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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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수

내용 목사님이 친자녀로 기른 첫학생들 (수정본)

전성수.재수목사님 - 목사님이 친자녀로 기른 첫학생들 전성수, 재수목사님, 이선희집사님

기록일시: 1994. 10. 11. (남정교회 사무실)


1.소개

백영희목사님 초기 개명교인들로서 말씀에 죽고 사는 초대교회로 살았던 시절, 가장 박해가 극심했던 가정이며, 아들 2명이 백목사님을 좇아 목회자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회자로 순생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전성수목사님은 복음의 넓은 세계를 위해 한없이 좁게 살았던 분이었고, 전재수목사님은 좁은 복음을 넓게 펼치기 위해 활발하게 목회를 했던 분입니다.


2.가정

부: 전문용, 모: 이선이

큰아들: 전성수, 부인: 전순달, 자녀: 은숙, 도광, 혜숙, 성숙, 도민, 00

작은아들: 전재수, 부인: 신숙자, 자녀: 은영, 도영, 도한, 도성


3.가족

본래 의령군 대의면에서 살던 전씨 집안으로 호주의 사후 경제 곤란으로 화전을 찾아 거창 개명골짝까지 이주하게 되었고 부친 전문용에 이르러 5대째 개명에 거주. 집안이 장골이었고 키나 체격이 대형이거나 아주 강함. 개명에서 보통을 조금 넘는 경제.


①전문용

백목사님과 같은 1910년 생이며 1950년 41세로 사망하게 됩니다. 대용 혹은 용대라고 불렸으며 백목사님이 예수믿기 전까지만 해도 제일 가까웠던 친구였습니다. 호탕한 성격이며 둘째 전제수목사님이 많이 닮은 편입니다. 술인심이 넉넉했고 이런 그에게 백목사님이 술독아를 팔고 예수에 미치게 되자 마귀 고수 전문용에 예수 고수 백영희로 평가받게 됩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고 선대로부터 농사를 주로 했으나 상업소질이 있어 닥나무를 재배, 한지를 제조하고 여러 장삿일로 활동 하였으며, 훗날 아들 두 아들이 목회 나오기 이전에 장사를 아주 크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집안 내력으로 봅니다.


②이선이

1913년 생으로 호적 이름은 외선이며 성격이 대단히 강하며 의지 또한 강했습니다.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 내고야 마는 실천력이 있었고 봉산이 친정이며 어깨너머로 배운 글이나 모든 손재주가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친정 부친이 한학자이며 아침마다 주문을 외울 정도로 집안에 미신이 강했고 1919년 대홍수에 모친이 사망하고 17세 결혼에 23세까지 아이가 없게 되자 유독 미신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고프던 시절에 나락 가마니가 반가마니로 줄어들 만큼 쌀을 비비며 겨울 내내 정성을 드려 본 적이 있을 정도. 더욱이 큰 집 아들 셋이 다 죽게 되자 귀신에 공을 드리는 일에 지극 정성이 더하지 않을 수 없는 즈음 결국 무당굿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 백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23세 되던 1935년도에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③ 전성수

1935. 11. 16. 생, 1982. 6. 5. 사망, 본명은 판수였으나 목회 출발로 백목사님께서 이름을 성수로 고쳐 주셨습니다. 외모가 좋았고 큰 키를 가진만큼 도량이 넓으고 진실되어 전형적인 외유내강이었습니다. 개명초등학교 1회였고 집에서 독학하여, 거창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양에 있던 카츄사 부대에 근무를 하였고 신앙 자유를 얻어, 피어선 신학교 2년을 야간으로 공부하였습니다. 1950년대의 일이며 제대 후 건국대로 편입 졸업하였습니다. (1967-8년)


전순달사모님은 가북 용산 분으로, 전목사님이 평생 한 길, 이 복음 교역자의 길을 그대로 다 걸었으며 그로 인한 가정 경제 등의 어려움이 지극했습니다.


신앙에 많은 갈등을 겪음


위천교회 1968. 2. 28. 첫 교역자로 파송이 되었고, 이후 경북 화전교회 1970년. 덕수교회에서 6-7개월을 보낸 다음 1972-80까지 신용인목사님을 이어 창동교회를 맡으면서 거창집회장소의 규모와 운영이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준비를 몸으로 마련하였습니다. 큰 교회와 전국 집회를 한 몸으로 책임진 과로가 이어지며 동성로교회 시무 중 1980-82. 6. 5. 과로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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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목사님 필기노트 기록


/67.3.-68.12. 위산/ 69.0.-71. 화전/ 71.11.-72. 덕수/ 72.5.-80. 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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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전재수

1941. 2. 29. 출생했으며 아버지 쪽을 많이 닮은 호탕한 성격입니다. 개명초등학교 6회 졸업, 고제중 4회 졸업, 명지대 법과 74년 졸업, 위천교회 출신 신죽자사모님(1943-위천교회 출신)


4.신앙박해


개명교회 초기 전목사님의 부친이 교회 박해의 선봉에 서고 내강외강의 아내가 불타오르던 신앙이 꺾이지 않게 되자 향후 20여년간 계속되는 동네 전체 박해의 제일 촛점이 됨


①매일 밤 집집마다 교회 못가게 박해하는 전문용의 일성

원래 술 주정이 심했고 예수 믿는 아내를 향하여 모든 폭발의 불길로 쏟아졌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동네 주막이던 어디서던 술이 가득 되어 오는 것이 매일의 일과. 집은 교회 약간 윗쪽으로 두어집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낮은 언덕배기로 씩씩대며 치달아 올라가서는, 온 동네를 향하여 호령을 합니다. 출전하는 말들의 콧김처럼 거친 숨을 씩씩 내품으며 동네 밑을 향하여 쩌렁쩌렁 고함을 질러 대곤 했습니다. “예수 믿는 년들, 야 이년들아!!!!”전문용의 일성, 욕이 시작되면 온 동네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예수 믿는 아내가 있는 집집마다 일제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립니다. 전문용의 욕설을 신호로 한 잔씩 먹었던 취기에 자신을 얹혀 마음껏 휘둘러보는 것이다. 조선말기의 남자 절대권으로, 여자에 대해 절대 우위인 주먹과 발길질로, 오기로, 감정으로, 그러나 이 모든 인간적 요소 뒤에는 장차 이 시대를 짊어질 신앙의 뿌리와 모판을 초두에 근절시키려는 악령의 총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제일 선두에 이용당하는 전문용은 박해하는 자신의 넘치는 힘이 어디서 솟는지 알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②이선희집사님의 기도생활

박해는 매일이었고 육중한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타격은 온 집안 살림이고 이집사님의 몸이고 사정없이 공중으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한번은 견디다 못해서 농산리 박정래 장로님 집에 잠깐 피했다가 한 주간 기도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겠느냐는 걱정에 호랑이굴로 가겠다고 하니까 장로님은 낮에도 혼자서는 남자라도 가기를 겁내는 험골인데 어찌 집사님 혼자 산기도를 가겠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길로 한 주간을 산기도로 지냈습니다. “하나님 함께 하시니 누가 나를 해하리요!” 조금도 주저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집에서 죽을 수 있는 순교의 순간으로 지나던 때라 전적 주님의 은혜였고 이미 사선을 넘었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침 한 주간 내내 비가 내리쳤습니다. 가지고 간 성경 한 권만은 비 맞지 않게 하려고 품에 안아 보았지만 온 몸이 흠뻑 젖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도 역시 흠뻑 적셔졌습니다.


이러한 우 중에도 불구하고 이집사는 금식으로 한 주간을 계속한 뒤 내려왔습니다. 한번 방향을 잡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조사님의 신앙인도도 인도지만 가정박해가 너무 심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간구도 이런 사선을 넘어서는 기도로 임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한 연단 역사였습니다. 한 주간 집을 비웠으니 이 역시 얼마나 난리가 날 일이었던가? 기도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또 다시 큰 난리가 났고, 그 다음 그대로 계속이었습니다. 큰 전쟁에는 큰 준비를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5.기타 상황


①개명초등학교

개명에서 고제초등학교로 다니던 학생들로만 개명초등학교가 분립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1회가 20여명, 전교생 100여명에 계명:하계명, 상계명, 수류, 물안실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학교를 보내지 않는 집도 2-30% .


②개명교회 주일학교

반사로서는 백목사님 떠난 뒤, 백태영선생이 부장이었고 이술이, 김대수 선생 등이 학생들을 맡았습니다.

공회 인물사는
설교록 이해에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록의 설교 배경 또는 설교록의 인용을 보충하는 자료입니다. 설교록에 언급되거나 목사님이 거쳐 온 걸음에 연관 된 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설교록의 내용이 너무 엄청난 것이 많아서 자칫 지나친 자기 자랑이나 과대한 선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씩 살피면서 이 노선과 설교의 또 다른 세계를 봤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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