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질문) 학생회 설교도 최고수준으로 해야 합니까?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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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질문) 학생회 설교도 최고수준으로 해야 합니까? 2940

학생부 교사입니다
목사님 글중에서 강단에서 설교를 할때는 최고 수준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학생회나 청년회예배시 그때도 설교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변) 설교는 제일 최고의 수준으로 해야 합니다.

1.십자가 대속을 주제로 예를 들겠습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구원도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 내용에서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과 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한 것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원과 대속을 설교에 주제로 삼거나 아니면 적어도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설교라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교인에 따라 망설여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2.구원과 대속이라는 단어는 많아도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구원'이나 '대속'을 내용으로 설교한 다른 설교집들을 많이 보았으나 구원과 대속의 최소한의 기본을 가르쳤다고 생각한 설교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의 대부분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부분만 예를 들어 설명을 반복하지, 죄란 무엇이며 죄의 종류가 몇 가지며 죄의 값이 무엇이며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이 왜 져야 하며, 죄라는 것을 왜 애당초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예수님이 왜 하나님으로 사람되어 왔어야 하며, 그리고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서 왜 죽어야 했고 왜 다시 살아야 하며, 왜 아버지 없는 상태로 출생해야 했고 왜 인간의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 이런 면을 설교한 설교집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런 내용은 설교라고 하지 않고 신학의 분과 중에서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조직신학의 구원론과 기독론은 각각 3학점 정도로 대학원 과정 2학년에서 3학년 사이에 공부하는데 모두들 어려워서 어떻게 배웠는지도 모르고 통과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대속'과 '구원'에 대하여 교인을 상대로 설교를 하려면 목회자들로서는 자신들이 신학교 다닐 때 가장 어려워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조직신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점수를 제대로 딸 수도 없어서 미리 문제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몇 부분만 외워서 겨우 졸업을 했는데,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신학에 전혀 지식이 없고 또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교인들이나 학생들을 상대로 그 교리들을 가르친다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려면 가르치겠지만 그것을 예배 때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친다면 신학강좌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할 것 같으면 항상 꼭같은 내용이니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지금 설교를 대단히 수준높게 가르치는 분들이라 해도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설교를 해도 어렵게 가르친다는 말이 나올 것인데, 아예 기독교 교리 강좌를 평범한 설교 시간에 중심으로 가르친다면 어느 교인이 그런 어렵고 재미없는 설교를 계속 들으러 교회에 나오겠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입니다.


3.청년회면 몰라도, 학생회 설교라면 이제 이런 어려운 설교를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학생회라면 주로 중고등학생들이어서 학교 공부로는 제법 무엇을 배운 듯 해도 교리 관련 내용에 대하여는 한참 어린 때입니다. 청년회라면 요즘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들이 별로 없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설교를 해도 그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듣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예를 든다면, 그 학생들이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사람되어 고생했고 십자가에서 그 아픈 고통을 참고 대신 죽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이런 호소적 감정적 설교만 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라고 이곳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4.최고 수준의 설교란, 단어나 표현을 어렵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내용입니다.

대속, 구원, 사죄, 신인양성일위 등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달리 바꾸는 것은 극단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단어는 많아봐야 몇 백개 더 되겠습니까?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영어단어가 약 1500여개 정도 되는데, 남의 글을 남의 문자로 통째로 외워가면서도 그 정도는 외우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 한번에 그 단어를 다 내놓는 것도 아니니까,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확정한 교리와 표현은 최대한 그대로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를 최고의 설교로 하라는 말은, 이렇게 교리적으로 교회가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그대로 사용하되, 다만 그 설교 내용에서 만일 구원을 가르치려면 대속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대속을 가르치려면 지은 죄를 먼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르치려면 그 학생들이 도덕의 죄, 국법의 죄, 인륜을 범한 죄와 성경이 말한 죄를 혼동할 것이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 삐뚤어진 것을 말한다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삐뚤어진 첫 행위가 에덴동산의 범죄니까 이를 원죄라 한다고 가르치고, 또 자기가 지은 죄는 본죄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죄와 본죄로 죄값이 있어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지옥을 가지 않게 하려면 이 죄를 대신 갚는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설교자가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가르치는 것은 자유지만, 또 설교자가 주로 가르치려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만일 설교자가 이런 내용은 실제로는 꼭 알아야 하지만 학생들이 어리고, 또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 이해를 하겠는가 하는 면 때문에 설교에서 가르칠 내용을 빼버린다든지, 아니면 선악과라는 추상적 개념을 알아듣겠나 해서 사과를 몰래 먹다가 목에 걸렸다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학교로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한반에 40명을 놓고 가르치면 1등하는 학생은 서울대를 목표하고 5등 하는 학생은 서울 4년제 대학을 목표로 하고 20등 하는 학생은 지방대 아무 곳이나 4년제나 갈려고 하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1등하는 학생의 수준과 진도에 맞추면 5등 이하 학생은 눈만 껌뻑거리고 시간만 때우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10등 정도 학생 수준에 강의 난이도와 진도를 맞추면 5등 안에 있는 학생들은 학교 출석부 때문에 무료하게 앉아 있어 주어야 하는 형편이 생깁니다.

입시 성적에 학교 명운을 걸고 있는 학교는 5등 안에 드는 학생을 목표로 몰아갑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5등 안에 드는 학생들 들러리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수준별로 학급을 편성해야 하는데,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평준화 정책이 막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좀 풀린다고 듣고 있으나 크게 개선될 여지가 없습니다. 자연계시의 이치로 보면 수준별로 해야 합니다. 못나서 열등감을 가진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세상 생존경쟁의 처절함을 맛봐야 제 살길을 어떻게 해서라도 찾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가르칠 때, 교인들의 수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또는 이해력 높은 지성인들은 어려워도 최고의 설교를 할 수 있는데 처음 나온 교인 주일학생 연로한 분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 세상을 너무 지나치게 닮아서 교회의 조직과 체제가 전부 세상 조직을 닮아있습니다. 장년반 조직은 세상 행정조직을 본따고, 주일학교 학생회 조직은 학교 교육 체제를 정확하게 옮겨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으면 그것을 속화라 하고, 속화가 되면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성경은 설교하는 이의 설득력에 달려있거나 웅변의 호소력에 달린 것이 아니고 듣는 이 속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달려 있다면, 세상 학교 강의처럼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 이하 학생들이 어찌 어려워서 따라오겠느냐는 개념이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아무리 쉽게 쉽게 설명을 해도 도저히 믿어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이 설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게 아무리 최고의 설교를 해도 성령이 깨닫게 하면 믿어지고 바로 고속으로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이는 있는 힘껏 노력하여 최고의 설교로 교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대상이 주일학생이든 중학생이든 신학생이든 꼭 같아야 합니다. 신학박사들을 앉혀놓고 자주 설교하는 분이 종종 말하기를 왜 할머니들과 주일학생들은 잘 듣고 깨닫는데 신학박사들은 저렇게 귀가 막혔는가 라는 탄식입니다.

학교 강의는 1등을 기준으로 가르치면 10등이나 20등 하는 학생이 어느날 갑자기 이해가 된다면서 1등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조건 수준별로 분류해서 그 실력대로 취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은, 특히 교회의 설교는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가장 값진 것, 가장 기름진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허비 낭비로 보여도 그분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우리들은 최고의 교훈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성령께 간구하면서 전하는 이가 할 일은, 오늘 처음 오는 이가 또는 오늘 제일 어린 주일학생이 이 설교에서 남몰래 은혜를 받고 오늘 받은 이 말씀을 가지고 평생 자기의 신앙걸음에 유일한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백영희신앙노선의 총공회 설교학입니다.


(재질문) 학생들에게 예정론도

학생들에게 예정론(절대예정)을 가르쳐도 될지?
쉽게 말해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예정 되어지고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 자연만물이 모두 예정되어있다.


(답변) 얼마 전에 오간 자료가 있었습니다.

예정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문제는 얼마 전에 '예정론'으로 여러번 문답이 오가며 한번 답변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 게시판 윗쪽 검색창이 오늘까지 조정문제가 있어 작동이 잘 안되기 때문에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찾는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아랫쪽 검색창은 한번에 단어 하나씩으로 해당 설교를 찾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올라오고 있어 일일이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윗쪽 검색창은 해당 글 속에 들어있는 단어 몇 개를 한꺼번에 검색한 자료만 올라오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게 해당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검색창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재질문) 예정론을 가르치는 문제로 문제가 발생

간단하게 답변 부탁드립니다.
지금 좀 민감한 문제에 걸려서.
예정론을 가르치는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 때문에 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답변)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1.성경은 그 어떤 부분이든 그 어떤 누구에게든, 가르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질문자가 질문자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가르친 것이 잘못인 경우도 많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동기로 어떤 표현을 사용해서 어떻게 설교를 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에게 3번 시험하면서 그 중에 두 번은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따라서 질문자가 마태복음 4장의 마귀처럼 그런 동기로 그런 표현으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그런 상대방에게 그렇게 설교했다면, 성경에 나오는 에정론을 가르쳤는데 그 행동 때문에 질문자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 내용만을 가지고는 결론적으로 단정하지 못합니다.


2.이렇게 너무 또렷한 문제가 문제로 부각되었다면, 질문자께서도 대단히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모든 사정은 다 들어봐야 아는 것이지만, 일단 짧은 질문 한 줄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혹시 질문자께서 전혀 문제가 될 필요가 없는 일을 대단히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앞섭니다. 익명을 사용하셨으니 비록 이곳에서 넘겨 짚는다 해도 다른 사람 앞에 기분나쁘게 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몇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3.이곳은 의의 투쟁은 마다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투쟁은 과연 투쟁을 한 다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고 형편과 입장이 달라져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수도 없이 생각해 보고 나서 말이나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지금 민감한 문제가 있는데 그 민감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이곳에 '예정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일단 상식에서 아주 벗어나 있는 경우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인데도 이곳에 다시 확인을 급하게 한다면, 이곳에 오간 문답 내용을 신앙생활을 살펴보는데 유익하게 사용하지 않는 분이신가 하는 염려가 크게 됩니다.


4.질문자께는 대단히 죄송스러우나,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 제천경찰서에 목사님과 주일학교 부장선생님이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국기배례 금지 교육을 받고 학교 조회 때 국기경례를 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누가 시키더냐 하니까 교회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고 했고, 반사들을 조사하여 누가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더냐 하니까 부장선생님, 또 목사님으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대구 비원교회 백영침목사님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다가, 해방후 위천교회 국기사건 당시 국기배례를 주목으로 바꾼 기록 등을 제시하여 신앙을 굽히지 않고도 뒤에 해결이 잘 되었습니다.

이곳은 그 어떤 주장도 옳다고 생각하면 분명히 외치는 곳입니다. 성경 기록과 교리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증거하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혼한 부부의 재혼한 가정 문 앞에서 밤낮주야 7계명을 지키라고 외치는 사람이 그 일 때문에 대문 안에서 나온 사람에게 매를 맞게 된다면, 99%는 맞아야 할 매를 맞은 것이지 주를 위해 고난 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그 가정으로 하여금 성경과 하나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맞서도록 한 죄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 어느 한 부분만 인용하여 사용하면서 혹시 본인이 손해를 보거나 위험에 있을 때 이곳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이곳 자료와 이곳 문답방 등의 사용 방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이 신앙노선이 옳기 때문에 누구든지 꼭 이렇게 살자고 외칩니다. 만일 이곳의 말이 옳다면, 그때는 본인이 그렇게 깨달은 다음 자신의 깨달음 때문에 자신이 좋아서 자신이 모든 고난을 각오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자유성에 있어 책임성이라고 합니다.


5.성경을 성경 그대로 가르쳤다 해도, 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지옥갈 사람은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하여 질문자가 질문자 교회에서 질문자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하나밖에 모르는데 열을 아는 것처럼 섣불리 가르쳤다면 야고보서 3장의 스승이 받을 심판 죄에 바로 걸리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 어떤 사람이 누구를 상대로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한 것이 옳은가 잘못인가 하는 문제는 그 교회 그 교역자 그 교인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개교회 자유라고 합니다. 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특별히 하나님께서 다른 형편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교리는 어느 누구라도 어느 누구에게든지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근거로 자기가 한 말은 다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를 한 것입니다.


6.참고로, 서부교회에서 주일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예로 든다면

아이들에게 지옥갈 사람과 천국갈 사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총공회 교회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수도없이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선생님이 혹 안 믿는 집에서 온 아이들이 집에 가서 자기 부모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면 믿는 데 손해가 있을까 해서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택했는지 안 택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고, 지금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도 또 혹 목사님이라도 불택자일 수 있고, 고회를 안 다니는 분들도 택자라면 마지막 죽는 순간이라도 믿고 천국간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예정교리를 가르쳐도 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면, 경험상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는 희귀하고, 대개는 좌충우돌하는 자신의 주관결정을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성급함 때문에 공연히 불필요한 분란이 일어납니다.

혹, 이전에 자기가 알아가는 도중에 있는 교리를 성급하게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권면드렸던 바로 그분이 아닌지, 또는 당시 그런 답변내용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지, 염려입니다.

학생들에게 예정론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민감하게 문제가 되었다면, 여러 면에서 그렇게 가르친 분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짐작이 있습니다. 혹 가르치는 사람이 아직 가르칠 만큼 되지 않았는데 자기 수준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해놓고, '예정론'을 못가르치게 하면 되느냐는 식으로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방어막을 친다면, 좀 생각해 볼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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