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질문) 탈북자가 증언하는 북한 수용소 성도들의 순교 신앙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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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8
5. (질문) 탈북자가 증언하는 북한 수용소 성도들의 순교 신앙 1972
다음은 탈북성도의 증언입니다.
이 내용이 백영희신앙연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한번 읽어보시고 교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볼때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에는 수많은 제2의 손양원목사님 같은
분들이 있다고 밖에 볼수 없습니다.
이글이 사실이라면 남쪽에 있는 환난성도들은 이제 그만 자랑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믿음을 시험해볼 때라고 여겨질 뿐입니다.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7년 간 고초를 겪은 뒤 탈북한 이순옥 (52)씨가 지난 1.29일 오전 11시 파리의 메종 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인권단체 프랑스 리베르테 초청으로 파리에 온 이씨는 이날 라디오 프랑스 엥테르의 공개 방송에 출연,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 추위에 떠는「동태 고문」 으로 동상에 걸려 열 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습니다.
이씨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북한수용소의 참상을 전했습다. 함경북도에서 당간부 전용 물자 공급소장을 지낸 이씨는 지난 85년 경찰간부의 뇌물 요구를 거절한 뒤 정치범으로 몰려 인민 재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평남 개천 교화소에서 92년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가 94년 아들과 함께 중국을 거쳐 탈북에 성공했다 합니다.
프랑스 엥테르는 북한 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피에르 리굴로 사회사평론 편집장을 비롯해 앙리 플라뇰(프랑스 민주 연합)의원, 「국경없는 의사회」 수석연구원 프랑스와 장, 필립 골립 파리 8대학 교수 등도 출연자로 초청, 북한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합니다.
그런데 DJ는 북한 인권 문제의 UN상정을 막기 위해 로비를 했으며, 김창국 인권위원장 은 국회 법사위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계량화 된 자료가 없어 답변하기 어렵다고 발언했으며, 정부는 UN인권위원회가 4.16일 실시하는 대북 인권비난 결의안 표결에 정책적으로 불참했습니다.
(이하 이순옥씨의 증언 일부)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날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 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기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 시간, 열 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 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 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소리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 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느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 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 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 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탈북자 이순옥씨의 증언 중 일부 발췌)
(답변) 그런 신앙이 되도록 준비했고 가르친 곳은, 이 신앙노선 뿐입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소식
1.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곳을 지역으로 나누면 평안도와 경남이었습니다.
미국의 북장로교가 평안도를 맡아 선교하고 가르쳤으며 호주의 장로교가 경남을 맡았습니다. 일제의 잔학무도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순교자를 내고 출옥성도를 배출한 곳은 바로 이 두 선교부 관할에서 키운 한국 교회였습니다. 북한은 하나님께서 해방 후 다시 일제보다 더 혹독한 용광로인 공산주의 속으로 넣으셨고, 남한은 경남의 출옥성도들을 통해 해방 후 진리 운동을 시작하여 오늘 총공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우리는 나타난 역사만 알지, 숨은 7천의 의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는 엘리야를 통해 계통을 잇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를 가장 대표적으로 기록한 것은 구원의 계통에 사용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후시대 구원의 계통으로 이어지지는 아니했다 해도 요셉처럼 그 당대 신앙만으로 본다면 구원의 계통에 사용되는 유다보다 더 하나님을 기뻐시게 했던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계통은 해방 후 남한교회로 이어지고, 남한교회 안에서는 고신을 통해 총공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가 뚜렷하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자께서 예로 들어주신 북한교회의 숨은 교인들의 소식은, 해방 이전 북한에 전해졌던 미국 북장로교의 철저했던 신앙세계와 그 신앙을 평양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이어받고 그 신앙이 이기선목사님과 같은 신앙으로 이어져 온 것을 볼 때, 엘리야 때 숨겨두었던 7천의 의인과 같은 경우일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3.눈이 어두워 단정하지는 못하겠으나, 이후 사실이 확인된다면 과거 역사를 두고는 단정하겠습니다.
지금 북한 문제를 두고는 지나치게 확대된 소식도 많고 지나치게 가려진 소식은 부지기 수입니다. 지하교회에 대한 면도 그런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의문인 것은 그렇게 많은 수의 신앙이 그렇게 장기간 그런 최고의 순생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교회는 신사참배 환란과 해방후 공산화를 통해 그 신앙 준비가 북한 전체적으로 완전 실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판정을 지웠습니다. 그 속에서 지금까지도 환란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바벨론에 포로잡혀 간 이들 중에 다니엘 모르드개 학개 등과 같은 사람으로 비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신앙있는 분들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장기간의 흑암 기간을 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런 정도의 신앙이 아니라면 그렇게 혹독한 환란 가운데 그렇게 신앙을 지키는 순생의 일들이 전해질 리가 없다는 것이 의문입니다. 어떤 면이든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현재 단 1명의 성도라도, 참으로 이 복음 때문에 오늘까지 고난 받는 성도가 있을 것인데 그런 분들이 사지에서 투쟁하는 상황을 두고 이곳은 오늘 이 세상 극단적인 평안을 누리면서 중계방송하듯 말씀을 드리는 것은 너무도 죄송스러운 일이라 감히 더 이상 말씀을 드리기는 두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극단적 환란 속에서는 극단적인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나가는 태양을 그 자리에 붙들어 매시거나 아니면 뒤로 빠꾸를 시키므로 우주의 순환 체계를 뒤흔들어서라도 큰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 있을지 단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4.질문자께서 소개하신 내용은, 그냥 소식으로 듣고 지나갈 수가 없는 충격입니다.
그 소식이 잘못 전해졌다고 치더라도, 북한에는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소식을 기다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소식이 바로 전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사의 앞날에 이들을 통해 역사할 역사는 천지개벽할 만큼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어떻게 무슨 역사를 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세계사의 흐름은 교회사에 달려있고, 교회사의 흐름은 죽기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분들의 순생과 순교사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호흡을 중단하고 숨을 죽이고 지켜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