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구약성경에서 ‘영’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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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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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5. 질문 : 구약성경에서 ‘영’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1001
우선, 구약에서는 예약적 중생이라고 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영의 중생이 아니니 존재적으로는 분명히 죽은 존재로 보아야 하는데, 영의 활동성을 암시하는 성구가 눈에 띄어 여쭤 봅니다.(욥15:13) 12절과 13절의 내용으로 보건대 영혼과 영 그리고 눈과 입이 댓귀를 이루는 것 같아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기는 스스로의 설득력이 약해서 말입니다.
듣기로는 영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몇 가지되고 상황에 따라 영혼, 영 등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서의 번역상 혼돈(본인의 수준)이 오는 표현들이 많기에 더욱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난해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는 교리 문제입니다.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 궁금합니다.즉 영 스스로의 힘 의지로 죄를 이긴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피와 성령과 진리의 보호로 죄를 이긴다는 것 인가요?
답변 : 1. 구약의 영 2. 영의 원어 3. 영이 범죄 않는 것
1. 구약 영의 활동
① 우선 구약 성도의 영에 대한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이전에 살았던 구약 성도들은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몸과 마음으로만 평생 활동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영이 중생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된 신약초기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았던 평생은, 영이 죽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성령에 직접 붙들려 살게 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영과 접촉하고, 영은 마음과 접촉하고, 마음은 몸과 접촉하면서 연결을 가지기 때문에 영이 죽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할 수 없는 것인데 제사제도를 주셔서, 미래 대속을 미리 앞당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연결이 가능하도록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성도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요청하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통해서 그 사람 내부로 들어와서 활동하게 되고, 그러다가 죄를 짓게 되면 다시 그 사람 외부로 나가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도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져도 성령이 마음 안에 있는 영 안에서 머물며 그 영을 통해 다시 마음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이 점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구약에는 아주 예외적으로 역사하셨고 신약은 아주 전면적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을 살려 그 영 안에 항상 내주하면서 그 영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몸을 인도하는 것이 신약입니다.
6·25때 남한이 완전 적화가 되었다면, 남한 내에 숨어있는 몇몇 세력이 구조요청을 할 때 그들에게 간접으로만 미국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토벌되면 미국은 구조 요청이 올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해서 남한 정부를 복구한 경우는 남한 정부의 요청으로 미군이 통째로 서울에 주둔을 정식으로 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세가 반대가 되어 이쪽에서는 저항하는 산 속의 빨치산들만 토벌하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② 영은 죽어 있으나 성령에 붙들린 마음이 산영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구약 성도의 영은 죽어 있으나 여러 성구에서 영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영과 마음과 몸과 행동을 통해서 외부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때는 어디까지가 영의 활동인지 어디까지가 마음의 활동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우선 영이 하나님께 붙들리면 그 영과 하나님이 외부에서 볼 때는 구별이 잘 되지 않고, 그 마음이 영에게 붙들리고 그 마음과 영이 외부에서는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면 때문에 오늘 신약에도 자기 영의 실체를 느끼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천사로 나타나고 역사하지만 그 천사가 원죄와 본죄도 없는 상태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수종 들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우리 눈에는 천사와 하나님의 구별이 종종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 많은 곳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가 뒤에 천사로 기록하고, 또 천사가 나타났다가 뒤에 하나님으로 기록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구약성도가 제사생활을 바로 할 때는 성령이 그 마음에 바로 나타나셔서 역사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은 마치 신약에서 하나님이 영을 통해 마음을 붙들 때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가 성령에 붙들리게 되면 그 마음은 죄지을 때 마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마음이 마치 신약의 영과 같은 존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도 마치 영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즉 외부의 관찰에서 보면 굳이 영이 죽은 상태에서 성령이 마음에 직접 역사했는지, 영을 통해 마음에 역사하고 있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 질문하신 내용은, 사실 답변자가 아직도 단정하지 않고 있는 문제입니다.
예로 드신 욥13:13은, 욥13:1-3을 잘못 표시했다고 읽었습니다. 성구에 대한 뚜렷한 말씀이 없어 성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위에 말씀드린 내용은 백영희목사님의 일관된 설명인데, 구약성도의 영의 실체에 대하여는, 이곳 답변자 역시 백목사님의 교리 전체를 통틀어 아직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두 세가지 중 하나입니다. 현재로는 이 부분에 대하여 반론적 질문을 몇 가지 가지고 있으나 지난 과거 수많은 교리 문제에 있어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고 또 틀렸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세월 속에 연구를 해 갈수록 백목사님의 깨달음이 옳았다는 것으로만 밝혀졌기 때문에 이 부분도 역시 그리 될까 하여 아직 확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백목사님의 교리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구약 성도의 영이 구약기간 내내 죽어 있었다면, 우선 그들이 살아 있던 당시는 위에서 설명한 내용대로 성령이 제사를 통해 직접 마음에 역사를 했고 그 역사는 외부적 지원 역사였기 때문에 신약의 내부 내주적 역사와 차이가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도가 죽는 경우, 그들의 죽은 영의 위치는 어디가 되겠느냐는 점이 의문입니다.
2. 영, 영혼 등의 번역
① 같은 원어 단어를 달리 번역하면, 원어 모르는 분은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꼭 같은 원어가 어떤 곳에서는 '영'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영혼'으로 번역된 경우가 있습니다. 원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같은 원어는 같은 한글 표현으로 통일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원어의 중요성이 그렇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 = 원어' 라는 공식이 있는 정도입니다.
중생교리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그 원어적 문제점이 전부 검토 되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어떻게 검토가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 드리려면 별개 질문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현재까지의 모든 검토 결과, 현재 우리 성경의 '영'이라고 번역된 것은 전부 우리가 아는 '영'으로 보시면 되고 그 외의 모든 표현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쨌든 원어 성경에 사용된 원래 단어의 뜻이 확인되지 않고는 어떤 교리도 성경해석도 있을 수가 없지 않느냐는 반론을 많이 듣게 됩니다. 사실 신학의 기본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백영희신앙노선은 신학이 반론이 있을 수 없는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원어에 대한 시각도 전혀 달리 보고 있습니다.
② 성경에 사용된 원어 단어만은, 성경 자체가 원어 사전
1등과 10등하는 학생의 실력 차이를 '천지차이'로 표현한다면,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하늘(천)과 이 땅(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엄청난'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원어는 히브리 언어이며 또한 헬라 언어인데 동시에 그 단어들은 그 성경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느냐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경 단어와 표현은 성경 전체가 바로 그 단어 하나를 설명하고 그 표현 하나를 설명하는 사전입니다. 현재까지는 유대인의 민족 언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 사람들이 옛날 사용한 헬라어를 성경원어로만 보았지, 성경 자체가 성경 단어의 사전이 된다고 보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신학생은 없겠지만, 그분들의 표현은 말 그대로 표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언어적 의미가 주인이고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손님 입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오로지 원어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원어를 알지 못할수록 가치 있게 평가하고 원어를 잘 알수록 성경 파악에 불리하겠다고 오히려 동정하는 편입니다. 말 뿐이 아니고 실제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중생 교리와 관련하여 '영'과 '영혼'이 원어에서는 같은 단어인가 다른 단어인가도 모르고 어떻게 중생교리와 영에 관련된 교리를 연구하겠느냐고 반문하지만, 중생교리와 영에 관련된 모든 연구는 이미 박윤선목사님과 40여년 전에 서로 필요한 문제를 다 검토했던 사항입니다. 백목사님의 주장에 대한 문제를 원어적 시각에서 전부 이의제기하였고, 그 이의는 백목사님에 의하여 전부 꺽어졌습니다. 즉, 오늘까지 이어진 보수 정통의 성경학자가 원어를 바탕으로 백목사님의 무지를 지적했고, 백목사님은 성경으로 성경의 원래 단어와 사용을 설명하여 박목사님 주장을 완벽하게 틀린 것으로 증명하여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이 부분의 교리를 연구차원에서 살피려 하신다면 재론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고 다만 원어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성된 교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신 정도라면,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할 듯 합니다.
3.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범죄 하지 않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마음과 몸이 합하여 죄를 지었고 영은 그 죄짓는 심신을 막지 못한 주격책임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소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주인이 변상을 하는 것이 성경법이니 곧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이 또 범죄 하게 되면, 우리 영 자체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어놓았지만, 자기 심신의 죄를 책임지고 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심신이 예수 믿기 이전에 지은 죄 전부와 함께 예수 믿은 이후 지을 죄 전부도 함께 해결했기 때문에 예수 믿은 이후의 심신 범죄 때문에 영이 주격책임으로 또 죽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우선 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죄와 상관없게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고, 또 심신에 대하여 가지는 주격책임 역시 십자가에서 전부 해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욥15:13,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는 백목사님께 직접 문의 드려 본 성구입니다.려 본 성
처음 질문하신 내용에서 몇 가지 지적하신 내용과 함께, 답변자도 백목사님 생전 욥15:13을 비롯 영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는 성구들을 문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욥15:13 등 문제 있는 성구에 대한 자세한 면담 내용은 개인 일지에 따로 메모가 되어 있습니다. 현재 백목사님 생전 일지 전부를 입력하고 있는 중이어서 자세한 답변은 따로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첫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드린 내용에서 다시 한번 다른 시각으로 보셨으면 합니다.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경을 보는 시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이며 기독교인이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성구를 들이대며, 사람이 천국을 실제 가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또 낙원에 있었던 홍포 입은 부자를 예로 들면 그것은 비유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기 대해서 아직까지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사람이 죽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성구는 너무도 많고 또 그리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구 하나를 두고 딱 들이대면 그동안 천국 소망을 굳게 가지게 하던 성구 전체는 잊어버리고 이런 성구 하나에서 큰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해결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있고,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 소망이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성구는 사실 시간을 갖고 찾으면 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간다는 교리는 단정할 수가 있는데, 이런 성구를 만나서 헷갈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이 성구를 좀 유심히 보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 성구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천국 관련 교리 안에서 이 성구를 여러 면으로 살펴본다면, 바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구를 평소에 미리 확실하게 우리가 알아놓지 않은 이유는, 난해절이거나 교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너무도 확실한 교리이기 때문에 따로 그 교리의 진부를 두고 연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부모의 유전자 검사를 평소에 하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을 간다는 교리는 너무 확실해서 그 반론을 예상하여 살펴보는 노력이 거의 없는 대목입니다. 중생교리도 이미 그 정도에 있는 교리입니다. 중생교리에 모순이 있는 원어가 있다면 그 원어의 사전적 의미를 기록한 그 사전을 고치든지 아니면 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의미가 있음을 살펴야 할 내용입니다.
조금 연구하면 그것이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그런 노력과 해석은 합리화가 아니고 너무도 당연히 성경에 말해 놓은 것을 내가 어리석어 다 알지 못하고 하나 정도는 혼동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성경을 통해서 그 성구를 좀더 잘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도, 아무리 생각해도 여호와 증인처럼 그 교리가 틀렸다고 보이는 성구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원리와 같습니다.
중생교리는 질문 하나를 놓고 설명을 하기에는 너무도 그 답변할 양이 많기 때문에 첫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내용으로 조금 살펴보신다면 저절로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생교리는 성경전체에 거의 다 연결이 되어 있고 또한 기독교 교리 전반에 관련을 가진 교리입니다. 마치 삼위일체나 천국 가는 교리와 같은 정도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성구에서 막힌다면, 그 성구 때문에 중생교리에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수없는 성구와 교리 전반의 체계가 완벽하게 다 맞아지는데, 그 한 성구는 나의 신앙수준에서 약간 의문이라는 차원으로 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선, 구약에서는 예약적 중생이라고 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영의 중생이 아니니 존재적으로는 분명히 죽은 존재로 보아야 하는데, 영의 활동성을 암시하는 성구가 눈에 띄어 여쭤 봅니다.(욥15:13) 12절과 13절의 내용으로 보건대 영혼과 영 그리고 눈과 입이 댓귀를 이루는 것 같아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기는 스스로의 설득력이 약해서 말입니다.
듣기로는 영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몇 가지되고 상황에 따라 영혼, 영 등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서의 번역상 혼돈(본인의 수준)이 오는 표현들이 많기에 더욱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난해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된 영은 범죄 하지 않는다는 교리 문제입니다.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 궁금합니다.즉 영 스스로의 힘 의지로 죄를 이긴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피와 성령과 진리의 보호로 죄를 이긴다는 것 인가요?
답변 : 1. 구약의 영 2. 영의 원어 3. 영이 범죄 않는 것
1. 구약 영의 활동
① 우선 구약 성도의 영에 대한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이전에 살았던 구약 성도들은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몸과 마음으로만 평생 활동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영이 중생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된 신약초기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았던 평생은, 영이 죽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성령에 직접 붙들려 살게 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영과 접촉하고, 영은 마음과 접촉하고, 마음은 몸과 접촉하면서 연결을 가지기 때문에 영이 죽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할 수 없는 것인데 제사제도를 주셔서, 미래 대속을 미리 앞당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연결이 가능하도록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성도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요청하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통해서 그 사람 내부로 들어와서 활동하게 되고, 그러다가 죄를 짓게 되면 다시 그 사람 외부로 나가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도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져도 성령이 마음 안에 있는 영 안에서 머물며 그 영을 통해 다시 마음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이 점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구약에는 아주 예외적으로 역사하셨고 신약은 아주 전면적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을 살려 그 영 안에 항상 내주하면서 그 영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몸을 인도하는 것이 신약입니다.
6·25때 남한이 완전 적화가 되었다면, 남한 내에 숨어있는 몇몇 세력이 구조요청을 할 때 그들에게 간접으로만 미국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토벌되면 미국은 구조 요청이 올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해서 남한 정부를 복구한 경우는 남한 정부의 요청으로 미군이 통째로 서울에 주둔을 정식으로 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세가 반대가 되어 이쪽에서는 저항하는 산 속의 빨치산들만 토벌하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② 영은 죽어 있으나 성령에 붙들린 마음이 산영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구약 성도의 영은 죽어 있으나 여러 성구에서 영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영과 마음과 몸과 행동을 통해서 외부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때는 어디까지가 영의 활동인지 어디까지가 마음의 활동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우선 영이 하나님께 붙들리면 그 영과 하나님이 외부에서 볼 때는 구별이 잘 되지 않고, 그 마음이 영에게 붙들리고 그 마음과 영이 외부에서는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면 때문에 오늘 신약에도 자기 영의 실체를 느끼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천사로 나타나고 역사하지만 그 천사가 원죄와 본죄도 없는 상태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수종 들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우리 눈에는 천사와 하나님의 구별이 종종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 많은 곳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가 뒤에 천사로 기록하고, 또 천사가 나타났다가 뒤에 하나님으로 기록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구약성도가 제사생활을 바로 할 때는 성령이 그 마음에 바로 나타나셔서 역사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은 마치 신약에서 하나님이 영을 통해 마음을 붙들 때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가 성령에 붙들리게 되면 그 마음은 죄지을 때 마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마음이 마치 신약의 영과 같은 존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도 마치 영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즉 외부의 관찰에서 보면 굳이 영이 죽은 상태에서 성령이 마음에 직접 역사했는지, 영을 통해 마음에 역사하고 있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③ 질문하신 내용은, 사실 답변자가 아직도 단정하지 않고 있는 문제입니다.
예로 드신 욥13:13은, 욥13:1-3을 잘못 표시했다고 읽었습니다. 성구에 대한 뚜렷한 말씀이 없어 성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위에 말씀드린 내용은 백영희목사님의 일관된 설명인데, 구약성도의 영의 실체에 대하여는, 이곳 답변자 역시 백목사님의 교리 전체를 통틀어 아직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두 세가지 중 하나입니다. 현재로는 이 부분에 대하여 반론적 질문을 몇 가지 가지고 있으나 지난 과거 수많은 교리 문제에 있어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고 또 틀렸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세월 속에 연구를 해 갈수록 백목사님의 깨달음이 옳았다는 것으로만 밝혀졌기 때문에 이 부분도 역시 그리 될까 하여 아직 확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백목사님의 교리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구약 성도의 영이 구약기간 내내 죽어 있었다면, 우선 그들이 살아 있던 당시는 위에서 설명한 내용대로 성령이 제사를 통해 직접 마음에 역사를 했고 그 역사는 외부적 지원 역사였기 때문에 신약의 내부 내주적 역사와 차이가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도가 죽는 경우, 그들의 죽은 영의 위치는 어디가 되겠느냐는 점이 의문입니다.
2. 영, 영혼 등의 번역
① 같은 원어 단어를 달리 번역하면, 원어 모르는 분은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꼭 같은 원어가 어떤 곳에서는 '영'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영혼'으로 번역된 경우가 있습니다. 원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같은 원어는 같은 한글 표현으로 통일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원어의 중요성이 그렇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 = 원어' 라는 공식이 있는 정도입니다.
중생교리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그 원어적 문제점이 전부 검토 되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어떻게 검토가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 드리려면 별개 질문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현재까지의 모든 검토 결과, 현재 우리 성경의 '영'이라고 번역된 것은 전부 우리가 아는 '영'으로 보시면 되고 그 외의 모든 표현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쨌든 원어 성경에 사용된 원래 단어의 뜻이 확인되지 않고는 어떤 교리도 성경해석도 있을 수가 없지 않느냐는 반론을 많이 듣게 됩니다. 사실 신학의 기본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백영희신앙노선은 신학이 반론이 있을 수 없는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원어에 대한 시각도 전혀 달리 보고 있습니다.
② 성경에 사용된 원어 단어만은, 성경 자체가 원어 사전
1등과 10등하는 학생의 실력 차이를 '천지차이'로 표현한다면,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하늘(천)과 이 땅(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엄청난'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원어는 히브리 언어이며 또한 헬라 언어인데 동시에 그 단어들은 그 성경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느냐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경 단어와 표현은 성경 전체가 바로 그 단어 하나를 설명하고 그 표현 하나를 설명하는 사전입니다. 현재까지는 유대인의 민족 언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 사람들이 옛날 사용한 헬라어를 성경원어로만 보았지, 성경 자체가 성경 단어의 사전이 된다고 보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신학생은 없겠지만, 그분들의 표현은 말 그대로 표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언어적 의미가 주인이고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손님 입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오로지 원어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원어를 알지 못할수록 가치 있게 평가하고 원어를 잘 알수록 성경 파악에 불리하겠다고 오히려 동정하는 편입니다. 말 뿐이 아니고 실제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중생 교리와 관련하여 '영'과 '영혼'이 원어에서는 같은 단어인가 다른 단어인가도 모르고 어떻게 중생교리와 영에 관련된 교리를 연구하겠느냐고 반문하지만, 중생교리와 영에 관련된 모든 연구는 이미 박윤선목사님과 40여년 전에 서로 필요한 문제를 다 검토했던 사항입니다. 백목사님의 주장에 대한 문제를 원어적 시각에서 전부 이의제기하였고, 그 이의는 백목사님에 의하여 전부 꺽어졌습니다. 즉, 오늘까지 이어진 보수 정통의 성경학자가 원어를 바탕으로 백목사님의 무지를 지적했고, 백목사님은 성경으로 성경의 원래 단어와 사용을 설명하여 박목사님 주장을 완벽하게 틀린 것으로 증명하여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이 부분의 교리를 연구차원에서 살피려 하신다면 재론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고 다만 원어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성된 교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신 정도라면, 이 정도의 설명으로 충분할 듯 합니다.
3. 중생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범죄 하지 않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마음과 몸이 합하여 죄를 지었고 영은 그 죄짓는 심신을 막지 못한 주격책임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소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주인이 변상을 하는 것이 성경법이니 곧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이 또 범죄 하게 되면, 우리 영 자체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어놓았지만, 자기 심신의 죄를 책임지고 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심신이 예수 믿기 이전에 지은 죄 전부와 함께 예수 믿은 이후 지을 죄 전부도 함께 해결했기 때문에 예수 믿은 이후의 심신 범죄 때문에 영이 주격책임으로 또 죽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영이 범죄 하지 않는 것은, 우선 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죄와 상관없게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고, 또 심신에 대하여 가지는 주격책임 역시 십자가에서 전부 해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욥15:13,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는 백목사님께 직접 문의 드려 본 성구입니다.려 본 성
처음 질문하신 내용에서 몇 가지 지적하신 내용과 함께, 답변자도 백목사님 생전 욥15:13을 비롯 영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는 성구들을 문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욥15:13 등 문제 있는 성구에 대한 자세한 면담 내용은 개인 일지에 따로 메모가 되어 있습니다. 현재 백목사님 생전 일지 전부를 입력하고 있는 중이어서 자세한 답변은 따로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첫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드린 내용에서 다시 한번 다른 시각으로 보셨으면 합니다.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경을 보는 시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이며 기독교인이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성구를 들이대며, 사람이 천국을 실제 가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또 낙원에 있었던 홍포 입은 부자를 예로 들면 그것은 비유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기 대해서 아직까지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사람이 죽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성구는 너무도 많고 또 그리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구 하나를 두고 딱 들이대면 그동안 천국 소망을 굳게 가지게 하던 성구 전체는 잊어버리고 이런 성구 하나에서 큰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해결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있고,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 소망이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성구는 사실 시간을 갖고 찾으면 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간다는 교리는 단정할 수가 있는데, 이런 성구를 만나서 헷갈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이 성구를 좀 유심히 보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 성구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천국 관련 교리 안에서 이 성구를 여러 면으로 살펴본다면, 바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구를 평소에 미리 확실하게 우리가 알아놓지 않은 이유는, 난해절이거나 교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너무도 확실한 교리이기 때문에 따로 그 교리의 진부를 두고 연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부모의 유전자 검사를 평소에 하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을 간다는 교리는 너무 확실해서 그 반론을 예상하여 살펴보는 노력이 거의 없는 대목입니다. 중생교리도 이미 그 정도에 있는 교리입니다. 중생교리에 모순이 있는 원어가 있다면 그 원어의 사전적 의미를 기록한 그 사전을 고치든지 아니면 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의미가 있음을 살펴야 할 내용입니다.
조금 연구하면 그것이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그런 노력과 해석은 합리화가 아니고 너무도 당연히 성경에 말해 놓은 것을 내가 어리석어 다 알지 못하고 하나 정도는 혼동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성경을 통해서 그 성구를 좀더 잘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도, 아무리 생각해도 여호와 증인처럼 그 교리가 틀렸다고 보이는 성구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원리와 같습니다.
중생교리는 질문 하나를 놓고 설명을 하기에는 너무도 그 답변할 양이 많기 때문에 첫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내용으로 조금 살펴보신다면 저절로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생교리는 성경전체에 거의 다 연결이 되어 있고 또한 기독교 교리 전반에 관련을 가진 교리입니다. 마치 삼위일체나 천국 가는 교리와 같은 정도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성구에서 막힌다면, 그 성구 때문에 중생교리에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수없는 성구와 교리 전반의 체계가 완벽하게 다 맞아지는데, 그 한 성구는 나의 신앙수준에서 약간 의문이라는 차원으로 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