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회의 행정만은 그 효율성을 뒤로 접고 전 교인이 좋아서 따르는 것이라야 …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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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4) 교회의 행정만은 효율성 보다 좋아서 따라야 하는 것
누가 자유성을 꺾고 강제로 하자는 말을 쉽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좋아서 따르는 그런 결정을 하자는 말을 누가 쉽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좋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행정은 효율성과 다수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적절히 절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 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 또는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 좋겠느냐 등 어떤 중대한 문제라도 결국은 다수의 생각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렇게 결정했을 때 과연 얼마나 득을 보겠느냐는 것을 계산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을 수는 없고, 또 100% 이익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⑴ 교회의 행정은 실제로, 자유성과 함께 전원일치로 갈 수밖 없음
교회의 행정만은 한 사람의 반대라도 그 반대를 꺾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전원이 찬성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율성이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의 횡포에 거대한 교회와 교단이 할 일을 포기하고 전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극단적 이상주의 극단적 이론주의를 실제로 교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① 살아 있는교회라면 나뉘어지고 갈라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교회 분리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말하는 것이며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로 예를 들어보면 쉬울 듯 합니다. 분리가 없고 분파가 없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생명이 없는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나 세상이 조롱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분파가 많습니다. 핵분열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옳은 것을 사람의 숫자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연구 과제로 미루면 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문제는 당장 결정하여 시행치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깨닫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가 되고 분파가 되어도 꼭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누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파 그 자체를 가장 큰 죄로 보고 분파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주장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파 자체보다 양보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결국 서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주님 안에는 이 파와 저 파가 있지만, 한 몸안에도 여러 지 체는 존재
많은 분들이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는데 왜 이 파, 저 파가 있어 분요하냐고 합니다. 그분들도 또 하나의 파가 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세상 이권 때문에 나누었다면 이는 분명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속에 감추어 놓아야 할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추어 놓은 것을 들여다 보며 정죄를 해야 하겠습니까? 본인이 세상 이권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까지 한다면 그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내심을 감추어두고 밖으로는 이 말 저 말로 명분을 진열한다면? 경찰이 수사를할 수도 없는 일이며 고문해서 밝힐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듣고 말 일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는 정죄할 일이 있다 해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행위를 그 사람 자체에게서 분리하여 잘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사람 자체를 복구불능으로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지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분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인데 깨닫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깨달은 분들과 저렇게 깨달은 분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분리를 하고 분파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한다면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읽고 연구해도 침례가 옳으며 세례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분리 불가를 내세워 침례와 세례를 섞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섞어도 되고 안 섞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런데도 분리를 한다면 그때는 분리의 폐단을 지적하여 막아야 될 것입니다.
교회의 운영을 모든 교인에게 일일이 확인시킬 것 없이 대표를 뽑아 대의정치 혹은 의회민주주의로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장로교인들이 옳다고 깨달은 대로 믿고 나가는데, 그 깨달음에서 볼 때 틀렸다고 느껴지는 침례교 정치나 감독교회 정치로 섞으라면 되겠습니까? 자기 욕심, 버릴 욕망, 명예 등등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은 몸된 교회를 나누는 참으로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가라는 길을 따로 보여주신다고 확정이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은 태아의 초기 시절 분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반대하고 두팔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린다면 기형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왜 틀렸느냐, 왜 나누었느냐, 왜 깨닫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르냐는 문제를 가지고 한 사건 한 행동 자체를 먼저 파악한 뒤, 거기 대한 잘 잘못을 따질 일이지, 나누었다는 그 자체를 가지고 무조건 틀렸다고 해 버린다면, 교인 통일 교회 통일 교단 통일의 단계를 거쳐 결국 종교 통일까지 진행될 가장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옳은 것과 진리는 구호로만 앞세워 놓고 자기 주관의 착각 또는 세상 이권을 위해서 분리해 간다면 종교 분리, 교단 분리, 교회 분리, 교인 분리까지 진행을 하다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 그 자체를 해부하는 죄까지 진행할 것입니다.
③ 주님 안에는 하나밖에 없으나, 찾아가는 과정에는 시행착오 가 존재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주님 안에는 옳은 것이 하나입니다. 녹음으로 예배 설교를 대신하며 은혜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한다면, 진정 성경과 양심으로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있는 힘껏 반대했던 분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돌이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진정 죄라고 느끼면서 분리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우상예배라고 느끼는 예배 참석을 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우상예배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예배라고 깨달았으면 우상예배가 아니라는 예배로 자기들만 예배를 분리해서 보고, 재독예배가 은혜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은 또 그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한 쪽이 양보하면 좋고 양쪽이 다 양보할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누어 예배를 분리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배당을 양보하고 누가 분리될때 유리하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돈 싸움이며 욕심 싸움일 뿐입니다. 녹음 설교를 예배시간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양보를 못하겠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주도권 문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대개가 세상 투쟁입니다.
어느 쪽이든 시행 착오는 있다고 우리는 단정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이 한 자리에서 성령과 악령으로 교차 되었으며 이런 횟수는 하루 490번이라도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계산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쉽게 결정하고 쉽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편으로 옳다고 생각되지만 열 번 백 번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신중 하다는 장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단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두는 단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장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자체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전원일치라는 교회 행정 면을 두고 말한다면, 매사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인격입니다.
분리가 되어도 끝까지 밀고 나갈 깨달음인가? 당시로는 꼭 그렇다고 해서 했지만 세월 속에 다시 생각해 볼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알고 조심을 하든, 한 두 번의 실수를 경험으로 그렇게 알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있게 연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누구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를 통해 그를 기르시는지 또는 그의 잘못 자체가 필요해서 그렇게 동원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이 옳다고 진행하는 것을 힘으로나 다른 기술을 동원하여 내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진행과 나의 깨달음이 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면 양보와 희생이라는것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⑵ 전원일치를 주장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함
교회내에서 의견이 다른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예로 든다면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경우 예배당 건물이나 교인 숫자를 확보해야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투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투쟁은 결국 혈육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문제이며 전원일치의 자유성이 교회 행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결국은 다 내주고 포기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환하게 단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뺏겼다고해서 뒤에 후회한다든지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현장에서 전투를 하고 후회해야 회개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갈등이 있는 곳마다 결국은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이면 성전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어야 했고, 신약은 내 속에 성령이 물러나실까 염려하여 건물과 교권과 돈을 양보하고 그대신 자기 속에 성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수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오물을 보고 좋아서 먹고 사람은 먹어주는 개를 보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권에 굶주린 사람은 혈육전을 통해서라도 교권과 건물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성령을 붙들고 싶은 사람은 성령을 붙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권보다 여러 배 혹은 백 배까지 되갚으실 하나님을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자기 좋아하는 것을 가지게 되어 있고, 서로 자기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가 자유성을 꺾고 강제로 하자는 말을 쉽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좋아서 따르는 그런 결정을 하자는 말을 누가 쉽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좋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행정은 효율성과 다수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적절히 절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 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 또는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 좋겠느냐 등 어떤 중대한 문제라도 결국은 다수의 생각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렇게 결정했을 때 과연 얼마나 득을 보겠느냐는 것을 계산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을 수는 없고, 또 100% 이익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⑴ 교회의 행정은 실제로, 자유성과 함께 전원일치로 갈 수밖 없음
교회의 행정만은 한 사람의 반대라도 그 반대를 꺾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전원이 찬성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율성이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의 횡포에 거대한 교회와 교단이 할 일을 포기하고 전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극단적 이상주의 극단적 이론주의를 실제로 교회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① 살아 있는교회라면 나뉘어지고 갈라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교회 분리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말하는 것이며 필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로 예를 들어보면 쉬울 듯 합니다. 분리가 없고 분파가 없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생명이 없는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천주교나 세상이 조롱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분파가 많습니다. 핵분열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옳은 것을 사람의 숫자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연구 과제로 미루면 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문제는 당장 결정하여 시행치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깨닫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가 되고 분파가 되어도 꼭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누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파 그 자체를 가장 큰 죄로 보고 분파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주장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파 자체보다 양보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결국 서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주님 안에는 이 파와 저 파가 있지만, 한 몸안에도 여러 지 체는 존재
많은 분들이 예수님만을 믿으면 되는데 왜 이 파, 저 파가 있어 분요하냐고 합니다. 그분들도 또 하나의 파가 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세상 이권 때문에 나누었다면 이는 분명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속에 감추어 놓아야 할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추어 놓은 것을 들여다 보며 정죄를 해야 하겠습니까? 본인이 세상 이권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까지 한다면 그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내심을 감추어두고 밖으로는 이 말 저 말로 명분을 진열한다면? 경찰이 수사를할 수도 없는 일이며 고문해서 밝힐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듣고 말 일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는 정죄할 일이 있다 해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행위를 그 사람 자체에게서 분리하여 잘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사람 자체를 복구불능으로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지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분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인데 깨닫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깨달은 분들과 저렇게 깨달은 분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분리를 하고 분파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한다면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읽고 연구해도 침례가 옳으며 세례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분리 불가를 내세워 침례와 세례를 섞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섞어도 되고 안 섞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런데도 분리를 한다면 그때는 분리의 폐단을 지적하여 막아야 될 것입니다.
교회의 운영을 모든 교인에게 일일이 확인시킬 것 없이 대표를 뽑아 대의정치 혹은 의회민주주의로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장로교인들이 옳다고 깨달은 대로 믿고 나가는데, 그 깨달음에서 볼 때 틀렸다고 느껴지는 침례교 정치나 감독교회 정치로 섞으라면 되겠습니까? 자기 욕심, 버릴 욕망, 명예 등등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은 몸된 교회를 나누는 참으로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가라는 길을 따로 보여주신다고 확정이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은 태아의 초기 시절 분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반대하고 두팔을 한 몸으로 묶어 버린다면 기형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왜 틀렸느냐, 왜 나누었느냐, 왜 깨닫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르냐는 문제를 가지고 한 사건 한 행동 자체를 먼저 파악한 뒤, 거기 대한 잘 잘못을 따질 일이지, 나누었다는 그 자체를 가지고 무조건 틀렸다고 해 버린다면, 교인 통일 교회 통일 교단 통일의 단계를 거쳐 결국 종교 통일까지 진행될 가장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옳은 것과 진리는 구호로만 앞세워 놓고 자기 주관의 착각 또는 세상 이권을 위해서 분리해 간다면 종교 분리, 교단 분리, 교회 분리, 교인 분리까지 진행을 하다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 그 자체를 해부하는 죄까지 진행할 것입니다.
③ 주님 안에는 하나밖에 없으나, 찾아가는 과정에는 시행착오 가 존재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주님 안에는 옳은 것이 하나입니다. 녹음으로 예배 설교를 대신하며 은혜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한다면, 진정 성경과 양심으로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있는 힘껏 반대했던 분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돌이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진정 죄라고 느끼면서 분리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우상예배라고 느끼는 예배 참석을 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우상예배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예배라고 깨달았으면 우상예배가 아니라는 예배로 자기들만 예배를 분리해서 보고, 재독예배가 은혜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람은 또 그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한 쪽이 양보하면 좋고 양쪽이 다 양보할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나누어 예배를 분리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배당을 양보하고 누가 분리될때 유리하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돈 싸움이며 욕심 싸움일 뿐입니다. 녹음 설교를 예배시간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양보를 못하겠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주도권 문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대개가 세상 투쟁입니다.
어느 쪽이든 시행 착오는 있다고 우리는 단정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이 한 자리에서 성령과 악령으로 교차 되었으며 이런 횟수는 하루 490번이라도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계산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쉽게 결정하고 쉽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편으로 옳다고 생각되지만 열 번 백 번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신중 하다는 장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단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두는 단점을 가진 대신에 다른 장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자체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전원일치라는 교회 행정 면을 두고 말한다면, 매사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인격입니다.
분리가 되어도 끝까지 밀고 나갈 깨달음인가? 당시로는 꼭 그렇다고 해서 했지만 세월 속에 다시 생각해 볼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알고 조심을 하든, 한 두 번의 실수를 경험으로 그렇게 알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있게 연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누구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를 통해 그를 기르시는지 또는 그의 잘못 자체가 필요해서 그렇게 동원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이 옳다고 진행하는 것을 힘으로나 다른 기술을 동원하여 내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진행과 나의 깨달음이 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면 양보와 희생이라는것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⑵ 전원일치를 주장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함
교회내에서 의견이 다른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예로 든다면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경우 예배당 건물이나 교인 숫자를 확보해야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투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투쟁은 결국 혈육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문제이며 전원일치의 자유성이 교회 행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결국은 다 내주고 포기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환하게 단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뺏겼다고해서 뒤에 후회한다든지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현장에서 전투를 하고 후회해야 회개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갈등이 있는 곳마다 결국은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이면 성전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어야 했고, 신약은 내 속에 성령이 물러나실까 염려하여 건물과 교권과 돈을 양보하고 그대신 자기 속에 성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 수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오물을 보고 좋아서 먹고 사람은 먹어주는 개를 보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권에 굶주린 사람은 혈육전을 통해서라도 교권과 건물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성령을 붙들고 싶은 사람은 성령을 붙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권보다 여러 배 혹은 백 배까지 되갚으실 하나님을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자기 좋아하는 것을 가지게 되어 있고, 서로 자기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