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총공회의 독립 찬송가 사용
서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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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5. 독립 찬송가 사용
1) 현재 제기되는 공회 교회의 찬송가 문제
일반 교계는 교파를 막론하여 찬송가를 600여곡으로 통일해서 사용한지 약 20년입니다. 공회는 이전에 사용하던 새 찬송가를 중심으로 201곡으로 공회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회의 200곡 찬송을 위주로 찬송을 부르신다면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내면의 깊은 세계를 유지하시고 계시든지 아니면 그리하시려고 많이 애를 쓰시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찬송 중에서 어느 찬송에 눈이 많이 가느냐는 것도 보이지 않는 신앙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00곡 중에 좀더 깊은 찬송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할 수 없어 200곡 찬송가는 가지고 있으나 그 200곡 중에 가장 밖에 있는 것을 애용하며 탈출의 기회만 생각하는 분도 없지 않습니다. 발전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안으로 들어오는 분이 복되다 하겠습니다.
현재 교계가 사용하는 600여곡 통일찬송가는 교계의 변덕병 때문 나온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찬송가 가사 변경입니다.
입에 익을 만하면 바꿉니다. 왜 바꾸는지 도무지 그 이유가 이렇게 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애국가의 가사가 벌써 몇십년째 계속 그 가사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에 보우라는 뜻이 애국가 외에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렇다고 쉽게 바꾸는가? 세상 나라도 공식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나 명칭 또는 그 표현들은 오랫동안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바뀌는 것을 타락 속화라는 이름으로 늘 조심시키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생각 한다면 공회 신앙노선이 찬송가 가사를 바꾸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이해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변덕스럽게 무엇이든 역사성 없이 계속성 없이 조삼모사로 변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은 체질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그러하고 믿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우리 민족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면 불신자일 것이고, 그보다는 안 믿을 때 옛사람의 요소인 변덕성을 아직 우리 교회들이 경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공회의 노선의 변화만을 가지고 헤아려도 벌써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소속 교단의 방침을 따르는 원칙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싫다면 소속을 떠나면 되고 좋다면 따르면 됩니다. 소속은 좋으나 '찬송가'라는 단일 사안에 대하여 이의가 있다면 '질문'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떠난 분들이 계셨습니다. 좋아서 지금까지 따라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질문'이 계셨던 분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미 백목사님 생전에 '의문'이나 '이의'가 계셨던 분들은 충분히 제기했고 설명은 지나칠 만큼 이루어졌습니다. '찬송가'라는 단일 사안을 두고 더 이상의 재질문이 필요 없어야 마땅한데도 아직까지 '의문'이 있다면 '양심 문제'입니다. 분명히 옳은 것을 작은 '이권' 때문에 또는 아무것도 아닌 '기호(嗜好) 문제'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사참배와 같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환란이 온다면 어떻게 할 사람인가?
2) 왜 공회 찬송가인가?
요약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과거도 그러했지만 오늘은 그 기승이 하늘을 진동하고 있는 교회 타락의 3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⑴ 영웅심, 명예심이 큰 일
소위 전문 분야를 가진 이들, 신학자 등 한 방면에 재주가 있는 이들은 무언가 하나를 이루어야 할 강박 관념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다음 가는 찬송가를 자기 손에서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90점짜리 신편찬송가를 80점짜리 새찬송가로 그다음은 기어코 '개정' '수정'등의 이름을 붙여 30점짜리 통일찬송가를 만들게 됩니다.
찬송가 방면에 전문가들이 이유를 제조하여 제시하는데 누군들 수긍하지 않겠는가? 말이 통하지 않는 무식한 총공회니까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과 같은 논리를 단지 신앙 본능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식한 타 교단들은 '팥으로 메주를 쑤게 된다'는 논리를 전문가들이 펼칠 때 이해가 되고 그 글들을 읽을 재주가 있으니 자기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전문가들의 논리에 결국 삼켜지는 것입니다. 반식자 우환이라는 말이 바로 이때 써먹을 자연계시일 것입니다.
교인들은 찬송가를 변경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 라고 으레 '박사'를 믿고 '학자'를 의지하고 다 맡겨 버렸고 신학자들과 해당 전문가들은 자기 이름, 자기 손을 거친 명품을 만들어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중심인 '악'이 들어 일을 냈고 그 증거는 '100점인 듯' '만년이나 가야 할 명품인 듯' 자랑하던 그 작품들이 몇 년 가지 않으면 또 개정되어야 할 논리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개정 20년만에 현재 교계는 ‘21세기 찬송가’가 필요 하다며 또 개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웅과 명예 학위를 가진 이들이 나서서 이번에는 자기들 차례라는 것입니다. 천하 교회가 다 속고 따라 가도 '진리' 하나를 예리하게 또 일관되게 주목하는 공회 교회들이라면 어림도 없는 사안입니다.
⑵ 학자들의 영웅심과 만나 음모를 하고 있는 세력이 돈
학자들의 성취감, 영웅들의 호기가 잔뜩 기회를 엿보고 노리고 있는데 '돈' 냄새를 맡는 데는 아주 날랜 교단주 교단 집행부 교단 살림꾼들이 이 대목을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을 회원으로 본다면 그 숫자는 단일 품목을 판매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대단히 큰 시장입니다. 찬송가가 바로 그러합니다. 교단끼리 넘어갈 수 없는 신앙노선적 입장들이 많았으나 1천만 기독교인이, 당시로는 아마 5백만 기독교인이 단번에 찬송가를 구입한다는 사실은 상품을 꾸준히 바꾸어야 할 현실적 이유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인 돈 욕심이 한국 교회를 다 삼켜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찬송가 판매 수입금의 분배 문제가 빙상의 일각으로 교계 신문에 나오곤 했습니다. 찾아보시면 능히 짐작하리라 봅니다.
지금도 돈 되는 일, 돈 남는 일, 주머니에 뒷돈 들어갈 구멍만 막아 버리면, 당장에 풍비박산이 나게 됩니다. 현 교계에 돈이 진리지 성경이 진리입니까? 성경이 하나님과 맞설 상대로 하나를 뽑은 것이 바로 '돈'입니다. 이곳이 물질계이니 이연하지 않겠습니까?
⑶ 영웅심과 돈 욕심 둘만 가지고는 불안하니까 '통일 구호'가 나서서 마무리
자기 중심의 명예심,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 이 중 하나만 해도 일을 충분히 낼 수가 있을 것이지만, 교회를 통째로 타락시키는 일은 너무도 큰 중대사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도록 가장 큰 원수 '통일 구호'가 나선 것입니다. 이 통일 구호라는 것은 기독교만 잡고 기독교만 죽이는 기독교에게만 일대 원수입니다. 명예나 돈, 둘을 제쳐 놓고도 그 둘을 포기하고라도 큰 일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일 구호가 명예와 돈 둘과 합했습니다. 그렇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 아닌가? 교리와 신앙노선이라는 문제는 자고로 교회가 목숨을 걸어야 하고 교회가 간판을 내리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인데 '통일 구호'를 앞세워 각 교단과 교회들이 스스로 '교리와 신앙 노선'을 자기들 손으로 없애도록 해버렸습니다.
찬송가 하나가 문제겠는가? 그 문제 때문에 이 3가지 세속화 절대 요소가 뭉친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문제는 세 가지중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3가지가 모인 것은 완벽하게 '찬송가'를 넘어서야, 그다음 넘을 산, '성경 개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교단 통합, 기독교 통합'으로 나갑니다. 그다음은? 종교 통일입니다. 그다음은? 종교와 세상 통일입니다. 그다음은? 기독교까지 포함된 종교가 통일된 세상 속에 한 분자가 된 '재림 당시'가 됩니다. '재림 시점'이 된 뚜렷하고 명백한 '징조'입니다. 두려운 것은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장로교 안에서도 교리가 너무도 뚜렷하게 다른 기장, 통합, 합동과 고신 등이 합하여 찬송가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불교 유교 기독교를 합해서 역사 이래 가장 큰 업적을 만들 시작의 노선이라고 보는 것이 이곳의 단호한 입장입니다. 죽을 일 아니면 따라 가는 것도 있기 때문에 성탄절 행사를 아직도 폐하지 않고 그럭 저럭 마지 못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쉽지 따라 가지 못할 일이 있는 바, 성경 개정이 그 첫째이며 찬송가 변경이 그 둘째에 세울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3) 배웠고 들었던 공회 소속 교회들의 심판은 다를것
한 의인, 한 성자, 한 선지자가 우리 살던 성읍에 있었고 그가 마지막 자기 증거하는 말씀 때문에 결국 강단에서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전해 준 복음, 그렇게 전해 준 '복음을 걸어가는데 필요한 주의'를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쉽고 간단하여 주일학생도 알 만한 기초 산수가 바로 '통일찬송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문제가 되다니요? 공회 밖에서가 아니고 공회 안에서. 찬송가 문제가 또 다시 재론이 되고 아직도 의문이 남았다니요? 그것이 몇 년 전에 예수 믿은 초신자, 첫신앙의 인물들에게서가 아니라 목회자들에게서!
아닙니다. 잘못 들었을 것입니다. 공회 이름이 붙은 교회이며 교역자라면 피치 못할 다른 사정, 말못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었으나 이 명백한 죄가 알고 보니 예수님의 증거를 듣고 보니 '구원에 사용된 필수 불가결한 양식'이었고, 동시에 영감 인도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통일찬송가'를 아직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은 지금 다윗과 같이 한 시대가 진동할 구원 준비에 한갖되게 순종하는 남다른 하나님의 특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공회는 그들과 달리 '공회찬송가'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회찬송가만 사용할 시대적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한 총공회 교회에 이해 못 하는 타 교단 출신 교인들 몇 명이 오해하고 말고 하는 정도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회 찬송가 외에 다른 찬송을 불러보니 더 은혜가 되더라는 3살짜리 아이의 간식 타령을 할 정도로 그렇게 신앙 어린 교역자는 없을 것입니다.
4) 독립 찬송가 사용은 백영희목사님의 결정
⑴ 여러 사람들의 요청을 검토한 것
한국 교회가 함께 불러오던 찬송가들, 그 찬송가들 중에서 어느 곡들을 선택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어느 목사님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도 들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의 애창 찬송가도 들어 있습니다. 다른 집사님의 간청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백목사님이 했습니다. 반대측 목사님의 애창 찬송가가 들어있다고 중간반측에서 공회찬송가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 집사님 가정의 애창 찬송가가 들어있다고 공회 찬송가의 권위가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집사님의 간청 때문에 공회찬송가가 고신측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여러 층, 여러 종류, 여러 시각, 여러 입맛, 여러 음감, 여러 청감까지를 다 고려하고 마지막 기도하여 결정하였으니 더욱 더 은혜롭고 더욱 더 신앙 어린 우리까지도 감사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애창 찬송가를 백목사님께 추천하면서 돈을 주고 통과 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주지도 않을 분이지만 그렇다고 받기를 하실 분인가? 집사님 가정의 애창곡을 요청드리면서 인정상 고려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있는 분입니까? 어느 집사님의 간청에 고신의 입김이 있었다고 오해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 신앙 성향들을 다 고려하고 여러 말씀들을 다 상고하며 주님의 뜻을 오랫동안 찾다가 확신하고 마지막 한 곡씩 한 곡씩 다 들어보고 확인하고 최종 결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가족 중에 찬송가를 만드는 과정에 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 옆에는 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부산공회에 있지 않습니다. 통일찬송가를 사용하는 타 공회에 소속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부산공회와 목사님의 가족을 거명하고 있는가? 백목사님께 받은 은혜를 측량할 수 없이 많았던 분 중에서 자기 주관의 오판으로 오해했던 분이 지나치면서 백목사님을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다도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목사님의 가족 중에는 우리 일반 교역자들이 따라 가지 못할 높은 신앙 차원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현 총공회 교역자 중에서는 그만한 신앙이 없다고 할 분이 바로 찬송가를 만들 때 심부름하고 백목사님과 한 자리에 앉아서 목사님이 시키는 일을 수종들었던 10여명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⑵ 공회 찬송은 백목사님 신앙노선을 가장 잘 요약 표현되는 예.
공회 찬송은 완제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통일찬송가가 명백히 죄가 되고 해가 되며 삐뚤어진 산물이어서 그 통일찬송가를 피해 차선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차선일 수밖에 없다고 차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닙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총공회 백목사님의 신앙과 평생의 역량이 집결된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아껴볼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렇다는 증거, 그렇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독립 찬송가 사용과 관련된 설교
한국 교계의 '찬송가'에 대한 입장을 반대했던 백목사님의 신앙 걸음, 그 걸음을 통해 백목사님의 신앙노선 전반에 일치하는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는 설교입니다.
한국 교계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찬송가에 대하여 성경 새번역 버금가는 정도로 비판했던 것이 백목사님의 신앙 입장이었습니다. 찬송가에 대한 백목사님의 신앙 입장이 현재 '공회찬송가'입니다.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교계에서 따돌릴까 두려워하던 몇몇 공회교역자들 중에서 엉뚱하게도 그 찬송가는 다른 사람이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소문을 내고 그래서 공회찬송가를 사용치 않는다는 논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하였고 '부활'이라는 사기극으로 이룬 것이 기독교라고 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우리 공회찬송가가 백목사님이 직접 주관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 때문에 '통일찬송가'를 사용한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시비는 그 시비에 응하는 것이 벌써 절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시비가 될 필요도 없는 사안이지만 혹 한 분을 위해서라도, 또는 훗날 더 큰 속화를 막는 '안내판'이라도 되겠다는 뜻에서 다음 설교 내용을 발췌 소개합니다.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취사 선택할 것이 있더라는 입장 때문에 공회 신앙노선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버리는 사람은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이 주관하지 않았던 찬송'이라며 공회찬송 대신 통일찬송가를 사용한다면, 그는 백목사님이 주관했던 모든 신앙노선을 따르겠다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유독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힘써 버리는 분들이 '찬송가'에 대한 자기 변호에서는 이런 '시체 도적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설교록에까지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내용입니다. 백목사님이 '정치적 발언'으로 설교했다면 백목사님의 모든 흔적을 자신들에게서 지우시고, 그가 영감에 붙들려 자신들을 인도했던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다면 회개를 하시라는 권고, 소개문입니다.
일시: 1987년 4월 7일 화요일 새벽예배
본문: 계14:9-12
설교: (찬송가에 대한 설교가 전반부였고, 따라서 전반부 설교만 그 대로 소개합니다.)
( 찬송가에 대한 주의깊은 통찰 )
그전에는 찬송가에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기록돼 있었는데 지금도 찬송가에 있습니까? '새찬송가'에 있어요? 주기도문이 끝에 있습니까, 앞에 있습니까? 찬송가가 너무 가사가 변해가고 또 장수도 변해져 가니까 우리가 익혀 놓은 것이 다 헛일이 되고 또 익혀야 되고 익혀야 됩니다.
( ① 찬송가 변동과 변질의 역사 )
우리가 '신편찬송가'를 보다가 '합동찬송가'를 보게 될 때에 이것이 좀 더 구비하고 더 정확한 그런 찬송을 하게 되는가보다 하고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또 합동찬송가가 없어지고 새찬송가가 나와서 좀 얼떨떨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새찬송가에 가사가 좀 틀린 것이 있어도 그래도 조금 발달적이겠다, 발전적이겠다, 좀 더 정확한 걸 찾아간다...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 뒤에 또 개편찬송가가 또 나왔습니다. 개편찬송가는 보니까 개인의 마음대로 너무 찬송가의 뜻을 자주 변개시켜서 처음에 창작한 사람의 근본대로도 되지 않았고 또 교리와 신조에도 바뀌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또 '통일찬송가'가 나왔는데 그 찬송의 느낌이 각각 다르겠지만, 그 통일찬송가는 너무 가사가 현저하게 바꾸어져서 너무 엄청나게 그렇게 바꾸어졌습니다.
( ② 찬송가의 의미 )
찬송가는 사람이 지은 하나의 교리라 신조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깨달은 대로 자기가 믿는 대로 이렇게 해 놨기 때문에 교리라든지 신조라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과 같이 그렇게 바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잘못돼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가 정확 무오한 성경으로 믿지마는 찬송가는 그것을 정확하다, 틀림이 없다는 무오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 ③ 공회찬송가 추진 동기 )
그렇지마는 그래도 일반 어린 신자들은 찬송가를 성경 다음가는 성경으로 이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찬송가에 가사가 잘못돼 있으면 이는 어린 교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성경을 보게 하는 거와 같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 해서 아무래도 우리가 새로 만들 실력은 없고, 그 대신 처음에 은혜 받아서 영감으로 지은 그 사람들이 근본 저술한 그대로 우리가 옮겨 받아서 찬송을 하자, 또 이것이 성경에 틀렸나 맞았나 그것을 봐서 성경대로 해 가지고 이 찬송가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도록 하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세상이 자꾸 변질되어 나가지만, 두 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보면, 두 가지로만 구별하면 잘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모든 사색도 연구도 비판도 평가도 이렇게 하는 그런 노선도 있고 또 하나님보다도 먼저 사람이 가깝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비위를 맞춰야 된다고 해서 사람 중심 사람 위주로 이렇게 모든 것을 사색하기도 하고 연구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평가하기도 하는 이런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노선이 됩니다. 길이 되는 것입니다.
( 찬송가 제작과정 )
( ① 원본과 번역원본에 충실키 위해서 )
그래서 아무래도 이걸 좀 어떻게 해야겠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이 찬송가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그 저자, 또 우리 상고 때부터 내려오는 족보 그런 것을 좀 따져 가지고, 이렇게 자꾸 세상 따라서 이렇게 타락해 가지 말고, 은혜 받아서 찬송을 지은 그 당시 그 사람들의 은혜를 그대로 우리가 전달해서 은혜 받고 전달해 가자 하는 그런 뜻에서 위원들이 나서 가지고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수고를 제일 많이 한 분은 서영호목사님 입니다. 바쁜데도 1주간 동안을 꼬빡 기울여 모든 찬송가 족보도 참고하고 또 뭐 원어도 참고해 가지고 하는 대로 또 수정을 했습니다. 또 다른 위원들이 이제 목사님들과 또 평신도들 중에 찬송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여러 날 동안을 그렇게 합동 연구를 하고 대조를 했습니다.
( ② 찬송가 곡의 숫자 )
찬송가 안에 이렇게 많은 찬송을 뜻 없이 이렇게 그 곡의 수를 많이 넓히면 우리가 다 부르지 못하는 그런 찬송들이 있어 복잡하니까 거기서 예배드리는 찬송으로만 440여곡을 간추렸습니다. 물론 개인이 부르는 거야 얼마든지 자기 개인주의고 또 성경에 위반되지 않는 그런 찬송은 자기가 지어 가지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는 다 내버려두지만 우리가 표준으로 삼는 예배 찬송으로서는 그렇게 간추려 본 것입니다.
(또 그 순서는, 첫째는 하나님의 존영에 대해서 영광에 대해서 하고, 그거 다 하나님의 자체에 대해서 먼저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데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순서가 이렇게 바꿔졌습니다. 그런 것을 잘 이해하십시오. 1987.5.9.)
( ③ 공명심을 특히, 극히 주의하며 )
그러나 이렇게 찬송들을 간추려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슨 별개의 찬송을 하나 만들어 보려는 공명심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아닙니다. 첫째 성경도 속화되어 번역들이 자꾸 이상하게 타락해 나가지 또 찬송도 그리되어지지, 그런데 이 둘이 함께 보조를 맞춰 내려가니까 어린 교인들이 뭐인지를 모르겠고 또 후배들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에 간추려 본 것이 440여곡이었습니다.
작업을 할 때에 우리가 이 찬송가를 만드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 우리 선조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것, 이미 지어 놓은 그 찬송가를 그대로 받아 나가려는 것이며, 또 비성경적인 표현이 섞여 있는 것은 제거하고 성경에 맞추려는 것이며, 또 단순하게 부르고 사용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앞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세계 교회들이 다 한가지 단일 찬송을 쓰도록 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교회가 단합해서 단일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좋기는 좋지마는 그보다도 찬송가가 성경대로라야 하기 때문에 성경대로의 찬송가로 이렇게 다 통일됐으면 좋겠다, 그리될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맞이해서 사용을 하겠으나, 그때까지는 부득이 간추려 몇장을 빼 가지고 우리가 예배 찬송으로 불러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만든다는 것이 아니고 있던 찬송가 중에서 다시 주워 모으고 고쳐서 한다는 우리 의도를 찬송가 서론에 발표를 하고, 좀 더 수정할 것이 있어 가본으로 열 권만 만들어 놨습니다. 이 가본이 완성품이 되면 이 찬송가를 우리 세계 교회들이 불렀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계 교회는 찬송에 능한 분들이니까 따라 올 리는 없고 그래도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회만큼이라도 이렇게 이 찬송가를 사용해야 되겠다 싶습니다. 우리 공회에서만 사용하는 찬송가라도 그렇게 완전한 가본을 만들라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그 가본도 완성이 덜 됐습니다. 그래도 많은 시간을 걸쳐서 수고한 사람들은 많이 수고를 했습니다.
( 찬송가 통일에 대한 문제 )
( ① 찬송가에까지 따라 붙은 돈 )
물론 교계에서 '통일찬송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들도 우리와 같이 어쨌든지 단일 교회이기 때문에 단일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다, 단일 대속, 단일 성경, 단일 또 교회, 단일 찬송가 이렇게 되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정신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그렇게 하게 되면 찬송가를 판매하는 판권이라는 돈이 왔다 가고, 이 돈은 참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을 찬송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보면 돈이 여기 붙었기 때문에 나중에 돈벌이가 되겠다 해서 이 찬송가를 통일시키고 다른 찬송가는 다 없애 버리자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만드는 일에 돈 문제가 생겨서 우리는 판권을 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면 판권을 우리에게 팔면 우리가 얼마를 주고 살 것이고 또 이 찬송가 만들어 가지고 이익이 나면 그때 이익 배당하겠다 이렇게 서로 의논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은 모르지만 우리나라 전국 교회가 찬송가를 전부 돈을 주고 사 가지고 전부 이렇게 해서 이제 통일찬송가를 만들었습니다.
( ② 유행을 좋아하는 교계의 타락상 )
또 만들어진 통일찬송가는 그 가사가 엄청나게 틀리니까 그걸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뭐 아무나따나 사니까 뭐 찬송가야 성경도 아닌데 합니다. 이래서 찬송가가 제2의 성경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상관이 없고 또 보수성이 적고 시대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는 시대를 따르는 사람, 무엇이든 보수성이 없는 사람, 또 옳고 그른가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사람, 또 잘못된 사상이 하나 들어오면 그것 때문에 자기가 현실이라는 실상을 당했을 때 그 사상이 자기에게 큰 미혹이 됐다는 그런 것을 생각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그만 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자꾸 유행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좀 어폐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지금 이 찬송가가 유행입니다. 유행이라 해도 누가 정죄를 못 할 만치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행이라, 속화라 이렇게 할 수 있을 만치 이렇게 돼 나가고 있습니다.
( 공회찬송가 출간 )
( ① 찬송가 출간 자유가 없는 교계 )
새찬송가를 사용하던 교단이 통일찬송가에서 이권 배당도 받았는데, 만들어 놓고도 이 통일찬송이 너무 허무하다 해서 따로 몇 가지를 더 넣자고 했다가 시비가 나고 중지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데 우리도 이렇게 사백 몇 곡을 해 가지고 찬송가를 만들어 쓰려고 하면 시비가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찬송가 지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사 왔는데 왜 도용을 하느냐?' 시비가 나면 저작법에 걸린답니다. 한 일억원 정도면 우리가 하겠는데 돈이 그렇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일 허락하신다면 언젠가 출판할 수 있는 자유의 때가 오지 않겠나? 또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힘을 쓰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좋은 찬송가를 좀 힘있는 누구를, 실력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에게 줘서라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 그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우리대로는 좀 수정할 대로 수정해서 그래도 좀 바르다 한 것을 이렇게 만들어서 보장을 해 놓자 하는 그 이념으로 낙망하지 않고 만들고 있습니다.
( ② 교계와 돈 시비를 피하고 출간되는 공회찬송가 )
언제 우리가 문공부에까지 허락을 맡아 가지고 그럴지도 모르겠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도 안되겠다 하여, 찬송가 몇 장만을 더 간추려 뽑아 가지고 몇 장만을 인쇄해서 사용하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100곡으로 생각을 했으나 은혜 받는 찬송들이 너무 많이 없어지겠고, 하다 하다 보니까 192곡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머리말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없고 그저 뽑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은 하지만 그것을 팔지 않고 교인들에게만 한 권씩 나누게 되면 아무 법적 문제도 없습니다. 한 권에 4백원 정도로 제작비가 들 것입니다. 그래서 요번 주일 안으로 나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새찬송가'를 제일 좋아하는데, 통일찬송가가 나온 뒤 새찬송가는 다 회수가 되었으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새찬송가를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내막으로는 불법으로 인쇄해서 나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뒤에 말썽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찬송가에서 몇 곡을 뽑아서 우리 교단 교인끼리 나누어 보는 것이야 시비하겠나? 만일 시비가 나면 그때 하는 대로 해보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6) 찬송가 문제와 교인 관리 문제
⑴ 공회찬송가 문제는 교계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
공회찬송가 문제는 한국 교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점을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교계가 통일찬송가를 만들 때 분위기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각교파별 감시팀을 만들어 통일찬송가를 사용치 않는 교파에 대하여는 기존 찬송가의 출판 저작권을 확보하고 있던 교계에서 법적 대응을 강력하게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서부교회 백목사님은 한국 교회 최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나 공회찬송가 출간으로 교계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걷겠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교계는 공회찬송가 출간시 머릿말에서 행했던 여러 변명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결국 예외로 인정하고 덮어 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백목사님이 통일찬송가에 대하여 그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에 맞서봐야 이길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보수측 교단들에게 영향을 미쳐 통일찬송가 시행이 깨질까 하였던 것입니다. 즉, 공회찬송가에 대하여는 모든 면으로 앞장 서서 시비를 하고 나설 외부 교단들이 오히려 일체 언급이 없었습니다. 교계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왜 공회 안에서만 이렇게 문제가 되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⑵ 공회 내에 찬송가 사용 문제는 전도에 불편 하다는 주장 때 문
신학을 아는 사람들, 교계의 향방을 아는 사람들은 백목사님이 지적하는 통일찬송가의 구조적 잘못에 대하여 아무 할 말이 없었으나 타 교단 교회들 중에서 교인들을 모아 와야 하는 분들이 공회 교회들과 교인 문제가 발생되면 찬송가를 가지고 말도 안 되는 고성방가로 자극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단이나 이상한 교회라는 표현이 해당될 때와 안 될 때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며 무식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공회찬송가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들 소속 신학교와 교단 지도부가 말릴 일이만 자기들 교회로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확보하겠다고 그냥 고함을 질러 댄 것입니다.
이렇게 타 교단 교회들의 고함 소리에 놀라 공회 소속 교회로 오던 교인들이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것이 공회의 찬송가 문제 본질입니다. 공회찬송가 자체를 시비하는 것은 양심이 아닐 것입니다. 공회찬송가는 통일찬송가에 비하여 신앙노선 문제 차원에서 옳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옳기는 옳지만 교인 전도 문제가 발생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라는 대처 문제만이 논의되어져야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⑶ 전도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고
신앙노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못할 일도 없는것
사실 전도를 위해서는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주일날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는 논리도 가르친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찬송가를 변경하는 것도 얼마든지 공회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되겠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때에 바꾸고 어떤 때에는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허용이 되고 또 신앙노선을 지키는 범위 안이라는 것이 먼저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변경이나 변화한 면만으로 말한다면 총공회 백목사님만큼 많이 바꾸고 변경한 분은 없습니다. 교계 어떤 잘나가는 교회라도 공회 정도로 광범위하고 전면적으로 마구 교계 일반 상식 관례를 다 휘저어 버린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만큼 그렇게 미련스럽게 과거것을 고집하는 곳도 없습니다. 남녀 좌석을 분리시켜 앉는다는 것이 도대체 언제 없어진 고래 폐습이라고들 알고 있을 터인데 공회는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⑷ 변경할 것과 변경치 못할 것에 대한 근본 시각과 자세가 문 제
다른 진영이 주일에 차를 사용하게 된 것과 공회가 주일에 차를 사용하도록 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 동기가 다르고 과정이 다르며 그 결정의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다른 진영은 교인들이 하나 둘 타기 시작하니까 교인들 형편 따라 시대의 분위기를 맞추어 허용한 것입니다. 허용할 수 있는 것인지 끝까지 막아야 하는 것인지, 허용한다면 어떤 시각에서 어떤 조건으로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재 공회 외부 모든 교파들의 '변경' 성질입니다.
바꾸는 것이 교인 확보에 필요하고 교회의 외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불경도 읽을 수 있고 제사도 지낼 수 있으며 북한 정권하에 소속하여 통일의 기수가 될 수도 있고 강단을 없앨 수도 있으며 예배당 안에 건강 강좌를 열 수도 있습니다. 밤무대를 강단에 올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고생이 엉겨붙는 콜라텍이라는 밤무대가 예배당 내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 별로 없고 대학의 써클 활동과 교회의 청년 활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 하나 떼어 놓고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고 따진다면, 해도 된다고 할 것도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못 하게 막을 것도 거의 없다는 것이 뻔한 결과입니다. 술 담배 도박 마약도 하지 말라고 성경으로 단정할 분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성경으로 교리로 신앙노선으로 또한 교회의 은혜면으로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교회의 근본 자세 등으로 먼저 생각해보고 기도한 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라 하여 그리했느냐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느냐, 해도 되는지를 성경 교리 신앙노선 은혜면으로 먼저 철저히 살핀 다음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했느냐는 문제가 문제입니다.
교회가 추도식을 하여 안 믿는 가족은 교회식 제사를 드렸다고 인사하고 교인들은 예배로 참석했다 하여 위안하고 있지만, 이 문제도 천주교가 제사를 '한국 고유 효법의 한 모양'이라고 하여 전도의 길을 터 준 것을 보고 기독교는 예배로 덮어 버렸던 것입니다. 1991년 통합측 교단 최고위급 회의에서도 공회의 추도식 금지 입장을 전해듣고 확인했던 교회사의 상식입니다.
⑸ 지금 찬송가 문제 하나로 논하지만, 실은 전반적 문제 전부 가 포함
철없는 타 교단 일부 교인들이 회원 모집을 위해 한번 고함 지르는 소리 때문에 찬송가를 변경하느냐는 문제가 공회에 제기되었으나 그 문제는 그 교회와 교역자의 전반적인 신앙 성향과 자세에 관련된 일부 표현일 뿐입니다. 찬송가를 통일로 변경하는 분들은 수백 수천이 넘는 사안에서 전부 일반 교회의 뿌리 없는 바람 몰이를 따라 갈 것이고 반대로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 풍조 거부가 바로 성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단체 속화, 속화 일변도, 속화 매진에 휩쓸리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입니다.
공회의 찬송가 문제는 공회의 모든 진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시대에 밀려서 할 수밖에 없느냐, 말단의 신앙 없는 교인들이 요구하면 그들을 끌어앉히기 위해 그냥 따라 갈 수밖에 없느냐? 만일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는 교회가 존립될 수 없고 차라리 신사참배를 하게 되면 신앙어린 사람들을 그들의 어린 차원에서라도 길러가고 또 앞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는 1939년도의 문제가 오늘 발생된다면, 한국 교계 전체를 따라 또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문제를 이웃 교회 교인들과 발생되는 문제로 인식을 하면서 동시에 모든 역사에 나타났던 교회의 타락사를 그대로 따라 가는 속화의 길을 함께 보았으면 합니다.
1) 현재 제기되는 공회 교회의 찬송가 문제
일반 교계는 교파를 막론하여 찬송가를 600여곡으로 통일해서 사용한지 약 20년입니다. 공회는 이전에 사용하던 새 찬송가를 중심으로 201곡으로 공회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회의 200곡 찬송을 위주로 찬송을 부르신다면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내면의 깊은 세계를 유지하시고 계시든지 아니면 그리하시려고 많이 애를 쓰시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찬송 중에서 어느 찬송에 눈이 많이 가느냐는 것도 보이지 않는 신앙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00곡 중에 좀더 깊은 찬송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할 수 없어 200곡 찬송가는 가지고 있으나 그 200곡 중에 가장 밖에 있는 것을 애용하며 탈출의 기회만 생각하는 분도 없지 않습니다. 발전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안으로 들어오는 분이 복되다 하겠습니다.
현재 교계가 사용하는 600여곡 통일찬송가는 교계의 변덕병 때문 나온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찬송가 가사 변경입니다.
입에 익을 만하면 바꿉니다. 왜 바꾸는지 도무지 그 이유가 이렇게 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애국가의 가사가 벌써 몇십년째 계속 그 가사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에 보우라는 뜻이 애국가 외에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렇다고 쉽게 바꾸는가? 세상 나라도 공식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나 명칭 또는 그 표현들은 오랫동안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바뀌는 것을 타락 속화라는 이름으로 늘 조심시키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생각 한다면 공회 신앙노선이 찬송가 가사를 바꾸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이해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변덕스럽게 무엇이든 역사성 없이 계속성 없이 조삼모사로 변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은 체질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그러하고 믿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우리 민족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면 불신자일 것이고, 그보다는 안 믿을 때 옛사람의 요소인 변덕성을 아직 우리 교회들이 경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공회의 노선의 변화만을 가지고 헤아려도 벌써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소속 교단의 방침을 따르는 원칙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싫다면 소속을 떠나면 되고 좋다면 따르면 됩니다. 소속은 좋으나 '찬송가'라는 단일 사안에 대하여 이의가 있다면 '질문'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떠난 분들이 계셨습니다. 좋아서 지금까지 따라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질문'이 계셨던 분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미 백목사님 생전에 '의문'이나 '이의'가 계셨던 분들은 충분히 제기했고 설명은 지나칠 만큼 이루어졌습니다. '찬송가'라는 단일 사안을 두고 더 이상의 재질문이 필요 없어야 마땅한데도 아직까지 '의문'이 있다면 '양심 문제'입니다. 분명히 옳은 것을 작은 '이권' 때문에 또는 아무것도 아닌 '기호(嗜好) 문제'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사참배와 같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환란이 온다면 어떻게 할 사람인가?
2) 왜 공회 찬송가인가?
요약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과거도 그러했지만 오늘은 그 기승이 하늘을 진동하고 있는 교회 타락의 3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⑴ 영웅심, 명예심이 큰 일
소위 전문 분야를 가진 이들, 신학자 등 한 방면에 재주가 있는 이들은 무언가 하나를 이루어야 할 강박 관념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다음 가는 찬송가를 자기 손에서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유혹을 떨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90점짜리 신편찬송가를 80점짜리 새찬송가로 그다음은 기어코 '개정' '수정'등의 이름을 붙여 30점짜리 통일찬송가를 만들게 됩니다.
찬송가 방면에 전문가들이 이유를 제조하여 제시하는데 누군들 수긍하지 않겠는가? 말이 통하지 않는 무식한 총공회니까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과 같은 논리를 단지 신앙 본능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식한 타 교단들은 '팥으로 메주를 쑤게 된다'는 논리를 전문가들이 펼칠 때 이해가 되고 그 글들을 읽을 재주가 있으니 자기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전문가들의 논리에 결국 삼켜지는 것입니다. 반식자 우환이라는 말이 바로 이때 써먹을 자연계시일 것입니다.
교인들은 찬송가를 변경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 라고 으레 '박사'를 믿고 '학자'를 의지하고 다 맡겨 버렸고 신학자들과 해당 전문가들은 자기 이름, 자기 손을 거친 명품을 만들어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중심인 '악'이 들어 일을 냈고 그 증거는 '100점인 듯' '만년이나 가야 할 명품인 듯' 자랑하던 그 작품들이 몇 년 가지 않으면 또 개정되어야 할 논리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개정 20년만에 현재 교계는 ‘21세기 찬송가’가 필요 하다며 또 개정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웅과 명예 학위를 가진 이들이 나서서 이번에는 자기들 차례라는 것입니다. 천하 교회가 다 속고 따라 가도 '진리' 하나를 예리하게 또 일관되게 주목하는 공회 교회들이라면 어림도 없는 사안입니다.
⑵ 학자들의 영웅심과 만나 음모를 하고 있는 세력이 돈
학자들의 성취감, 영웅들의 호기가 잔뜩 기회를 엿보고 노리고 있는데 '돈' 냄새를 맡는 데는 아주 날랜 교단주 교단 집행부 교단 살림꾼들이 이 대목을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을 회원으로 본다면 그 숫자는 단일 품목을 판매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대단히 큰 시장입니다. 찬송가가 바로 그러합니다. 교단끼리 넘어갈 수 없는 신앙노선적 입장들이 많았으나 1천만 기독교인이, 당시로는 아마 5백만 기독교인이 단번에 찬송가를 구입한다는 사실은 상품을 꾸준히 바꾸어야 할 현실적 이유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인 돈 욕심이 한국 교회를 다 삼켜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찬송가 판매 수입금의 분배 문제가 빙상의 일각으로 교계 신문에 나오곤 했습니다. 찾아보시면 능히 짐작하리라 봅니다.
지금도 돈 되는 일, 돈 남는 일, 주머니에 뒷돈 들어갈 구멍만 막아 버리면, 당장에 풍비박산이 나게 됩니다. 현 교계에 돈이 진리지 성경이 진리입니까? 성경이 하나님과 맞설 상대로 하나를 뽑은 것이 바로 '돈'입니다. 이곳이 물질계이니 이연하지 않겠습니까?
⑶ 영웅심과 돈 욕심 둘만 가지고는 불안하니까 '통일 구호'가 나서서 마무리
자기 중심의 명예심,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 이 중 하나만 해도 일을 충분히 낼 수가 있을 것이지만, 교회를 통째로 타락시키는 일은 너무도 큰 중대사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도록 가장 큰 원수 '통일 구호'가 나선 것입니다. 이 통일 구호라는 것은 기독교만 잡고 기독교만 죽이는 기독교에게만 일대 원수입니다. 명예나 돈, 둘을 제쳐 놓고도 그 둘을 포기하고라도 큰 일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일 구호가 명예와 돈 둘과 합했습니다. 그렇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 아닌가? 교리와 신앙노선이라는 문제는 자고로 교회가 목숨을 걸어야 하고 교회가 간판을 내리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인데 '통일 구호'를 앞세워 각 교단과 교회들이 스스로 '교리와 신앙 노선'을 자기들 손으로 없애도록 해버렸습니다.
찬송가 하나가 문제겠는가? 그 문제 때문에 이 3가지 세속화 절대 요소가 뭉친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문제는 세 가지중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3가지가 모인 것은 완벽하게 '찬송가'를 넘어서야, 그다음 넘을 산, '성경 개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교단 통합, 기독교 통합'으로 나갑니다. 그다음은? 종교 통일입니다. 그다음은? 종교와 세상 통일입니다. 그다음은? 기독교까지 포함된 종교가 통일된 세상 속에 한 분자가 된 '재림 당시'가 됩니다. '재림 시점'이 된 뚜렷하고 명백한 '징조'입니다. 두려운 것은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장로교 안에서도 교리가 너무도 뚜렷하게 다른 기장, 통합, 합동과 고신 등이 합하여 찬송가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불교 유교 기독교를 합해서 역사 이래 가장 큰 업적을 만들 시작의 노선이라고 보는 것이 이곳의 단호한 입장입니다. 죽을 일 아니면 따라 가는 것도 있기 때문에 성탄절 행사를 아직도 폐하지 않고 그럭 저럭 마지 못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쉽지 따라 가지 못할 일이 있는 바, 성경 개정이 그 첫째이며 찬송가 변경이 그 둘째에 세울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3) 배웠고 들었던 공회 소속 교회들의 심판은 다를것
한 의인, 한 성자, 한 선지자가 우리 살던 성읍에 있었고 그가 마지막 자기 증거하는 말씀 때문에 결국 강단에서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전해 준 복음, 그렇게 전해 준 '복음을 걸어가는데 필요한 주의'를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쉽고 간단하여 주일학생도 알 만한 기초 산수가 바로 '통일찬송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문제가 되다니요? 공회 밖에서가 아니고 공회 안에서. 찬송가 문제가 또 다시 재론이 되고 아직도 의문이 남았다니요? 그것이 몇 년 전에 예수 믿은 초신자, 첫신앙의 인물들에게서가 아니라 목회자들에게서!
아닙니다. 잘못 들었을 것입니다. 공회 이름이 붙은 교회이며 교역자라면 피치 못할 다른 사정, 말못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었으나 이 명백한 죄가 알고 보니 예수님의 증거를 듣고 보니 '구원에 사용된 필수 불가결한 양식'이었고, 동시에 영감 인도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통일찬송가'를 아직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은 지금 다윗과 같이 한 시대가 진동할 구원 준비에 한갖되게 순종하는 남다른 하나님의 특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공회는 그들과 달리 '공회찬송가'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회찬송가만 사용할 시대적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한 총공회 교회에 이해 못 하는 타 교단 출신 교인들 몇 명이 오해하고 말고 하는 정도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회 찬송가 외에 다른 찬송을 불러보니 더 은혜가 되더라는 3살짜리 아이의 간식 타령을 할 정도로 그렇게 신앙 어린 교역자는 없을 것입니다.
4) 독립 찬송가 사용은 백영희목사님의 결정
⑴ 여러 사람들의 요청을 검토한 것
한국 교회가 함께 불러오던 찬송가들, 그 찬송가들 중에서 어느 곡들을 선택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어느 목사님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도 들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의 애창 찬송가도 들어 있습니다. 다른 집사님의 간청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백목사님이 했습니다. 반대측 목사님의 애창 찬송가가 들어있다고 중간반측에서 공회찬송가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 집사님 가정의 애창 찬송가가 들어있다고 공회 찬송가의 권위가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집사님의 간청 때문에 공회찬송가가 고신측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여러 층, 여러 종류, 여러 시각, 여러 입맛, 여러 음감, 여러 청감까지를 다 고려하고 마지막 기도하여 결정하였으니 더욱 더 은혜롭고 더욱 더 신앙 어린 우리까지도 감사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애창 찬송가를 백목사님께 추천하면서 돈을 주고 통과 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주지도 않을 분이지만 그렇다고 받기를 하실 분인가? 집사님 가정의 애창곡을 요청드리면서 인정상 고려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있는 분입니까? 어느 집사님의 간청에 고신의 입김이 있었다고 오해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 신앙 성향들을 다 고려하고 여러 말씀들을 다 상고하며 주님의 뜻을 오랫동안 찾다가 확신하고 마지막 한 곡씩 한 곡씩 다 들어보고 확인하고 최종 결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가족 중에 찬송가를 만드는 과정에 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 옆에는 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부산공회에 있지 않습니다. 통일찬송가를 사용하는 타 공회에 소속한 분입니다. 그런데 왜 부산공회와 목사님의 가족을 거명하고 있는가? 백목사님께 받은 은혜를 측량할 수 없이 많았던 분 중에서 자기 주관의 오판으로 오해했던 분이 지나치면서 백목사님을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다도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목사님의 가족 중에는 우리 일반 교역자들이 따라 가지 못할 높은 신앙 차원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현 총공회 교역자 중에서는 그만한 신앙이 없다고 할 분이 바로 찬송가를 만들 때 심부름하고 백목사님과 한 자리에 앉아서 목사님이 시키는 일을 수종들었던 10여명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⑵ 공회 찬송은 백목사님 신앙노선을 가장 잘 요약 표현되는 예.
공회 찬송은 완제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통일찬송가가 명백히 죄가 되고 해가 되며 삐뚤어진 산물이어서 그 통일찬송가를 피해 차선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차선일 수밖에 없다고 차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닙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총공회 백목사님의 신앙과 평생의 역량이 집결된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아껴볼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렇다는 증거, 그렇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독립 찬송가 사용과 관련된 설교
한국 교계의 '찬송가'에 대한 입장을 반대했던 백목사님의 신앙 걸음, 그 걸음을 통해 백목사님의 신앙노선 전반에 일치하는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는 설교입니다.
한국 교계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찬송가에 대하여 성경 새번역 버금가는 정도로 비판했던 것이 백목사님의 신앙 입장이었습니다. 찬송가에 대한 백목사님의 신앙 입장이 현재 '공회찬송가'입니다.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교계에서 따돌릴까 두려워하던 몇몇 공회교역자들 중에서 엉뚱하게도 그 찬송가는 다른 사람이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소문을 내고 그래서 공회찬송가를 사용치 않는다는 논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하였고 '부활'이라는 사기극으로 이룬 것이 기독교라고 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우리 공회찬송가가 백목사님이 직접 주관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 때문에 '통일찬송가'를 사용한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시비는 그 시비에 응하는 것이 벌써 절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시비가 될 필요도 없는 사안이지만 혹 한 분을 위해서라도, 또는 훗날 더 큰 속화를 막는 '안내판'이라도 되겠다는 뜻에서 다음 설교 내용을 발췌 소개합니다.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취사 선택할 것이 있더라는 입장 때문에 공회 신앙노선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버리는 사람은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이 주관하지 않았던 찬송'이라며 공회찬송 대신 통일찬송가를 사용한다면, 그는 백목사님이 주관했던 모든 신앙노선을 따르겠다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유독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힘써 버리는 분들이 '찬송가'에 대한 자기 변호에서는 이런 '시체 도적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설교록에까지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내용입니다. 백목사님이 '정치적 발언'으로 설교했다면 백목사님의 모든 흔적을 자신들에게서 지우시고, 그가 영감에 붙들려 자신들을 인도했던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다면 회개를 하시라는 권고, 소개문입니다.
일시: 1987년 4월 7일 화요일 새벽예배
본문: 계14:9-12
설교: (찬송가에 대한 설교가 전반부였고, 따라서 전반부 설교만 그 대로 소개합니다.)
( 찬송가에 대한 주의깊은 통찰 )
그전에는 찬송가에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기록돼 있었는데 지금도 찬송가에 있습니까? '새찬송가'에 있어요? 주기도문이 끝에 있습니까, 앞에 있습니까? 찬송가가 너무 가사가 변해가고 또 장수도 변해져 가니까 우리가 익혀 놓은 것이 다 헛일이 되고 또 익혀야 되고 익혀야 됩니다.
( ① 찬송가 변동과 변질의 역사 )
우리가 '신편찬송가'를 보다가 '합동찬송가'를 보게 될 때에 이것이 좀 더 구비하고 더 정확한 그런 찬송을 하게 되는가보다 하고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또 합동찬송가가 없어지고 새찬송가가 나와서 좀 얼떨떨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새찬송가에 가사가 좀 틀린 것이 있어도 그래도 조금 발달적이겠다, 발전적이겠다, 좀 더 정확한 걸 찾아간다...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 뒤에 또 개편찬송가가 또 나왔습니다. 개편찬송가는 보니까 개인의 마음대로 너무 찬송가의 뜻을 자주 변개시켜서 처음에 창작한 사람의 근본대로도 되지 않았고 또 교리와 신조에도 바뀌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또 '통일찬송가'가 나왔는데 그 찬송의 느낌이 각각 다르겠지만, 그 통일찬송가는 너무 가사가 현저하게 바꾸어져서 너무 엄청나게 그렇게 바꾸어졌습니다.
( ② 찬송가의 의미 )
찬송가는 사람이 지은 하나의 교리라 신조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 깨달은 대로 자기가 믿는 대로 이렇게 해 놨기 때문에 교리라든지 신조라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과 같이 그렇게 바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잘못돼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가 정확 무오한 성경으로 믿지마는 찬송가는 그것을 정확하다, 틀림이 없다는 무오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 ③ 공회찬송가 추진 동기 )
그렇지마는 그래도 일반 어린 신자들은 찬송가를 성경 다음가는 성경으로 이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찬송가에 가사가 잘못돼 있으면 이는 어린 교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성경을 보게 하는 거와 같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 해서 아무래도 우리가 새로 만들 실력은 없고, 그 대신 처음에 은혜 받아서 영감으로 지은 그 사람들이 근본 저술한 그대로 우리가 옮겨 받아서 찬송을 하자, 또 이것이 성경에 틀렸나 맞았나 그것을 봐서 성경대로 해 가지고 이 찬송가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도록 하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세상이 자꾸 변질되어 나가지만, 두 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보면, 두 가지로만 구별하면 잘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모든 사색도 연구도 비판도 평가도 이렇게 하는 그런 노선도 있고 또 하나님보다도 먼저 사람이 가깝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비위를 맞춰야 된다고 해서 사람 중심 사람 위주로 이렇게 모든 것을 사색하기도 하고 연구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평가하기도 하는 이런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노선이 됩니다. 길이 되는 것입니다.
( 찬송가 제작과정 )
( ① 원본과 번역원본에 충실키 위해서 )
그래서 아무래도 이걸 좀 어떻게 해야겠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이 찬송가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그 저자, 또 우리 상고 때부터 내려오는 족보 그런 것을 좀 따져 가지고, 이렇게 자꾸 세상 따라서 이렇게 타락해 가지 말고, 은혜 받아서 찬송을 지은 그 당시 그 사람들의 은혜를 그대로 우리가 전달해서 은혜 받고 전달해 가자 하는 그런 뜻에서 위원들이 나서 가지고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수고를 제일 많이 한 분은 서영호목사님 입니다. 바쁜데도 1주간 동안을 꼬빡 기울여 모든 찬송가 족보도 참고하고 또 뭐 원어도 참고해 가지고 하는 대로 또 수정을 했습니다. 또 다른 위원들이 이제 목사님들과 또 평신도들 중에 찬송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여러 날 동안을 그렇게 합동 연구를 하고 대조를 했습니다.
( ② 찬송가 곡의 숫자 )
찬송가 안에 이렇게 많은 찬송을 뜻 없이 이렇게 그 곡의 수를 많이 넓히면 우리가 다 부르지 못하는 그런 찬송들이 있어 복잡하니까 거기서 예배드리는 찬송으로만 440여곡을 간추렸습니다. 물론 개인이 부르는 거야 얼마든지 자기 개인주의고 또 성경에 위반되지 않는 그런 찬송은 자기가 지어 가지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는 다 내버려두지만 우리가 표준으로 삼는 예배 찬송으로서는 그렇게 간추려 본 것입니다.
(또 그 순서는, 첫째는 하나님의 존영에 대해서 영광에 대해서 하고, 그거 다 하나님의 자체에 대해서 먼저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데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순서가 이렇게 바꿔졌습니다. 그런 것을 잘 이해하십시오. 1987.5.9.)
( ③ 공명심을 특히, 극히 주의하며 )
그러나 이렇게 찬송들을 간추려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슨 별개의 찬송을 하나 만들어 보려는 공명심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아닙니다. 첫째 성경도 속화되어 번역들이 자꾸 이상하게 타락해 나가지 또 찬송도 그리되어지지, 그런데 이 둘이 함께 보조를 맞춰 내려가니까 어린 교인들이 뭐인지를 모르겠고 또 후배들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에 간추려 본 것이 440여곡이었습니다.
작업을 할 때에 우리가 이 찬송가를 만드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 우리 선조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것, 이미 지어 놓은 그 찬송가를 그대로 받아 나가려는 것이며, 또 비성경적인 표현이 섞여 있는 것은 제거하고 성경에 맞추려는 것이며, 또 단순하게 부르고 사용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앞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세계 교회들이 다 한가지 단일 찬송을 쓰도록 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교회가 단합해서 단일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좋기는 좋지마는 그보다도 찬송가가 성경대로라야 하기 때문에 성경대로의 찬송가로 이렇게 다 통일됐으면 좋겠다, 그리될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맞이해서 사용을 하겠으나, 그때까지는 부득이 간추려 몇장을 빼 가지고 우리가 예배 찬송으로 불러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만든다는 것이 아니고 있던 찬송가 중에서 다시 주워 모으고 고쳐서 한다는 우리 의도를 찬송가 서론에 발표를 하고, 좀 더 수정할 것이 있어 가본으로 열 권만 만들어 놨습니다. 이 가본이 완성품이 되면 이 찬송가를 우리 세계 교회들이 불렀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계 교회는 찬송에 능한 분들이니까 따라 올 리는 없고 그래도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회만큼이라도 이렇게 이 찬송가를 사용해야 되겠다 싶습니다. 우리 공회에서만 사용하는 찬송가라도 그렇게 완전한 가본을 만들라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그 가본도 완성이 덜 됐습니다. 그래도 많은 시간을 걸쳐서 수고한 사람들은 많이 수고를 했습니다.
( 찬송가 통일에 대한 문제 )
( ① 찬송가에까지 따라 붙은 돈 )
물론 교계에서 '통일찬송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들도 우리와 같이 어쨌든지 단일 교회이기 때문에 단일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다, 단일 대속, 단일 성경, 단일 또 교회, 단일 찬송가 이렇게 되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정신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그렇게 하게 되면 찬송가를 판매하는 판권이라는 돈이 왔다 가고, 이 돈은 참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을 찬송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보면 돈이 여기 붙었기 때문에 나중에 돈벌이가 되겠다 해서 이 찬송가를 통일시키고 다른 찬송가는 다 없애 버리자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만드는 일에 돈 문제가 생겨서 우리는 판권을 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면 판권을 우리에게 팔면 우리가 얼마를 주고 살 것이고 또 이 찬송가 만들어 가지고 이익이 나면 그때 이익 배당하겠다 이렇게 서로 의논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은 모르지만 우리나라 전국 교회가 찬송가를 전부 돈을 주고 사 가지고 전부 이렇게 해서 이제 통일찬송가를 만들었습니다.
( ② 유행을 좋아하는 교계의 타락상 )
또 만들어진 통일찬송가는 그 가사가 엄청나게 틀리니까 그걸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뭐 아무나따나 사니까 뭐 찬송가야 성경도 아닌데 합니다. 이래서 찬송가가 제2의 성경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상관이 없고 또 보수성이 적고 시대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는 시대를 따르는 사람, 무엇이든 보수성이 없는 사람, 또 옳고 그른가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사람, 또 잘못된 사상이 하나 들어오면 그것 때문에 자기가 현실이라는 실상을 당했을 때 그 사상이 자기에게 큰 미혹이 됐다는 그런 것을 생각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그만 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자꾸 유행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좀 어폐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지금 이 찬송가가 유행입니다. 유행이라 해도 누가 정죄를 못 할 만치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행이라, 속화라 이렇게 할 수 있을 만치 이렇게 돼 나가고 있습니다.
( 공회찬송가 출간 )
( ① 찬송가 출간 자유가 없는 교계 )
새찬송가를 사용하던 교단이 통일찬송가에서 이권 배당도 받았는데, 만들어 놓고도 이 통일찬송이 너무 허무하다 해서 따로 몇 가지를 더 넣자고 했다가 시비가 나고 중지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데 우리도 이렇게 사백 몇 곡을 해 가지고 찬송가를 만들어 쓰려고 하면 시비가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찬송가 지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사 왔는데 왜 도용을 하느냐?' 시비가 나면 저작법에 걸린답니다. 한 일억원 정도면 우리가 하겠는데 돈이 그렇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일 허락하신다면 언젠가 출판할 수 있는 자유의 때가 오지 않겠나? 또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힘을 쓰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좋은 찬송가를 좀 힘있는 누구를, 실력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에게 줘서라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 그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우리대로는 좀 수정할 대로 수정해서 그래도 좀 바르다 한 것을 이렇게 만들어서 보장을 해 놓자 하는 그 이념으로 낙망하지 않고 만들고 있습니다.
( ② 교계와 돈 시비를 피하고 출간되는 공회찬송가 )
언제 우리가 문공부에까지 허락을 맡아 가지고 그럴지도 모르겠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도 안되겠다 하여, 찬송가 몇 장만을 더 간추려 뽑아 가지고 몇 장만을 인쇄해서 사용하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100곡으로 생각을 했으나 은혜 받는 찬송들이 너무 많이 없어지겠고, 하다 하다 보니까 192곡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머리말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없고 그저 뽑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은 하지만 그것을 팔지 않고 교인들에게만 한 권씩 나누게 되면 아무 법적 문제도 없습니다. 한 권에 4백원 정도로 제작비가 들 것입니다. 그래서 요번 주일 안으로 나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새찬송가'를 제일 좋아하는데, 통일찬송가가 나온 뒤 새찬송가는 다 회수가 되었으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새찬송가를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내막으로는 불법으로 인쇄해서 나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뒤에 말썽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찬송가에서 몇 곡을 뽑아서 우리 교단 교인끼리 나누어 보는 것이야 시비하겠나? 만일 시비가 나면 그때 하는 대로 해보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6) 찬송가 문제와 교인 관리 문제
⑴ 공회찬송가 문제는 교계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
공회찬송가 문제는 한국 교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점을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교계가 통일찬송가를 만들 때 분위기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각교파별 감시팀을 만들어 통일찬송가를 사용치 않는 교파에 대하여는 기존 찬송가의 출판 저작권을 확보하고 있던 교계에서 법적 대응을 강력하게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서부교회 백목사님은 한국 교회 최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나 공회찬송가 출간으로 교계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걷겠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교계는 공회찬송가 출간시 머릿말에서 행했던 여러 변명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결국 예외로 인정하고 덮어 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백목사님이 통일찬송가에 대하여 그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에 맞서봐야 이길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보수측 교단들에게 영향을 미쳐 통일찬송가 시행이 깨질까 하였던 것입니다. 즉, 공회찬송가에 대하여는 모든 면으로 앞장 서서 시비를 하고 나설 외부 교단들이 오히려 일체 언급이 없었습니다. 교계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 왜 공회 안에서만 이렇게 문제가 되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⑵ 공회 내에 찬송가 사용 문제는 전도에 불편 하다는 주장 때 문
신학을 아는 사람들, 교계의 향방을 아는 사람들은 백목사님이 지적하는 통일찬송가의 구조적 잘못에 대하여 아무 할 말이 없었으나 타 교단 교회들 중에서 교인들을 모아 와야 하는 분들이 공회 교회들과 교인 문제가 발생되면 찬송가를 가지고 말도 안 되는 고성방가로 자극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단이나 이상한 교회라는 표현이 해당될 때와 안 될 때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며 무식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공회찬송가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들 소속 신학교와 교단 지도부가 말릴 일이만 자기들 교회로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확보하겠다고 그냥 고함을 질러 댄 것입니다.
이렇게 타 교단 교회들의 고함 소리에 놀라 공회 소속 교회로 오던 교인들이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것이 공회의 찬송가 문제 본질입니다. 공회찬송가 자체를 시비하는 것은 양심이 아닐 것입니다. 공회찬송가는 통일찬송가에 비하여 신앙노선 문제 차원에서 옳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옳기는 옳지만 교인 전도 문제가 발생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라는 대처 문제만이 논의되어져야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⑶ 전도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고
신앙노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못할 일도 없는것
사실 전도를 위해서는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주일날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는 논리도 가르친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찬송가를 변경하는 것도 얼마든지 공회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되겠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때에 바꾸고 어떤 때에는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허용이 되고 또 신앙노선을 지키는 범위 안이라는 것이 먼저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변경이나 변화한 면만으로 말한다면 총공회 백목사님만큼 많이 바꾸고 변경한 분은 없습니다. 교계 어떤 잘나가는 교회라도 공회 정도로 광범위하고 전면적으로 마구 교계 일반 상식 관례를 다 휘저어 버린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만큼 그렇게 미련스럽게 과거것을 고집하는 곳도 없습니다. 남녀 좌석을 분리시켜 앉는다는 것이 도대체 언제 없어진 고래 폐습이라고들 알고 있을 터인데 공회는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⑷ 변경할 것과 변경치 못할 것에 대한 근본 시각과 자세가 문 제
다른 진영이 주일에 차를 사용하게 된 것과 공회가 주일에 차를 사용하도록 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 동기가 다르고 과정이 다르며 그 결정의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다른 진영은 교인들이 하나 둘 타기 시작하니까 교인들 형편 따라 시대의 분위기를 맞추어 허용한 것입니다. 허용할 수 있는 것인지 끝까지 막아야 하는 것인지, 허용한다면 어떤 시각에서 어떤 조건으로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재 공회 외부 모든 교파들의 '변경' 성질입니다.
바꾸는 것이 교인 확보에 필요하고 교회의 외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불경도 읽을 수 있고 제사도 지낼 수 있으며 북한 정권하에 소속하여 통일의 기수가 될 수도 있고 강단을 없앨 수도 있으며 예배당 안에 건강 강좌를 열 수도 있습니다. 밤무대를 강단에 올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고생이 엉겨붙는 콜라텍이라는 밤무대가 예배당 내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 별로 없고 대학의 써클 활동과 교회의 청년 활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 하나 떼어 놓고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고 따진다면, 해도 된다고 할 것도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못 하게 막을 것도 거의 없다는 것이 뻔한 결과입니다. 술 담배 도박 마약도 하지 말라고 성경으로 단정할 분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성경으로 교리로 신앙노선으로 또한 교회의 은혜면으로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교회의 근본 자세 등으로 먼저 생각해보고 기도한 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라 하여 그리했느냐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느냐, 해도 되는지를 성경 교리 신앙노선 은혜면으로 먼저 철저히 살핀 다음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했느냐는 문제가 문제입니다.
교회가 추도식을 하여 안 믿는 가족은 교회식 제사를 드렸다고 인사하고 교인들은 예배로 참석했다 하여 위안하고 있지만, 이 문제도 천주교가 제사를 '한국 고유 효법의 한 모양'이라고 하여 전도의 길을 터 준 것을 보고 기독교는 예배로 덮어 버렸던 것입니다. 1991년 통합측 교단 최고위급 회의에서도 공회의 추도식 금지 입장을 전해듣고 확인했던 교회사의 상식입니다.
⑸ 지금 찬송가 문제 하나로 논하지만, 실은 전반적 문제 전부 가 포함
철없는 타 교단 일부 교인들이 회원 모집을 위해 한번 고함 지르는 소리 때문에 찬송가를 변경하느냐는 문제가 공회에 제기되었으나 그 문제는 그 교회와 교역자의 전반적인 신앙 성향과 자세에 관련된 일부 표현일 뿐입니다. 찬송가를 통일로 변경하는 분들은 수백 수천이 넘는 사안에서 전부 일반 교회의 뿌리 없는 바람 몰이를 따라 갈 것이고 반대로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 풍조 거부가 바로 성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단체 속화, 속화 일변도, 속화 매진에 휩쓸리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입니다.
공회의 찬송가 문제는 공회의 모든 진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시대에 밀려서 할 수밖에 없느냐, 말단의 신앙 없는 교인들이 요구하면 그들을 끌어앉히기 위해 그냥 따라 갈 수밖에 없느냐? 만일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는 교회가 존립될 수 없고 차라리 신사참배를 하게 되면 신앙어린 사람들을 그들의 어린 차원에서라도 길러가고 또 앞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는 1939년도의 문제가 오늘 발생된다면, 한국 교계 전체를 따라 또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문제를 이웃 교회 교인들과 발생되는 문제로 인식을 하면서 동시에 모든 역사에 나타났던 교회의 타락사를 그대로 따라 가는 속화의 길을 함께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