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질문) 십자가 표시를 보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경우는 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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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7. (질문) 십자가 표시를 보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경우는 3775
찬송가138장 후렴구에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눈 밝았네
참 내기쁨 영원하도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표식일 뿐인데 그걸 보면서 마음에 큰
고통이 사라진다면 우상숭배의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 찬송가 후렴구는 우상숭배의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답변) 십자가의 형태와 표시 때문에 오는 평안이면, 문제가 참으로 많습니다.
1.십자가 표시를 볼 때
그 십자가 표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하여 그 희생을 감사하게 되고 그 감사와 회개 때문에 우리 마음에 성령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이 평안함을 얻게 된다면, 십자가 표시를 꼭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목회자 얼굴을 대하면서도 은혜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 내용을 읽지 않고 성경책 껍데기만 보고도 반가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은혜 받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린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라는 존재를 냄새로 알고 그 품에 따뜻한 온기로 느끼며 행복에 젖습니다. 그 엄마의 고생과 그 엄마 마음에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애틋한 사랑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10대가 되고 20대 청년이 되어서도 엄마 얼굴을 보면 반갑고 좋은데 그 엄마가 시청 청소부를 하며 얼마나 천대받고 고생하며 돈을 벌어오는지 그 고생의 내막과 그 엄마의 마음 속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불효자식으로 나가기 꼭 좋은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느낌으로만 좋아하게 되지만, 자라게 되면 엄마의 손이 거칠고 얼굴이 다른 엄마들보다 못났고 엄마가 화장실 청소만 하기 때문에 몸에서 악취가 베어있어 외형은 흉해도, 날 위한 그 고생의 내용을 알기 때문에 감사를 느껴야 합니다.
어린 신앙은 십자가를 성탄절 카드의 멋있는 그림 속 풍경화의 일부로 보고 십자가를 좋아하고 십자가 때문에 교회를 한번 더 가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천주교 우상놀음으로 가게 됩니다. 어릴 때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제 눈에 좋아보이는 표시를 통해 좋은 느낌만 가졌다가, 이제 자라가게 되면 십자가 표시 속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대속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표시는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고 주님의 대속만이 내 속에 항상 나를 인도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표시는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어릴 때 한번 그 의미를 기억하기 좋은 표시로 소개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고, 또 어린 신앙이 십자가 표시를 좋아하면 그의 신앙이 그럴 수준밖에 되지 않는 정도에서 잠시 허용해 주는 식이면 좋습니다. 그렇게 지켜 보다가 조금이라도 말씀을 알아듣기 시작하면, 젖을 떼고 밥을 바꿔 먹이듯, 십자가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신앙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쳐 길러 나가야 할 것입니다.
3.무엇이든 좋지 않은 것이 없고, 무엇이든 좋은 것이 없다는 원리를 아셨으면 합니다.
돈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돈으로 생긴 부작용을 연구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교회를 망친 것도 돈이고 부모를 죽인 것도 돈입니다. 그렇게 예를 든다면 천하 모든 죄가 돈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 자체를 죄라고까지 비판합니다.
반대로 돈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예찬해 보라고 한다면, 예배당도 돈으로 건축했고, 목회자도 돈으로 생활비를 보장해서 목회를 하게 했고, 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돈으로 좋은 일에 사용한 것을 따지자면 한도 없습니다. 과연 돈이란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돈이면 귀신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바로 사용하면 선물이고 잘못 사용하면 저주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사용한다면 천하에 버릴 것이 없고 만물이 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잘못 사용한다면 성경을 읽고 성경 때문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무신론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천하에 자기를 해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4.항상 속으로 경계할 것은, 어린 신앙을 핑계대다가 정도가 지나치는 순간입니다.
십자가 표시도 좋은 예배당 건축물도 바로 사용하면 어떤 어린 신앙에게는 도움되는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은 우리가 바로만 사용하고 사용할 때를 알고 사용하고 그 사용이 어떻게 되면 잘못되는지를 안다면, 우리에게는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같이 신앙에 관련된 표시나 물품들 또는 예배당 건축물의 외형과 같은 이런 경우들은 조금만 잘못 알고 잘못 상대하면 우상종교로 나가는 위험물이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주변 교회들이 십자가를 달지 않으면 십자가를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비난을 할 것이므로 어느 한쪽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붙여놓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배당은 경제면과 사용면만을 보고 건축하면 되지, 미를 고려하고 과시를 염두에 두고 예술성을 가미했다면, 이미 선을 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선을 넘고 있다 해도 또렷하게 죄라고 판정할 정도가 아닌 단계에서 다른 사람이 건축을 해놓았다면 수고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 건축 자체를 두고 외부로 비판하는 것보다 속으로 염려하고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술성을 가미했다 해도, 예술에 수준이 높은 사람의 눈에는 보기 싫지 않은 정도로 예배당 외부를 마감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가장 조심할 것은, 십자가든 무엇이든 어린 신앙을 배려한다고 핑계를 대고 시작해놓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본색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런 때를 경계해야 합니다. 미개국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의료혜택을 주며 복음을 전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 첫 순간의 급박한 현장에서 선진국의 선교사가 후진국 병자들에게 자기들 손에 들고 있는 영양제 하나 소화제 하나가 그들의 생사를 살릴 수 있다면 치료목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로 저절로 그들에게 경제나 의료 혜택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그런 동기였다고 말을 해도 속으로는 후진국 미개인들에게 돈과 의료와 교육을 쏟아부으면 전도에 도움이 된다해서 적극적으로 전도방편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그들을 도와주려는 사회사업이 목적이고 그 목적을 이루는 방편으로 기독교선교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 3가지 중에서 첫번째 경우는 좋은 것이고, 세번째 경우는 큰 죄가 되는 것이고, 두번째 경우는 애매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 두번째 경우는 첫째로 가든지 아니면 세번째로 가게 되지 끝까지 두번째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해도 초기에는 여간 그 속의 목적과 내심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다른 사람의 복음 운동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주의깊게 지켜보다가, 확실하게 표시가 날 때부터 경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5.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로 본다면
가장 건전하게 복음운동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곳이 '개혁주의 보수교단'들로, 합동측과 관련 계통 교단들이 10,000여개 교회고, 고신이 1,000여개를 겨우 넘기고 있는데, 그들 교회 중에서 십자가나 예배당의 외형 등이 신앙의 본질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 교회들을 담임하는 분들이 신학교 목사과정 공부 중에서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노선은 그런 외형을 이곳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렇게 해야 옳은 것이라고 배우고 나왔는데, 막상 현장에서 목회를 할 때는 교인들 전도나 신앙증진에 도움이 된다 해서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정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설교시간에 가운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고, 신학대학원의 신학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목사를 안수한다는 그 형식도 내나 십자가 표시를 표시 이상으로 상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6.질문 내용에만 집중한다면
찬송가 138장은 통일찬송가여서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는 가사이므로 답변을 피하고 싶지만, 그 찬송이 이곳에서 원래 사용하던 '새찬송가'의 233장을 수정한 것이므로, 원래 가사였던 새찬송가를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새찬송가 가사에서 '십자가를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제하네'라고 했는데, 처음 믿게 된 어린 신앙시절을 회고하면서 그 당시 십자가 표시만 보고도 은혜가 넘쳤고 평안을 가졌으며, 그때까지 괴롭히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처음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시절에는 십자가 뿐 아니라, 신앙에 관련된 어떤 것과도 접촉만 하면 이유도 없이 그 내용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눈물이 쏟아지고 기쁨이 솟구치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보통 중생 후 첫 은혜의 감격이라고 하는데, 마치 고아로 고생하던 아들이 뒷늦게 제 부모를 찾게 된 감격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좋고 모든 것이 은혜로울 때입니다. 이럴 때 수십년 믿고도 가지기 어려운 경험들과 기적들을 체험하는 것이 보통 교인들의 경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늘 그런 감정 속에서만 머물게 되면 이제까지 걱정했던 바로 그런 우상화로 나가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신앙지도자 입장에 있는 분들이 잘 지켜보다가 첫신앙의 감격으로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일시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줬다가, 이내 배워서 알아가며 자라는 신앙으로 얼른 지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질문한 내용의 찬송가 가사는, 첫 신앙의 첫 감격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렇다면 그 감격은 엄격한 교리 잣대로 비판을 하기보다 그런 첫신앙의 감격스러운 때가 일시 있다고 아는 정도로 넘어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