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말씀이 중심된 초대교회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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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⑸ 말씀이 중심된 초대교회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
① 말씀이 새겨져야 예배의 실상인 하나님 경배가 경배답게 됨
㉮ 아는 경배라야 함
크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의 대상은 바로 찾게 되었으나 그 방법이 형식과 경건의 모양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씩 둘씩 알아가게 되면 아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그 자세가 저절로 커지고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 경배한다는 말은 없고 그런 몸짓은 없어져도 예배보는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의 높으심에 눌려 그 마음이 얼어붙듯 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하는 사람의 여러 가지 좌석 위치나 앉는 자세를 사람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만 개발되고 결국 깊은 중심에 느껴지는 중압감은 없고 외식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 우리가 어떻게 죽을 죄인이었는지, 또 오늘에도 얼마나 망령과 강퍅을 가진 인간인지를 알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표시하지 않아도 중심이 겸손해지기 때문에 경배 받으실 하나님과 경배해야 될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게 되고 이것이 참으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인격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지 않아도 죽은 자가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일 것이며, 또한 무생물이나 동식물이 예배드릴 리가 없으니 산 사람이 살아 있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은 강조할 것도 없고 재론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배란 살아 있는 우리가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그 예배라는 것이 무슨 외부의 형식이 있는 것으로 무의식인 구약적 관념에 젖은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새롭게 새기는 말씀에서 몰랐던 하나님의 다른 면을 또 알아가고 부족한 우리를 또 다시 느끼게 되고, 대속의 은혜를 다시 새롭게 알게 되면 저절로 예배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무엇을 드리는 형상을 탈피하고 진정 받은 대속의 사람이 참으로 되어가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 받은 그 은혜를 알고, 아니까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되고, 그 구원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할 자신이 되어야 할찌 알게 되고, 또 각오하게 되고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 부족한 자신을 도와 주시라고 간구하게 되고, 이러는 사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속의 사람으로 인격을 만들고 행위를 만들고 생활을 만들고 말씨까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고 그러니 우리는 섬겼고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더욱 붙들었고 우리는 이 예배를 볼 때마다 더욱 더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니 이런 실체는 엄숙의 분위기나 경건의 모양이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외부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새기는 데에서 하나님과 대속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와 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 어린 신앙이 예배를 통해 자라감은 필연적인 일
예배가 전 생활이며 전 생활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신앙이 있고 어린 신앙이 있으나 예배를 통하여 자라가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경배했고 섬겼다면 하나님과의 접촉,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결실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예배라는 섬김, 예배라는 바침의 외형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로 오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자라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닮은 우리로 점점 향상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형을 표현한다면 섬김과 예배가 되겠고 내용과 결과를 말한다면 은혜를 받는 것이며 배운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배가 바로 진행되면 어린 신앙이 모든 면으로 알아가게 되고 알아가게 되는 만큼 이전에 모르던 찬송, 이전에 못 보던 진리 말씀, 이전에 생각 못한 기도가 이어지게 됩니다.
㉰ 지식 신앙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씀이 강조되어야 함
물론, 말씀만 지나치게 강조가 되어 나머지 두 가지 요소가 무시되는 데에 이르면 곤란하겠으나 바르게 전해지는 말씀이라면 그 두 가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잘못 진행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말씀만 남아 있고 기도라는 간구와 감사의 표현이라는 찬송이 없게 되면 그 말씀은 말라빠진 고서적 책장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의 이유 감사할 내용도 모르고 찬송이라는 감정만 가진 상태에서 감정에 맞는 곡과 가사만 가지고 세상 노래에서 오는 기쁨인지 하늘로 오는 기쁨인지 모르고 찬양예배만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세상 노래 모임에서 얻는 기쁨과 교회의 찬양에서 얻는 기쁨이 같은 수준 같은 차원에까지 나갈 수 있는 기형적 신앙도 주의해야 된다고 봅니다.
기도는 감사하고 간구하고 결심하는 것 인데 기도의 형식은 성경에서 가져오고 기도하는 내용은 무당에게 자기 소망을 요구하듯 그렇게 요구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만 강조해서 기형적으로 자라게 되면 안 됩니다. 말씀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모든 것이 정상이 되리라 봅니다. 신앙은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이 있고, 아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자기에 대한 깨달음, 확신, 각오 등이 생기면서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⑹ 예배에 대한 성경 성구의 해석을 다시 한번 참고 하셨으면
① 예배는 신령과 진정
㉮ 영감을 받게 하는 것은 진리
성령에 붙들리는 영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요4:24,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신 신령은 성령에 감동된 영감의 예배를 말하며 진정은 우리 중심 우리 전부를 진정 기울인 면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이 먼저 전제되어 있습니다. 형식과 외형을 두고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한 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 마음을 완전히 붙들도록, 우리는 붙들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성령에 붙들려야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은 그 내용이 무릎을 꿇은 경건한 자세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하나님께 나를 바칩니다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형식적 표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신약의 예배입니다. 성령이 각자 속에 직접 와 계시니 그분에게 자신이 붙들리는 것이 신령입니다. 이는 다른 형식으로는 될 수 없고 자신의 진정한 참 마음 그 중심을 내적으로 다 기울어 집중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느끼고 주님 아니면 안된다는 이 절박 이 간절 이 중심이 될 때 성령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시니 예배가 '신령'하게 된 것입니다. 벌써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은 몰라도 자신이 아는 있는 힘을 다 기울인 중심 그 진심이 바로 '진정'입니다.
㉯ 그렇다면 진리를 소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가능
이 본문이 예배의 진행과 내용이 '신령과 진정'이라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이라면,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만든 설교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안내한 설교이며 그 설교는 그 설교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그 설교의 말씀 내용이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족과 주님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우쳐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부족을 느꼈고 주님을 갈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면 비로소 이것이 예배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는 방편은 여러 가지 형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꼭 어느 방법 어느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성경 봉독과 그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방법도 있겠고, 많은 말씀의 내용을 함축 정리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읽음으로 그 교리서가 설교하는 내용을 파악하면서 깨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없는 교회 목사님이 없는 예배 시간도 있을 수 있으니,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보다 더 진리의 내용 소개가 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책자가 있다면 원고로 삼아 읽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대속을 깨닫게 하고 성령은 붙들고 각자는 자기가 성령에게 붙들리는 이 교제, 이 연결, 이 접촉, 이 영감의 실상을 만들어주는 진리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대표되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은 예배의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없이 각자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며 이것이 예배의 실체이며 이 생활이 생활에까지 이어진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예배화한 성자일 것입니다.
㉰ 진리의 성령이니 진리의 말씀을 소개하는 방법은 다양
따라서 테이프나 비디오를 다시 재생시켜 말씀을 반복하여 배우고 새기고 연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오실 수 있는 그 선행의 진리 깨달음에 각성을 주고 해설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게 되면 깨닫는 성령이 역사하고 이미 영감의 교제가 있게 되는 순서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재독에 대하여 반대한 분들은 한결같이 '죽은 자의 테이프를 다시 설교 시간에 듣는 것이 틀렸다'고 하는데 이는 논쟁의 수단은 될찌라도 말은 전혀 안 되는 주장입니다. 꼭 반대를 하려면 반대하는 이유를, 죽은 자의 것이든 산 자의 것이든 재독 자체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의 산 인격체의 활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라는 표현은 다분히 감정에 치우쳐 읽는 사람에게 부정적 채색을 시도하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가 산 사람의 산 인격체에서 발원된 것이라야 한다면, 스피커 선을 통하여 이미 전류 파동의 기계적 처리로 바뀐 설교자의 음성은 인격체의 것인가? 발원이 인격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된다라고 하면, 시차 문제이지 재독 테이프의 목소리 역시 같은 이치가 적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동시적 발음이 나와야 한다고 다시 반론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 설교하는 분 자체가 없고 설교 순서가 없어도 예배는 형성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모순으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 공회의 예배관은 재독 설교가 포함될 수 있는 노선
원래부터 총공회의 예배관은 이렇게 형식보다 내용적인 면, 전체적인 면보다 개별 구원적인 면을 강조해 왔고 그 선상에서 재독 설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진 설교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실제 말씀을 새긴 사람들이 그 말씀을 새기는 과정에서 영감의 역사를 만나게 되었던가가 문제입니다.
②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설교자를 산 사람으로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몸을 말씀에 산 채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 산 제사의 “살아 있는”이라는 의미
산 제사로 자기를 드리는 각자가 된 것이 예배이지 그렇게 안내하고 소개한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니라 예배에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롬12:1-2의 말씀을 인용하며 모두들 예배를 인도하는 자, 설교자가 직접 설교를 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하지만 이는 대단한 오해입니다. 우리 사람끼리는 예배시간에 설교자 목회자 기도 대표 등등으로 이름을 붙이지만 이는 예배의 본질, 예배의 구성 요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없어도 예배 인도자가 없어도 예배가 성립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설교자란 각자가 드리는 예배에 도움을 주는 직일 뿐입니다. 구약의 제사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설교자가 산 인격으로 설교하여야 함이 예배의 필수라는 것을 가르치는 성구가 아니며 예배를 참석한 모든 사람, 그들 각자가 자기의 몸은 살아 있지만 구약의 제물이 죽어 바쳐지면 제물인 짐승이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언행심사를 할 수 없고 바쳐져 죽어 있는 존재가 되듯이 예배드리는 각자가 자기 심신을 산 채로, 그러나 죽어서 마음대로 못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하실 때 쓰여지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예배 보는 사람이 산 제물이 되도록 재독을 사용 했다면
이렇게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것이 예배를 드린 사람 각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인데 이런 결심을 주는 방법에 사용되는 것이 재독 테이프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요소에도 상관이 없고 예배의 내용에도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일 뿐입니다.
생명이 없는 피아노를 쳐서 소리가 나게 하여 찬송하는 사람에게 감사의 감정이 좀 더 커지도록 했다면 그 피아노는 생명 없는 무인격체로서 예배를 드렸다든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그 피아노를 사용하여 찬송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피아노를 앞에 놓고 머리를 숙였다면 피아노가 우상예배가 되겠고 설교 테이프가 설교자 대신 산 인격체 노릇을 했고 산 제사로 변해졌다고까지 주장을 한다면 우상예배 됩니다. 그러나 재독을 예배 보는 사람이 산 제물 되도록 도움이 되게 사용 한다는 인식으로 예배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또 성경을 이렇게 이해 한다면 재독이란 피아노 반주와 같이, 스피커를 이용한 설교자의 음성 확대와 같다 할 것입니다. 전혀 예배의 본질을 해치지 않고 여러 형태로 사용되고 도움이 되어진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설교자의 설교도 하나의 수단이고 도움일 뿐이지 예배는 아 님
산 제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데 말씀을 통해 느껴지고 이해가 되며 또 결심이 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설교자의 설교이며 따라서 설교자가 그 자리에서 직접 행한 설교가 아니라 과거 다른 사람의 설교록을 읽어주든지 아니면 테이프와 같은 방법으로 듣는 사람이 스스로 산 제사 산 제물이 되도록 설득과 이해를 촉구하게 하면 이는 예배를 예배답게 한 것일 뿐입니다. 그 테이프가 예배가 아니며 그 테이프를 틀어주는 행위 역시 예배의 필수적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테이프에 담긴 설명이 산 제물로 살아야 되겠다고 느끼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고,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앞으로 산 제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런 결심에 성령이 각자에게 개별로 역사하였으니 그 성령의 감동이 바로 예배의 내용입니다.
반대로 설교자가 설교한 설교가 예수님만 믿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공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되면, 설교자의 설교 때문에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산 제사를 부인한 그 설교 내용 때문에 그 설교는 예배로 하여금 예배가 되지 못하게 역할하였고, 그 역할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감염된 사람은 인간이 볼 때는 그 날 예배를 드린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한 그 말씀을 듣는 이가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새기는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한다면 이것이 예배의 실체인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는 말입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참석한 각자,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는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듣는 각자의 마음 속에 새긴 말씀, 그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개별 감동의 역사, 그 유무로 그들 속에 예배가 되고 안 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한 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그기 참석한 전부가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보나 하나님께서는 각자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셨는지로 예배 유무를 판단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받는 말씀이 옳고 그 말씀대로 구원을 위해서는 대속으로 사는 생활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은 자와 같이 살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① 말씀이 새겨져야 예배의 실상인 하나님 경배가 경배답게 됨
㉮ 아는 경배라야 함
크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의 대상은 바로 찾게 되었으나 그 방법이 형식과 경건의 모양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씩 둘씩 알아가게 되면 아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그 자세가 저절로 커지고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 경배한다는 말은 없고 그런 몸짓은 없어져도 예배보는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의 높으심에 눌려 그 마음이 얼어붙듯 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하는 사람의 여러 가지 좌석 위치나 앉는 자세를 사람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만 개발되고 결국 깊은 중심에 느껴지는 중압감은 없고 외식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 우리가 어떻게 죽을 죄인이었는지, 또 오늘에도 얼마나 망령과 강퍅을 가진 인간인지를 알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표시하지 않아도 중심이 겸손해지기 때문에 경배 받으실 하나님과 경배해야 될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게 되고 이것이 참으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인격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지 않아도 죽은 자가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일 것이며, 또한 무생물이나 동식물이 예배드릴 리가 없으니 산 사람이 살아 있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은 강조할 것도 없고 재론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배란 살아 있는 우리가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그 예배라는 것이 무슨 외부의 형식이 있는 것으로 무의식인 구약적 관념에 젖은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새롭게 새기는 말씀에서 몰랐던 하나님의 다른 면을 또 알아가고 부족한 우리를 또 다시 느끼게 되고, 대속의 은혜를 다시 새롭게 알게 되면 저절로 예배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무엇을 드리는 형상을 탈피하고 진정 받은 대속의 사람이 참으로 되어가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 받은 그 은혜를 알고, 아니까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되고, 그 구원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할 자신이 되어야 할찌 알게 되고, 또 각오하게 되고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 부족한 자신을 도와 주시라고 간구하게 되고, 이러는 사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속의 사람으로 인격을 만들고 행위를 만들고 생활을 만들고 말씨까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고 그러니 우리는 섬겼고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더욱 붙들었고 우리는 이 예배를 볼 때마다 더욱 더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니 이런 실체는 엄숙의 분위기나 경건의 모양이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외부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새기는 데에서 하나님과 대속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와 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 어린 신앙이 예배를 통해 자라감은 필연적인 일
예배가 전 생활이며 전 생활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신앙이 있고 어린 신앙이 있으나 예배를 통하여 자라가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경배했고 섬겼다면 하나님과의 접촉,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결실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예배라는 섬김, 예배라는 바침의 외형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로 오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자라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닮은 우리로 점점 향상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형을 표현한다면 섬김과 예배가 되겠고 내용과 결과를 말한다면 은혜를 받는 것이며 배운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배가 바로 진행되면 어린 신앙이 모든 면으로 알아가게 되고 알아가게 되는 만큼 이전에 모르던 찬송, 이전에 못 보던 진리 말씀, 이전에 생각 못한 기도가 이어지게 됩니다.
㉰ 지식 신앙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씀이 강조되어야 함
물론, 말씀만 지나치게 강조가 되어 나머지 두 가지 요소가 무시되는 데에 이르면 곤란하겠으나 바르게 전해지는 말씀이라면 그 두 가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잘못 진행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말씀만 남아 있고 기도라는 간구와 감사의 표현이라는 찬송이 없게 되면 그 말씀은 말라빠진 고서적 책장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의 이유 감사할 내용도 모르고 찬송이라는 감정만 가진 상태에서 감정에 맞는 곡과 가사만 가지고 세상 노래에서 오는 기쁨인지 하늘로 오는 기쁨인지 모르고 찬양예배만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세상 노래 모임에서 얻는 기쁨과 교회의 찬양에서 얻는 기쁨이 같은 수준 같은 차원에까지 나갈 수 있는 기형적 신앙도 주의해야 된다고 봅니다.
기도는 감사하고 간구하고 결심하는 것 인데 기도의 형식은 성경에서 가져오고 기도하는 내용은 무당에게 자기 소망을 요구하듯 그렇게 요구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만 강조해서 기형적으로 자라게 되면 안 됩니다. 말씀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모든 것이 정상이 되리라 봅니다. 신앙은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이 있고, 아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자기에 대한 깨달음, 확신, 각오 등이 생기면서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⑹ 예배에 대한 성경 성구의 해석을 다시 한번 참고 하셨으면
① 예배는 신령과 진정
㉮ 영감을 받게 하는 것은 진리
성령에 붙들리는 영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요4:24,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신 신령은 성령에 감동된 영감의 예배를 말하며 진정은 우리 중심 우리 전부를 진정 기울인 면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이 먼저 전제되어 있습니다. 형식과 외형을 두고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한 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 마음을 완전히 붙들도록, 우리는 붙들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성령에 붙들려야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은 그 내용이 무릎을 꿇은 경건한 자세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하나님께 나를 바칩니다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형식적 표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신약의 예배입니다. 성령이 각자 속에 직접 와 계시니 그분에게 자신이 붙들리는 것이 신령입니다. 이는 다른 형식으로는 될 수 없고 자신의 진정한 참 마음 그 중심을 내적으로 다 기울어 집중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느끼고 주님 아니면 안된다는 이 절박 이 간절 이 중심이 될 때 성령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시니 예배가 '신령'하게 된 것입니다. 벌써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은 몰라도 자신이 아는 있는 힘을 다 기울인 중심 그 진심이 바로 '진정'입니다.
㉯ 그렇다면 진리를 소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가능
이 본문이 예배의 진행과 내용이 '신령과 진정'이라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이라면,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만든 설교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안내한 설교이며 그 설교는 그 설교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그 설교의 말씀 내용이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족과 주님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우쳐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부족을 느꼈고 주님을 갈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면 비로소 이것이 예배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는 방편은 여러 가지 형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꼭 어느 방법 어느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성경 봉독과 그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방법도 있겠고, 많은 말씀의 내용을 함축 정리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읽음으로 그 교리서가 설교하는 내용을 파악하면서 깨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없는 교회 목사님이 없는 예배 시간도 있을 수 있으니,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보다 더 진리의 내용 소개가 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책자가 있다면 원고로 삼아 읽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대속을 깨닫게 하고 성령은 붙들고 각자는 자기가 성령에게 붙들리는 이 교제, 이 연결, 이 접촉, 이 영감의 실상을 만들어주는 진리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대표되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은 예배의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없이 각자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며 이것이 예배의 실체이며 이 생활이 생활에까지 이어진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예배화한 성자일 것입니다.
㉰ 진리의 성령이니 진리의 말씀을 소개하는 방법은 다양
따라서 테이프나 비디오를 다시 재생시켜 말씀을 반복하여 배우고 새기고 연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오실 수 있는 그 선행의 진리 깨달음에 각성을 주고 해설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게 되면 깨닫는 성령이 역사하고 이미 영감의 교제가 있게 되는 순서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재독에 대하여 반대한 분들은 한결같이 '죽은 자의 테이프를 다시 설교 시간에 듣는 것이 틀렸다'고 하는데 이는 논쟁의 수단은 될찌라도 말은 전혀 안 되는 주장입니다. 꼭 반대를 하려면 반대하는 이유를, 죽은 자의 것이든 산 자의 것이든 재독 자체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의 산 인격체의 활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라는 표현은 다분히 감정에 치우쳐 읽는 사람에게 부정적 채색을 시도하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가 산 사람의 산 인격체에서 발원된 것이라야 한다면, 스피커 선을 통하여 이미 전류 파동의 기계적 처리로 바뀐 설교자의 음성은 인격체의 것인가? 발원이 인격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된다라고 하면, 시차 문제이지 재독 테이프의 목소리 역시 같은 이치가 적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동시적 발음이 나와야 한다고 다시 반론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 설교하는 분 자체가 없고 설교 순서가 없어도 예배는 형성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모순으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 공회의 예배관은 재독 설교가 포함될 수 있는 노선
원래부터 총공회의 예배관은 이렇게 형식보다 내용적인 면, 전체적인 면보다 개별 구원적인 면을 강조해 왔고 그 선상에서 재독 설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진 설교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실제 말씀을 새긴 사람들이 그 말씀을 새기는 과정에서 영감의 역사를 만나게 되었던가가 문제입니다.
②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설교자를 산 사람으로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몸을 말씀에 산 채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 산 제사의 “살아 있는”이라는 의미
산 제사로 자기를 드리는 각자가 된 것이 예배이지 그렇게 안내하고 소개한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니라 예배에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롬12:1-2의 말씀을 인용하며 모두들 예배를 인도하는 자, 설교자가 직접 설교를 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하지만 이는 대단한 오해입니다. 우리 사람끼리는 예배시간에 설교자 목회자 기도 대표 등등으로 이름을 붙이지만 이는 예배의 본질, 예배의 구성 요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없어도 예배 인도자가 없어도 예배가 성립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설교자란 각자가 드리는 예배에 도움을 주는 직일 뿐입니다. 구약의 제사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설교자가 산 인격으로 설교하여야 함이 예배의 필수라는 것을 가르치는 성구가 아니며 예배를 참석한 모든 사람, 그들 각자가 자기의 몸은 살아 있지만 구약의 제물이 죽어 바쳐지면 제물인 짐승이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언행심사를 할 수 없고 바쳐져 죽어 있는 존재가 되듯이 예배드리는 각자가 자기 심신을 산 채로, 그러나 죽어서 마음대로 못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하실 때 쓰여지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예배 보는 사람이 산 제물이 되도록 재독을 사용 했다면
이렇게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것이 예배를 드린 사람 각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인데 이런 결심을 주는 방법에 사용되는 것이 재독 테이프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요소에도 상관이 없고 예배의 내용에도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일 뿐입니다.
생명이 없는 피아노를 쳐서 소리가 나게 하여 찬송하는 사람에게 감사의 감정이 좀 더 커지도록 했다면 그 피아노는 생명 없는 무인격체로서 예배를 드렸다든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그 피아노를 사용하여 찬송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피아노를 앞에 놓고 머리를 숙였다면 피아노가 우상예배가 되겠고 설교 테이프가 설교자 대신 산 인격체 노릇을 했고 산 제사로 변해졌다고까지 주장을 한다면 우상예배 됩니다. 그러나 재독을 예배 보는 사람이 산 제물 되도록 도움이 되게 사용 한다는 인식으로 예배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또 성경을 이렇게 이해 한다면 재독이란 피아노 반주와 같이, 스피커를 이용한 설교자의 음성 확대와 같다 할 것입니다. 전혀 예배의 본질을 해치지 않고 여러 형태로 사용되고 도움이 되어진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설교자의 설교도 하나의 수단이고 도움일 뿐이지 예배는 아 님
산 제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데 말씀을 통해 느껴지고 이해가 되며 또 결심이 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설교자의 설교이며 따라서 설교자가 그 자리에서 직접 행한 설교가 아니라 과거 다른 사람의 설교록을 읽어주든지 아니면 테이프와 같은 방법으로 듣는 사람이 스스로 산 제사 산 제물이 되도록 설득과 이해를 촉구하게 하면 이는 예배를 예배답게 한 것일 뿐입니다. 그 테이프가 예배가 아니며 그 테이프를 틀어주는 행위 역시 예배의 필수적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테이프에 담긴 설명이 산 제물로 살아야 되겠다고 느끼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고,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앞으로 산 제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런 결심에 성령이 각자에게 개별로 역사하였으니 그 성령의 감동이 바로 예배의 내용입니다.
반대로 설교자가 설교한 설교가 예수님만 믿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공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되면, 설교자의 설교 때문에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산 제사를 부인한 그 설교 내용 때문에 그 설교는 예배로 하여금 예배가 되지 못하게 역할하였고, 그 역할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감염된 사람은 인간이 볼 때는 그 날 예배를 드린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한 그 말씀을 듣는 이가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새기는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한다면 이것이 예배의 실체인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는 말입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참석한 각자,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는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듣는 각자의 마음 속에 새긴 말씀, 그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개별 감동의 역사, 그 유무로 그들 속에 예배가 되고 안 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한 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그기 참석한 전부가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보나 하나님께서는 각자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셨는지로 예배 유무를 판단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받는 말씀이 옳고 그 말씀대로 구원을 위해서는 대속으로 사는 생활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은 자와 같이 살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