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성경 성구로 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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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성경 성구로 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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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성경 성구로 본 예배

① 요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예배의 형식은 완전히 다 폐지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은 예루살렘에 구원의 준비가 있었고 따라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신약은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이며 너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만 믿어라고 하시면서 이제는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장소도 형식도 시간도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신령한 예배요 진정한 예배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오셨다면 신령한 예배가 되었을 것이고, 아니라면 예배를 드리려고 오기는 했지만 예배 자체는 실패한 것입니다.

㉯ ‘신령’은 하나님을 모심, 진정은 자기 마음 다 드린 상태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을 구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니 우리가 바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 집례로 구약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이제 그뿐입니다. 신약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우리 각각의 영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장소가 따로 없고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모시고 움직였으면 예배가 된 사람이고, 예배시간이라도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예배를 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외부로는 판단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사람은 자기 속에 이루어지는 예배의 유무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령한 예배가 예배이기 때문에 온갖 조심과 형식으로 다 기울인 예배당의 예배시간이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광야같은 세상, 그 깊은 속에 사는 어느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동행하시어 신령한 예배가 존재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예배의 뜻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오시느냐는 문제는 자기 마음을 얼마나 기울이고 자기의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생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중생은 그 흉내조차도 인간의 협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외부의 흉내와 모양은 자기의 심신이 얼마나 움직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끌고 온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화에 필요한 은혜는 자기 있는 힘을 다 쓰는 자에게 그 정성을 보시고 그다음 당신이 판단해서 당신의 은혜를 당신이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다하고 정성 다하고 힘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일익을 맡는다든지 또 우리 정성 다한 것이 1원짜리 정도라도 대가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 신약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을 향해 집중할 때

천주교에서 개혁했던 교회는 중생의 기본구원관, 교황 무오설 등 수도 없이 다급하고 현황적인 교리 문제가 있었고 이를 집중 상대하며 바른 교리를 세우는 데 그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이런 문제는 생과 사를 나눌 문제였고 이런 교리들은 생명을 내놓고 전념했던 신학자들에 의하여 수백년을 이어올 수 있는 좋은 교리로 구현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배의 수고로 교회가 평안과 번영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그런 혜택을 가진 후배들이 선배들이 닦아놓은 초석 교리들 위에 이제 남은 평생 믿어갈 평소의 신앙, 여생의 경건에 관계된 성화 구원면을 소홀히 했고 교회는 천주교라는 절대 위협의 요소가 없게 되자 안일과 나태에 빠지면서 서서히 세상 속으로 침체되어 갔습니다. 생사 투쟁의 초기 신학자들은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평소 생활에까지 하나님을 모신 경건으로 살지 않을 수 없는 절박감을 주었는데, 복음의 평화기에는 그런 외부 위협이 없고 이것이 평소의 신앙생활을 풀어놓는 역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지켜지고 집에 돌아가 혼자 살아가는 자기 현실은 따로 진행되는 이분화가 가속화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초기 신학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강조한 것은 그 예배가 생활로 그대로 이어져 그들에게는 항상 긴장 속에 경건 속에 살게 했는데, 후세대는 예배만 그렇게 하고 평소의 생활은 풀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은 그 예배마저도 경건의 모양만 진열할 뿐 예배 시간에서조차도 경건의 내용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예배 시간 도중에 가족 소개를 하고, 예배 시간 도중에 폭소를 유도하고, 예배 시간 도중에 TV 댄스팀이 다리를 치켜 들 수 있게 된 정도입니다. 개 교회 하나를 두고는 아직까지 예배 본질에 대한 집착이 있어 이를 금지하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교단을 두고는 소속 교회들에게 이런 모습을 금지하는 곳이 하나도 없고 따라서 교단적으로 예배 개념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교단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무엇이냐고 시비가 발생되면 신학교 교재들이 인용되지만, 정작 아무 소리가 없으면 이미 예배 시간의 예배마저도 별별 진행으로 다 어지러워졌다고 보겠습니다.

② 롬12:1-2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예배니라’

예배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는 이의가 없을 표현이지만 미개했던 시대로 올라가면 죽은 자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린다든지, 죽은 송장 또는 죽은 자의 권위를 빌려서 더 높은 하나님께 상소를 할 수 있다는 미신 또는 이종교적 예배의 형태들이 쉽게 발견됩니다.
일단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라는 시점을 고려한다면 극단적 이단들을 제외하고는 죽은 자와 신과의 연계 자체를 고대 미신 또는 비교 종교학적 현상으로 설명해버리고 그런 행위 자체를 아주 역사책에서 기억할 남의 일로 알아버립니다.

㉮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구약에서 명령했던 제사의 모습이 다 폐지된 신약교회이기 때문에 예배 자체가 영적 예배라야 합니다. 외부 진열이 영적 예배의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위기 또는 참고로서 이런 저런 규격을 정해 보지만 그런 규격을 하나의 법칙으로 또는 강요나 의무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배에 관한 한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육적 예배는 육체로 확인이 되는 레위 지파 제사장이 집례를 하게 되어 있으며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레위인이 아니며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인 우리가 혼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제는 신령한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도 육체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신령한 이스라엘로서 복음을 향하게 되면 그들도 신령한 이스라엘의 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예배가 영적 예배로 출발했던 초대 교회와 개혁 교회 초기를 잊어버리고 육안으로 기준을 삼을 정도로 천주교와 구약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문제를 두고도 예배당 건축 문화가 있다 할 정도가 되어 예배당을 건축해도 예배당 건축법을 법아닌 법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사무실 형의 사각으로 마감하면 이단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이며, 십자가의 희생을 마음에 담아 두기 위해 건축물에 십자가를 표시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적기독이라고 취급하는 정도입니다.

㉯ 예배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그 몸을 움직이는 우리 속에 마음은 이미 내포가 되어 있습니다. 이 몸을 죽이면 살인죄가 됩니다. 따라서 죽이지는 않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예배보는 우리의 마음을 이제는 하나님이 움직이지 나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산 제사입니다.

‘드린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움직이면 제가 순점8로 움직이겠고 움직이는 그 주권, 그 결정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살아 있으나 그 사용권 그 소유권 그 활동에 관한 결정권은 내가 가졌던 것을 하나님께 드려 이제는 하나님이 가지고 하나님 마음 대로 명하시고 나는 순종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제일 소중한 시간이며 따라서 세상에서 복잡했던 모든 것을 추스르고 하나님 존전 앞에 나간다는 압박감에서 자신의 전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예배의 의미를 모든 경건과 지엄의 표현으로 나열을 시켰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들어봐도 좋은 말이어서 틀린 말이 없고 나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 의미가 명확히 또 단촐하게 정리되는 설명 역시 없습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틀린 말이 없고 또 맞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말이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그 구체적인 행위 그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면 대답할 신학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산 몸으로 그러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성의를 차려 입은 성직자가 다리를 떨면서 신부 입장의 걸음으로 강단으로 올라가는 그 걸음이 지금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구약입니다. 강단은 설교자의 위치가 편리하게 조성된 것일 뿐입니다. 예배당이라 예배보는 모임을 편리하도록 시설된 것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가질 수 없습니다. 제단은 없어졌으며 성전은 예배당 건물에서 그 동일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도 아닙니다. 드려봐야 하나님이 가져가지 않으시고 교회 운영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의 결정대로 사용할 뿐입니다. 강단에 올라가는 성직자가 지금 산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고 생각한다면 그 외 구경하는 교인들은 예배에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설교자든 교인이든 어떤 순서를 맡은 자이던 예배란 참석한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몸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치 않고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과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라고 그 사용권을 맡기는 것이며 그 결과 주님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고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영적 예배가 된 것입니다.

㉰ 예배 참석자 각자가 자기 속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 이것이 예배

설교자라는 직책은 예배에 필수가 아닙니다. 찬양대도 어떤 순서자라도 예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직책이지 없으면 예배가 성립되지 않는 필수 요소일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참석자 자신들이 자신들 마음 속에서 자기에게 회개를, 감사를, 각오를,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이 예배이며 그 만남을 위한 순서와 형태는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교파마다 신학자마다 예배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 경험상 그것이 아주 유익하더라는 것이지 그렇게 해야 예배가 된다고 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 그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하는 모습이 예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로 정할 수 없는 신약의 이런 외부의 형식 속에 실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하나님 앞에 고칠 것을 지적 받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을 배워 감사했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배우고 결심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에서 회개, 감사, 각오 등의 여러 진리 증거를 듣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들은 본인이 들은 내용을 가지고 자기 속에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자기에게만 필요한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 모습을 외부로 표현한다면 예배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성경만 읽어놓고 오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기도로 명상으로 찬송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 테이프를 들을 때 만일 그 테이프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는데 이 사실을 교회도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이것이 탄식이다고 했다면, 그 테이프가 설교자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테이프에 담긴 성경 해석을 다시 들으면서 자기가 자기 속의 하나님께 '참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맞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으며, '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살면서 이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라는 자탄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도 감사도 각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제공이 어떤 형태 어떤 모습 어떤 내용이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작 중요한 문제는 예배 참석자 자신이 자신 속의 하나님께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그 방법이 전해 듣던 새겨 듣던 읽어 들었던 상관할 것 없이 자기 속의 하나님과 자기가 회개적 대화, 감사적 대화, 각오적 대화, 간구적 대화등 무슨 대화든 오고 간 이 실제가 남이 있다면 이것이 모르는 신령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빼버리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배의 형식만 쭉 진행이 된다면 이는 예배 같으나 예배가 아니게 됩니다.

③ 예배뿐 아니라 모든 신앙 행위가 예배적으로 변화 되어야함

신약교회가 그 신앙의 방향을 구약적으로 잡아 손해보는 일이 많고 반대로 신약교회가 신약의 은혜를 방점G 기회로 삼아 쓰지 못할 쓰레기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배가 오늘은 세상을 닮아 썩어진 경우가 휠。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풍조 속에서도 건전한 교회의 예배를 보수하는 극소수의 교회들 중에서 그 정도가 지나쳐 구약까지로 회귀하는 교회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지성인이 많은 교회, 상류층의 문화인이 많은 교회들일수록 장엄한 의식과 예법에 집착이 많고 이런 경향이 결국 천주교를 닮을 수 있는 요인임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비단 예배뿐 아니라 여러 가지 비슷한 사안들이 많다고 보며 전반적인 신앙 경향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산술적 1/10인 십일조는 있어도 자기 번 모든 수입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것이라는 표시로 그 중 1/10을 떼서 당신이 드리라는 복음 운동에 바치고 나머지 9/10도 주님의 것인데 내가 맡아 내가 사용하게 되었으니 하나님 원하시는 뜻을 찾아 일일이 그렇게 사용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십일조가 십일조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이런 신령한 면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십분의 일을 계산해서 드린다면, 그리고 그 십일조를 드리면서 무슨 말로 해설을 하고 어떤 봉투로 포장을 한다 해도 이는 너무 구약적이며 의식적이며 형식적이며 너무도 영적예배가 되어야 할 신령한 이스라엘답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교역자가 하나님 앞에 특수 신분으로 특수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아닌데 그렇게 특수화되어 있는 것도 예배, 십일조 등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오늘 교회의 구약화입니다. 앞서 복음 사역을 맡은 그 내용 때문에 목회자가 귀한 것이지 목회자가 된 그 신분 때문에 귀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혼동하면 잘못된 사역에 대한 비판이 없어지고 잘못된 사역이 목회자의 신분에 묻혀 교회를 치명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참으로 움직이는 사람, 그는 주일학생이라도 그 순간은 하나님의 점L며 하나님과 끊어져 자기 주관대로 움직이는 사람, 그는 목회자라도 그 순간은 하나님의 점L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점; 대적해야 하나님 대적이 되지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은 점; 대적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 대적이 되겠습니까? 착오로 실수할까 두려워하는 점은 물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부분 어느 대목을 일일이 짚어 말하라면 한도 없겠으나 전체적인 방향 그 지향하는 자세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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