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질문) 유아세례 3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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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5. (질문) 유아세례 3566
칼뱅은 유아세례를 인정했고, 재세례파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장로교회는 유아세례를 행하고 있지만, 침례교는 절대반대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 홈페이지에서는 유아세례를 반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리고 유아세례를 하는 것이 잘못됐다면, 칼뱅의 다른 깨달음도
잘못될 가망성이 있지 않나요?
시대의 종이었는데, 그 시대의 최고 성경해석가였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큰 종이었는데 잘못 해석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또한 유아세례가 잘못된 것이라면 칼뱅의 다른 성경해석도 의구심이 듭니다.
(답변) 이곳의 유아세례 반대 이유는 침례교와 같다고 아시면 됩니다.
1.신령한 이스라엘인 오늘 우리 믿는 사람에게 육체적 관계를 적용한 것이 문제입니다.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가 있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은 대개 장로교인들이고 그 중에 신학을 하지 않은 분들은 그 이유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곳이 유아세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침례교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례교 역시 구원관에 있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구분을 하지 못하는 면에 대하여는 장로교나 다른 교파들이나 다 마찬가지이므로, 좀 깊이 들어가면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와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할례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신약의 신령한 이스라엘인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자녀들을 구약 성도들처럼 어릴 때부터 구원언약의 아이라는 뜻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문제는, 구약은 육체적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구원의 약속이 있는 자손이라는 설명이 성경이고 실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신령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육의 부모를 통해 그 집 아이가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지만, 육의 부모의 전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집 아이가 안 믿게 될지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2.또 하나 이유는, 신약의 구원과 신앙은 각 개인과 하나님의 당사자해결원칙입니다.
신약의 구원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직통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가정과 교회와 교파는 옆에서 도와주면 좋고 도와 주지 못하면 아쉬운 정도이지 주변의 도움 자체가 구원 자체의 유무에 관계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믿는다고 발표할 때, 그때 베푸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믿고, 그 사람의 믿음 때문에 내가 덕을 보는 식은, 구원에 대한 기본 이해가 잘못된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론에 대하여는 이곳에 많은 글로써 설명했기 때문에 이번 답변에서는 생략을 많이 하겠습니다. 이 홈의 /초기화면/연구실/정리방/교리요약/'구원론'/과 /'교회론'/에서 여러 배경 문제를 설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3.칼빈에 대한 평가는
장로교에서는 마치 교주라는 말로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칼빈의 위치는 탁월합니다. 이곳은 옳으면 누구의 주장이든 듣고 배우고, 잘못된 주장이면 누구의 발언이든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의 훌륭한 선진이나 선배들의 발언인 경우는 일반 사람의 발언에 비하여 대단히 신중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원리가 같습니다. 옳으면 따르고 잘못되었으면 고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칼빈이 가르친 것도 바로 이렇습니다.
침례교에 대하여 하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유아세례는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이지만, 그 문제 때문에 교파를 나누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을 좋게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이 그 면에 대하여는 어리고 아직 생각하는 범위가 좁아서 그런 것이지 이단들처럼 타락하는 길로 들어서는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나뉘어지지 않을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도 있고, 어떤 문제는 나와 다르지만 그 사람의 현재 신앙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로 두고 볼 면도 있다고 봅니다.
4.칼빈의 다른 교리적 오류에 대하여는
이곳 홈에서는 여러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2000년대 교회의 깨달음에서 500년 전의 칼빈 가르침을 바로 비교한다면 틀린 것이 더러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그것을 칼빈의 잘못된 교리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500년 전 천주교에서 막 벗어나는 문제가 그 시대 선지자들이 주력해야 할 문제였고 그 점을 고려하고 그 면에서 평가한다면 칼빈의 모든 주장은 옳았다고 봅니다.
6.25전쟁의 최전선 사령관에 대한 평가는 그 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무우밭이 몇 평이나 탱크에 의하여 짓밣혔느냐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는 것은 너무 무지하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남침을 저지하여 적을 섬멸해야 하는 것이 당시 최전선 사령관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1000년간을 내려온 세계교회의 중심으로부터 교회의 호흡을 다시 되찾기 위해 주력한 분인데 그 일에 주력하면서 그 일 때문에 강조하고 그 일 때문에 집중하다 보면 지금 2000년대 교회 기준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된 것도 있고 너무 소홀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칼빈의 후시대가 맡아서 자기 사명으로 발전시켰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수백년 내려오면서 그 일을 바로 감당하지 못해서 오늘 공회의 신앙노선에서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교회정치와 교리에 대하여 많은 지적을 하고 있으나, 그 제자들에게는 틀렸다고 하고 싶지만 칼빈에 대하여는 전폭적으로 존경하고 싶습니다. 이 점에서는 이곳도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칼빈주의는 백영희신앙노선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교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칼빈주의라고 할 때 지칭하는 그룹들이 있어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5.결론적으로
칼빈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칼빈주의자들에 대하여는 비판하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칼빈에 대하여는 감히 우러러 보기에도 죄송할 만한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