 성적이 내려가고, 좋은 대학을 갈 자신이 없으니까 신학공부를 하겠다며 갑자기 주의 종들이 나오는 것을 수도 없이 보고 있습니다. 공부조차 하기 싫어 놀던 그 사람이 이제는 부모가 주는 돈을 가지고 신학교에서 책에 적힌 것을 받아쓰고 있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사'라고 적힌 성구를 받아쓰고 외워서 시험에 통과를 한다음, 강단 위에서 연보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마구 외쳐대는데..... 참 문제입니다.

신학교 교과서와 강의를 받아적고 외워서 졸업시험도 보고 또 목사고시에도 합격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졸업하기 전에는 전도사로 설교를 하고, 또 합격 후에는 목사로 설교를 하는 신학전공자들의 입에서 과연 설교가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대학원 신학교수들인데 그들부터가 강의자들이지 증거자들이 아닌데 어떻게 그 밑에서 증거자들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신학교 교수가 강의를 초월해서 증거하는 사람으로 학생들을 기른다면 현재 신학대원원들의 학과목 이수과정 학사운영형태 등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교수들의 일자리부터 없어지고 자신들이 취득한 학위가 휴지가 되어버리니, 그렇게 할 리도 없을 것입니다.


④따라서 일등 교인이 일등 목회자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자기 밑에 앉아 설교 듣는 교인들이 땀 흘려 어렵게 돈을 벌어오는 그 형편을 체험하고 통과하되, 말씀을 가지고 그 현실을 통과해 보아야만 교인들에게 생활 속에 실제 살아야 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먹어보지 못한 음식과 영양은 아이에게 건너가는 수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그런 억울한 형편에 놓이게 되면 칼을 들 것인데, 강단 위에서 늘 가르치기만 하니까 교인들에게는 억울해도 참으라고 하는 경우가 사실 너무 많습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그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했더라면 자기는 내놓지 않았을 것인데, 남의 돈이니까 식은 죽 먹듯이 연보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말씀대로 살아본 것이 없으면 배달부든지 아니면 강사일 뿐입니다.

백영희목사님은 그 자신도 그러했고, 그 밑에 목회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평생 지도한 것이 바로 이 면입니다. 목회자가 되고 싶으면 현재 교인된 그 자리에서 교인노릇부터 바로 해 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좋은 목회자로 되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환경을 주지 않으면 이왕이면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 참으로 말씀을 붙들고 장기간 인내를 가져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공회 노선에서는 목회자가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로 바로 진학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⑤증거는 성령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나, 배달과 강의는 인간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 말씀대로 살아본 증거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벌써 그는 그 말씀으로 그 현실을 통과할 때 자기 속에 계신 성령으로 동행했던 것입니다. 혹 그때는 몰랐다 해도 뒤에 돌이켜 보면 성령이 자기를 붙들고 그 길을 걷게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 말씀대로 정말 끝까지 살아보려고 한다면 인간이 제 단독으로는 그렇게 할 마음이 생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란 인간 단독으로는 믿을 수도 없고 또 지식으로는 알아도 자기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실행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현실에서 말씀대로 실제 살아 본 사람이라면 그는 그 말씀에 관련해서는 벌써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증거라고 합니다. 따라서 설교가 증거가 되지 못하고, 또 그 설교 속에 증거가 들어 있지 않으면 그 설교는 강의든지 어느 인간의 자기 체험일 뿐이지, 성령으로 함께 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성경말씀을 배달하거나 강의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 정도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이 배달부나 강사들에게는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붙들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씀 실행 생활의 증거는 이미 그 증거 속에 성령이 들어 있고 증거하는 설교도 성령이 붙들고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이제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들의 어린 신앙을 고려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①말씀대로 살아 본 그 사람은 이미 설교의 '생명'은 가졌습니다.

참으로 신본주의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설교자가 애꾸눈이든 절름발이든 불학무식이든 상관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말씀대로 살게 하고 그 살아본 것을 증거시킬 때, 그 설교자를 보지 않고 그 설교자를 붙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만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대로 살아 본 그 사람은 이미 설교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송장이니 산 사람이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송장에게 비하겠습니까?


②비록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강단에 서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송장이 아니니까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라'
이런 말은 듣는 사람쪽에서 할 말이고 가질 태도이지, 설교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닙니다. 설교할 사람으로서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어린 사람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다가 설교를 듣지 못할까 해서 빗질을 곱게 하고 또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을 교양이라 인품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현실 속에서 살아보는 것이 어렵지, 다른 사람 앞에 침이 튀지 않도록 주의하고 버스 안에서 남의 발을 밟지 않는 배려야 따로 신학교를 가지 않아도 눈치만 있으면 다 해결될 일입니다.


③질문 내용 중, 설교할 때 손을 호주머니에 넣는 경우로 예를 든다면

그런 행동 자체를 두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내 가장 보수적인 신학교 예배 시간에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쪽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서서 기도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건방지기를 이루 말도 못한다고 하겠지만, 어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우리의 사회 기본 자세이고, 그들은 할아버지 머리를 손주가 쓰다듬으며 애정을 표시하는 정도입니다.

설교 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교하는 것은, 잘은 모르지만 주로 해외 생활을 많이 해 본 분들이나 그런 분들에게 영향을 받은 분들에게서 많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하는 분이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거나 무시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습관이거나 또 다른 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냥 따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비록 목회자의 중심은 깨끗하다 해도 어린 신앙의 어린 마음을 생각해서 삼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이들 보는 데서는 찬물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의 조심성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서는 술 담배를 하다가도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본이 되지 않는다고 끊고 들어왔다는 경우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잘 한 것입니다.

참고로, 서양문화를 선호하는 분들이 종종 반론을 펴는 중에 우리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 목사님들은 그렇게 경건하고 두려워 벌벌 떠는데,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할 때는 전혀 하나님 무서워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답니다. 미국 목사님들은 그 행동이 자유분방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될까 봐서 벌벌 떨고 말 한마디에 대하여 그렇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정말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아직 이 나라에 사는 우리로서는 외부 경건도 내부 경건과 함께 지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사는 불신 세상 사람들보다는 우리가 좀 더 점잖다는 말을 듣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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