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진리전원일치
서기
■상세소개
0
26
2023.03.13 21:24
3. 진리전원일치
총공회신앙노선은 그 운영의 첫 원리가 ‘진리전원일치’입니다. 모든 교리뿐아니라 모든 행정 사항까지 전원일치가 아니면 결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에 대하여 공회 안팎의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것이 현실 교회에서 시행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 존립 하려면 전원일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또한 지켜질 수도 있기 때문에 공회는 그 행정 원리의 3가지 기본 원칙 중 첫째로 이 원칙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성급한 선입관
총공회 교회 내에서조차 거의 모든 분들이 전원일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천국에나 가서 할 일, 천국에서나 될 일'이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한적도 있습니다. 총공회 내부 교인들 중 90% 이상의 교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10% 정도의 교인들은 일단 발언에서만큼은 전원일치는 가능하며 또 그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내에서도 ‘전원일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들이 10중 9요, 찬성하는 분들이 10중 1이라는 말입니다. '9 대 1' 이라는 분포는 수학적 표현이 아니라 강조의 표현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전원일치를 지지하는 10% 정도의 공회 내부 교인들도 사실상 백목사님이 가장 강하게 주장했던 점을 고려 그분을 존중하는 자세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정도입니다. 이 ‘전원일치’ 원칙은 우선 그 이해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너무도 확고한 선입관념 때문입니다. 알고보면 전원일치라야만 하고 또 실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2) 필요성
① 개인의 자유성 보장
② 신앙의 단체화 과정에서 확보해야 할 자유성
③ 교회의 단체 속화를 막는 방법
④ ‘양심자유’ ‘교회자유’ 원칙의 필연적 결과
⑤ 오늘 교회의 극단적 탈선의 방어책
⑥ 교회의 진정한 모습
3) '전원일치는 교회 행정의 본질'
① 자유성의 행정
다수결로 결정을 짓는 것이 인간 수준의 세계에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며 가장 상식적인 방편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정상대로 움직이는 사회라면, 다수결이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어느 특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형상 중에 자유성을 주셨고, 이 자유성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세월 속에 타일러 가며, 보여줘 가며, 스스로 알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했습니다. 역사 6천년이 흘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한 인생이 평생을 살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자유성입니다. 교회 행정은 효율성을 생각 한다면 다수결이 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자유성이기 때문에 전원일치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되 기계를 제작하듯, 높은 산을 만드시듯 우리를 상대하셨다면 천국만 만들어 천국으로 바로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신성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여러 과정 여러 세월을 주시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시려고 각양 각색의 섭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직접 하시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시고,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인간 혼자 하도록 하나님은 숨어 버리시는 등 각양 각색의 오묘하고 신비롭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자유성입니다.
순간이면 다 될 일을 이렇게 역사 세계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평생 세월 속에서 한 인간 인간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이제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하나님 대신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움직이며 영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처음이며 나중입니다. 하나님 대신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노릇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 자유성이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합격 자체가 문제라면 전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답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해결하는것만 문제라면 전능자가 해결해 버립니다.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물어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스스로 요청하고 그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구하여 힘을 받는 이 인격, 이 실력, 이 훈련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천국까지 맡길 수 있습니다.
천국 자체가 문제라면 천국만 만드시고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됩니다. 타락이라는 순서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유로 원하여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려 한다면, 기계가 아니고 컴퓨터가 아닌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려 한다면 그 본질은 바로 '자유성'이며 따라서 이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찾게 하는 그 과정이 역사 교회, 교회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② 자유성으로 기르는 데는 세월이 필요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했습니다. 가나안에 넣는 것이 목적이면 순간에라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여 도우심을 받는 이 경험 이 실력 이 인격을 길러 가시려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연기시켜 놓고 광야에서 수없는 반복으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무지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하는 방편이 두 가지입니다. 기계처럼 제작하여 인간을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하나 있고, 하나는 자유성을 주셔서 그 자유성을 죽이지 않고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가능한 방편 중에 하나님은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방편은 세월과 노력이 첫번째 방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③ 옳은 것을 찾는 과정이 문제
교회의 결정이 다수결로 된다면 이쪽편의 생각에 따라 저쪽편에 있는 사람들은 원치 않는데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교인의 자유성, 그들의 자라가야 될 신앙을 고려치 않고 이렇게 한 쪽이 혼자 독단해 버리는 경우, 비록 그 결정이 옳았다 해도 그 방편이 다른 사람, 다른 교인들의 신앙을 자유성을 가지고 자라가도록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그들의 자유의사로 동참하고 이해가 되어 따라 오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결정은 가나안 입성만 알았지 광야 40년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원일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원일치란 이 땅 위에서 사실상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수결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에 이르는 과정의 내용이, 하나님으로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게 되어졌느냐? 이 기준으로 과정을 분석하고 평가하게 된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중에서 단 두 명이 통과했을 뿐입니다.
가나안 입성은 주님의 대속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중생이 되는 순간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가나안 입성이 목표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그 과정이 목적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그 과정, 그 동행의 강도가 바로 각자마다 다른 건설구원의 내용입니다. 힘들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하도록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마지막 안되면 안 된 그 자리에서 끝내고 말아야 하는 것이 자유성을 가진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전원일치라는 것은 상대방이 무지하여 무조건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혹 한쪽이 너무 강하여 반대쪽이 억지로 머리를 숙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원일치는 이런 두가지 형태로 시행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원일치는 문자적 전원일치는 되었을찌라도 성경이 말하는 전원일치는 아닙니다. 만일 무지한 사람에게 맹점; 요구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힘으로 눌러 전원일치를 만들었다면, 세상은 이를 독재라는 수준에서만 욕하겠지만 실은 '자유성'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무지한 이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알려 주어서 그들이 알게 되고 이해가 될 때, 알게 된 지식으로 이제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진 다음 진정한 전원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반대하는 이들을 힘이나 회의 기술로 눌러서 전원일치로 만드는 것은 점령이지 양육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을 배제하고, 반대하는 그들 속에 그 지식과 그 옛사람을 회개하도록 여러 과정을 거쳐 스스로 돌이키게 하고 그 결과로 전원일치가 되어야 이것이 전원일치인 것입니다.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며 거의 실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된 것만큼이 바로 건설구원의 양입니다. 100% 성공, 100점을 다 맞는 사람이 없다면 백지를 낼 것입니까? 50점짜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어린 신앙의 그 중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자유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의 자유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렇다면 일이 생겼을때 해결에 가치를 둘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자유성을 어떻게 반영했는지에 가치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의 행정만은 효율성 보다 좋아서 따라야 하는 것
누가 자유성을 꺾고 강제로 하자는 말을 쉽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좋아서 따르는 그런 결정을 하자는 말을 누가 쉽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좋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행정은 효율성과 다수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적절히 절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 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 또는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 좋겠느냐 등 어떤 중대한 문제라도 결국은 다수의 생각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렇게 결정했을 때 과연 얼마나 득을 보겠느냐는 것을 계산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을 수는 없고, 또 100% 이익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⑴ 교회의 행정은 실제로, 자유성과 함께 전원일치로 갈 수밖 없음
교회의 행정만은 한 사람의 반대라도 그 반대를 꺾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전원이 찬성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율성이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의 횡포에 거대한 교회와 교단이 할 일을 포기하고 전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극단적 이상주의 극단적 이론주의를 실제로 교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① 살아 있는교회라면 나뉘어지고 갈라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교회 분리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말하는 것이며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로 예를 들어보면 쉬울 듯 합니다. 분리가 없고 분파가 없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생명이 없는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나 세상이 조롱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분파가 많습니다. 핵분열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옳은 것을 사람의 숫자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연구 과제로 미루면 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문제는 당장 결정하여 시행치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깨닫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가 되고 분파가 되어도 꼭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누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파 그 자체를 가장 큰 죄로 보고 분파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주장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파 자체보다 양보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결국 서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주님 안에는 이 파와 저 파가 있지만, 한 몸안에도 여러 지 체는 존재
많은 분들이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는데 왜 이 파, 저 파가 있어 분요하냐고 합니다. 그분들도 또 하나의 파가 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세상 이권 때문에 나누었다면 이는 분명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속에 감추어 놓아야 할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추어 놓은 것을 들여다 보며 정죄를 해야 하겠습니까? 본인이 세상 이권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까지 한다면 그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내심을 감추어두고 밖으로는 이 말 저 말로 명분을 진열한다면? 경찰이 수사를할 수도 없는 일이며 고문해서 밝힐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듣고 말 일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는 정죄할 일이 있다 해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행위를 그 사람 자체에게서 분리하여 잘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사람 자체를 복구불능으로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지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분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인데 깨닫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깨달은 분들과 저렇게 깨달은 분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분리를 하고 분파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한다면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읽고 연구해도 침례가 옳으며 세례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분리 불가를 내세워 침례와 세례를 섞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섞어도 되고 안 섞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런데도 분리를 한다면 그때는 분리의 폐단을 지적하여 막아야 될 것입니다.
교회의 운영을 모든 교인에게 일일이 확인시킬 것 없이 대표를 뽑아 대의정치 혹은 의회민주주의로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장로교인들이 옳다고 깨달은 대로 믿고 나가는데, 그 깨달음에서 볼 때 틀렸다고 느껴지는 침례교 정치나 감독교회 정치로 섞으라면 되겠습니까? 자기 욕심, 버릴 욕망, 명예 등등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은 몸된 교회를 나누는 참으로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가라는 길을 따로 보여주신다고 확정이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은 태아의 초기 시절 분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반대하고 두팔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린다면 기형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왜 틀렸느냐, 왜 나누었느냐, 왜 깨닫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르냐는 문제를 가지고 한 사건 한 행동 자체를 먼저 파악한 뒤, 거기 대한 잘 잘못을 따질 일이지, 나누었다는 그 자체를 가지고 무조건 틀렸다고 해 버린다면, 교인 통일 교회 통일 교단 통일의 단계를 거쳐 결국 종교 통일까지 진행될 가장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옳은 것과 진리는 구호로만 앞세워 놓고 자기 주관의 착각 또는 세상 이권을 위해서 분리해 간다면 종교 분리, 교단 분리, 교회 분리, 교인 분리까지 진행을 하다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 그 자체를 해부하는 죄까지 진행할 것입니다.
③ 주님 안에는 하나밖에 없으나, 찾아가는 과정에는 시행착오 가 존재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주님 안에는 옳은 것이 하나입니다. 녹음으로 예배 설교를 대신하며 은혜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한다면, 진정 성경과 양심으로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있는 힘껏 반대했던 분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돌이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진정 죄라고 느끼면서 분리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우상예배라고 느끼는 예배 참석을 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우상예배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예배라고 깨달았으면 우상예배가 아니라는 예배로 자기들만 예배를 분리해서 보고, 재독예배가 은혜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은 또 그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한 쪽이 양보하면 좋고 양쪽이 다 양보할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누어 예배를 분리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배당을 양보하고 누가 분리될때 유리하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돈 싸움이며 욕심 싸움일 뿐입니다. 녹음 설교를 예배시간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양보를 못하겠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주도권 문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대개가 세상 투쟁입니다.
어느 쪽이든 시행 착오는 있다고 우리는 단정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이 한 자리에서 성령과 악령으로 교차 되었으며 이런 횟수는 하루 490번이라도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계산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쉽게 결정하고 쉽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편으로 옳다고 생각되지만 열 번 백 번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신중 하다는 장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단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두는 단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장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자체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전원일치라는 교회 행정 면을 두고 말한다면, 매사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인격입니다.
분리가 되어도 끝까지 밀고 나갈 깨달음인가? 당시로는 꼭 그렇다고 해서 했지만 세월 속에 다시 생각해 볼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알고 조심을 하든, 한 두 번의 실수를 경험으로 그렇게 알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있게 연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누구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를 통해 그를 기르시는지 또는 그의 잘못 자체가 필요해서 그렇게 동원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이 옳다고 진행하는 것을 힘으로나 다른 기술을 동원하여 내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진행과 나의 깨달음이 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면 양보와 희생이라는것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⑵ 전원일치를 주장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함
교회내에서 의견이 다른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예로 든다면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경우 예배당 건물이나 교인 숫자를 확보해야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투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투쟁은 결국 혈육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문제이며 전원일치의 자유성이 교회 행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결국은 다 내주고 포기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환하게 단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뺏겼다고해서 뒤에 후회한다든지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현장에서 전투를 하고 후회해야 회개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갈등이 있는 곳마다 결국은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이면 성전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어야 했고, 신약은 내 속에 성령이 물러나실까 염려하여 건물과 교권과 돈을 양보하고 그대신 자기 속에 성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수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오물을 보고 좋아서 먹고 사람은 먹어주는 개를 보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권에 굶주린 사람은 혈육전을 통해서라도 교권과 건물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성령을 붙들고 싶은 사람은 성령을 붙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권보다 여러 배 혹은 백 배까지 되갚으실 하나님을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자기 좋아하는 것을 가지게 되어 있고, 서로 자기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5) 세상 점령법을 쓸 수 없기 때문
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
끝까지 서로의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은 법이 있고 강제 집행이 따르게 됩니다. 감옥에 보내며 경찰이 진압을 해버리면 됩니다. 교회에서 서로 의견이 끝까지 다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 우리에게는 혈과 육에 대한 권리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부처 믿는다고 절로 가버린다면? 막을 수 없습니다. 설득으로 돌아서면 되지만. 교인이 연보를 하지 않는다고 회원권을 회수할 수 있습니까? 두고 볼 일이지 회비 징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출교를 명했는데 그 출교 처분이 잘못되었다며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이라면서 교회를 출석한다면 대문에서 멱살을 잡아내겠습니까? 결국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신앙의 본질입니다.
② 결국 영의 사람은 말씀을 차지하고, 육의 사람은 예배당을 차지하게됨
만일 횡포자 폭행자가 교회를 차지하면 어쩌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교인으로서 만일 그렇게까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 교회는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 교회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한 두 사람의 횡포에 교회를 넘겨 줄 것인가, 절대 다수를 확보한 쪽에서 예배당을 정말로 넘겨 줄 것인가? 물론 그 한 두 사람의 횡포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우선 조사할 일입니다.
신앙노선 문제가 아니라 공연히 술 한 잔 먹고 난동을 부리는 차원이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제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노선 문제로 시비가 생기고 그 극단의 투쟁이 뒤 따르고 이를 막는 일은 혈육전밖에 없다면 결국 택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혈과 육을 경계하고 말씀 하나의 가치를 우주보다 크게 보는 사람은 말씀을 새겨 할 일이 있고 못할 일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0년을 한 예배당에서 서로 주도권을 위해 싸운다면 이는 혈과 육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말씀을 새기고자 하는 측은 먼저 개척을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교인이 아닌데 세상 사람으로 재산권을 침해하고 예배를 방해할 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신 대로 경찰과 법원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저항주의가 아니며 우리는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교인이며 성경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목적 어떤 흉악함을 가졌을지라도 그 사람과 혈과 육의 싸움은 피하고 기도로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면 감사히 받고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으시면 넘겨주라는 말씀인 줄 알고 동일한 감사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 많고 또 구체적인 여건에 따라 그 결정이 천차만별이지만 원리만 가지고 말하면 이는 단호합니다. 따라서 채찍으로 성전 안에서 휘두를 때가 있고,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혀도 말 한마디 못할 때가 있어야 신앙입니다.
③ 따라서 교회의 치리 제도 자체에 근본적 수정이 필요
교회가 교회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세워둔 법을 이용해서 적법 절차에 의한 악행을 일삼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역사가 실제 그렇게 하여 왔으니 결국 교회법은 하나의 선언적 교훈으로 몇 가지만 제시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고 실제로는 바로 믿도록 노력하고, 하다가 안되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교회가 힘쓸일은 바른 복음을 양보하지 않고 혼자라도 끝까지 믿음 지킬 일만 해야 합니다.
현 교회법은 교단에 상관없이 치리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재판소를 두고 있습니다. 중세 천주교는 화형까지 시켜 버리는 힘이 있었지만 기독교는 그런 권리를 줘도 버려야 하고 또 그런 권리를 가질 수도 없는 교리를 가졌습니다. 현 교회의 치리 제도는 세상 재판소를 배껴 놓은 것이라 보면 될 만큼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교회의 의회민주제와 함께 교회의 치리 제도가 근본적으로 수정될 때가 되었습니다.
현재 교회는 그 모든 결정을 교인들이 뽑은 대표들이 다수결로 확정하고, 그 집행에 반대하면 교회 법정이 이를 강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과 집행은 상대방의 의사를 꺾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허공을 향한 것일 뿐입니다.
우선, 말 몇 마디로 교인의 다수나 대표의 다수를 자기편으로 바꿔 놓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교회의 집행은 자기편 주먹이 많으면 결국 주먹을 따라 가지 법을 따라 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법은 서로의 생각이 결국 다를 때 최종 판단의 기준이며, 법정은 그 집행 수단인데, 그 법과 그 집행 자체를 교회는 주먹으로 해결해서 안되며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원칙적 방향을 선언하는 정도에서 끝내야 합니다.
④ 결론은 세상 점령법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전원일치의 결 정 외에는 생각할 수 없음
해방 후 고신이 자신들은 진리를 지킨 쪽이고 따라서 무슨 일을 해도 자신들이 한 것은 옳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들과 신사참배를 승리한 의인들이 소송이라는 죄와 폭력이라는 죄를 꼭같이 사용했고 교권과 돈을 위해 싸울 때도 꼭 같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승자는 악령이었습니다. 신사참배 환란으로 한국 교회를 대부분 거머쥐고, 해방 후 그 나머지 신사참배 승리 쪽을 점령하였습니다. 고신은 자신들이 사선을 넘은 승리자라고 안심했었는데, 바로 그 지점에 설치된 덪에 걸릴 때는 걸린 줄도 몰랐습니다.
교회는 교회에 발생되는 모든일을 두고 전교인이 결국은 전체가 이해되기까지 늦어지고 차질이 생겨도 타이르고 권하며 서로가 기도의 제목으로 정해놓고 한 건 한 건 처리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이상에서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바로 마귀의 것이 되어 버립니다.
6) 오늘 교회의 단체 속화가 기술적으로는 전원일치 부재 에서 기인합니다.
이제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면 전원일치라야 하겠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현실 교회의 운영은 다수결이 아니고는 실제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전원일치와 다수결을 살펴 보겠습니다.
① 다수결로 결정하다 보니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의 교리로 등 장
세상도 웃을 일입니다. 윤회사상이 불교 교리라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되듯이, 교회가 하나님 유일주의라면 일본인이 신으로 받드는 태양신에게 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모든 일을 다수결로 결정하다 보니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총칼이 무서워 그러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교회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총칼이 사라진 해방 후까지도 결국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이들이 오늘까지 한국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한국 교계의 대표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정죄하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되는 정도입니다.
성경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안 믿고 싶은 사람을 믿고 싶은 사람이 다수결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해봐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가 옳다는 교인이 많다고 해도 세례가 옳다는 소수를 표대결을 통해 그들의 세례를 버리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을 목사 장로로 안수해야 된다는 목표를 위해 여성계가 꾸준히 노력했고, 결국 과반수를 확보하여 통합측 교단은 여성 안수가 교리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여성 안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 교리였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대로 바로 믿는 생명길, 그러나 좁은 길은 사람이 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넓은 길, 사망길로는 가는 사람이 많으니 결국 교회는 속화 타락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넓은 길이 체질인 사람만이 아니고 좁은 길을 가야 하는 사람까지 데려가는 법이 다수결입니다.
② 다수결이 되다 보니 세상 선거와 교회 선거가 같아짐
교회가 떠나고 초월할 것이 본토 친척 아비집인데, 본토 친척 아비집의 표를 모아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교단 선거에 '선거 관리위원회'가 있어야 하고, 사전 운동 금지 기간이 있으며, 부정 선거 방지책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대의원들이 묶고 있는 호텔이나 여관에 후보자들이 방문하면 안된다는 규제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부정 선거였다고 법원에 '무효 처분'을 내려달라는 소송이 진행되는 정도입니다.
③ 교회는 의회민주주의 정치로 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문제
한국 국회나 정치가 엉망인 것은 제도가 아니라 민족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이며 또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까지 합니다. 그러나 밖으로 표시가 났느냐 안 났느냐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신사적 모습으로 포장을 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영미 선진국이라 보면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만이 교회가 연구할 일이며 이것을 찾은 이가 어린 아이하나일찌라도 옳은 그것을 전체가 따라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서로가 옳다는 것이 다르다면? 기다릴 뿐입니다. 서로가 토론할 뿐입니다. 해봐도 결론이 꼭 같아지면 눈을 밝혀 바른 것을 알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기도를 해도 꼭 서로 의견이 옳다고 확신이 들면? 또는 목적을 두고 억지를 끝까지 부린다면? 그 결정은 미루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루는 것이 한쪽에 유리하니까 계속 반대 의견을 낸다면? 불리해도 서로의 확신이 일치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다 교회가 마비되고 더 이상 교회가 유지가 될 수 없는 최종에 이르면? 서로 교회를 분리해야 합니다.
교회 분리를 장난으로 알아도 큰 죄가 되겠지만 교회 분리는 예수님 몸을 분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국교로부터 청교도가 미국으로 분리 이주한 것은 발전이요 성장이지 멸망을 위한 분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안이 생긴다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나 역할이 달라서 그러한가? 이런 과제로 보이는 예배당을 분리하는 문제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7) 교회의 모습은ꡐ전원일치ꡑ
① 전원일치라는 과정을 가져야 오류도 수정할 수 있음
재론되는 말이지만, 교회는 다수결로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원일치가 되어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지라도 전원일치제라면 한 사람의 이의와 한 사람의 수정제의로 교회의 결정을 다시 한번 과제로 올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다수결 역시 그럴 수 있지만 기준 숫자 이상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으로 교회를 위기 때마다 구원했던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생각한다면 다수결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② 중요한 발언은 한 사람을 통하여 나옴
우리는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할 때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 전부를 살린 경우를 늘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또 하나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란 항상 옳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엘리야 한 사람으로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라는 사람에게는 항상 옳고 바른 것이 전달된다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혼자서 택한 백성 전부를 책임졌던 1인 절대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이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썼기 때문에 그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고 이 땅 위의 인간이란 누구든지 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십자가상에 있던 강도도 옳게 깨달아 그 순간에서 옳은 의인이 될 수 있고, 노아가 홍수 심판을 이기고 완전 승리를 했던 그 자리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역사라는 점까지를 고려하라는 것이지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영원 불변 완전을 맡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③ 투쟁과 분리보다 연구의 확신이 분화를 가져와야함
교회 갈등의 대부분 모습이 투쟁이며 그 투쟁의 결과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어느 것이 옳은지를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고 확신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 결과가 같으면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았으니 큰 성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다르면 그리고 그 결과가 다른 상태로는 한 예배당을 운영할 수 없다면 각자에게 주신 역할 맡기시는 사명이 달라서 그러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집에 7남매가 한 솥밥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씩 결혼해서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투쟁과 분리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분화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오히려 성장일 수 있고 더 넓은 범위로 복음을 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척과 모든 교회 분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개척과 분화를 가장하여 자기 사업을 도모하는 교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며,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최종 결정을 한 뒤에라도 또 돌아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그 열심 그 충성, 그 계속성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 천주교가 세계적 단합과 일사분란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싸움만 있는 기독교계를 조롱하며 천주교는 화평의 봉사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가 수도 없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여 이루고 확보한 재산과 교권을 가졌을때 이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문명시대가 되고 보니 이미 벌어놓은 돈으로 폭력배들이 합법적 회사를 운영하여 변모한다는 세상뉴스와 같은 수준에서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추한 모습, 분명히 교회의 추한 모습은 예배당을 두고 싸우는 극단적인 투쟁들이지만, 그 흙탕물 속에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고 전 인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으려는 그 중심이 지극히 미약하나 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꼭 같은 사람으로 보지만 그 속에 그런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원일치라야 합니다.
8) 세상 대법원이 교회는 전원일치를 하라고함
세상 말은 듣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우리 신앙노선입니다. 그들이 옳고 그들이 틀렸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며, 신앙의 옳고 그른 것은 믿는 사람이 성경으로 서로 살펴 찾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여담이 되겠고, 좋게 보면 참고할 자연계시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교회가 신앙 문제로 싸워 법정으로 오면, 최점G 판단은 교인끼리 전원일치로 합의를 하라 합니다. 그 합의 없이 무슨 교회법으로 무슨 교회 회의로 교단 지원을 어떻게 받아서 주장 한다 해도 결국은 세상 법원이 교회 문제는 전원일치로만 하라면서 빠져 버립니다.
혹 질서 유지가 안되는 문제 등은 임시 조처만 해 줄 뿐입니다. 정상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면 세상 법원도 이렇게 말하는 정도입니다.
9) 장로교회 헌법 정신 제1조와 2조가 말하는ꡐ신앙자유 ꡑ는 전원일치에서만 가능
교회라면 헌법이 있고, 헌법에는 근본 원리가 있습니다. 장로교 헌법원리는 제1조에 '양심의 자유'를, 제2조에서 '교회의 자유'를 선언하는 바, 교단 헌법의 각론이 이 '자유성'의 원리를 반한다면 그 규정은 원인무효가 됩니다. 이 두 가지 자유가 실현되려면 '전원일치'라는 의결 과정이라야 한다는 것이 총공회의 입장입니다.
⑴ 장로교 헌법 원리 제1조와 제2조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① 헌법 규정 소개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인류는 종교에 관계되는 각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중생된 신자의 성경적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합니다.
제2조 '교회의 자유', 전조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한 예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습니다.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함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② 헌법 규정 내용과 역사
누구든지 신앙생활에 대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박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 '개인 양심의 자유'이며, 따라서 교회도 교회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며, 실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는 성경 원리들입니다. 초기 건전했던 천주교가 1천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양 불교로까지 타락하게 된 이유는 잘못된 교리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를 반대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유가 아니고 신앙은 강제라는 기본인식이 천주교를 천주교로 만든 가장 최종 범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각론적으로 전부 바로 잡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이란 '신앙 자유'가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면을 가장 강하게 표현한 것이 장로교 헌법 초두 1조와 2조에 '신앙 자유'를 헌법 근본 원리로 채택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 자유를 막는 교회법은 위헌 규정이 되어 원인 무효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종교개혁 후 영국에서도 상대편의 깨달음을 칼로 제거할 수 있는 국교가 있었고 결국 미국으로 밀려나온 청교도의 출발 이념은 신앙이란 칼로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우리나라를 선교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뼈아픈 역사를 한국 교회 헌법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전원일치가 아니면 장로교의 '신앙 자유' 원리는 파기된 것
서로의 깨달음이 같으면 교회는 매사에 문제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 신앙양심에 옳은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깨달음이 다른 경우는 어찌 되겠는가? 내 생각에는 분명히 틀린 것인데 그것을 옳다는 사람이 많아서 끌려가게 됩니다. 양심에는 싫은데 환경이 나를 강제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신앙 자유'의 근본 정신입니다. 그러나 현 장로교 헌법은 교인이 자기 양심에 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 행정의 효율성을 앞세워 양심과 반대되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노회가 여성 안수는 비성경적이라는 양심을 가졌더라도 다른 노회들이 성경적이라는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 결국 양심에 반하여 자기 노회 안에서 여성 안수를 시행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거부하게 되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꼭 여성안수를 해야 양심인데 다른 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안해야 옳다고 하면 못합니다. 기어코 해버린다면 제거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제재를 하겠다면 제재를 당해야 합니다. 자기 교회와 노회, 그리고 자기 교단 전부가 여성 안수를 안 하는 것이 성경에 옳다고 결정했다면, 그런데 나 한 사람만 이 여성은 장로로 장립을 해야겠다고 양심에 느낀다면, 결국 못하게 됩니다. 신앙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꼭 막을 수 있다면 그 교단은 천주교로 삐뚤어져 나갈 수 있는 요소는 이미 갖췄다고 봐야 합니다.
⑵ 진정한 '신앙 자유'는 전원일치라는 결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요구
① 서로가 달리 깨달았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수결제도에서는 찬반의 기준만 다를 뿐이지 결국 소수의 반대를 누르고 다수가 그 뜻을 세워나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물론 누른다는 말에 이의가 많을 것입니다. 누른 것이 아니고 이해한 것이라, 양보한 것이라, 양해한 것이라, 승복한 것이라는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해보면 포기한 것이라, 점령당한 것이라,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표현들도 가능합니다.
결과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같습니다. 양심에 틀린 것을 다른 사람들 때문에 하게 된다면, 자기가 좋아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신앙양심 자유'라는 장로교 헌법 원리에는 어긋난 것입니다.
② 전원이 찬성할 때 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
세상과 다른 것이 교회라고 한다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때를 정치면으로 예를 든다면 '전원일치'의 결의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찬성하고 자신들의 신앙 양심에 옳다고 느낄 때에 일 처리를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을 살리는 일입니다. 또한 교회에 다른 모순과 투쟁이 아예 발을 붙일 수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쁘게 처리할 일이 있을 때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되고 그리되면 비현실적인 말 장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쁘게 처리할 일이 실은 없습니다. 특히 반대하는 사람 양심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 해치워야 할 성격의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면 맞을 것입니다. 예배 보는 자리에 불이 났다면 그 불을 끄는 일이야 의논할 성격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다 타서 예배 볼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고 시급히 예배당 건축을 의논해야 하는 경우는 어찌 되겠는가? 꼭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반대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비록 한 사람의 양심이라도 그 양심을 꺾고 빨리 전 교인이 예배 볼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그렇게만 가질 것이 아니고, 예배는 예배당이 없어도 볼 수 있으니 예배 보는 장소가 불편하고 차라리 양심을 꺾지 않는 일이 교회의 운영 원리를 아는 사람이며 장차 더 큰 위험요소를 미리 막는 지혜라고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한 사람의 반대 때문에 예배당 건축이 계속 미루어지겠는가? 더 어린 교인 새로 전도된 사람의 구원 문제는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연기가 되면 좁은 고집으로 반대했던 사람이라도 대개는 입장을 철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획 단계에서 자기 주관으로 고집을 부리던 사람이라도 다른 전체가 강제로 밀지 않고 기다리며 불편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불편을 느끼게 되면 결국 자기 주장이 바뀌게 되는 경우가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복음운동을 고려치 않고 막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래도 강제로 진압할 수는 없는 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그렇다고 그 한 사람으로 전체가 다 묶인다면 어찌 그를 방치하겠는가?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강제할 수도 더욱 없습니다. 이곳은 교회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집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일반 집단의 최후 강제집행과는 아주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힘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확인도 되지 않는 강제력, 이것은 교회 이외의 집단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우스워 보이고 가장 신화로 보이며 하나의 핑계거리로 보이는 것, 기도가 바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며, 어떤 세상 무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주친 교회 행정, 교회 사건에서 이 기도를 참으로 큰 강제력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진정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기도에 대하여 설교하고 남에게 가르칠 때는 기도가 이런 것이며 저런 것이라고 수없이 외쳤습니다. 정작 교회에 생긴 교회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어떻게 표결처리를 유리하게 해 볼까 하는 일로만 골똘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요, 그 현실을 수습해주고 그 현실을 지원하느라고 교회의 헌법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③ 기도를 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기도를 해도 안된다면 그렇다면 이제 인간 강제력이 마지막으로 나가야겠는가? 최점8로 나가는 힘, 그것이 그 집단의 속성입니다. 기도가 최점L며 최강의 권위라면 교회일 것이고, 법정의 재판장 판결이 마지막 권위요 해결이라면 문명 불신자일 것이고, 경찰의 진압봉이 최후 진압을 하였다면 이는 미개인일 것이며, 군대가 출동하여 사살로 평정한다면 이는 교회를 적국으로 본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수단에 마지막 해결을 호소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기도입니다. 혈과 육의 싸움은 신약교회가 싸울 싸움이 분명히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인간 문제를 가지고 가라고 존재한 것이 교회라고 보는 사람,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의 구호에서 써먹고 실은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실력껏 하겠다고 한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고 그 일을 막으러 다닐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⑶ 전원일치는 좋은 이상입니다. 현실로 만들려면 그 대가는 끝없는 희생
① 반대측과 은혜로운 결론을 가질 수 있는 최상의방법
첫 깨달음은 서로가 다를 수 있고 또 대개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실수가 많고 심령이 어두운 사람이 심령이 밝은 사람보다 휠。 그 숫자가 많은 것이 오늘 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깨달음 중에서 가장 옳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찾는 것이 교회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원일치라는 의결법이 옳은 것을 찾아 나가는 방법으로서도 가장 유리하다고 봅니다. 상대방을 강제로 꺾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고 조급하게 실수하는 일들이 줄어들 것이고 또 반대되는 의견끼리라도 연구 과제로 접근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게 된다는 조건이 있다면 상대편이 어느 유리한 시점을 택해서 어떤 의결 규정을 사용하여 나올지 모르게 되고 이런 문제로 경험 많은 교회들은 세상 정당들이 싸우는 싸움을 교회로 전부 옮겨놓고 있습니다.
② 그러든 말든 끝까지 세상 잇속을 챙기고 자기 주관을 고집하 겠다면,
기도로 노력하고 모든 대화로 힘써도 안된다면 결국 신앙 있는 쪽이 포기하고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예배당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수십 수백억짜리 예배당이나 교단 재산이 걸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 액수는 얼마에 해당이 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황무지를 택했을 때 복으로 갚으심을 안다면, 그것을 믿는 것이 교회라면 당연히 그리 하게 되어 있습니다.
③ 말로는 간단한 것이 전원일치 현실이 되려면 다 내놓은 것 이 기본
결국 기독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가 칼로 망하기 때문에라도 칼을 쓰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차지하고 세상을 포기하라고 하시니 장사 계산에서라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심까지 하셨다면 그 제자로 나가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라면 진리를 잡고 세상을 다 포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 정도의 신앙은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첫 출발에서 가르쳐야 하고, 아무리 어려도 예수 믿는 교인이라면 이것이 기본적으로 되어져야 교인다운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교회 투쟁을 해결하는 근본 방법일 것입니다.
이것이 총공회신앙노선입니다.
그렇게 배운 것이 총공회 교회들이라면, 또 그렇게 가르친 것이 백영희목사님의 특별하다는 교훈이라면 그러면 왜 총공회 교단과 교회들은 다른 교단 교회들처럼 분규로 10년을 보냈느냐는 비판으로 이 전원일치 행정을 요약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총공회는 이 면을 미리 배웠고 따라서 어느 교단 어느 교인들보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과정이 아주 특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교훈이 틀려서가 아니고 교훈대로 하지를 않아서 생긴 문제이며, 교훈대로 하지 않은 것은 실수나 몰라서가 아니고 알면서 고의로 죄를 짓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거두는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전원일치 신앙을 배운 사람으로서 다른 교단과 같은 불상사를 반복하는 것은 그 심판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나타날 것이고 이 면 때문에 총공회에 소속된 교회와 교인들의 불행이 참으로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을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요약한다면, 기독교의 본질은 분명히 전원일치의 과정으로 교회의 모든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히 성경적입니다. 전원일치가 아닌 의회민주주의 식의 다수결 처리는 세상이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라는 고정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10) 전원일치로 결의된 것이 수정될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
⑴ 전원일치 결의를 수정할 때는 전원일치 결의가 필요한가?
① 결의된 것을 수정하는 문제를 두고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 전원일치는 그 성립과 함께 그 결의의 유지에도 적용
총공회 역사는 그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전원일치' 신앙노선과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총공회 자체가 전원일치성으로 성립되고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총공회의 결의도 전원일치로 성립되고 전원일치로 유지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 전원일치제의 핵심인 자유성을 중심으로 이해할 문제
전원일치 제도는 단순히 싸움을 막는 방편으로 모든 사람의 의견을 통일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현장의 기발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안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첫 시작인 하나님의 목적을 심층 분석한다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이 목표한 이 목적 존재는 만물과 달리 하나님과 같은 자유성을 가지도록 하였고 이 자유성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가장 핵심적 요소입니다.
자유성을 가진 존재가 완전의 실력을 갖추는 것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평생 타이르며 기다리며 세월 속에 스스로 알아서 고쳐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어느 인간이 누구를 향해 하나님도 사용하지 않으시는 강제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총공회와 같이 '자유성'을 근본 본질로 삼는 전원일치 제도를 시행 않는 일반 교단들의 행정 체제는 하나님과 맞서 하나님 이상의 권세를 가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전원일치란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 어떻게 당신의 뜻을 나타낼지 모르기 때문에 주권 예정 섭리 성취를 우리는 따라가는 순종, 즉 믿음으로 접근하겠다는 면이 더하여져 있습니다. 천하가 다 똘똘 뭉쳐 단정하고 결정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했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 성취는 다수에 있거나 인간 권위에 있거나 인간 예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전원일치 성립뿐 아니라, 유지되는 데에도 '자유성들'의 전 원일치
어느 제도가 어떤 과정에서 어떤 순간에 어떻게 해석되고 운영되더라도, 자유성이라는 근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결의가 성립되는 첫 날도 자유성들의 총의라야 되고 그 결의가 유지되고 진행되는 모든 과정도 역시 자유성들의 총의로만 그리 되어야 합니다.
한번 결의된 것이라 해도, 그 결의는 그 당시 그 형편에서는 그 결의에 관계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실을 바꾸어 주시면 바뀐 현실 때문에 의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결의에 대하여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새로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의미는 전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수정안이 전원일치로 확정이 되지 않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현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 결의하기 이전에 수정에 대한 결의의 과정을 미리 의논해야 함
전원일치란, 전원일치로 성립이 될 때 이 안건은 훗날 수정안이 제시될 때 전원일치로 수정안을 결의할 것인지 아니면 수정안이 제시되는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원래 전원일치 결의된 것이 깨진 것이 되어 결의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지를 미리 알고 미리 확정해 두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사안 자체가 이렇게 예상과 예측이 되지 못하여 확정해 두지 않고 시행되어온 것이라면, 전원일치제의 원 취지를 먼저 생각하여 중간에라도 이 사안을 전원일치 제도의 근본 신앙 노선에서 인식을 하고 먼저 확정해 둔 다음 의논될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시무투표를 비롯하여 인원을 선출하는 문제는 일단 전원일치의 의사로 선출 방법을 결정하고 그 방법에 의하여 선출된 사람에 대하여는 선출 당시 결정한 조건대로 1년 또는 2년 임기를 마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전원일치로 수정하지 않고는 그대로 시행됩니다. 중도에 자기 의견이 바뀌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서부교회 시무투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듯이, 불신임을 받게되는 측에서 결과가 불리하게 되자 '이 제도는 원래 문제가 있었던 제도였다. 어린 중학생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유성으로 그 제도와 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② 수정하자는 의견이 전원일치로 모아지지 않는 경우
수정치 않기로 했던 것도 전원이 다시 입장을 바꿔 전원일치가 되면 수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수정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 연구하고 살필 핵심 주제입니다.
㉮ 시행과 결과에 이의하지 않겠다고 하고서도 이를 뒤집는 경 우
물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불상을 들여놓는다 해도 자기 자유겠지만, 그 자유가 어느 차원에서 어떻게 시행되느냐에 따라 우리는 때로는 경찰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을 방화하기 위해 휘발유를 들었을 경우입니다. 때로는 예배당에서 쫒겨나고 매를 맞아도 그대로 당할 일도 있습니다. 교회내 교권 투쟁 차원에서 횡패를 부릴 때입니다. 어떤 때는 어떤 이권을 잃어버려도 이를 감사하고 지켜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한다면, 공회 외부인
결의와 결의한 것을 시행하는 것과 그 결과까지를 자기 자유성으로 확정해놓고 생각이 달라져서 원래 결정한 것을 수정하겠다고 하는 경우, 그런데 만일 전체가 수정하겠다고 전원이 일치하여 변경하지 않는 경우는 공회 행정 노선으로는 그것이 변경될 수 없습니다. 수정하겠다는 사람이 전원이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결의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 원칙이 그렇다고 해도 자기는 수정해야겠고 결의한 것을 따라 가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공회의 전원일치법에 의하여는 수납될 수가 없고 그 대신 공회 행정 노선 자체를 맞서 이를 수정하겠다는 것이니 이런 경우는 공회 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하여 이것을 전원일치로 수용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고, 공회 안에 사람이 공회 밖으로 나가서 탈퇴한 사람들처럼 공회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됩니다.
㉰ 이의 제기에 대하여 이런 점은 기본 상식
공회 결의 원칙을 무시하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매로 잡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의견을 취급할 때 이제는 내부 결의 때와 같이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라도 그 사람이 어려서 모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가르치고 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애를 쓰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참고로, 성경이나 교리 문제 또는 총공회 신앙노선의 근본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예외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안에서 일일이 표시를 하지 않고 토를 붙여놓지 않더라도 우리 가는 걸음은 근본적으로 성경과 교리 그리고 공회 신앙노선 상에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 일반 결의는 이의 제기가 언제든지 가능한 경우가 많음
전원이 일치하여 결의하였으나 시행 과정에서 이의가 있고 수정하자는 제의가 있으면 그 결의가 있기 전 상태로 바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결의가 되면 그것으로 시행만 남은 경우가 아니라 일단 현 상태로는 의견이 합치됨으로 결의를 하였고 또 앞으로 변경된다면 다시 전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되는 경우입니다. 그 시행 과정과 결과까지를 확정해 두는 경우는 인원 선출이나 시무투표 등과 같이 비교적 명기된 몇몇 경우에 불과하고 대개의 결의는 여기에 속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고도 순수하게 행정 실무에 관련된 것은 이의를 미리 포함하여 결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교훈적 요소가 들어있는 결의의 경우는 거의 전?
총공회신앙노선은 그 운영의 첫 원리가 ‘진리전원일치’입니다. 모든 교리뿐아니라 모든 행정 사항까지 전원일치가 아니면 결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에 대하여 공회 안팎의 모든 사람들이 과연 그것이 현실 교회에서 시행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 존립 하려면 전원일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또한 지켜질 수도 있기 때문에 공회는 그 행정 원리의 3가지 기본 원칙 중 첫째로 이 원칙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성급한 선입관
총공회 교회 내에서조차 거의 모든 분들이 전원일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천국에나 가서 할 일, 천국에서나 될 일'이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한적도 있습니다. 총공회 내부 교인들 중 90% 이상의 교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10% 정도의 교인들은 일단 발언에서만큼은 전원일치는 가능하며 또 그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내에서도 ‘전원일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들이 10중 9요, 찬성하는 분들이 10중 1이라는 말입니다. '9 대 1' 이라는 분포는 수학적 표현이 아니라 강조의 표현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전원일치를 지지하는 10% 정도의 공회 내부 교인들도 사실상 백목사님이 가장 강하게 주장했던 점을 고려 그분을 존중하는 자세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정도입니다. 이 ‘전원일치’ 원칙은 우선 그 이해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너무도 확고한 선입관념 때문입니다. 알고보면 전원일치라야만 하고 또 실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2) 필요성
① 개인의 자유성 보장
② 신앙의 단체화 과정에서 확보해야 할 자유성
③ 교회의 단체 속화를 막는 방법
④ ‘양심자유’ ‘교회자유’ 원칙의 필연적 결과
⑤ 오늘 교회의 극단적 탈선의 방어책
⑥ 교회의 진정한 모습
3) '전원일치는 교회 행정의 본질'
① 자유성의 행정
다수결로 결정을 짓는 것이 인간 수준의 세계에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며 가장 상식적인 방편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정상대로 움직이는 사회라면, 다수결이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어느 특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형상 중에 자유성을 주셨고, 이 자유성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세월 속에 타일러 가며, 보여줘 가며, 스스로 알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했습니다. 역사 6천년이 흘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한 인생이 평생을 살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자유성입니다. 교회 행정은 효율성을 생각 한다면 다수결이 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자유성이기 때문에 전원일치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되 기계를 제작하듯, 높은 산을 만드시듯 우리를 상대하셨다면 천국만 만들어 천국으로 바로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신성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여러 과정 여러 세월을 주시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시려고 각양 각색의 섭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직접 하시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시고,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인간 혼자 하도록 하나님은 숨어 버리시는 등 각양 각색의 오묘하고 신비롭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자유성입니다.
순간이면 다 될 일을 이렇게 역사 세계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평생 세월 속에서 한 인간 인간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이제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하나님 대신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움직이며 영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처음이며 나중입니다. 하나님 대신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노릇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 자유성이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합격 자체가 문제라면 전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답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해결하는것만 문제라면 전능자가 해결해 버립니다.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물어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스스로 요청하고 그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구하여 힘을 받는 이 인격, 이 실력, 이 훈련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천국까지 맡길 수 있습니다.
천국 자체가 문제라면 천국만 만드시고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됩니다. 타락이라는 순서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유로 원하여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려 한다면, 기계가 아니고 컴퓨터가 아닌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려 한다면 그 본질은 바로 '자유성'이며 따라서 이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찾게 하는 그 과정이 역사 교회, 교회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② 자유성으로 기르는 데는 세월이 필요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했습니다. 가나안에 넣는 것이 목적이면 순간에라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여 도우심을 받는 이 경험 이 실력 이 인격을 길러 가시려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연기시켜 놓고 광야에서 수없는 반복으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무지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하는 방편이 두 가지입니다. 기계처럼 제작하여 인간을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하나 있고, 하나는 자유성을 주셔서 그 자유성을 죽이지 않고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가능한 방편 중에 하나님은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방편은 세월과 노력이 첫번째 방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③ 옳은 것을 찾는 과정이 문제
교회의 결정이 다수결로 된다면 이쪽편의 생각에 따라 저쪽편에 있는 사람들은 원치 않는데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교인의 자유성, 그들의 자라가야 될 신앙을 고려치 않고 이렇게 한 쪽이 혼자 독단해 버리는 경우, 비록 그 결정이 옳았다 해도 그 방편이 다른 사람, 다른 교인들의 신앙을 자유성을 가지고 자라가도록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그들의 자유의사로 동참하고 이해가 되어 따라 오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결정은 가나안 입성만 알았지 광야 40년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원일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원일치란 이 땅 위에서 사실상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수결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에 이르는 과정의 내용이, 하나님으로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게 되어졌느냐? 이 기준으로 과정을 분석하고 평가하게 된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중에서 단 두 명이 통과했을 뿐입니다.
가나안 입성은 주님의 대속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중생이 되는 순간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가나안 입성이 목표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그 과정이 목적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그 과정, 그 동행의 강도가 바로 각자마다 다른 건설구원의 내용입니다. 힘들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하도록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마지막 안되면 안 된 그 자리에서 끝내고 말아야 하는 것이 자유성을 가진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전원일치라는 것은 상대방이 무지하여 무조건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혹 한쪽이 너무 강하여 반대쪽이 억지로 머리를 숙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원일치는 이런 두가지 형태로 시행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원일치는 문자적 전원일치는 되었을찌라도 성경이 말하는 전원일치는 아닙니다. 만일 무지한 사람에게 맹점; 요구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힘으로 눌러 전원일치를 만들었다면, 세상은 이를 독재라는 수준에서만 욕하겠지만 실은 '자유성'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무지한 이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알려 주어서 그들이 알게 되고 이해가 될 때, 알게 된 지식으로 이제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진 다음 진정한 전원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반대하는 이들을 힘이나 회의 기술로 눌러서 전원일치로 만드는 것은 점령이지 양육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을 배제하고, 반대하는 그들 속에 그 지식과 그 옛사람을 회개하도록 여러 과정을 거쳐 스스로 돌이키게 하고 그 결과로 전원일치가 되어야 이것이 전원일치인 것입니다.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며 거의 실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된 것만큼이 바로 건설구원의 양입니다. 100% 성공, 100점을 다 맞는 사람이 없다면 백지를 낼 것입니까? 50점짜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어린 신앙의 그 중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자유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의 자유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렇다면 일이 생겼을때 해결에 가치를 둘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자유성을 어떻게 반영했는지에 가치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의 행정만은 효율성 보다 좋아서 따라야 하는 것
누가 자유성을 꺾고 강제로 하자는 말을 쉽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좋아서 따르는 그런 결정을 하자는 말을 누가 쉽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좋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행정은 효율성과 다수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적절히 절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 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 또는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 좋겠느냐 등 어떤 중대한 문제라도 결국은 다수의 생각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렇게 결정했을 때 과연 얼마나 득을 보겠느냐는 것을 계산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을 수는 없고, 또 100% 이익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⑴ 교회의 행정은 실제로, 자유성과 함께 전원일치로 갈 수밖 없음
교회의 행정만은 한 사람의 반대라도 그 반대를 꺾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전원이 찬성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율성이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의 횡포에 거대한 교회와 교단이 할 일을 포기하고 전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극단적 이상주의 극단적 이론주의를 실제로 교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① 살아 있는교회라면 나뉘어지고 갈라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교회 분리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말하는 것이며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로 예를 들어보면 쉬울 듯 합니다. 분리가 없고 분파가 없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생명이 없는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나 세상이 조롱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분파가 많습니다. 핵분열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옳은 것을 사람의 숫자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연구 과제로 미루면 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문제는 당장 결정하여 시행치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깨닫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가 되고 분파가 되어도 꼭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누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파 그 자체를 가장 큰 죄로 보고 분파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주장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파 자체보다 양보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결국 서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주님 안에는 이 파와 저 파가 있지만, 한 몸안에도 여러 지 체는 존재
많은 분들이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는데 왜 이 파, 저 파가 있어 분요하냐고 합니다. 그분들도 또 하나의 파가 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세상 이권 때문에 나누었다면 이는 분명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속에 감추어 놓아야 할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추어 놓은 것을 들여다 보며 정죄를 해야 하겠습니까? 본인이 세상 이권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까지 한다면 그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내심을 감추어두고 밖으로는 이 말 저 말로 명분을 진열한다면? 경찰이 수사를할 수도 없는 일이며 고문해서 밝힐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듣고 말 일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는 정죄할 일이 있다 해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행위를 그 사람 자체에게서 분리하여 잘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사람 자체를 복구불능으로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지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분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인데 깨닫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깨달은 분들과 저렇게 깨달은 분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분리를 하고 분파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한다면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읽고 연구해도 침례가 옳으며 세례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분리 불가를 내세워 침례와 세례를 섞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섞어도 되고 안 섞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런데도 분리를 한다면 그때는 분리의 폐단을 지적하여 막아야 될 것입니다.
교회의 운영을 모든 교인에게 일일이 확인시킬 것 없이 대표를 뽑아 대의정치 혹은 의회민주주의로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장로교인들이 옳다고 깨달은 대로 믿고 나가는데, 그 깨달음에서 볼 때 틀렸다고 느껴지는 침례교 정치나 감독교회 정치로 섞으라면 되겠습니까? 자기 욕심, 버릴 욕망, 명예 등등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은 몸된 교회를 나누는 참으로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가라는 길을 따로 보여주신다고 확정이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은 태아의 초기 시절 분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반대하고 두팔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린다면 기형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왜 틀렸느냐, 왜 나누었느냐, 왜 깨닫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르냐는 문제를 가지고 한 사건 한 행동 자체를 먼저 파악한 뒤, 거기 대한 잘 잘못을 따질 일이지, 나누었다는 그 자체를 가지고 무조건 틀렸다고 해 버린다면, 교인 통일 교회 통일 교단 통일의 단계를 거쳐 결국 종교 통일까지 진행될 가장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옳은 것과 진리는 구호로만 앞세워 놓고 자기 주관의 착각 또는 세상 이권을 위해서 분리해 간다면 종교 분리, 교단 분리, 교회 분리, 교인 분리까지 진행을 하다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 그 자체를 해부하는 죄까지 진행할 것입니다.
③ 주님 안에는 하나밖에 없으나, 찾아가는 과정에는 시행착오 가 존재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주님 안에는 옳은 것이 하나입니다. 녹음으로 예배 설교를 대신하며 은혜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한다면, 진정 성경과 양심으로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있는 힘껏 반대했던 분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돌이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진정 죄라고 느끼면서 분리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우상예배라고 느끼는 예배 참석을 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우상예배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예배라고 깨달았으면 우상예배가 아니라는 예배로 자기들만 예배를 분리해서 보고, 재독예배가 은혜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은 또 그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한 쪽이 양보하면 좋고 양쪽이 다 양보할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누어 예배를 분리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배당을 양보하고 누가 분리될때 유리하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돈 싸움이며 욕심 싸움일 뿐입니다. 녹음 설교를 예배시간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양보를 못하겠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주도권 문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대개가 세상 투쟁입니다.
어느 쪽이든 시행 착오는 있다고 우리는 단정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이 한 자리에서 성령과 악령으로 교차 되었으며 이런 횟수는 하루 490번이라도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계산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쉽게 결정하고 쉽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편으로 옳다고 생각되지만 열 번 백 번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신중 하다는 장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단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두는 단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장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자체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전원일치라는 교회 행정 면을 두고 말한다면, 매사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인격입니다.
분리가 되어도 끝까지 밀고 나갈 깨달음인가? 당시로는 꼭 그렇다고 해서 했지만 세월 속에 다시 생각해 볼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알고 조심을 하든, 한 두 번의 실수를 경험으로 그렇게 알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있게 연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누구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를 통해 그를 기르시는지 또는 그의 잘못 자체가 필요해서 그렇게 동원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이 옳다고 진행하는 것을 힘으로나 다른 기술을 동원하여 내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진행과 나의 깨달음이 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면 양보와 희생이라는것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⑵ 전원일치를 주장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함
교회내에서 의견이 다른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예로 든다면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경우 예배당 건물이나 교인 숫자를 확보해야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투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투쟁은 결국 혈육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문제이며 전원일치의 자유성이 교회 행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결국은 다 내주고 포기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환하게 단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뺏겼다고해서 뒤에 후회한다든지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현장에서 전투를 하고 후회해야 회개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갈등이 있는 곳마다 결국은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이면 성전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어야 했고, 신약은 내 속에 성령이 물러나실까 염려하여 건물과 교권과 돈을 양보하고 그대신 자기 속에 성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수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오물을 보고 좋아서 먹고 사람은 먹어주는 개를 보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권에 굶주린 사람은 혈육전을 통해서라도 교권과 건물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성령을 붙들고 싶은 사람은 성령을 붙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권보다 여러 배 혹은 백 배까지 되갚으실 하나님을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자기 좋아하는 것을 가지게 되어 있고, 서로 자기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5) 세상 점령법을 쓸 수 없기 때문
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
끝까지 서로의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은 법이 있고 강제 집행이 따르게 됩니다. 감옥에 보내며 경찰이 진압을 해버리면 됩니다. 교회에서 서로 의견이 끝까지 다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 우리에게는 혈과 육에 대한 권리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부처 믿는다고 절로 가버린다면? 막을 수 없습니다. 설득으로 돌아서면 되지만. 교인이 연보를 하지 않는다고 회원권을 회수할 수 있습니까? 두고 볼 일이지 회비 징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출교를 명했는데 그 출교 처분이 잘못되었다며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이라면서 교회를 출석한다면 대문에서 멱살을 잡아내겠습니까? 결국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신앙의 본질입니다.
② 결국 영의 사람은 말씀을 차지하고, 육의 사람은 예배당을 차지하게됨
만일 횡포자 폭행자가 교회를 차지하면 어쩌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교인으로서 만일 그렇게까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 교회는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 교회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한 두 사람의 횡포에 교회를 넘겨 줄 것인가, 절대 다수를 확보한 쪽에서 예배당을 정말로 넘겨 줄 것인가? 물론 그 한 두 사람의 횡포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우선 조사할 일입니다.
신앙노선 문제가 아니라 공연히 술 한 잔 먹고 난동을 부리는 차원이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제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노선 문제로 시비가 생기고 그 극단의 투쟁이 뒤 따르고 이를 막는 일은 혈육전밖에 없다면 결국 택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혈과 육을 경계하고 말씀 하나의 가치를 우주보다 크게 보는 사람은 말씀을 새겨 할 일이 있고 못할 일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0년을 한 예배당에서 서로 주도권을 위해 싸운다면 이는 혈과 육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말씀을 새기고자 하는 측은 먼저 개척을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교인이 아닌데 세상 사람으로 재산권을 침해하고 예배를 방해할 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신 대로 경찰과 법원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저항주의가 아니며 우리는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교인이며 성경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목적 어떤 흉악함을 가졌을지라도 그 사람과 혈과 육의 싸움은 피하고 기도로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면 감사히 받고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으시면 넘겨주라는 말씀인 줄 알고 동일한 감사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 많고 또 구체적인 여건에 따라 그 결정이 천차만별이지만 원리만 가지고 말하면 이는 단호합니다. 따라서 채찍으로 성전 안에서 휘두를 때가 있고,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혀도 말 한마디 못할 때가 있어야 신앙입니다.
③ 따라서 교회의 치리 제도 자체에 근본적 수정이 필요
교회가 교회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세워둔 법을 이용해서 적법 절차에 의한 악행을 일삼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역사가 실제 그렇게 하여 왔으니 결국 교회법은 하나의 선언적 교훈으로 몇 가지만 제시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고 실제로는 바로 믿도록 노력하고, 하다가 안되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교회가 힘쓸일은 바른 복음을 양보하지 않고 혼자라도 끝까지 믿음 지킬 일만 해야 합니다.
현 교회법은 교단에 상관없이 치리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재판소를 두고 있습니다. 중세 천주교는 화형까지 시켜 버리는 힘이 있었지만 기독교는 그런 권리를 줘도 버려야 하고 또 그런 권리를 가질 수도 없는 교리를 가졌습니다. 현 교회의 치리 제도는 세상 재판소를 배껴 놓은 것이라 보면 될 만큼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교회의 의회민주제와 함께 교회의 치리 제도가 근본적으로 수정될 때가 되었습니다.
현재 교회는 그 모든 결정을 교인들이 뽑은 대표들이 다수결로 확정하고, 그 집행에 반대하면 교회 법정이 이를 강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과 집행은 상대방의 의사를 꺾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허공을 향한 것일 뿐입니다.
우선, 말 몇 마디로 교인의 다수나 대표의 다수를 자기편으로 바꿔 놓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교회의 집행은 자기편 주먹이 많으면 결국 주먹을 따라 가지 법을 따라 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법은 서로의 생각이 결국 다를 때 최종 판단의 기준이며, 법정은 그 집행 수단인데, 그 법과 그 집행 자체를 교회는 주먹으로 해결해서 안되며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원칙적 방향을 선언하는 정도에서 끝내야 합니다.
④ 결론은 세상 점령법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전원일치의 결 정 외에는 생각할 수 없음
해방 후 고신이 자신들은 진리를 지킨 쪽이고 따라서 무슨 일을 해도 자신들이 한 것은 옳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들과 신사참배를 승리한 의인들이 소송이라는 죄와 폭력이라는 죄를 꼭같이 사용했고 교권과 돈을 위해 싸울 때도 꼭 같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승자는 악령이었습니다. 신사참배 환란으로 한국 교회를 대부분 거머쥐고, 해방 후 그 나머지 신사참배 승리 쪽을 점령하였습니다. 고신은 자신들이 사선을 넘은 승리자라고 안심했었는데, 바로 그 지점에 설치된 덪에 걸릴 때는 걸린 줄도 몰랐습니다.
교회는 교회에 발생되는 모든일을 두고 전교인이 결국은 전체가 이해되기까지 늦어지고 차질이 생겨도 타이르고 권하며 서로가 기도의 제목으로 정해놓고 한 건 한 건 처리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이상에서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바로 마귀의 것이 되어 버립니다.
6) 오늘 교회의 단체 속화가 기술적으로는 전원일치 부재 에서 기인합니다.
이제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면 전원일치라야 하겠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현실 교회의 운영은 다수결이 아니고는 실제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전원일치와 다수결을 살펴 보겠습니다.
① 다수결로 결정하다 보니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의 교리로 등 장
세상도 웃을 일입니다. 윤회사상이 불교 교리라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되듯이, 교회가 하나님 유일주의라면 일본인이 신으로 받드는 태양신에게 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모든 일을 다수결로 결정하다 보니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총칼이 무서워 그러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교회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총칼이 사라진 해방 후까지도 결국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이들이 오늘까지 한국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한국 교계의 대표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정죄하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되는 정도입니다.
성경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안 믿고 싶은 사람을 믿고 싶은 사람이 다수결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해봐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가 옳다는 교인이 많다고 해도 세례가 옳다는 소수를 표대결을 통해 그들의 세례를 버리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을 목사 장로로 안수해야 된다는 목표를 위해 여성계가 꾸준히 노력했고, 결국 과반수를 확보하여 통합측 교단은 여성 안수가 교리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여성 안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 교리였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대로 바로 믿는 생명길, 그러나 좁은 길은 사람이 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넓은 길, 사망길로는 가는 사람이 많으니 결국 교회는 속화 타락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넓은 길이 체질인 사람만이 아니고 좁은 길을 가야 하는 사람까지 데려가는 법이 다수결입니다.
② 다수결이 되다 보니 세상 선거와 교회 선거가 같아짐
교회가 떠나고 초월할 것이 본토 친척 아비집인데, 본토 친척 아비집의 표를 모아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교단 선거에 '선거 관리위원회'가 있어야 하고, 사전 운동 금지 기간이 있으며, 부정 선거 방지책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대의원들이 묶고 있는 호텔이나 여관에 후보자들이 방문하면 안된다는 규제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부정 선거였다고 법원에 '무효 처분'을 내려달라는 소송이 진행되는 정도입니다.
③ 교회는 의회민주주의 정치로 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문제
한국 국회나 정치가 엉망인 것은 제도가 아니라 민족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이며 또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까지 합니다. 그러나 밖으로 표시가 났느냐 안 났느냐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신사적 모습으로 포장을 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영미 선진국이라 보면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만이 교회가 연구할 일이며 이것을 찾은 이가 어린 아이하나일찌라도 옳은 그것을 전체가 따라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서로가 옳다는 것이 다르다면? 기다릴 뿐입니다. 서로가 토론할 뿐입니다. 해봐도 결론이 꼭 같아지면 눈을 밝혀 바른 것을 알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기도를 해도 꼭 서로 의견이 옳다고 확신이 들면? 또는 목적을 두고 억지를 끝까지 부린다면? 그 결정은 미루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루는 것이 한쪽에 유리하니까 계속 반대 의견을 낸다면? 불리해도 서로의 확신이 일치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다 교회가 마비되고 더 이상 교회가 유지가 될 수 없는 최종에 이르면? 서로 교회를 분리해야 합니다.
교회 분리를 장난으로 알아도 큰 죄가 되겠지만 교회 분리는 예수님 몸을 분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국교로부터 청교도가 미국으로 분리 이주한 것은 발전이요 성장이지 멸망을 위한 분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안이 생긴다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나 역할이 달라서 그러한가? 이런 과제로 보이는 예배당을 분리하는 문제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7) 교회의 모습은ꡐ전원일치ꡑ
① 전원일치라는 과정을 가져야 오류도 수정할 수 있음
재론되는 말이지만, 교회는 다수결로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원일치가 되어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지라도 전원일치제라면 한 사람의 이의와 한 사람의 수정제의로 교회의 결정을 다시 한번 과제로 올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다수결 역시 그럴 수 있지만 기준 숫자 이상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으로 교회를 위기 때마다 구원했던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생각한다면 다수결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② 중요한 발언은 한 사람을 통하여 나옴
우리는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할 때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 전부를 살린 경우를 늘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또 하나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란 항상 옳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엘리야 한 사람으로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라는 사람에게는 항상 옳고 바른 것이 전달된다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혼자서 택한 백성 전부를 책임졌던 1인 절대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이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썼기 때문에 그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고 이 땅 위의 인간이란 누구든지 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십자가상에 있던 강도도 옳게 깨달아 그 순간에서 옳은 의인이 될 수 있고, 노아가 홍수 심판을 이기고 완전 승리를 했던 그 자리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역사라는 점까지를 고려하라는 것이지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영원 불변 완전을 맡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③ 투쟁과 분리보다 연구의 확신이 분화를 가져와야함
교회 갈등의 대부분 모습이 투쟁이며 그 투쟁의 결과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어느 것이 옳은지를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고 확신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 결과가 같으면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았으니 큰 성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다르면 그리고 그 결과가 다른 상태로는 한 예배당을 운영할 수 없다면 각자에게 주신 역할 맡기시는 사명이 달라서 그러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집에 7남매가 한 솥밥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씩 결혼해서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투쟁과 분리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분화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오히려 성장일 수 있고 더 넓은 범위로 복음을 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척과 모든 교회 분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개척과 분화를 가장하여 자기 사업을 도모하는 교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며,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최종 결정을 한 뒤에라도 또 돌아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그 열심 그 충성, 그 계속성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 천주교가 세계적 단합과 일사분란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싸움만 있는 기독교계를 조롱하며 천주교는 화평의 봉사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가 수도 없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여 이루고 확보한 재산과 교권을 가졌을때 이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문명시대가 되고 보니 이미 벌어놓은 돈으로 폭력배들이 합법적 회사를 운영하여 변모한다는 세상뉴스와 같은 수준에서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추한 모습, 분명히 교회의 추한 모습은 예배당을 두고 싸우는 극단적인 투쟁들이지만, 그 흙탕물 속에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고 전 인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으려는 그 중심이 지극히 미약하나 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꼭 같은 사람으로 보지만 그 속에 그런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원일치라야 합니다.
8) 세상 대법원이 교회는 전원일치를 하라고함
세상 말은 듣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우리 신앙노선입니다. 그들이 옳고 그들이 틀렸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며, 신앙의 옳고 그른 것은 믿는 사람이 성경으로 서로 살펴 찾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여담이 되겠고, 좋게 보면 참고할 자연계시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교회가 신앙 문제로 싸워 법정으로 오면, 최점G 판단은 교인끼리 전원일치로 합의를 하라 합니다. 그 합의 없이 무슨 교회법으로 무슨 교회 회의로 교단 지원을 어떻게 받아서 주장 한다 해도 결국은 세상 법원이 교회 문제는 전원일치로만 하라면서 빠져 버립니다.
혹 질서 유지가 안되는 문제 등은 임시 조처만 해 줄 뿐입니다. 정상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면 세상 법원도 이렇게 말하는 정도입니다.
9) 장로교회 헌법 정신 제1조와 2조가 말하는ꡐ신앙자유 ꡑ는 전원일치에서만 가능
교회라면 헌법이 있고, 헌법에는 근본 원리가 있습니다. 장로교 헌법원리는 제1조에 '양심의 자유'를, 제2조에서 '교회의 자유'를 선언하는 바, 교단 헌법의 각론이 이 '자유성'의 원리를 반한다면 그 규정은 원인무효가 됩니다. 이 두 가지 자유가 실현되려면 '전원일치'라는 의결 과정이라야 한다는 것이 총공회의 입장입니다.
⑴ 장로교 헌법 원리 제1조와 제2조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① 헌법 규정 소개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인류는 종교에 관계되는 각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중생된 신자의 성경적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합니다.
제2조 '교회의 자유', 전조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한 예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습니다.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함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② 헌법 규정 내용과 역사
누구든지 신앙생활에 대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박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 '개인 양심의 자유'이며, 따라서 교회도 교회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며, 실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는 성경 원리들입니다. 초기 건전했던 천주교가 1천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양 불교로까지 타락하게 된 이유는 잘못된 교리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를 반대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유가 아니고 신앙은 강제라는 기본인식이 천주교를 천주교로 만든 가장 최종 범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각론적으로 전부 바로 잡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이란 '신앙 자유'가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면을 가장 강하게 표현한 것이 장로교 헌법 초두 1조와 2조에 '신앙 자유'를 헌법 근본 원리로 채택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 자유를 막는 교회법은 위헌 규정이 되어 원인 무효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종교개혁 후 영국에서도 상대편의 깨달음을 칼로 제거할 수 있는 국교가 있었고 결국 미국으로 밀려나온 청교도의 출발 이념은 신앙이란 칼로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우리나라를 선교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뼈아픈 역사를 한국 교회 헌법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전원일치가 아니면 장로교의 '신앙 자유' 원리는 파기된 것
서로의 깨달음이 같으면 교회는 매사에 문제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 신앙양심에 옳은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깨달음이 다른 경우는 어찌 되겠는가? 내 생각에는 분명히 틀린 것인데 그것을 옳다는 사람이 많아서 끌려가게 됩니다. 양심에는 싫은데 환경이 나를 강제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신앙 자유'의 근본 정신입니다. 그러나 현 장로교 헌법은 교인이 자기 양심에 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 행정의 효율성을 앞세워 양심과 반대되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노회가 여성 안수는 비성경적이라는 양심을 가졌더라도 다른 노회들이 성경적이라는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 결국 양심에 반하여 자기 노회 안에서 여성 안수를 시행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거부하게 되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꼭 여성안수를 해야 양심인데 다른 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안해야 옳다고 하면 못합니다. 기어코 해버린다면 제거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제재를 하겠다면 제재를 당해야 합니다. 자기 교회와 노회, 그리고 자기 교단 전부가 여성 안수를 안 하는 것이 성경에 옳다고 결정했다면, 그런데 나 한 사람만 이 여성은 장로로 장립을 해야겠다고 양심에 느낀다면, 결국 못하게 됩니다. 신앙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꼭 막을 수 있다면 그 교단은 천주교로 삐뚤어져 나갈 수 있는 요소는 이미 갖췄다고 봐야 합니다.
⑵ 진정한 '신앙 자유'는 전원일치라는 결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요구
① 서로가 달리 깨달았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수결제도에서는 찬반의 기준만 다를 뿐이지 결국 소수의 반대를 누르고 다수가 그 뜻을 세워나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물론 누른다는 말에 이의가 많을 것입니다. 누른 것이 아니고 이해한 것이라, 양보한 것이라, 양해한 것이라, 승복한 것이라는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해보면 포기한 것이라, 점령당한 것이라,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표현들도 가능합니다.
결과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같습니다. 양심에 틀린 것을 다른 사람들 때문에 하게 된다면, 자기가 좋아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신앙양심 자유'라는 장로교 헌법 원리에는 어긋난 것입니다.
② 전원이 찬성할 때 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
세상과 다른 것이 교회라고 한다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때를 정치면으로 예를 든다면 '전원일치'의 결의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찬성하고 자신들의 신앙 양심에 옳다고 느낄 때에 일 처리를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을 살리는 일입니다. 또한 교회에 다른 모순과 투쟁이 아예 발을 붙일 수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쁘게 처리할 일이 있을 때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되고 그리되면 비현실적인 말 장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쁘게 처리할 일이 실은 없습니다. 특히 반대하는 사람 양심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 해치워야 할 성격의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면 맞을 것입니다. 예배 보는 자리에 불이 났다면 그 불을 끄는 일이야 의논할 성격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다 타서 예배 볼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고 시급히 예배당 건축을 의논해야 하는 경우는 어찌 되겠는가? 꼭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반대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비록 한 사람의 양심이라도 그 양심을 꺾고 빨리 전 교인이 예배 볼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그렇게만 가질 것이 아니고, 예배는 예배당이 없어도 볼 수 있으니 예배 보는 장소가 불편하고 차라리 양심을 꺾지 않는 일이 교회의 운영 원리를 아는 사람이며 장차 더 큰 위험요소를 미리 막는 지혜라고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한 사람의 반대 때문에 예배당 건축이 계속 미루어지겠는가? 더 어린 교인 새로 전도된 사람의 구원 문제는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연기가 되면 좁은 고집으로 반대했던 사람이라도 대개는 입장을 철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획 단계에서 자기 주관으로 고집을 부리던 사람이라도 다른 전체가 강제로 밀지 않고 기다리며 불편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불편을 느끼게 되면 결국 자기 주장이 바뀌게 되는 경우가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복음운동을 고려치 않고 막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래도 강제로 진압할 수는 없는 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그렇다고 그 한 사람으로 전체가 다 묶인다면 어찌 그를 방치하겠는가?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강제할 수도 더욱 없습니다. 이곳은 교회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집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일반 집단의 최후 강제집행과는 아주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힘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확인도 되지 않는 강제력, 이것은 교회 이외의 집단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우스워 보이고 가장 신화로 보이며 하나의 핑계거리로 보이는 것, 기도가 바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며, 어떤 세상 무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주친 교회 행정, 교회 사건에서 이 기도를 참으로 큰 강제력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진정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기도에 대하여 설교하고 남에게 가르칠 때는 기도가 이런 것이며 저런 것이라고 수없이 외쳤습니다. 정작 교회에 생긴 교회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어떻게 표결처리를 유리하게 해 볼까 하는 일로만 골똘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요, 그 현실을 수습해주고 그 현실을 지원하느라고 교회의 헌법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③ 기도를 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기도를 해도 안된다면 그렇다면 이제 인간 강제력이 마지막으로 나가야겠는가? 최점8로 나가는 힘, 그것이 그 집단의 속성입니다. 기도가 최점L며 최강의 권위라면 교회일 것이고, 법정의 재판장 판결이 마지막 권위요 해결이라면 문명 불신자일 것이고, 경찰의 진압봉이 최후 진압을 하였다면 이는 미개인일 것이며, 군대가 출동하여 사살로 평정한다면 이는 교회를 적국으로 본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수단에 마지막 해결을 호소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기도입니다. 혈과 육의 싸움은 신약교회가 싸울 싸움이 분명히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인간 문제를 가지고 가라고 존재한 것이 교회라고 보는 사람,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의 구호에서 써먹고 실은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실력껏 하겠다고 한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고 그 일을 막으러 다닐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⑶ 전원일치는 좋은 이상입니다. 현실로 만들려면 그 대가는 끝없는 희생
① 반대측과 은혜로운 결론을 가질 수 있는 최상의방법
첫 깨달음은 서로가 다를 수 있고 또 대개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실수가 많고 심령이 어두운 사람이 심령이 밝은 사람보다 휠。 그 숫자가 많은 것이 오늘 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깨달음 중에서 가장 옳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찾는 것이 교회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원일치라는 의결법이 옳은 것을 찾아 나가는 방법으로서도 가장 유리하다고 봅니다. 상대방을 강제로 꺾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고 조급하게 실수하는 일들이 줄어들 것이고 또 반대되는 의견끼리라도 연구 과제로 접근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게 된다는 조건이 있다면 상대편이 어느 유리한 시점을 택해서 어떤 의결 규정을 사용하여 나올지 모르게 되고 이런 문제로 경험 많은 교회들은 세상 정당들이 싸우는 싸움을 교회로 전부 옮겨놓고 있습니다.
② 그러든 말든 끝까지 세상 잇속을 챙기고 자기 주관을 고집하 겠다면,
기도로 노력하고 모든 대화로 힘써도 안된다면 결국 신앙 있는 쪽이 포기하고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예배당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수십 수백억짜리 예배당이나 교단 재산이 걸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 액수는 얼마에 해당이 되더라도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황무지를 택했을 때 복으로 갚으심을 안다면, 그것을 믿는 것이 교회라면 당연히 그리 하게 되어 있습니다.
③ 말로는 간단한 것이 전원일치 현실이 되려면 다 내놓은 것 이 기본
결국 기독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가 칼로 망하기 때문에라도 칼을 쓰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차지하고 세상을 포기하라고 하시니 장사 계산에서라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심까지 하셨다면 그 제자로 나가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라면 진리를 잡고 세상을 다 포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 정도의 신앙은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첫 출발에서 가르쳐야 하고, 아무리 어려도 예수 믿는 교인이라면 이것이 기본적으로 되어져야 교인다운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교회 투쟁을 해결하는 근본 방법일 것입니다.
이것이 총공회신앙노선입니다.
그렇게 배운 것이 총공회 교회들이라면, 또 그렇게 가르친 것이 백영희목사님의 특별하다는 교훈이라면 그러면 왜 총공회 교단과 교회들은 다른 교단 교회들처럼 분규로 10년을 보냈느냐는 비판으로 이 전원일치 행정을 요약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총공회는 이 면을 미리 배웠고 따라서 어느 교단 어느 교인들보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과정이 아주 특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교훈이 틀려서가 아니고 교훈대로 하지를 않아서 생긴 문제이며, 교훈대로 하지 않은 것은 실수나 몰라서가 아니고 알면서 고의로 죄를 짓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거두는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전원일치 신앙을 배운 사람으로서 다른 교단과 같은 불상사를 반복하는 것은 그 심판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나타날 것이고 이 면 때문에 총공회에 소속된 교회와 교인들의 불행이 참으로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을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요약한다면, 기독교의 본질은 분명히 전원일치의 과정으로 교회의 모든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히 성경적입니다. 전원일치가 아닌 의회민주주의 식의 다수결 처리는 세상이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라는 고정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10) 전원일치로 결의된 것이 수정될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
⑴ 전원일치 결의를 수정할 때는 전원일치 결의가 필요한가?
① 결의된 것을 수정하는 문제를 두고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 전원일치는 그 성립과 함께 그 결의의 유지에도 적용
총공회 역사는 그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전원일치' 신앙노선과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총공회 자체가 전원일치성으로 성립되고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총공회의 결의도 전원일치로 성립되고 전원일치로 유지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 전원일치제의 핵심인 자유성을 중심으로 이해할 문제
전원일치 제도는 단순히 싸움을 막는 방편으로 모든 사람의 의견을 통일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현장의 기발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안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첫 시작인 하나님의 목적을 심층 분석한다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이 목표한 이 목적 존재는 만물과 달리 하나님과 같은 자유성을 가지도록 하였고 이 자유성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가장 핵심적 요소입니다.
자유성을 가진 존재가 완전의 실력을 갖추는 것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평생 타이르며 기다리며 세월 속에 스스로 알아서 고쳐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어느 인간이 누구를 향해 하나님도 사용하지 않으시는 강제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총공회와 같이 '자유성'을 근본 본질로 삼는 전원일치 제도를 시행 않는 일반 교단들의 행정 체제는 하나님과 맞서 하나님 이상의 권세를 가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전원일치란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 어떻게 당신의 뜻을 나타낼지 모르기 때문에 주권 예정 섭리 성취를 우리는 따라가는 순종, 즉 믿음으로 접근하겠다는 면이 더하여져 있습니다. 천하가 다 똘똘 뭉쳐 단정하고 결정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했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 성취는 다수에 있거나 인간 권위에 있거나 인간 예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전원일치 성립뿐 아니라, 유지되는 데에도 '자유성들'의 전 원일치
어느 제도가 어떤 과정에서 어떤 순간에 어떻게 해석되고 운영되더라도, 자유성이라는 근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결의가 성립되는 첫 날도 자유성들의 총의라야 되고 그 결의가 유지되고 진행되는 모든 과정도 역시 자유성들의 총의로만 그리 되어야 합니다.
한번 결의된 것이라 해도, 그 결의는 그 당시 그 형편에서는 그 결의에 관계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실을 바꾸어 주시면 바뀐 현실 때문에 의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결의에 대하여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새로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의미는 전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수정안이 전원일치로 확정이 되지 않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현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 결의하기 이전에 수정에 대한 결의의 과정을 미리 의논해야 함
전원일치란, 전원일치로 성립이 될 때 이 안건은 훗날 수정안이 제시될 때 전원일치로 수정안을 결의할 것인지 아니면 수정안이 제시되는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원래 전원일치 결의된 것이 깨진 것이 되어 결의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지를 미리 알고 미리 확정해 두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사안 자체가 이렇게 예상과 예측이 되지 못하여 확정해 두지 않고 시행되어온 것이라면, 전원일치제의 원 취지를 먼저 생각하여 중간에라도 이 사안을 전원일치 제도의 근본 신앙 노선에서 인식을 하고 먼저 확정해 둔 다음 의논될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시무투표를 비롯하여 인원을 선출하는 문제는 일단 전원일치의 의사로 선출 방법을 결정하고 그 방법에 의하여 선출된 사람에 대하여는 선출 당시 결정한 조건대로 1년 또는 2년 임기를 마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전원일치로 수정하지 않고는 그대로 시행됩니다. 중도에 자기 의견이 바뀌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서부교회 시무투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듯이, 불신임을 받게되는 측에서 결과가 불리하게 되자 '이 제도는 원래 문제가 있었던 제도였다. 어린 중학생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유성으로 그 제도와 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② 수정하자는 의견이 전원일치로 모아지지 않는 경우
수정치 않기로 했던 것도 전원이 다시 입장을 바꿔 전원일치가 되면 수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수정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 연구하고 살필 핵심 주제입니다.
㉮ 시행과 결과에 이의하지 않겠다고 하고서도 이를 뒤집는 경 우
물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불상을 들여놓는다 해도 자기 자유겠지만, 그 자유가 어느 차원에서 어떻게 시행되느냐에 따라 우리는 때로는 경찰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을 방화하기 위해 휘발유를 들었을 경우입니다. 때로는 예배당에서 쫒겨나고 매를 맞아도 그대로 당할 일도 있습니다. 교회내 교권 투쟁 차원에서 횡패를 부릴 때입니다. 어떤 때는 어떤 이권을 잃어버려도 이를 감사하고 지켜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한다면, 공회 외부인
결의와 결의한 것을 시행하는 것과 그 결과까지를 자기 자유성으로 확정해놓고 생각이 달라져서 원래 결정한 것을 수정하겠다고 하는 경우, 그런데 만일 전체가 수정하겠다고 전원이 일치하여 변경하지 않는 경우는 공회 행정 노선으로는 그것이 변경될 수 없습니다. 수정하겠다는 사람이 전원이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결의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 원칙이 그렇다고 해도 자기는 수정해야겠고 결의한 것을 따라 가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공회의 전원일치법에 의하여는 수납될 수가 없고 그 대신 공회 행정 노선 자체를 맞서 이를 수정하겠다는 것이니 이런 경우는 공회 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하여 이것을 전원일치로 수용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고, 공회 안에 사람이 공회 밖으로 나가서 탈퇴한 사람들처럼 공회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됩니다.
㉰ 이의 제기에 대하여 이런 점은 기본 상식
공회 결의 원칙을 무시하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매로 잡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의견을 취급할 때 이제는 내부 결의 때와 같이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라도 그 사람이 어려서 모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가르치고 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애를 쓰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참고로, 성경이나 교리 문제 또는 총공회 신앙노선의 근본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예외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안에서 일일이 표시를 하지 않고 토를 붙여놓지 않더라도 우리 가는 걸음은 근본적으로 성경과 교리 그리고 공회 신앙노선 상에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 일반 결의는 이의 제기가 언제든지 가능한 경우가 많음
전원이 일치하여 결의하였으나 시행 과정에서 이의가 있고 수정하자는 제의가 있으면 그 결의가 있기 전 상태로 바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결의가 되면 그것으로 시행만 남은 경우가 아니라 일단 현 상태로는 의견이 합치됨으로 결의를 하였고 또 앞으로 변경된다면 다시 전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되는 경우입니다. 그 시행 과정과 결과까지를 확정해 두는 경우는 인원 선출이나 시무투표 등과 같이 비교적 명기된 몇몇 경우에 불과하고 대개의 결의는 여기에 속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고도 순수하게 행정 실무에 관련된 것은 이의를 미리 포함하여 결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교훈적 요소가 들어있는 결의의 경우는 거의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