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원일치는 교회 행정의 본질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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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3) '전원일치는 교회 행정의 본질'
① 자유성의 행정
다수결로 결정을 짓는 것이 인간 수준의 세계에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며 가장 상식적인 방편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정상대로 움직이는 사회라면, 다수결이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어느 특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형상 중에 자유성을 주셨고, 이 자유성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세월 속에 타일러 가며, 보여줘 가며, 스스로 알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했습니다. 역사 6천년이 흘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한 인생이 평생을 살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자유성입니다. 교회 행정은 효율성을 생각 한다면 다수결이 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자유성이기 때문에 전원일치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되 기계를 제작하듯, 높은 산을 만드시듯 우리를 상대하셨다면 천국만 만들어 천국으로 바로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신성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여러 과정 여러 세월을 주시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시려고 각양 각색의 섭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직접 하시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시고,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인간 혼자 하도록 하나님은 숨어 버리시는 등 각양 각색의 오묘하고 신비롭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자유성입니다.
순간이면 다 될 일을 이렇게 역사 세계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평생 세월 속에서 한 인간 인간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이제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하나님 대신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움직이며 영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처음이며 나중입니다. 하나님 대신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노릇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 자유성이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합격 자체가 문제라면 전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답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해결하는것만 문제라면 전능자가 해결해 버립니다.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물어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스스로 요청하고 그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구하여 힘을 받는 이 인격, 이 실력, 이 훈련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천국까지 맡길 수 있습니다.
천국 자체가 문제라면 천국만 만드시고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됩니다. 타락이라는 순서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유로 원하여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려 한다면, 기계가 아니고 컴퓨터가 아닌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려 한다면 그 본질은 바로 '자유성'이며 따라서 이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찾게 하는 그 과정이 역사 교회, 교회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② 자유성으로 기르는 데는 세월이 필요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했습니다. 가나안에 넣는 것이 목적이면 순간에라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여 도우심을 받는 이 경험 이 실력 이 인격을 길러 가시려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연기시켜 놓고 광야에서 수없는 반복으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무지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하는 방편이 두 가지입니다. 기계처럼 제작하여 인간을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하나 있고, 하나는 자유성을 주셔서 그 자유성을 죽이지 않고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가능한 방편 중에 하나님은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방편은 세월과 노력이 첫번째 방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③ 옳은 것을 찾는 과정이 문제
교회의 결정이 다수결로 된다면 이쪽편의 생각에 따라 저쪽편에 있는 사람들은 원치 않는데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교인의 자유성, 그들의 자라가야 될 신앙을 고려치 않고 이렇게 한 쪽이 혼자 독단해 버리는 경우, 비록 그 결정이 옳았다 해도 그 방편이 다른 사람, 다른 교인들의 신앙을 자유성을 가지고 자라가도록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그들의 자유의사로 동참하고 이해가 되어 따라 오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결정은 가나안 입성만 알았지 광야 40년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원일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원일치란 이 땅 위에서 사실상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수결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에 이르는 과정의 내용이, 하나님으로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게 되어졌느냐? 이 기준으로 과정을 분석하고 평가하게 된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중에서 단 두 명이 통과했을 뿐입니다.
가나안 입성은 주님의 대속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중생이 되는 순간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가나안 입성이 목표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그 과정이 목적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그 과정, 그 동행의 강도가 바로 각자마다 다른 건설구원의 내용입니다. 힘들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하도록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마지막 안되면 안 된 그 자리에서 끝내고 말아야 하는 것이 자유성을 가진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전원일치라는 것은 상대방이 무지하여 무조건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혹 한쪽이 너무 강하여 반대쪽이 억지로 머리를 숙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원일치는 이런 두가지 형태로 시행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원일치는 문자적 전원일치는 되었을찌라도 성경이 말하는 전원일치는 아닙니다. 만일 무지한 사람에게 맹점; 요구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힘으로 눌러 전원일치를 만들었다면, 세상은 이를 독재라는 수준에서만 욕하겠지만 실은 '자유성'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무지한 이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알려 주어서 그들이 알게 되고 이해가 될 때, 알게 된 지식으로 이제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진 다음 진정한 전원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반대하는 이들을 힘이나 회의 기술로 눌러서 전원일치로 만드는 것은 점령이지 양육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을 배제하고, 반대하는 그들 속에 그 지식과 그 옛사람을 회개하도록 여러 과정을 거쳐 스스로 돌이키게 하고 그 결과로 전원일치가 되어야 이것이 전원일치인 것입니다.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며 거의 실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된 것만큼이 바로 건설구원의 양입니다. 100% 성공, 100점을 다 맞는 사람이 없다면 백지를 낼 것입니까? 50점짜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어린 신앙의 그 중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자유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의 자유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렇다면 일이 생겼을때 해결에 가치를 둘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자유성을 어떻게 반영했는지에 가치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① 자유성의 행정
다수결로 결정을 짓는 것이 인간 수준의 세계에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며 가장 상식적인 방편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입니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정상대로 움직이는 사회라면, 다수결이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어느 특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형상 중에 자유성을 주셨고, 이 자유성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세월 속에 타일러 가며, 보여줘 가며, 스스로 알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했습니다. 역사 6천년이 흘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한 인생이 평생을 살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자유성입니다. 교회 행정은 효율성을 생각 한다면 다수결이 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자유성이기 때문에 전원일치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되 기계를 제작하듯, 높은 산을 만드시듯 우리를 상대하셨다면 천국만 만들어 천국으로 바로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신성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여러 과정 여러 세월을 주시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시려고 각양 각색의 섭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직접 하시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시고,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인간 혼자 하도록 하나님은 숨어 버리시는 등 각양 각색의 오묘하고 신비롭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자유성입니다.
순간이면 다 될 일을 이렇게 역사 세계 속에서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평생 세월 속에서 한 인간 인간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이제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하나님 대신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움직이며 영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처음이며 나중입니다. 하나님 대신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노릇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 자유성이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합격 자체가 문제라면 전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답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해결하는것만 문제라면 전능자가 해결해 버립니다.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물어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스스로 요청하고 그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구하여 힘을 받는 이 인격, 이 실력, 이 훈련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천국까지 맡길 수 있습니다.
천국 자체가 문제라면 천국만 만드시고 천국에서 살도록 하면 됩니다. 타락이라는 순서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유로 원하여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려 한다면, 기계가 아니고 컴퓨터가 아닌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려 한다면 그 본질은 바로 '자유성'이며 따라서 이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찾게 하는 그 과정이 역사 교회, 교회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② 자유성으로 기르는 데는 세월이 필요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했습니다. 가나안에 넣는 것이 목적이면 순간에라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여 도우심을 받는 이 경험 이 실력 이 인격을 길러 가시려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연기시켜 놓고 광야에서 수없는 반복으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무지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하는 방편이 두 가지입니다. 기계처럼 제작하여 인간을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하나 있고, 하나는 자유성을 주셔서 그 자유성을 죽이지 않고 그런 실력의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가능한 방편 중에 하나님은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방편은 세월과 노력이 첫번째 방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두번째 방편을 택한 것입니다.
③ 옳은 것을 찾는 과정이 문제
교회의 결정이 다수결로 된다면 이쪽편의 생각에 따라 저쪽편에 있는 사람들은 원치 않는데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교인의 자유성, 그들의 자라가야 될 신앙을 고려치 않고 이렇게 한 쪽이 혼자 독단해 버리는 경우, 비록 그 결정이 옳았다 해도 그 방편이 다른 사람, 다른 교인들의 신앙을 자유성을 가지고 자라가도록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그들의 자유의사로 동참하고 이해가 되어 따라 오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결정은 가나안 입성만 알았지 광야 40년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원일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원일치란 이 땅 위에서 사실상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수결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에 이르는 과정의 내용이, 하나님으로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게 되어졌느냐? 이 기준으로 과정을 분석하고 평가하게 된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중에서 단 두 명이 통과했을 뿐입니다.
가나안 입성은 주님의 대속으로 오늘 우리에게는 중생이 되는 순간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가나안 입성이 목표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그 과정이 목적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그 과정, 그 동행의 강도가 바로 각자마다 다른 건설구원의 내용입니다. 힘들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하도록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마지막 안되면 안 된 그 자리에서 끝내고 말아야 하는 것이 자유성을 가진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전원일치라는 것은 상대방이 무지하여 무조건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혹 한쪽이 너무 강하여 반대쪽이 억지로 머리를 숙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원일치는 이런 두가지 형태로 시행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원일치는 문자적 전원일치는 되었을찌라도 성경이 말하는 전원일치는 아닙니다. 만일 무지한 사람에게 맹점; 요구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힘으로 눌러 전원일치를 만들었다면, 세상은 이를 독재라는 수준에서만 욕하겠지만 실은 '자유성'없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무지한 이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알려 주어서 그들이 알게 되고 이해가 될 때, 알게 된 지식으로 이제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진 다음 진정한 전원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반대하는 이들을 힘이나 회의 기술로 눌러서 전원일치로 만드는 것은 점령이지 양육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가할 수 있는 압력을 배제하고, 반대하는 그들 속에 그 지식과 그 옛사람을 회개하도록 여러 과정을 거쳐 스스로 돌이키게 하고 그 결과로 전원일치가 되어야 이것이 전원일치인 것입니다.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며 거의 실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된 것만큼이 바로 건설구원의 양입니다. 100% 성공, 100점을 다 맞는 사람이 없다면 백지를 낼 것입니까? 50점짜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어린 신앙의 그 중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자유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의 자유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렇다면 일이 생겼을때 해결에 가치를 둘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자유성을 어떻게 반영했는지에 가치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