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리적인 면에서 본 예배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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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⑴ 교리적인 면에서 본 예배
① '예배'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일이 예배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를 원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풀고 나가면 다른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알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쉽고 확실한 방법이 우리 교회에게는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위치, 우리의 신분, 이 두 존재의 접촉은 예배라는 단어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만난다는 것만 뜻할 것 같으면 예배는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일 것입니다. 앞뒷집 친구가 만난 것이 아니고 만나는 두 존재가 어떤 존재냐는 것을 조금 더듬으면, 이 만남은 만난다는 의미에서 한없는 의미가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다 나올 수 있습니다.
㉮ 우선, 만나 뵙는 분의 위치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가 '예배'
지극히 낮은 우리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을 무슨 말로 표현하여야 적절하겠습니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단어 사용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 고유적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성경에 필요하여 그 원어의 그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니 우리는 그 뜻을 다시 더듬어 올라가며 찾으면 됩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일상 사회 생활에서는 어떤 존재를 마주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단, 인간이 신으로 상대하는 존재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이며 따라서 예배란 이미 마주 앉은 두 존재의 위치를 표현한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왕이 아무리 높은 존재이며, 또 부모가 아무리 귀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무한'
하나님은 여러 높은 존재들 중에서 제일 높은 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만존재 전부를 하나로 묶어 피조물이며 하나님만은 창조주입니다. 당신만 높고 나머지는 다 지극히 낮은 존재이며 이 차이는 무한이기 때문에 아예 그 거리를 재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존재들끼리는 높낮이가 수도 없으며 그래도 그 존재들끼리는 그 차이를 측량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만을 연구해도 평생이 부족하고 영원도 부족합니다. 영원토록 알아 나가는 진행만 있지 그 끝을 측정하지도 못하고 그 끝에 선다는 것은 더욱이나 말도 안됩니다.
㉰ 이런 하나님을 만나 뵙는 우리의 자세는 '예배'
하나님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배'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뜻은 우리가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제일 천한 우리가 제일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그분의 높이와 우리의 낮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예배적인 자세 외에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을 상대하는 자세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② 예배의 내용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예배'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접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면 예배의 내용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얻어 가지기만 하는것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접촉하면 부자의 부요함이 거지에게 묻어 나갑니다. 유식과 무식이 만나면 말 한 마디라도 무식한 사람이 듣고 지식에서는 유익을 봅니다. 정권자를 만난 사람은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써먹고 무슨 혜택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본체는 완전이요 그분의 소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요, 인간은 지음을 받았고 그분이 아니면 순간도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완전이란 다른 존재에게 주기만 하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드렸다고 하지만 우리를 받아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유익을 보거나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면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신 완전과 우리가 접촉을 하면 무엇이든 우리는 유익만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쪽은 주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되갚을 수가 없는 이동의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대가가 없었으니 은혜라고 하며 받은 쪽은 거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니 이를 가리켜 영광이라고 합니다.
㉯ 만나 뵙는 자기가 어떤 신분이냐는 것이 문제
알아도 귀신이 아는 지식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일이 두려워 자신을 떨게 만듭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뵐 수도 없었고 우리는 하나님께 정죄받고 지옥을 가야 했던 죄인들입니다. 중죄인이 경찰 만나는 일을 기쁘게 기다릴 수 없습니다. 범죄가 난무하는 밤길을 혼자 걸어가야 할 시민이 경찰을 만났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혜택을 봅니다. 이 경찰의 실력이 하찮으면 죄인은 다행일 것이고 시민은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찰이 완전 무결하다면 죄인들은 떨 일이고 시민은 얼마나 다행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인지 하나님이 전력을 다 기울이시는 자녀인지 그 신분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며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 신분이라면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도 없고 또 만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만나 뵙는 것이 문제입니다.
㉰ 대속 받은 우리만 만나 뵐 수 있으니 부모와 자녀의 만남
하나님과 우리는 그 높낮이는 이루 말할 수 없어 '예배'라고 표현을 했으나 이런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 두 존재 사이는 '부모와 자녀'입니다. 만나면 자녀가 덕을 보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가 있습니다. 두 존재의 위치가 그러하고 두 존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대속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대속을 예표하는 제사를 앞에 놓아야 합니다. 그 제사에는 여러 가지 규정이 많았습니다. 다 지켜야 그 다음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이제는 마음을 기울어 그분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대속이 완성이 되었고 이 대속으로 구원을 받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전제가 없고 다른 규정이 없으며 가로막는 어떤 휘장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면 당신은 바로 들어오십니다.
집을 나간 것이 우리였지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버지를 모실 준비가 되면 아버지가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잊어도 아버지는 손바닥에 새겨놓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기회를 보고 계십니다.
② 예배의 필요성
㉮ 영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으나, 마음은 힘쓰는 만큼되기 때문
하나님 접촉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은 영을 살리시고 이 중생된 영 속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영원히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주격, 우리 속에 있는 주체, 바로 우리 영인데 중생되는 순간에는 이 영만 해결해 놓으시고 마음과 몸은 먼저 살아난 그 사람의 영에게 맡긴 것입니다. 즉, 중생된 사람이 평생 힘쓸 자기 성화라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과 자기 몸에 얼마나 하나님을 모셨느냐에 따라 그 성화의 양이 결정되는 것이며, 이 성화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해 나가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우리 마음에 우선 하나님을 모시는 이 일에 전력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접촉이라 할 수 있는 예배라는 것은 그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가만 두면 비록 중생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 몸과 마음의 기능과 요소들은 영원히 죽어 지옥으로 분리 유리될 수 있습니다. 죽을 우리 마음과 몸의 기능과 요소들을 영이 살려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영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님과 하나가 된 이 영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노력은 우리 마음에 이 하나님을 모시는 예배가 바로 우리 성화 구원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살릴 때와 이치는 꼭 같으나 영은 순간이며 영원 해결이고, 마음과 몸은 평생 반복과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데 이는 마음과 몸의 요소가 수도 없는 복합체로 되어 있고 각 현실에서 해당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각개로 따로 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 평생 힘쓸 이 일은 예배라는 이름에서 시작되고 진행
무슨 말로 표현해도 결국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우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예배인데,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 생활은 이 일이 전부요 이 일을 빼놓는다면 다 헛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은 예배생활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주님 모시지 않고 혼자 움직인 시간, 그 부분은 지옥에 버려야 될 쓰레기가 된 생애이며 주님 모시고 움직인 그 시간 그 생애만 추려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여생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으로 움직이는 생활, 즉 예배생활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따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 중에는 주일, 시간 중에는 예배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주일에 관한 명령은 신약에서까지 유지를 시켰고 예배 역시 그 형식은 자유롭게 했으나 신령한 예배, 또는 영적 예배로는 신약으로까지 이어져 나오기 때문에 각 교회와 각 개인의 형편을 따라 정해진 법은 없으나 양심껏 주일과 예배를 지키고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정하게 된 것은 주일 예배가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서 주님 모시는 예배가 되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점Z가 되고 출발이 되며 그 중심 노릇을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예배 따로, 생활 따로'가 되는 예배는 이미 손발이 잘린 예 배
예배시간 예배가 얼마나 생활에까지 번져 갔느냐 이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입니다. 교회사나 교리사에서 다루는 '예배'는 예배시간의 '예배'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예배시간 외의 일상 생활과 비교하게 되면서 예배 자체의 중요성이 자꾸 강조가 되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일상 생활의 경건은 소홀하게 되고 결국은 생활과 유리된 예배만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사는 생활 현장에 가져갈 예배가 그 현장 맞은편에 성역으로 구분이 되면서 믿는 사람들은 건너편으로 예배보러 가는 시간과 다시 건너와서 이편에서 자기의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예배를 드린 목적과 결과가 세상 속에 처한 자기 생활에서 예배적 인격, 예배적 행동, 예배적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구약적 예배로 선입관을 가져 예배는 생활과 분리된 거룩한 시간, 하나님을 뵙는 참으로 지성스러워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강조되면서 자꾸 형식화 의식화가 되어졌고, 그러는 만큼 예배때 모신 하나님을 예배시간 마친 뒤에까지 그대로 모셔 생활 속에까지 동행을 해야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로 진행된다는 점은 아주 잊혀져 버렸습니다.
예배보는 반대편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예배 보러 갈 때만 저 건너편으로 넘어 갑니다. 그러면서 예배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강조가 됩니다. 예배시간의 예배가 생활 시간 속의 예배로 이어져야 하는 면을 간과한 결과 예배 마친 뒤의 교인은 전혀 딴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향한 준비와 자세는 아무리 강조가 되어져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생활하던 자기 현실이 상대적으로 덜 경건해지고 덜 말씀화되는 소홀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란 이런 것이며 저런 것이라는 설명이 높아갈수록 예배와 생활의 모습은 뚜렷하게 이원화로 진행되어 심지어 천주교와 같이 예배당의 예배 모습은 구약교회나 불교만큼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그 예배가 끝난 뒤 자기 생활 속에 모습은 술 담배가 평범하게 되기까지 되었습니다. 현재 구약교회에서 재출발한 신약의 초대교회 모습, 또 천주교에서 완전히 개혁을 하고 나온 당시의 교회는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가 되었고 이것이 신앙과 생활의 일치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델이 될 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예배 따로 사회 활동 따로라는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 안에 갇혀 있는 '예배'를 예배시간 밖으로까지 진출시켜 전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과 생활이 하나되는 참 성화 참 건설구원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이 일을 숙달키 위해 중생된 우리는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데도 이 세상에 오랫동안 살도록 붙들어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의 생활이 말씀대로 경건하게 또 깨끗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또 예배가 경건하게 지엄하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도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며 예배에서 뵈온 하나님을 그대로 생활 속에까지 모시고 들어가서 생활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결과가 있어야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까지 연결시킨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확대된 예배가 생활이며 축소된 생활이 예배인데 이 예배와 생활의 하나됨을 놓치면 결국 신약시대에 구약교회를 가지게 됩니다.
① '예배'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일이 예배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를 원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풀고 나가면 다른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알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쉽고 확실한 방법이 우리 교회에게는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위치, 우리의 신분, 이 두 존재의 접촉은 예배라는 단어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만난다는 것만 뜻할 것 같으면 예배는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일 것입니다. 앞뒷집 친구가 만난 것이 아니고 만나는 두 존재가 어떤 존재냐는 것을 조금 더듬으면, 이 만남은 만난다는 의미에서 한없는 의미가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다 나올 수 있습니다.
㉮ 우선, 만나 뵙는 분의 위치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가 '예배'
지극히 낮은 우리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을 무슨 말로 표현하여야 적절하겠습니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단어 사용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 고유적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성경에 필요하여 그 원어의 그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니 우리는 그 뜻을 다시 더듬어 올라가며 찾으면 됩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일상 사회 생활에서는 어떤 존재를 마주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단, 인간이 신으로 상대하는 존재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이며 따라서 예배란 이미 마주 앉은 두 존재의 위치를 표현한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왕이 아무리 높은 존재이며, 또 부모가 아무리 귀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무한'
하나님은 여러 높은 존재들 중에서 제일 높은 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만존재 전부를 하나로 묶어 피조물이며 하나님만은 창조주입니다. 당신만 높고 나머지는 다 지극히 낮은 존재이며 이 차이는 무한이기 때문에 아예 그 거리를 재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존재들끼리는 높낮이가 수도 없으며 그래도 그 존재들끼리는 그 차이를 측량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만을 연구해도 평생이 부족하고 영원도 부족합니다. 영원토록 알아 나가는 진행만 있지 그 끝을 측정하지도 못하고 그 끝에 선다는 것은 더욱이나 말도 안됩니다.
㉰ 이런 하나님을 만나 뵙는 우리의 자세는 '예배'
하나님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배'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뜻은 우리가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제일 천한 우리가 제일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그분의 높이와 우리의 낮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예배적인 자세 외에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을 상대하는 자세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② 예배의 내용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예배'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접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면 예배의 내용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얻어 가지기만 하는것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접촉하면 부자의 부요함이 거지에게 묻어 나갑니다. 유식과 무식이 만나면 말 한 마디라도 무식한 사람이 듣고 지식에서는 유익을 봅니다. 정권자를 만난 사람은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써먹고 무슨 혜택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본체는 완전이요 그분의 소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요, 인간은 지음을 받았고 그분이 아니면 순간도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완전이란 다른 존재에게 주기만 하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드렸다고 하지만 우리를 받아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유익을 보거나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면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신 완전과 우리가 접촉을 하면 무엇이든 우리는 유익만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쪽은 주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되갚을 수가 없는 이동의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대가가 없었으니 은혜라고 하며 받은 쪽은 거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니 이를 가리켜 영광이라고 합니다.
㉯ 만나 뵙는 자기가 어떤 신분이냐는 것이 문제
알아도 귀신이 아는 지식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일이 두려워 자신을 떨게 만듭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뵐 수도 없었고 우리는 하나님께 정죄받고 지옥을 가야 했던 죄인들입니다. 중죄인이 경찰 만나는 일을 기쁘게 기다릴 수 없습니다. 범죄가 난무하는 밤길을 혼자 걸어가야 할 시민이 경찰을 만났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혜택을 봅니다. 이 경찰의 실력이 하찮으면 죄인은 다행일 것이고 시민은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찰이 완전 무결하다면 죄인들은 떨 일이고 시민은 얼마나 다행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인지 하나님이 전력을 다 기울이시는 자녀인지 그 신분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며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 신분이라면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도 없고 또 만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만나 뵙는 것이 문제입니다.
㉰ 대속 받은 우리만 만나 뵐 수 있으니 부모와 자녀의 만남
하나님과 우리는 그 높낮이는 이루 말할 수 없어 '예배'라고 표현을 했으나 이런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 두 존재 사이는 '부모와 자녀'입니다. 만나면 자녀가 덕을 보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가 있습니다. 두 존재의 위치가 그러하고 두 존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대속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대속을 예표하는 제사를 앞에 놓아야 합니다. 그 제사에는 여러 가지 규정이 많았습니다. 다 지켜야 그 다음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이제는 마음을 기울어 그분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대속이 완성이 되었고 이 대속으로 구원을 받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전제가 없고 다른 규정이 없으며 가로막는 어떤 휘장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면 당신은 바로 들어오십니다.
집을 나간 것이 우리였지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버지를 모실 준비가 되면 아버지가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잊어도 아버지는 손바닥에 새겨놓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기회를 보고 계십니다.
② 예배의 필요성
㉮ 영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으나, 마음은 힘쓰는 만큼되기 때문
하나님 접촉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은 영을 살리시고 이 중생된 영 속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영원히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주격, 우리 속에 있는 주체, 바로 우리 영인데 중생되는 순간에는 이 영만 해결해 놓으시고 마음과 몸은 먼저 살아난 그 사람의 영에게 맡긴 것입니다. 즉, 중생된 사람이 평생 힘쓸 자기 성화라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과 자기 몸에 얼마나 하나님을 모셨느냐에 따라 그 성화의 양이 결정되는 것이며, 이 성화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해 나가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우리 마음에 우선 하나님을 모시는 이 일에 전력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접촉이라 할 수 있는 예배라는 것은 그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가만 두면 비록 중생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 몸과 마음의 기능과 요소들은 영원히 죽어 지옥으로 분리 유리될 수 있습니다. 죽을 우리 마음과 몸의 기능과 요소들을 영이 살려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영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님과 하나가 된 이 영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노력은 우리 마음에 이 하나님을 모시는 예배가 바로 우리 성화 구원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살릴 때와 이치는 꼭 같으나 영은 순간이며 영원 해결이고, 마음과 몸은 평생 반복과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데 이는 마음과 몸의 요소가 수도 없는 복합체로 되어 있고 각 현실에서 해당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각개로 따로 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 평생 힘쓸 이 일은 예배라는 이름에서 시작되고 진행
무슨 말로 표현해도 결국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우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예배인데,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 생활은 이 일이 전부요 이 일을 빼놓는다면 다 헛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은 예배생활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주님 모시지 않고 혼자 움직인 시간, 그 부분은 지옥에 버려야 될 쓰레기가 된 생애이며 주님 모시고 움직인 그 시간 그 생애만 추려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여생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으로 움직이는 생활, 즉 예배생활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따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 중에는 주일, 시간 중에는 예배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주일에 관한 명령은 신약에서까지 유지를 시켰고 예배 역시 그 형식은 자유롭게 했으나 신령한 예배, 또는 영적 예배로는 신약으로까지 이어져 나오기 때문에 각 교회와 각 개인의 형편을 따라 정해진 법은 없으나 양심껏 주일과 예배를 지키고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정하게 된 것은 주일 예배가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서 주님 모시는 예배가 되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점Z가 되고 출발이 되며 그 중심 노릇을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예배 따로, 생활 따로'가 되는 예배는 이미 손발이 잘린 예 배
예배시간 예배가 얼마나 생활에까지 번져 갔느냐 이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입니다. 교회사나 교리사에서 다루는 '예배'는 예배시간의 '예배'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예배시간 외의 일상 생활과 비교하게 되면서 예배 자체의 중요성이 자꾸 강조가 되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일상 생활의 경건은 소홀하게 되고 결국은 생활과 유리된 예배만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사는 생활 현장에 가져갈 예배가 그 현장 맞은편에 성역으로 구분이 되면서 믿는 사람들은 건너편으로 예배보러 가는 시간과 다시 건너와서 이편에서 자기의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예배를 드린 목적과 결과가 세상 속에 처한 자기 생활에서 예배적 인격, 예배적 행동, 예배적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구약적 예배로 선입관을 가져 예배는 생활과 분리된 거룩한 시간, 하나님을 뵙는 참으로 지성스러워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강조되면서 자꾸 형식화 의식화가 되어졌고, 그러는 만큼 예배때 모신 하나님을 예배시간 마친 뒤에까지 그대로 모셔 생활 속에까지 동행을 해야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로 진행된다는 점은 아주 잊혀져 버렸습니다.
예배보는 반대편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예배 보러 갈 때만 저 건너편으로 넘어 갑니다. 그러면서 예배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강조가 됩니다. 예배시간의 예배가 생활 시간 속의 예배로 이어져야 하는 면을 간과한 결과 예배 마친 뒤의 교인은 전혀 딴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향한 준비와 자세는 아무리 강조가 되어져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생활하던 자기 현실이 상대적으로 덜 경건해지고 덜 말씀화되는 소홀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란 이런 것이며 저런 것이라는 설명이 높아갈수록 예배와 생활의 모습은 뚜렷하게 이원화로 진행되어 심지어 천주교와 같이 예배당의 예배 모습은 구약교회나 불교만큼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그 예배가 끝난 뒤 자기 생활 속에 모습은 술 담배가 평범하게 되기까지 되었습니다. 현재 구약교회에서 재출발한 신약의 초대교회 모습, 또 천주교에서 완전히 개혁을 하고 나온 당시의 교회는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가 되었고 이것이 신앙과 생활의 일치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델이 될 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예배 따로 사회 활동 따로라는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 안에 갇혀 있는 '예배'를 예배시간 밖으로까지 진출시켜 전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과 생활이 하나되는 참 성화 참 건설구원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이 일을 숙달키 위해 중생된 우리는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데도 이 세상에 오랫동안 살도록 붙들어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의 생활이 말씀대로 경건하게 또 깨끗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또 예배가 경건하게 지엄하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도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며 예배에서 뵈온 하나님을 그대로 생활 속에까지 모시고 들어가서 생활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결과가 있어야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까지 연결시킨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확대된 예배가 생활이며 축소된 생활이 예배인데 이 예배와 생활의 하나됨을 놓치면 결국 신약시대에 구약교회를 가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