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문) 성탄추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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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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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1. (질문) 성탄추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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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성경과 관련 없는, 단순한 '교회의 전통 문제'입니다.
1.교회 문제는 성경에 따르는 것과 교회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①예배와 관련하여, 성경을 기준으로 할 때 어느 정도로 지킬 문제인지 분류했습니다.
주일예배나 성찬식은 '성경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주일 2회 예배나 밤예배는 '성경처럼'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은 '성경을 참고'하여 지킵니다.
집회 부흥회 사경회 등의 교회 내 각종 모임은 '신앙 유익'을 위한 목회입니다.
성탄절은 성경과 신앙에 유익은 극히 적고 그 손해는 대단히 많은 것이니, '형편따라' 합니다.
추도식은 장점은 없고 단점 뿐이므로 성경으로 금해야 할 것입니다.
②성경으로 꼭 선을 긋고 지켜야 할 것은 주일예배와 추도식 문제입니다.
첫번째 말씀드린 주일 문제는 생사를 떠나서 지켜야 할 일이고 마지막에 말씀드린 추도식은 꼭 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앙이 어리고 장성한 정도를 떠나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문제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③신앙의 성장에 따라 필요하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말씀드린 주일 오후예배나 밤예배는, 신앙이 자라감에 따라 젖먹던 사람에게 밥이 필요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일예배 한번 외에 추가되는 예배가 꼭 필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 사람의 신앙 성장에 따라 그 중요성과 가치가 달라지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조는 하되, 꼭 지켜야 한다고 선을 긋지는 못합니다. 한 주간 집회를 할 때 수요일 밤예배를 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일오후 예배를 꼭 지키는 것은 주일 2회 예배가 원칙이기 때문이 아니고, 주일은 온종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때문에 자연히 한번 더 예배 보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④장점이 많기 때문에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단점을 조금 조심할 것도 있습니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들은 구약처럼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 절기들을 다 잊어라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식으로 지키는 문제는 없어졌으나 그 절기들을 통해 특별히 생각할 감사 제목이 있기 때문에 감사를 중심에 두고, 외부적으로는 형식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할 문제가 이 감사절기들입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감사생활을 실제 할 수 있도록 하되 형식에 치우치는 단점을 조심해서 해야 할 문제입니다.
⑤성탄절은 그 단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금하지는 못해도,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추도식은 아예 성경으로 금해버려야 하는 것이지만, 성탄절은 그 의도가 주님 오심을 기념하겠다는 것이어서 금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동기는 좋다고 해도 그 출발 사상 자체가 너무 감상적이었기 때문에 그 폐해가 클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실제 세월이 지나면서 그 폐해는 그 장점과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극히 조심할 문제입니다.
성탄절로 인하여 없어지는 죄는 수박 겉핥기와 같고, 성탄절로 인하여 쌓여지는 죄는 산더미입니다. 그러나 추도식과 같이 교리적으로 또 전면적으로 금하기에는 문제가 있고 단지 극단적으로 조심하며 살펴야 할 일이 성탄절입니다.
2.성탄절은 그 출발부터가 극히 위험스러웠습니다.
①인간들의 자기 감정으로 출발시킨 것입니다. 자기 생일잔치 기분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생일'에 대한 인간들의 잘못된 축하 기분이 앞뒤도 가리지 않고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세상식 잔치를 만들었습니다. 부활절은 구약 유월절에서 연결이 되어 있고 또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또 그 부활에 연합되어 살아라고 한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에 참고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주일오후 예배나 삼일예배 또는 새벽예배는 그날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모임을 폐할 것이고 우리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또 예배로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며 더구나 우리의 전생활이 예배생활이라야 하기 때문에 예배의 횟수와 시간이 확장되는 것은 두 말할 것없이 신앙이 자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기는 커녕 오히려 지켜서는 안되겠다는 깨달음이 많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다만 딱 금지해야 할 만한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에 유익이 있으면 지킬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삼가 조심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맥주맛에 취한 사람이, 천국에는 맥주공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인간들이 자기 태어난 것이 축하받을 일이라고 착각을 하고 그 착각을 가지고 예수님에게로 가져간 것입니다. 성탄절을 두고는 의심치 않을 수 없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서양불교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는 조각상 분위기 엄숙 형식 감상으로 유지되는 우상종교입니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성탄에 대한 것이 전혀 없었는데 천주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예수님 유품, 순교자들의 유골 등과 함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상에 취하고 젖도록 동원된 것입니다.
②현재 성탄절을 두고 행해지는 모든 것은, 이 면에서 보셔야 합니다.
눈이 와서 사방을 덮어야 성탄절이 된다고, 세상 뉴스까지도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속에 예수님의 대속이란 흔적도 없고 오로지 인간들의 시각효과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흰눈에 성탄절 찬송부르는 것도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무드를 조성하는 것이고, 선물도 그렇고, 아이들이 여러 가지 단정을 하고 율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 행동 자체를 두고 잘못되었다 할 것은 없지만, 그 모든 행동 속에 그 중심이 인간의 감정, 인간의 무드만 남아 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과 그 고난으로 구원 받은 기쁨과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살아야 할 각오와 같은 것이 없다면, 이는 천국잔치를 세상잔치로 바꾸어 치르는 것입니다.
③문제는, 성탄절 문제를 두고 타 교단이나 교회와 더불어 투쟁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생 교리, 구원 교리와 같은 문제를 두고는 외치다가 맞아 죽어도 외칠 만큼 가치가 있고, 그 한 깨달음으로 이 세대가 한꺼번에 놓쳐버리는 구원의 건설이 너무 아쉽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두고는 그렇게 투쟁해 가며 말릴 수가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감정이고 어디까지가 대속의 은혜에 대한 표현이냐 하는 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대속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가지고, 그 다음 주일학생이 그 어린 수준에서 '아기 예수님'을 찬송할 때, 아기로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더 깊이 느끼고, 또 아이들의 맑은 찬송을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그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말한 대속의 실감은 전혀 없이, 그냥 성탄절마다 선포되는 축하 주문과 같이 대속을 말해놓고 실제로는 성탄의 여러 행사를 통해 자기들끼리 놀고 먹는 짓을 하는지, 그 선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짐작은 할 수 있으나 남에게 이렇다 저렇다고 나설 수는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탄식할 문제이고, 자기만 조심할 문제이고, 남에게 물들지 않으면 되는 문제이고, 혹 남들이 시비를 걸게 되면 차분하게 설명하는 정도에서 그칠 문제입니다.
3.사실 성탄절은 모든 면에서 없는 듯 지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①성탄 츄리로 말하면, 성탄절의 감상적인 분위기를 가장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면입니다.
성탄 츄리가 전도용 불빛으로 잘 사용되던 때는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우선 집집마다 전등도 1-2개 밖에 없었고 또 가로등도 없었으며, 그마저도 전기값을 아끼기 위해 일찍 소등을 해버리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전부가 새까맣게 변해버리고 호롱불처럼 깜빡거리는 등 몇 개만 남아 있는 들판에, 멀리 예배당 종탑에 걸쳐서 예배당 담까지 내려오는 성탄절 츄리는 정말 멋지고 정취가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시내라 해도 고작 2층이면 높은 집이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시골이나 도심이나 별 차이 없이 그 멋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날씨도 그때는 추웠지만 가정도 난방이 전체적으로 되지 않아서 사람이 앉거나 누우면 그 신체 접촉되는 부분만 따뜻했기 때문에 일어서서 움직이는 사람은 겨울내내 몸이 얼어붙게 되어 있었습니다. 몸이 추우니 마음도 추웠고 그래서 천지가 그렇게 추워보이는 상황에서, 멀리 예배당 츄리가 빨강 파랑 노랑으로 반짝거리고 있으면 시각적으로도 따뜻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고, 우선 마음까지도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평소 때는 교회를 욕하고 조롱하던 사람들도, 세계가 성탄절을 즐거운 날로 대한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성탄절 근처가 되면 이해하는 편이었습니다. 자연히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어 추운 상태에서 또 어두운 밤에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특히 그 겨울 밤의 어둠까지 분위기를 더욱 보태었고, 하늘에 반짝이는 별까지 멋진 배경이 되어 성탄절의 교회 츄리는 온 세상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겠다는 상징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이런 성탄절 츄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고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개 면에 교회가 하나 있을까 말까 했고, 어지간한 시골 읍이나 작은 도시에는 이 골짝에 하나 저 골짝에 하나를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눈에 성탄절 츄리가 2개나 3개가 들어오는 경우는 서울이나 있었을까요?
1970년대까지는 이런 분위기 남아 있었고, 혹 낙망하고 낙심한 사람이 이런 감상적 분위기에 이끌려 교회를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전도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감정이 개입되도록 기술을 사용하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철수시켜 버리는 것이 성경이고 진리입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다는 것입니다.
②1980년대부터는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돈과 사람이 교회에 몰리기 시작했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망하고 손쉬운 사업으로서 인쇄업과 예배당사업을 손꼽을 수 있다는 말을 서적업자들이 하던 때입니다. 1970년대 비축된 고도성장의 경제력이 1980년부터 외부로 표시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 골목까지 가로등이 급작스럽게 설치가 되어 심지어 5집에 가로등 하나가 들어서고, 뚫을 수 있는 대로는 도로가 사통팔달로 들어서며 그 도로에는 야간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로 메워졌고, 2층이면 높은 건물이었는데 5층 10층 건물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들어서며 하늘을 향했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는 차단이 되었고 그 건물과 가로등과 일반 가정의 불빛들이 밤과 낮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하여 성탄츄리를 달아봐야 우선 눈에 띄이기도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네온싸인 규제가 풀리게 되자, 시골 작은 간판까지 일년 내내 성탄절 츄리를 켜고 술을 팔고 가게마다 광고 불빛을 풀가동시켜 버리게 되자 밤하늘의 별이 빛을 잃어 별도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더하여, 교회는 한 블럭에 2-3개씩 들어서고, 시골도 교회가 경쟁적으로 들어서며, 교회들마다 종탑에 성탄 츄리로 경쟁을 하게 되니까, 이제는 업소인지 성탄츄리인지 무엇인지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1년에 한번 어두운 밤하늘에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정취있는 성탄절츄리의 의미는 깨끗이 없어지고, 무분별한 네온싸인 광고들 중에 하나처럼 파묻히고 심지어 주유소마다 항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느라고 현란하게 벌여놓은 자극에 이제는 사람들의 시각에 성탄츄리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③성경이 명한 것이면 끝까지 지키겠는데, 성탄의 정취를 위해 설치하는 것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얼른 치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혹 아직도 그 성탄 츄리를 설치하여 앞에 말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든지 아니면 다른 면으로 특별히 필요하다면 몰라도, 무조건 성탄에는 옛날부터 해오던 필수품이니까 한다는 것이라면 교회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은 앞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그 출발이 인간적 감상주의이지 성경적 근거도 없었고, 그렇다고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절실한 것이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신앙어린 사람들을 배려한 면이 있었는데 그들의 발전적 신앙을 위해서는 장점보다는 단점과 위험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극히 조심할 행사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과거 분위기에서는 전도나 교회 활동을 사회적에 대하여 좋게 알릴 수 있는 면이 일부 있었지만, 지금의 성탄 츄리는 아주 단점만 촐촐 남겨두고 있는 시대입니다.
성탄 츄리를 잘 했다고 보여지는 곳은 교회의 자기 과시면이 강조되고, 그렇지 않으면 무분별한 난립에 어지럽게 보이는 시대인데, 이미 '성탄절'은 세상적으로 장사들 돈벌이하는 대목이요, 청소년 탈선의 기회요, 사회는 주말 연휴 나들이로 사용하는 휴가철이요, 교회는 한번 치르고 넘어가야 하는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행사들은 내부에서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로 교회 내부문제가 되고 있으나, 성탄 츄리는 성탄 행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외부를 상대로 치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와 거리 먼 외부인들 이방인들 타교인들 신앙어린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지를 잘 감안하여 해야 할지, 한다면 어느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④질문은 '성탄 츄리'지만, 새벽찬양을 포함하여 여러 행사들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전 주일학생은 시루떡 두 조각을 먹겠다고 성탄절 교회를 찾았고, 그때 그 떡 때문에 평생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았습니다. 배고프던 때였기 때문에 교회는 떡 하나로 전도할 수 있었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또 남들 앞에서 한번 나서서 발표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사회 전반적으로 특수한 아이들 외에는 주어지지 않았는데, 교회에서는 성탄절 찬송연습으로 남 앞에 한번 자기 발표를 한번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 선물이 넘쳐 나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탄 추억이 되도록 선물을 하려면 아이들 하나에게 돈 10만원이 넘어가야 할 정도인데, 그것도 이전 떡 1-2개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남 앞에 발표하는 것도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또 학원 행사까지 그 기회가 너무 많아서 이제 예배당에서 발표해 보는 것은 유치원학생들이나 아직까지 설레일까, 초등학생만 되어도 시시하게 될 판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이전에 성탄절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들과 어디 휩쓸릴까 하여 교회 행사로 잡아두고 교회도 익히게 하고 교회 선배와 유대도 갖게 하고 또 그들에게 신앙으로 향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을 극단적으로 자극할 컴퓨터 게임과 미치도록 해 줄 수 있는 TV나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도 있고, 또 학생이 원하면 일단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환경이 되어 있습니다. 1년 내내 탈선과 타락과 방종이 그들 손끝에 닿아있는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성탄절 한번 잘 넘기게 하면 또 1년은 바람들지 않겠다고 안심할 수 있는 때도 아닙니다.
⑤성탄의 장점은 거의 실종되고, 폐단과 단점이 많다는 것을 우선 동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백영희신앙노선처럼, 어떻게 믿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이곳의 주장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믿자고 한다면 이곳도 그 분들에게 대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원칙을 놓고 말해야 한다면, 성탄은 그 출발도 성경적이 아니었고, 그 동기도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떡 벌어지게 해야 할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도 대단히 그 단점과 폐단들을 조심했어야 했는데 성탄절이라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분들은 그 단점을 막을 신앙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성탄절은 성탄절 지난 10개후에 미성년 또는 혼외 대량 출산으로 그 실체가 확인될 정도였습니다. 이 통계도 피임이라는 의미를 몰랐던 1970년대까지 통계입니다.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대량 출산으로 표시조차 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오늘 교회가 신중하게 되돌아 보고 다시 그 의미와 그 행사를 확인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 시민단체 사람들 입맛대로 이웃돕기를 중심으로 지낼 행사라면, 기독교를 사회사업으로 바꾸고 두레마을 김진홍목사님을 교주로 모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교회가 죄문제를 해결하고 대속하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면, 성탄을 통해 죄를 더 깨끗이 정리하고 회개에 나서고 죄와 싸우기를 십자가에 죽음을 생각하고 상대할 일입니다. 이런 면으로 성탄절을 맞을 것같으면, 아예 성탄절을 기하여 그리할 것이 아니고 한 주일에 한번 오는 주일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정상적인 교회 앞에는 그 몸둘 바를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저 모퉁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그냥 사라져 버려야 옳을 것입니다.
백목사님의 평생 목회걸음을 추적해보면 바로 그런 걸음을 걸었습니다. 주일학생 중고등학생 전도에나 사용했고, 그들이 선물을 보고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니는 것을 막는 정도로 사용했고, 또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수도 없는 사람에게 설명할 일이 막막하여 그냥 우리도 하기는 한다는 정도였습니다.
4.전면적으로 하지 말라는 정도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①100미터 정도로 붙어있는 시골교회 중 이런 교회를 보았습니다.
성탄 츄리에 대한 질문인데, 주변 교회들이나 세상사람들로부터 혹 오해는 없는 것이 좋겠고, 그렇지만 성탄 츄리의 여러 문제점은 분명히 속으로 알고 계시면서 조절해 나가야 하겠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시골에서 100미터로 붙어 있는 교회는 대단히 근접거리입니다. 두 교회의 성탄 츄리는 한 해의 마지막 경쟁처럼 보이기 쉽상입니다. 한쪽 교회가 자기 교회 예배당 문 앞에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에만 등을 달아 성탄 츄리를 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옆에 교회 츄리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방향이나 그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교회 건물 바로 앞에 간단하게 작게 츄리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는 그 츄리마저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린 교인이나 시골 동네 사람들 인식에 무슨 이단인가 하는 느낌이 있을까 하여 줄여나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②참고로, 성탄 츄리를 놓고 비교해 볼 것은 예배당의 종과 챠임벨 소리 역사입니다.
성탄 츄리는 성탄절 한번이라고 한다면, 일년 내내 예배당의 정취를 외부에 느끼게 하는 것은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예배당 종탑의 종과 그 종소리입니다. 밀레라는 화가가 저녁종 소리를 듣고 기도하는 농부의 그림을 그린 것은 세상에서도 대표적인 풍경화입니다. 예배당의 종과 그 종소리가 갖는 정취에 대하여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도심은 1960년대까지, 시골은 1970년대까지 종을 가졌고 그 종을 쳤습니다. 1천년 넘는 교회 역사와 전통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심은 1970년대부터 시골도 1980년대부터는 챠임벨 소리로 종소리를 대체하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일찍부터 없애버렸습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예배 30분이나 1시간 전에 종을 쳐서 교인들에게 예배 준비를 시키던 것이 예배당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면서 시계 없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산업사회라는 것 자체가 시계에 맞추어 사람들이 빈틈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교회의 종이라는 것은 정서에 호소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하나의 치장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필요성이 없게 되자 바로 없애 버린 것입니다.
동시에,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에게 그 종소리가 교회에 대한 반감과 악감을 반복해서 심어주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교인들의 거주지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반경 내에 붙박고 사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1970년대를 지나면서 도심의 대형 교회일수록 그 당시로는 고가인 챠임벨로 교회의 존재를 과시하고 이어 중소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이를 바꾸어 갈 때, 공회 소속 교회들은 종이 종으로서 기능상 필요하지 않은 곳은 철거하기 시작했고 챠임벨로 바꾼 교회는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당시 주변 다른 교인들에게는 종 없는 교회가 교회냐, 이단 아니냐 등으로 많은 지적과 비난과 논란이 있었지만, 2000년대로 접어선 오늘은 공회의 신앙노선이 분명히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③찬송가나 성경처럼 한번 잡으면 바꾸지 않아야 할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찬송가나 성경처럼, 참으로 미련스럽게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제도처럼 그 실체를 파악한 후 필요하면 즉각 바꾸어 수백년 교회역사를 새로 시작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또 예배당 종처럼 천천히 바꾸어 가되 그 존재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슬그머니 축소해 나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소리없이 없애버려야 할 것도 있습니다.
성탄 츄리는 예배당 종탑과 종소리의 경우로 보셨으면 합니다. 공회의 신앙노선은 예배당을 지을 때 종탑을 올리고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리는 등의 외부 멋과 치장은 일절 사양하고 있습니다. 예배 볼 수 있도록 비 피하고 튼튼하게 짓고 작은 돈으로 지을 수 있는 사각 공간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수십년 전부터 그렇게 지었는데, 요즘 교계를 포함해서 세상까지 예배당 사치를 두고 천주교를 닮는다고 그렇게 비난이 많습니다.
세상 비난은 원래 신경쓰는 체질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5백년 전에 천주교로부터 구사일생 탈출해 나와서 오늘 기독교가 되었는데, 지금 기독교는 선배들이 죽을 고생 다하고 빠져 나온 천주교 속으로 자원해서 기어들어가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개혁주의'라는 이름은 멋모르고 또 장식품으로 다 걸치고 있는데, 그 개혁주의라는 의미는 바로 이제 말한 이 주장을 여기서 주장한 것보다 더 강하게 지켰던 초기 천주교로부터 빠져나온 신앙운동이라는 뜻입니다. 그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예배당을 멋으로 짓는 것이나 예배 순서를 오늘처럼 복잡게 하는 것, 예배시간에 찬양한다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뛰고 굴리는 것을 전부 배격하는 신앙주의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주장은, 교회역사 중 '중세역사'와 '종교개혁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통 중에 정퉁의 주장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것이고, 이곳의 주장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기독교는 개혁주의 신앙인데 기독교의 근본을 모르고 천주교식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정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