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찬-2

공회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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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찬-2

내용 첫신앙의 시절

첫 신앙의 순간, 박신찬을 포함한 대부분의 분들이 가졌을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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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0년의 생존이 큰 기적이고 40여년의 신앙생활이 더 큰 기적이고 20여년의 목회생활은 더욱 크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믿는다. 유교적 고풍이 극심한 가정의 장손으로서 예수교의 신앙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기적이요 은혜이다.


부모님의 심한 반대 속에 주일성수하며 교회 생활 계속하다가 달빛 밝은 어느날 저녁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의 정문 위에 앉아 기도하고 집에 와서 신앙생활 자유롭게 하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교회까지 달려가던 그 기쁨의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 모친과 형재자매,그 자손 모두 신앙인이 된 것도 기적이다.


고교 1학년 크리쓰마스 다음 주일부터 친구들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3학년에는 신앙 생활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주일 예배 뿐아니라 주변 교회의 모든 집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11월에 읍내에 있는 개척 교회의 집회에 담임선생님과 곰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주간 참석했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신앙 고민을 하는 학생을 기독학교로서는 징벌할 수 없다시며 용서하신 곰님의 넓은 마음을 잊을 수 없다.신앙생활에 빠져 공부를 소흘히 한 것은 잘못이지만 후회해 본 적은 없다.


1957년(고1) 크리쓰마스 다음 주일인 12월 29일에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탄절에 떡 얻어 먹으러 온다고 생각할가봐 일부러 성탄절 지난 첫 주일부터 나간 것이다. 나의 첫 교회는 건너 마을의 조그만 동산 위에 있는 아담한 고신측 교회였다. 두루마기 입고 설교하시는 늙어 보이는 조사님(전도사)으로부터 요6:1-14 오병이어의 설교를 들었다. 58년 일년 동안은 신앙에 별 진전 없이 보낸 것 같다. 교회는 빠짐 없이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나갔다. 보리밥을 많은 먹던 시절이라 그런지 몰라도 어떻게 설교 시간에 무엄하게도 방귀를 여기 저기서 뀌어 대는지 퀵퀵 웃다가 돌아오곤 했으니 믿음이 자랄리 없었다.


일년이 가고 58년 마지막 주간에 집회(사경회)가 열린다기에 월요일 저녁 친구와 함께 참석했다. 나의 첫 집회 참석이었다. 그러나 그 집회 시작하면서 교회가 분열하는 서글픈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청년회 주최로 초청한 강사님이 한창 노회에서 재판해오고 있는 서부교회 백영희 조사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강단에 세울 수 없다고 처음 들어보는 골리앗 같은 당회장의 위엄찬 목소리였다. 이웃교회에서도 다소 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청년회장으로 생각되는 선배가 나와서 다른 곳에서 집회를 강행할테니 참석하라는 발언과 함께 거의 퇴장하여 田집사님의 새까만 아주 작은 오두막 집 방과 마루에서 첫 집회를 마쳤다. 이튿날 동네 가운데 있는 다른 李집사님 집의 벽을 뜯어내고 두 방을 한 예배당으로 만들고 중학생들이 학교서 사용하는 책상 하나를 강대상으로 세우고 집회를 끝맞쳤다. 새벽까지 한 시간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맨 앞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때의 말씀은 기억못해도 설교하시던 조사님의 얼굴은 천사 같이 느껴질 정도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부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조그마한 동리에 두 개의 교회가 서로 종소리를 울리며 예배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고 지금도 아픈 분열은 이 땅에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네 가운데서 집회를 끝낸 그 집이 오늘에 우뚝 솟은 창북교회로 발전한 것이다. 내가 약 20년간 밤낮으로 드나들며 신앙생활을 한 모교회인 것이다. 눈을 감고라도 찾아갈 수 있는 정든 교회였다. 백조사님이 상회불복종이란 죄목으로 노회에서 제명(59,6) 당하기 약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첫 교회,첫 집회,첫 분열로 교역자 없이 우리끼리 모여 예배드리는 형편이었으나 나의 신앙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 생활 약 40년은 모교회와 새로 시작된 세칭 백파 교단의 약 40년 연대와 같은 셈이 된 것이다.총공회는 그 이후에 붙인 이름이다.


두 세 선배와 우리 친구들끼리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며 서부교회서 다달이 순회로 오시던 귀한 집사님들의 설교와 격주로 오시는 이 조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자라갔다. 고 3 이 주교 부장도,청년회 회장도 해보기도 하지만 유명무실 그대로 실패였다.


59년 9월 29일 추계 휴교이므로 동쪽 아침마다 해 뜨오르는 높다란 금귀봉 정상에 올라 기도하다가 내려오니 우리 교회에 교역자님이 오셔서 읍내 李집사님 댁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친구들과 같이 가서 저녁에 약간의 이삿짐을 질머지고 올라오고 전도사님은 이튿날 9월 30일 수요일에 부임하셨고 첫 수요 예배는 창3:1-8 설교하시다가 단식을 오래하여 지쳐 중단하고 말았다.


그 신전도사님은 내가 만난 첫 목자였다. 남자 전도사를 조사라 부르고 여전도사는 그대로 전도사로 불렀다. 그 이후에도 여전도사는 거의 찾을 수 없을 만큼 희귀했다. 그래서 여전도사님 부를 것 없이 전도사님이라고만 불러도 다 통한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같이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30세 중반의 젊은 때인 것 같다. 나의 모교회 20년 동안에 열 분의 교역자가 교체되었다.


일편단심 하나님 사랑,교인 사랑하시며 기도로 사시던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그 분이 소장한 박윤선 목사님의 전 주석과 모든 책을 탐독했으며, 그분의 기도실을 뒷산 너머 산 중턱에 친구들과 굴을 파서 마련해 드린 것 등은 잊을 수 없다. 전도사님은 나의 아내를 중매하기도 하신 분이며 우리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며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는 응답되어 여러 장로(이환봉,성기정,오세윤,남상철,김병권),목사(김철수,김병춘)가 되었고,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집사님의 두 딸은 사모가 되었다. 이 모든 신앙 동지들을 나는 자랑하며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 2세들 가운데도 여러 교역자들과 사모들이 자라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64년 8월 29일(토) 꼭 5년만에 이웃 교회로 이동하셨고 송용조조사님이 도평과 겸임하여 몇개월 목회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철없는 젊은 우리들이 여자는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배신하여 이동케 했으니 우리의 소시의 죄악을 사하여 주옵소서. 몇 년 전 서울서 은퇴하여 홀로 늙어 가시는 전도사님께 지금도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 후에도 이런 교역자 반대는 몇차례 더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가룟 유다의 후예인 것이며, 목회하며 교인들의 반대를 부딪힐 때마다 마땅한 보응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영욕이 교차하는 첫 교회, 첫 집회, 첫 목자, 첫 교단, 첫 배척! 만감이 교차하지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때를 생각하며 기도동지회로 모이기도 한다.


나는 그 동안 1960년 3월, 읍내 있는 교회의 유치원 강당을 빌려 졸업식을 했다. 61년 11월 17일(금)저녁 중앙교회(현 창동)집회 기간에 백영희 목사님께 학습을 받았고, 62년 5월 7일 본교회 순회시 배수윤 목사님께 읍내 친구와 함깨 세례를 받았다.


할렐루야!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아멘!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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