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찾는 것은 바로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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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7) 교회의 모습은ꡐ전원일치ꡑ
① 전원일치라는 과정을 가져야 오류도 수정할 수 있음
재론되는 말이지만, 교회는 다수결로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원일치가 되어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지라도 전원일치제라면 한 사람의 이의와 한 사람의 수정제의로 교회의 결정을 다시 한번 과제로 올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다수결 역시 그럴 수 있지만 기준 숫자 이상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으로 교회를 위기 때마다 구원했던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생각한다면 다수결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② 중요한 발언은 한 사람을 통하여 나옴
우리는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할 때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 전부를 살린 경우를 늘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또 하나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란 항상 옳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엘리야 한 사람으로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라는 사람에게는 항상 옳고 바른 것이 전달된다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혼자서 택한 백성 전부를 책임졌던 1인 절대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이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썼기 때문에 그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고 이 땅 위의 인간이란 누구든지 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십자가상에 있던 강도도 옳게 깨달아 그 순간에서 옳은 의인이 될 수 있고, 노아가 홍수 심판을 이기고 완전 승리를 했던 그 자리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역사라는 점까지를 고려하라는 것이지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영원 불변 완전을 맡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③ 투쟁과 분리보다 연구의 확신이 분화를 가져와야함
교회 갈등의 대부분 모습이 투쟁이며 그 투쟁의 결과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어느 것이 옳은지를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고 확신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 결과가 같으면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았으니 큰 성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다르면 그리고 그 결과가 다른 상태로는 한 예배당을 운영할 수 없다면 각자에게 주신 역할 맡기시는 사명이 달라서 그러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집에 7남매가 한 솥밥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씩 결혼해서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투쟁과 분리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분화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오히려 성장일 수 있고 더 넓은 범위로 복음을 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척과 모든 교회 분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개척과 분화를 가장하여 자기 사업을 도모하는 교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며,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최종 결정을 한 뒤에라도 또 돌아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그 열심 그 충성, 그 계속성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 천주교가 세계적 단합과 일사분란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싸움만 있는 기독교계를 조롱하며 천주교는 화평의 봉사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가 수도 없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여 이루고 확보한 재산과 교권을 가졌을때 이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문명시대가 되고 보니 이미 벌어놓은 돈으로 폭력배들이 합법적 회사를 운영하여 변모한다는 세상뉴스와 같은 수준에서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추한 모습, 분명히 교회의 추한 모습은 예배당을 두고 싸우는 극단적인 투쟁들이지만, 그 흙탕물 속에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고 전 인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으려는 그 중심이 지극히 미약하나 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꼭 같은 사람으로 보지만 그 속에 그런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원일치라야 합니다.
① 전원일치라는 과정을 가져야 오류도 수정할 수 있음
재론되는 말이지만, 교회는 다수결로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원일치가 되어 신사참배를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지라도 전원일치제라면 한 사람의 이의와 한 사람의 수정제의로 교회의 결정을 다시 한번 과제로 올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다수결 역시 그럴 수 있지만 기준 숫자 이상을 넘겨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으로 교회를 위기 때마다 구원했던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생각한다면 다수결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② 중요한 발언은 한 사람을 통하여 나옴
우리는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할 때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 전부를 살린 경우를 늘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또 하나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바른 깨달음이란 항상 옳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엘리야 한 사람으로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라는 사람에게는 항상 옳고 바른 것이 전달된다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혼자서 택한 백성 전부를 책임졌던 1인 절대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이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썼기 때문에 그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고 이 땅 위의 인간이란 누구든지 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십자가상에 있던 강도도 옳게 깨달아 그 순간에서 옳은 의인이 될 수 있고, 노아가 홍수 심판을 이기고 완전 승리를 했던 그 자리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역사라는 점까지를 고려하라는 것이지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영원 불변 완전을 맡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③ 투쟁과 분리보다 연구의 확신이 분화를 가져와야함
교회 갈등의 대부분 모습이 투쟁이며 그 투쟁의 결과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어느 것이 옳은지를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고 확신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 결과가 같으면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았으니 큰 성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다르면 그리고 그 결과가 다른 상태로는 한 예배당을 운영할 수 없다면 각자에게 주신 역할 맡기시는 사명이 달라서 그러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집에 7남매가 한 솥밥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씩 결혼해서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투쟁과 분리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분화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오히려 성장일 수 있고 더 넓은 범위로 복음을 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척과 모든 교회 분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개척과 분화를 가장하여 자기 사업을 도모하는 교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며,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최종 결정을 한 뒤에라도 또 돌아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그 열심 그 충성, 그 계속성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 천주교가 세계적 단합과 일사분란을 자랑하며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싸움만 있는 기독교계를 조롱하며 천주교는 화평의 봉사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가 수도 없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여 이루고 확보한 재산과 교권을 가졌을때 이제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문명시대가 되고 보니 이미 벌어놓은 돈으로 폭력배들이 합법적 회사를 운영하여 변모한다는 세상뉴스와 같은 수준에서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추한 모습, 분명히 교회의 추한 모습은 예배당을 두고 싸우는 극단적인 투쟁들이지만, 그 흙탕물 속에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고 전 인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으려는 그 중심이 지극히 미약하나 섞여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꼭 같은 사람으로 보지만 그 속에 그런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원일치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