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질문) 목회자와 청빈 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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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질문) 목회자와 청빈 1295

서기 0 22
4. (질문) 목회자와 청빈 1295 목회의 성공은 교인의 숫자이고 교인의 숫자는 목회자의 성공적인 연봉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남모르게 충성한 목회자에게 주시는 열매중의 하나인지요. 성경에서 목회자와 재물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구절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변) 신약교회와 구약교회를 비교하며, 신앙과 세상복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구약교회는 ①말씀 순종 → ②세상 복 → ③천국 복, 순서로 길렀습니다. ①예외가 없지는 않았으나, 구약성도에게는 세상복을 꼭 보여주셨습니다. 구약 성도가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복을 먼저 주셔서 '말씀 순종 = 복'이라는 공식을 성도들에게 심어두셨습니다. 구약교회는 어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복을 먼저 받아보았으나 정상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세상복을 누리면서 그 세상 복으로부터 천국 복을 알아가고 목표하는 사람으로 점점 바뀌어갔습니다. 이래서 구약성도는 '말씀순종 = 세상복'으로 시작하여 말씀순종의 진짜 알맹이는 천국 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구약교회도 말씀순종은 영생을 준비하는 것임을 알게 되어 자기의 모든 세상을 천국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고 갔습니다. 즉 구약 교회는 겉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자연은혜로 시작하여 특수은혜로, 세상 것으로 시작하여 천국 것으로, 육체의 것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것으로, 일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영원한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②따라서, 구약성도의 신앙은 그 확인이 아주 쉬웠습니다. 그 재산이 얼마냐는 것으로 그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숨은 신앙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말씀에 순종하고 평생을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에 대하여 보이도록 재산을 늘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이었고 그들의 재산은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양이었습니다. 조카 롯이 후에 소돔으로 갔다가 빈털털이가 되는데 그 롯의 재산이 바로 그 롯이 말씀에 거역한 표시였습니다. 다윗왕이 다스릴 때 이스라엘은 가장 국경을 많이 넓히고 전쟁에서 이겼으며 외국에서 공물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왕이 남이 알든 모르든 얼마나 말씀에 순종을 많이 했느냐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를 통해서 나타나는 구약의 모든 왕들의 흥망성쇠는 바로 이 공식대로 되어졌습니다. 왕이 무슨 병에 걸리고 어떤 천재지변을 만났는지를 보고 그 왕이 숨어서 지은 죄까지도 다 드러났고 또 누구든지 알도록 했습니다. ③질문 내용을 두고, 만일 구약시대 목회자를 평가한다면 교인의 숫자가 말씀 순종을 말하는 것이고, 매달 사용할 수 있는 생활비용이 하나님께 충성한 정도를 말하게 된다고 단정하겠습니다. 오늘 예배당에 해당이 되는 성전이 화려하고 높고 웅장할수록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게 성전을 지은 목회자는 세상뿐 아니고 천국에서도 그대로 영원히 대접과 실력과 영광을 받게 됩니다. 2.신약교회는 세상복이라는 증거 대신 성령과 진리와 대속이라는 3가지 증거로 길러갑니다. ①신약교인에게는 '말씀 순종 = 천국복'이라는 공식이 바로 해당되는 때입니다. 구약교회를 길러가는 순서를 앞에서 ①말씀 순종 → ②세상 복 → ③천국 복, 순서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되는 '②세상 복'이라는 중간단계를 없애고 그대신 보이지 않으나 더 큰 증거를 주시면서 '①말씀 순종 → ③천국 복'으로 바로 길러가고 있습니다. 구약교회는 한 행동 한 행동에 대하여 세상복이 오는지를 확인하여 보이는 증거로 확인을 한 다음에라야 원래 그 행동이 바로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오게 된 세상복을 가지고 누린 다음에 그 세상복보다 더 나은 천국복을 바라보는 단계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로 나아가는 길은 굼뱅이 기어가는 속도라고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세상복으로 증거를 삼는 대신 성령과 진리와 대속으로 증거를 삼아 초고속으로 날라 가는 시대입니다. 대속 입은 사람이 성령으로 한 말씀을 순종했으면 구약처럼 그 행동 이후를 살펴볼 것도 없이 그 행동을 하게 한 그 3가지만 가지고 순종과 동시에 천국복이 완료되어 하늘에 쌓여가고, 지상에서는 또 다시 다음 단계 순종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복으로 보이는 '증거'를 봐야 따라 올 수 있는 구약교회와 성경에 쓰인 말씀이라면 그 자체로 '증거'를 삼는 신약교회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신용관계를 현금과 수표로 비유한다면 전시 혼란기에는 현금만이 확실한 결재 수단이고 평시 안정기에는 수표와 현금이 동일한 결재 수단이 됩니다. 구약교회에게는 손에 쥐어주고 눈에 보여주어야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이라는 말이 나왔고 신약교회에게는 세상복으로 보증을 서지 않고 말씀만으로 모든 것이 확정되는 때입니다. 구약은 세상복으로 길러갈 수밖에 없는 어린 때였고 신약은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수표를 믿고 따라가야 하는 장성한 때입니다. ②구약교회에 주신 '세상복'이라는 증거 대신 신약교회는 3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약에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오직 순종으로 걸어갔던 특별한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특별한 종들이었고, 구약의 일반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복을 받아야만 믿을 수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도 구약교회에는 그 단계가 필요한 어린 때이기 때문에 광야 40년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느려도 일일이 보이는 증거로 인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우리는 일반 성도 전부가 다 구약의 특별한 그런 종들의 신앙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일반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복을 받아야 믿을 수 있었으나 오늘은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이 순종을 낳고 그 순종은 그 순종의 구약적 보답인 세상복을 따로 받을 필요도 없이 그 순종행위만으로 이미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을 확정짓고 그다음 순종을 향해 바쁘게 나아가라는 때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성령과 진리와 대속의 증거입니다. 이 3가지 증거는 구약교회에게 아주 드물게 또 그림자와 같이 어두운 상태로 잠깐씩 나타났을 뿐인데 오늘 우리에게는 환한 빛 가운데로 인도하듯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5:7에서 말씀하신 대로 신약교회가 받아가진 증거는 완성된 대속의 '피', 완성된 성경인 '진리', 그로 인하여 내주하는 '성령' 셋의 증거입니다. 구약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장차 오실 주님의 대속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신약 우리는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사활로 대속을 완성을 해 버렸습니다. 구약교회는 성경이 일부 기록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각자 구원에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임시 임시 직접 나타나셔서 가르쳐 주던 정도였습니다. 오늘 신약교회에는 완성된 성경으로 주셨습니다. 오늘 신약 우리는 구약 선지와 신약 사도들 전부가 받았던 계시를 한 손에 들고 우리 생활에 길을 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 진리 대속이라는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3가지 증거 역사를 두고 말하자면 구약은 전반적으로 어두움 속에서 더듬어 길을 찾는 정도였으니 몽학선생을 따라 가는 어린 학생들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그 신령한 면이 이렇게 어리고 흐렸기 때문에 그 어린 신앙들에게는 세상 눈에 보이는 복을 주셔서 그들의 순종에 증거를 삼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완성된 대속과 완성된 성경을 우리 속에 항상 내주하신 성령이 가지고 우리를 직접 인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보이는 세상 증거가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그 세상 증거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뿐인 시대인 것입니다. ③따라서 우리는 세상복과 신앙생활의 관계를 두고 다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우리들이 말씀대로 바로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에 대한 결과를 주시되 눈에 보이는 세상복으로 주시면서 우리의 행동이 옳았다고 격려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구약교회와 달리 세상복을 가지고 그렇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은 신약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3가지 증거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신앙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상복으로 또박또박 갚아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좀 장성해지게 되면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린신앙에게는 비록 신약시대이지만 구약교회를 기르듯이 보이는 면으로 역사하는 면이 많은 편입니다. 어쨌든 구약과 비교를 한다면 신약교회는 말씀을 순종했다고 하여 세상복으로 그대로 보여주시는 면이 거의 없습니다. 그대신 말씀 순종이 세상복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은밀하게 가르치시고 또 하나님은 늘 실제로 우리와 생활 중에서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알만 하도록 눈에 보이는 역사를 하는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신약 우리들에게는 말씀을 순종할 때 세상복을 받는 것은 신앙에 참고 정도 되도록 하시는 정도라고 요약하셨으면 합니다. ④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약교회는 목회자의 충성과 맡은 교회의 교세는 구약과 다릅니다. 국경선이 넓어지고 점령한 나라 숫자가 많아지며 공물이 넘치고 농사가 잘 되면 구약시대 다윗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세상복을 받은 종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이렇게 세상복을 받아 가진 사람이라야 천국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복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사로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구약에서는 그 사람의 천국복은 살펴볼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천국복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우리들에게는 성령에 붙들려, 받아 가진 대속이 감사해서 얼마나 말씀대로 움직였느냐는 그 보이지 않는 '순종'이 바로 천국복입니다. 순종한 실체가 있다면 천국복은 이미 주어졌고 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순종하던 그 당시 만들어지고 미리 천국에 저축되었던 복을 찾아 쓰면 됩니다. 따라서 신약교회와 성도를 세상복이라는 잣대로 측정하여 그들의 순종이 잘 됐다 못 됐다, 길다 잛다고 한다면 참으로 우맹이요 소경이라는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아직도 그 마음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어린 신앙에게, 또 하나님이 주시는 보이지 않는 복이 정말 존재하겠느냐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한번씩 참고하라고 또 격려하시는 뜻으로 세상복을 보여주는 경우는 신약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을 전체로 두고 비교한다면, 구약은 세상복을 보아서 그 신앙을 그대로 평가할 수 있고, 신약은 보이지 않는 3가지 증거로 순종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판정이 나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복을 가지고 그 사람의 내면 충성을 측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3.질문과 관련된 직접 답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①'세상복'을 초월하도록 주신 신약의 은혜를 초월한 성도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가 문제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너무도 환하게 볼 수 있는 실무적인 면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우리는 예수 믿는 초기에 구약 성도들에게 보이는 세상복으로 인도하듯 우리를 잠깐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다고 했고, 이제 장성하여 신약성도의 정상적인 수준이 되면 보이지 않는 3가지 증거로 순종을 하면 그 순종 자체로 천국복은 완료되고 그다음 순종할 단계를 따라 쭉 이어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약교회 교인들, 특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교인들, 그리고 우리 목회자들의 오늘 형편을 놓고 본다면, 처음 예수 믿을 때 세상복까지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단계는 다 경험을 했을 것인데 그 경험을 가지고 그다음부터 자기 발로 걸어가는 소년처럼 청년처럼 장년처럼 계속해서 자라가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이제 믿는 사람들은 세상복이 필요한 어린 신앙이고 이제 믿은 지 3-5년이 된 사람들은 그런 세상복을 보지 않고도 말씀 순종 자체에만 관심이 있어 그 면으로 힘을 쓰고, 믿은 지 10년이 되고 그 이상 된 사람들은 어린 사람과 커나오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걸어온 걸음을 가지고 그들을 정상대로 인도하고 안내하는 그런 구조라고 한다면 오늘 신약교회의 세상복이라는 단어는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 또 특수한 형편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씩 사용할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천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한국교계를 두고 평가를 하자면, 과연 몇 명이나 세상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고 말씀이 증거한 증거만 따라서 걸어갈 신앙으로 성장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도 수준의 신앙, 불신자급의 그런 신앙을 벗어난 사람, 즉 세상복이 있어야 신앙에 도움이 되는 그런 수준을 어린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어린 신앙을 벗어난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②'세상복'을 초월하고 나가야 할 신약 우리가, 세상복에 매여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곳이 늘 비판을 받고 있지만 신약에서 세상복이 가지는 의미라는 문제를 두고는 냉정하게 평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곳의 평가로는, 한국교회 1천만 성도 중에 '세상복'을 과연 초월하여 죽는날까지 세상복을 주지 않아도 그것에 상관없이 피와 성령과 진리의 3가지 은혜만으로 감격하여 천국 소망에 취한 사람이 되어 앞만 보고 달려갈 사람이 과연 1명이 있겠느냐 2명이 있겠느냐, 이 정도로 헤아릴 정도이지 1백명이겠느냐 1천명이겠느냐는 정도로 계수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집중하는 '백영희신앙노선'은 그 연구를 항상 목회 현장을 현실적으로 놓고 발언하게 되어 있으니, 신약교회에 일반적으로 주신 은혜는 구약 세상복이라는 단계를 단숨에 초월하고 천국을 향해야 옳은 것이 교리이지만, 말세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전부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병자와 같이 신약시대에서 예수님을 믿어 사람이 되기는 되었으나 한번도 중생된 성도 노릇을 해보지 못하고 이 3가지 증거를 한번도 믿고 순종해 보지 못하고 늘 은과 금을 구걸하는 세상복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할 것습니다. 교인들이 아무리 신앙이 있다 해도 막상 목회자와 꼭같은 여건에 던져 두면 목회자만한 교인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자기 담임을 두고 잘 한다 못 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말이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학생이 교사보다 실력이 낫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두고 평을 자주 하는데 그 비평이 대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하는 목회자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명의 편리를 위해서 목회자를 두고 일반적으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③이곳이 알기로는, 신앙의 가장 앞선 이들 중에서도 세상복을 초월한 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과연 오늘 목회자 중에서 주님 대속에 감격하여 나도 죽는 날까지 어떤 오해 박해가 있어도 오히려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누가 자기를 욕해도 그 비판 속에서 자기 단점만 찾고 그것으로 기뻐할 정도의 분들이 있겠습니까? 사례가 적어 아이들을 중도에 학교 포기를 하고도 그 아이들에게 이렇게 복음 사업에 학업을 제단에 바칠 수 있게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자 할 목회자를 찾을 수 있을지요? 죽도록 충성했으나 교회는 점점 축소되어 마지막으로 6-70대 나이에 자기 부부 자녀 손주 10여명 앉혀놓고 예배보면서도 이렇게 하늘의 사역꾼에 말석에라도 앉혀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목회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는 그래도 백영희신앙노선의 목회자들이 특수하게 은혜를 받았고 또 그런 감사를 가질 수 있도록 평생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공회와 여러 형태로 관련된 200여 교회 전체를 통해 그럴 수 있는 분의 숫자는 이곳이 알기로는 5명 이상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거 많은 공회 내부 대소사를 통해 목회자들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숫자를 꼽아가며 제시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곳의 신앙노선에 속한 직원들과 관련 목회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곳에서 담대하게 외치는 모든 증거는, 배운 바 이 길이 옳다는 것에는 자신이 있지만 과연 그 길을 걷고 있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이 길을 걷기 위해 힘껏 노력할 뿐이라는 데까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보다 아득히 앞서 걷던 다른 분들이 알고보니 이제 말한 이런 자세가 아니었음을 보면서 하물며 그분들보다 아득히 뒤쳐진 이곳 답변자와 함께 나가는 이들이야 오죽하겠느냐는 계산을 가지고 스스로를 살피고 있습니다. ④이제 설명드린 내용들이 맞다면, 우리는 세상복으로 신앙을 측정해야 할 수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세상복'을 가지고 길러가는 구약이 아니라 피와 진리와 성령으로 증거받고 나아가야 할 신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를 당한 우리 시대의 강퍅함이 역사 최고에 이르렀다고 봐야 성경일 것인데, 이런 우리의 강퍅함이 신약에 살면서도 마치 구약 어린 시대에 해당되는 '세상복'이 필요한 식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탄식하고, 주변을 탄식하고, 이 시대 전체를 향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 현실은 분명히 그런 수준입니다. 따라서 좀 철저하게 냉정하게 단정한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교회를 다니니까 껍데기로 그냥 신앙이라고 할 정도이지 조금 생각을 해본다면 불신일 것입니다. 중생된 우리는 천국갈 사람들인데 우리 수준은 꼭 지옥갈 사람 차원으로 살고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에 대한 평가가 그의 숨어 드러나지 않은 순종의 걸음을 기준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맡고 있는 교인의 숫자와 예배당의 가격 그리고 그가 받을 수 있는 월급액수로 평가할 수 없어야 마땅하고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목회자 전체의 수준이 불신자급이고 그 목회활동이 세상 대리점 운영자 수준이니 나타난 실적으로 도토리 키를 잴 정도밖에 더 되겠느냐는 탄식입니다. 구약교회가 보이는 세상복으로 보이지 않는 천국복을 향했듯이 오늘 신약교회 우리도 세상복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그 이상으로 나갈 준비라도 되어 있으나 세상복을 그렇게 갈구하는데도 세상복을 받아보지도 못한 분들이 많으니 이런 우리들에게 신약의 정상적인 성도에게 해당되는 '세상복'을 초월한 측정기준은 아직 해당이 되지 않겠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 속에 역사하는 성령만이 아시는 숨은 걸음이라는 기준으로 각자의 신앙을 봐야 정상일 것인데 우리 신앙이 정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게 충성한 것으로 평가를 받겠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⑤교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교세 외형을 그렇게 무시했던 백목사님의 예를 소개합니다. 세상 알기를 그렇게 우습게 알다간 종이 우리 시대에는 그분 뿐으로 생각됩니다. 교세 예배당 연보 교권 직책 등을 모조리 잿더미처럼 취급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평생을 걸어갔던 분이었습니다. 이 면에 있어서는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가지던 1979년에도 불신 기자가 비판을 위해 기획 취재에 들어가고 그 기자가 교계에 확인을 하고그 결과를 통고받고서야 비로소 서부교회는 자기 규모가 교계에서 어느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교계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살았던 백목사님이 정작 자기 주일학교 반사나 따르는 목회자들을 지도할 때는 한결같이 출석 몇 명이라는 숫자로 반사나 목회자의 한 주간 생활을 단정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교리적 입장, 스스로 걸어온 평생의 목회 등 모든 면을 생각해 보면 너무도 기이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너무 이상하게 느낀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년에 노망을 했다거나 타락을 했다는 표현이 서울공회나 대구공회 지도부에서는 아주 예사롭게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정답은, 반사들이나 목회자들의 수준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따라갈 신앙에는 너무도 아득히 거리가 멀었던 젖먹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남몰래 한 주간 살았던 내면을 돌이켜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정도 어린 신앙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면으로 징계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단은 일단 두고라도 백목사님을 따르는 그 교역자들은 교계에서 비할 수 없이 모두들 자기 형편과 사정을 초월했다고들 평가를 받았던 이들인데, 도시교회로 이동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시골교회로 이동하면서 유쾌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형교회로 이동되면서 감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개척교회로 가면서 고통스러운 짐을 진 표정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 분 계셨는데, 그 분들은 충성이 넘쳐서 먼저 사망을 해버렸고,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으로만 말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들이기 때문에 돈을 보고 목회하고 성취감과 자존심과 자기 노후 대책을 두고 교회의 부흥문제에 심혈을 기울이지 피로 사신 주의 교회라는 입장에서 교회를 돌본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취급하는 것이 성경에도 맞을 것입니다. 믿는 자를 보겠냐고 하신 성구가 바로 오늘 우리 시대를 향했기 때문입니다. 4.목회자와 재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성구들을 몇 가지 찾아보았습니다. ①고전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 이 성구들은 목회자가 자기 실력껏 목회하고 목회한 교회로부터 실력껏 돈을 모을 수 있는 성구입니다. 지금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목회자들이 막대하게 돈을 모으고 있는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 갖다 댈 성구가 없지 않습니다. 특히 민18:21은 교회 십일조를 목회자가 자기 월급으로 다 가져갈 때 내놓는 성구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곶감 빼먹듯 성구를 골라먹겠다고 나서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②신18:1,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찌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 성전을 맡은 사람은 자기 생활과 기업을 세상에서 따로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목회자가 사유재산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로 돈벌이를 하면 안된다는 원칙으로 새겨 볼 성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가 왕성하면 그 먹을 것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 섬김이 없어지면 굶어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③고전9:12,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 현재까지는 교회 경제의 제일 큰 수입이 십일조인데 이 십일조가 전부 목회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도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고전9장에서 바울이 하나씩 손을 꼽아가며 목회자가 가진 여러 권리를 말했는데 이 때는 신약입니다. 그러나 12절에서 복음을 위해 이 권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성경이 주신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힘대로 그 권리를 복음 위해 내놓는다면 사도바울쪽으로 가까이 가는 사람이 될 것이고, 성경이 준 권리는 철저하게 찾아먹겠다고 한다면 눅16:14에서 말씀한대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④막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9: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골3:1-2,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이런 성구들은 목회자로 하여금 주님 위해 죽어드리지 못하고 있던 것을 다 바치지 못해서 발버둥을 치게 할 성구들일 것입니다. 어느 성구가 눈에 더 들어오고 어느 성구를 인용할 때에 목회자에게 힘이 솟으며 어느 성구를 인용할 때 강단을 뚜드리며 강조하느냐는 것을 두고, 그냥 짐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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