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따라서 예배는 일반인이 생각하지 않았던 이런 형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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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따라서 예배는 일반인이 생각하지 않았던 이런 형태일 수도 있다.

서기 0 24
⑷ 따라서 예배는 일반인이 생각하지 않았던 이런 형태일 수도 있음

① 예배의 3가지 요소가 있다면 그 모습은 여러가지일 수 있는 것

말씀, 기도, 찬송이라는 예배의 요소 3가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형식보다 내용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약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습까지를 명령해 놓았으나 신약에서는 폐지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그 외부의 모습의 일치나 형식의 재현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말씀'이라는 부분이 이런 모습일 수도 있음

예배의 요소 중 하나를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성경을 읽고 그 성구에 대한 설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성경만 읽고 그기 대한 설교가 전혀 없다해도 말씀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각자가 바로 은혜를 받고 또 그 본문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을 각자가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 깨닫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하며 여러 가지 예배의 내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경은 읽지 않고 교리가 증거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교리란 성경을 근거했고 성구에 대한 해석이며 설교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먼저 읽어야 성경을 근거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형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은 뒤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기 전 먼저 성경을 읽으셨기 때문에 그 모습을 참고하는 것이지 성경 봉독과 이어지는 설교가 예배에서 생략되거나 반대로 되어서 안되는 절대성을 가진 예법은 아닙니다.

즉, 예배의 3요소 중에 하나인 '말씀'의 부분이 성경공부 형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용이 예배인데, 그리고 예배의 말씀 부분인데 그 말씀 부분이 성경공부의 성격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인데 외부에 붙이는 이름에 따라서 예배가 되고 안되는 정도로 형식화 구조화시킨다는 것은 신약교회의 예배에 대한 기본 인식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 찬송의 경우는 이미 많이 보편화가 되었고 지나친 경우도 있음

찬양예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의 3가지 요소 중 말씀과 기도 부분을 없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의도가 되었다면 예배라는 이름을 붙인 노래판이겠지만 말씀과 기도까지를 찬양에서 포함하여 찬양의 모습이 가장 부각되도록 해 본다는 의미라면 전혀 정죄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찬양이란 음의 높낮이와 길이의 조절, 그리고 최소한으로 줄여 표현하는 몇 마디의 감사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내용은 전부가 성경에서 나온 말씀이라야 하고 또한 그 속에 우리의 소원이 담겨져 있으니 이미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설명을 하지 않아도 상식으로 안다는 전제에서 특별히 찬양적 말씀, 찬양적 기도, 찬양적 찬양이 필요하다고 느껴 찬양예배라고 한 것이 찬양예배의 첫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찬양예배는 없어지고 찬양만 남고, 찬양까지도 없어지며 노래의 기술과 숙련만 남고, 노래의 기술과 숙련은 들러리가 되고 말초신경의 예민함만 한 곳으로 끌고 다니는 모습으로까지 진행하여 '열린 예배의 극단'까지를 혹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찬송 속에 말씀과 기도를 포함하고 그리고 찬송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예배를 진행한다면, 이를 정죄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예배가 시작되자 기도가 터져 결국 그 기도로 예배가 마쳐 진 경우

광신들이 주로 써먹는 일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이나, 성령에 붙들려 감사가 넘치고 또는 간구할 제목이 있어 그 회중을 하나님이 휘몰아 기도로 한 시간의 예배를 계속 인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과 말씀 증거가 없었다면 기도회라고 해야겠는가? 예배로 모였다가 기도회로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 기도가 과거 받은 말씀을 되새기며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회개가 있었다면, 또는 기도의 목소리만 있었으나 그 기도의 한 편에 받은 은혜의 감사가 자신의 감정을 격발시켰다면 그래서 감탄의 신음이 나왔다면 찬송의 요소가 빠졌다고 할 것인가? 기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배 시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의 모습을 다 갖추고 정한 예배 시간의 모든 요소가 다 나열이 되어져도 그 기도 속에 내용은 무속의 구복이 스며갈 수도 있고, 성경의 봉독과 설교의 강조는 이어져도 세상 정치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의 음은 높아가고 화음은 어우러져도 대속의 감사는 찾아볼 수 없고 성악가의 기술만 높이 휘날릴 수가 있으니 이런 경우는 예배의 모양은 있고 예배는 없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② 예배의 필수 인원이라는 개념도 신약은 구약과 차이

㉮ 제사장이 없는 제사는 없었으나 목사님 없는 예배는 가능

예배에 꼭 필요한 인원 꼭 순서에 담당시키는 직책이 사회자, 설교 담당자, 찬양대, 기도 맡은 분 등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너무도 고정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그 순서를 다 외울 정도이고 이런 순서에 변화가 생기면 정식 예배가 아니었던 것으로 여기는 기존 지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목사님 혼자 모든 순서를 다 맡아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실은 목사님이 빠지고 전도사님도 없어 교인 중에 한 분이 대신해도 예배입니다. 혼자 앉아 말씀 새기고 찬송하고 기도하여 예배를 드려도 예배입니다. 단순한 습관이며 단순한 인식이지 실은 정확히 예배라 할 때는 사람이 몇 명이든 담당 직책이 어찌 되었든 그리고 그 순서의 진행이 어찌 되었든 이는 예배의 본질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사장이 없는 제사가 없듯이 목사가 없는 예배가 어찌 가능하겠는가? 신약의 모든 믿는 사람은 전부가 왕 같은 제사장이요 말씀을 맡은 다 선지자들입니다. 자기 단독이 예배 드릴 수 있으며 필요하여 모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단호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예배에는 누가 없으면 안된다든지, 특별한 사람이 꼭 필요하다든지, 심지어 어느 높은 차원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것입니다.

천주교가 시작되고 교조주의가 시작될까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만인 제사장론이라는 평범한 신약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받는 것도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깊이 새겨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도 모든 신앙의 본질적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성도 일 대 일의 관계입니다. 돕는 은혜는 좋은 것이나 필수는 아닙니다.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가 좋은 것이나 목사님이 없다고 예배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대가 없는 예배라고 서부교회는 수십년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해를 하셨던 분들은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초기 건전했던 때를 몰랐었습니다. 그 큰 서부교회 예배당에 목사님 혼자 사회, 설교, 기도, 찬송 인도, 광고까지를 다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요하여 어느 다른 순서가 다른 분에게 맡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할 것은 양극단입니다. 순서를 꼭 맡겨야 한다거나 꼭 누구 혼자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예배의 필수 인원은 자기와 하나님 단 둘이며 누구도 사이에 들어갈 수 없는 관계인데 이를 변경시키게 되면 신약의 예배는 그 본질에 문제가 생깁니다.

㉯ 예배당의 모습부터 이미 우려할 수준으로 진행중

왜 예배당은 다른 건물과 달라야 하느냐? 성전이기 때문이라며 예배당 건물에 부여하는 의미가 많이 의식화되고 있습니다. 천 개면 천개, 만 개면 만 개의 예배당이 기독교 예배당의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건물 꼭대기에 표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의 법이 되었습니다. 예외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것은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신약입니다. 십자가란 건물에 올려놓은 표시로 인하여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십자가 표시가 있어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이 있는 그 희생의 생활, 그 희생의 생애, 그 희생의 행위가 있는 곳에 이미 십자가는 그어지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는 노력과 수고가 사회인들에게까지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비난이야 모르니까 자기들 수준에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말을 하든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적을 하기 이전, 예배당을 예배 보는 장소로서의 편리함과 유리함에 두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면 참으로 탄식할 교리 문제가 이어지게 됩니다.

목회자의 성취감, 과시 필요, 교인들의 회집력과 자긍심 등 여러 신앙외적인 요소들이 동인이 되고 인력과 경제 동원은 구약의 성전 건축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가? 이런 숫자가 적으냐 많으냐의 논란은 있겠으나 전혀 그런 신앙외적 요인을 배제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예배당은 거의 없다 하겠습니다. 정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예배'에 대한 인식입니다. 예배당이 치장되기 시작하면 예배의 내용은 비게 되고 예배의 내용이 차게 되면 예배당의 치장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배당을 더럽게 관리하면 저절로 예배가 예배다워지느냐는 반론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배보는 장소는 가정도 되고 들판도 되며 그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가장 편리한 곳,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곳, 예배 진행이 잘 되어질 수 있는 곳을 예배당으로 마련하는 것이고, 또 죄 되지 않으면 교회의 공동 행위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배당은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적 차원의 예배당이기 이전에 '예배'의 정의와 관련된 예배당이라면 예배 보는 곳이 예배당이지 예배당이 예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혹시 무교회주의나 모이기를 힘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오해도 있을 법합니다. 교회의 정의를 먼저 생각한다면 예배당의 문제로 무교회주의를 경계하지 않을 것이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그 차원이 예배의 정의와 예배당의 의미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배당의 모습에서부터 교회들이 인식하는 '예배'의 구약화가 위험선을 넘고 있으며 구약이 신약으로 발전되어 온 교회사를 되돌려 신약교회의 구약화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적 오류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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