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찬-3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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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찬-3

내용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

백영희조사님



나의 인생에 가장 귀한 만남은 백영희 조사님을 만난 것이다. 나의 40여년 신앙생활과 20여년의 목회생활은 백영희 조사님을 만남으로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가 조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4월 25-30일 첫 삼봉산 집회 때였다. 4.19 학생 혁명 다음 주간이었다. 나는 당시 조사님을 만나는 것이 유일 소망이었다. 매월 순회 오시는 서부교회 집사님들과 본교회 전도사님과 주변 많은 사람들로부터 너무 너무 신령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회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교인들과 약 60리 길을 걸어가 참석하였다. 삼봉산 밑에 폐금광의 뼈대만 남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에서 첫 집회가 열렸다. 가을(9월 12-17일) 집회는 더 깊은 골짝에서 큰 천막을 치고 열렸고 다음해부터 일정한 장소에서 천막치고 집회를 하다가 1967년부터 주상기도원으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님은 약 12명의 집사님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셨다. 조그마한 키에 삭발한 모습이었으나 얼굴과 눈은 너무도 빛나 보였다. 첫 시간부터 감동과 감격 속에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본교회서의 설교와 순회 집사님들의 설교와 여러 차례의 다른 집회를 통해 받은 기초 위에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 고후13:5,딤후3:12-17, 히2:1-4, 벧후1:1-11 본문으로 중생 성화를 중심한 근본 구원 도리를 자세히 증거하셨다.


그후 예배당 겸 숙소인 천막을 치고 집회를 계속할 때 많아지는 교인들로 너무 좁아 꼼짝도 못하였고 자주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밥을 지어 먹고 비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아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도 3-4시간씩 하는 설교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경청하며 필기했다.그 때부터 받은 복음 진리가 내 신학과 신앙의 뼈와 살이 되어 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63년 4.29∼5.3일간 삼봉산 집회는 산에서 열리지 않고 봉산예배당에서 열렸다. 창세기 4장 본문으로 노선에 대해 한 주간 설교하셨다. 5월2일 목요일, 집회 마지막 저녁 백목사님의 요청으로 전도사님과 친구와 강사실에서 처음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되기 원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구동성으로 소원은 있지만 부족하여 되겠습니까 하였다.


성직의 사명감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마음을 버리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하라고 하시며 특히 성경과 영어 공부에 전념하며, 범사를 깊이 관찰하고 타에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하셨다. 예수님은 30년 준비하여 3년 일하셨고 모세는 80년 준비하여 40년 일했으니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며,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없으니 어린 종들을 인도 양육 보호해 귀한 일꾼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로부터 16년 후, 79년 11월 9일 친구들보다 약 10년이나 늦게 전도사 인허를 받고 11월 20일 봉산,원기교회에 부임했으니 기이한 섭리로 생각되었다.


78년 목사님의 요청과 선배 교역자들의 권면으로 양성원에 입학하여 6년만에 졸업하고, 86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부임한지 6년 반 만에 86년 5월 봉산교회를 떠나 신풍교회 구전교회,성림교회 거쳐 포양교회 현제에 이르렀다.


목사님은 89년 8월 27일 주일 새벽 설교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 분의 죽음을 측근은 순교, 보통은 순직, 반대자는 보응이라고 너무나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나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다가 죽으셨으니 순교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날의 살해가 정신이상자의 광란으로만 알기엔 너무 강한 의심과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80년 4월 병아리 전도사 시절 어느 수요 예배 시간 서부교회 강단에서 증거한 나의 짧은 설교를 세계적인 설교라고 하시며 교만하지 말고 말씀대로의 사람만 되라고 분에 넘치는 격려를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말씀이 예언으로 성취되기를 아직도 기대해 본다.


나는 목사님 앞에 무례한 언행도 더러 행하였다. 조폐공사의 악명이 그러하고, 세례라면 박 목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들만 봐도 그러하다. 그 이후 만날 때마다 한번도 그냥 지나지 않으시고 다시는 어리석지 말라는 말씀 하시던 것을 기억하며 반드시 지혜자가 될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다.


많은 선배와 동역자들로부터 나는 100% 그대로식이 아니라고 깨끗지 못한 사람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그러나 나는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나는 심판날에 그들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최선을 다해 예수 대로, 성령과 성경 대로 믿고 행하고 전하고 산다면 목사님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너무도 위대한 설교자, 목회자, 신학자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님의 종이시며 신사참배와 공산세력을 이기신 불굴의 신앙가이심을 아는 자들만이 알 것이다. 나는 제자의 수에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다. 살아계실 때에도 부끄러워 감히 나서지 못했고, 천국 가서도 멀리서나 뵈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스럽겠다.


목사님의 유족들과 모든 선배 후배 동역자들과 가정과 교회들 위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총이 끝날까지 함께 하기를 우유부단하고 신찬한 사람이지만 삼가 또 삼가 기원해 본다. 주님과 함께 오실 조사님 아니 목사님을 스무살 나이에 처음 만나 이단, 사이비, 이상한 교회, 별난 소리까지 다 들으며 지금까지 살아 왔으나 나는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조그마나마 김사할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끝날까지엔 어떤 미지의 길이 열려질지 고요히 고요히 눈을 감아 본다. 주여!


예수님 만나 좋은 신앙인이 되려면 좋은 신앙인 부터 만나야 한다는 말은 지당한 말이지만 좋은 신앙인,목회자,친구들을 만나고도 좋은 신앙인,목회자가 못되는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아멘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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