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교회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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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교회

개척정보(1980년 기준)
설립 1947.2. 자립 1947.2. 개척자 손의원
규모 990/635 재산 407,415(부) 소재지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 381 (42-7493)
비고 1952.7 백영희 부임

1.개척


항서교회 소속의 이명달전도사님(1948.02.01. 항서교회 부임)과 김영준 장로님 부부가 주축되어 당시 한국 교계 신사참배 처리 문제에 대하여 항서교회와 김길창 목사님이 신사참배 지지측 노선에서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고 고신 소속으로 개척을 추진. 이명달전도사님이 우선 개척 전 3-4주간 항서교회를 출석하지 않았고 개척을 준비 중. 막 시골에서 이사왔던 진금옥씨까지 시장에서 만나 개척으로 합류토록 권유하여 1948. 11. 7. (11월 첫 주일) 서부교회 정식 개척 예배를 보게 됨.



1)손이원목사님을 모신 첫 개척


최초 예배 인원 16명: 손이원목사님, 교인으로는 이명달, 김장로님 부부, 정재완부부, 박남숙 (박정자 언니), 한동희 한종희 형제, 김용학 김분옥부부, 교사 한 분과 장렬 등이었으며 장소는 김장로님 가정. 예배당은 현 서부교회 대지에 평범한 2층 일본가옥이 있었고 이를 사서 2층방을 터고 다다미로 예배당 사용, (현재 서부교회 상강당 자리가 단상, 하강단 중앙부분이 방, 강단은 북쪽), 16명으로 개척하여 100여명까지 부흥.


2)김창인조사님


1950. 4, 삼일교회 남전도회 전도사로 있던 김창인 현 충현교회 목사님이 전도사로서 서부교회 부임. 1946년 월남 후 부흥사로서 곳곳에 따르는 교인들이 있었고 서부교회에 담임목회가 시작되자 유입되는 교인으로 300여명으로 부흥, 1952. 5. 근래 유입되었던 월남교인들과 기존 교인들의 갈등.



2.백영희조사님


1)부임


무명 흰 양복, 중절모의 모습이었고, 부임 첫 주일 예배에 장년반 뿐 아니라 주일학교까지 설교. 주일학교 첫 예배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 두 가지 내용 중에 하나로 설교. 당시 장년반 40, 주일학교 80여명, 한번씩 주일학교 설교.


2)설교


주일학교 설교 중에서 학생들을 불러 세워가며 '일하기 싫으면 먹어야겠는가, 말아야겠는가? 문답으로 설교를 진행. 1952년 부임 때나 마지막 1989년 때나 한결. 여름 성경학교 때는 설교 전부를 조사님이 담당하였고, 아브라함, 이삭, 다윗 등의 성경인물과 함께 효도에 대하여 순임금에 대하여도 비유로, 순임금 아버지가 우물에서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자세하게 소개.

일반 교회와 같이 주일학교 이후에는 학생회, 청년회, 성가대, 남녀 전도대 등 일반 교회 활동과 동일


3)주일학교


①1952-초기 주일학교

부장: 한동희 전도사

반사: 조종석, 전자출, 박혜영, 정갑조, 조대환, 송무자 (이종덕婦), 문영자, 백순희, 송용조,

신용인, 김응도, 박장관, 서영호, 조현옥, 조길연 (송용조婦), 김명자, 박현옥

편성: 남녀 1개반, 학년당 10여명, 전체 150여명. 학년에 학생이 많으면 2-3 개반으로 편성


②1959-62년도

부장: 백영침

출석: 300-350, 주일오후: 100, 수오후: 60, 새벽: 3-40


반별 평균 10-15명, 여4-1반 장춘자 (김영웅婦), 안영옥, 송방숙 3개반은 반별 4-50여명씩 출석, 마분지 프린터 한 출석부 하나에 30여명 등재되는데, 대형반들은 그런 출석부가 반별로 3-4개씩 보유. 3개반의 경쟁은 특별했고 전체 주일학교 분위기와 열심을 주도. 김명자, 김응도, 정재성 등도 주교 교사로 가세 활동. 기준 주일학교 체제에서 불붙던 열심에다 1961년 부산 피난 상태에서 분교로 계속되던 부산 소재 연세대를 입학한 홍순철이 주교 반사로 임명되면서, 출발부터 배정되는 학생을 거절하고 개척으로 출발하겠다고 요청하고 허락.


③1962년 예배당 개축 및 주교 개편


1961-2년, 주교와 장년반 예배당이 비좁아서 예배당 전면 개수. 옆집을 구입 몸체를 연결시켜 두지붕에 단일 예배실로 넓혀지면서 1층은 주교 전용이 되어지고, 주교 부장 백영침을 서전교회로 목회 배출. 개수된 넓은 예배실에서 1963년을 맞이하면서 서울 연세대 본교로 올라가는 홍순철의 독립반을 담당할 교사 문제가 대두되었다. 반사가 임명되면서 배정을 받지 않는 대신 학년에 상관없이 전도하는 순수 개척반이 독립반으로 성공적으로 모범이 되었던 바, 그 특수성을 고려하고 또 그간의 모범 운영이 증명되어 이를 주교 전체 체제에 적용하느냐는 문제로 연구. 당시 가장 오랫동안 주일학교 전체 분위기를 선도하던 기존 3개 대형반도 어느덧 학년 남녀 구별 없는 전도로 그 성과가 증명.


드디어 백목사님은 주교 반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장 모습, 더하여 전도와 목회의 성격 등을 성경적으로 새겨 종래 일반교회의 학년반 체제를 독립반 체제로 전면 개편키로 결심하여 1963년부터는 서부교회는 주일학교 제도 전체를 완전히 전환, 출발.


④1963-70년


편제가 독립반으로 바뀌기 직전 350명 출석보고가 있었으나 편제 개편 이후에는 대형주교로 부흥할 싹이 보임. 모든 반사는 자기가 전도한 대로 자기가 맡아 자기가 기르는 제도. 홍순철이 빠진 주일학교에서 독립반 체제로 바뀐 후 단연 돋보이는 활동은 김종철, 정재성 두 반사였다. 김종철은 단일반 출석이 7-80여명까지 이르고, 반장을 세워 줄을 지워 교회로 출석. 정재성 반도 40여명. 그러나 주교 총출석수는 1970년까지 계속 6백 정도. 장년반도 비슷한 숫자로 출석되고 있었음.


1960년까지 고신과의 교단적 투쟁, 1970년까지는 개교회주의로 공회를 발족하고 장년반에 치중하여 주일학교 관리는 부장을 통해 공과를 전달하고 전체 방향만 대략 지시로 지도하며 실무는 부장이 총괄. 그러나 이미 개척반 제도로 주일학교 체제를 바꾼 후 나타나는 대형화 싹을 본 목사님은 장렬을 부장으로 세우면서 교회 전체가 주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토록 하며 목사님도 주교의 세부사항을 전부 관리 결정. 반사회 주관, 반별 출석 점검, 주교 행사와 반사활동의 개별 지도까지. 부장은 예배 인도에 전념케 하고, 총무적 관리는 정영덕에게 생활부장으로 맡겨 부장을 보조.


⑤1970-80년대 :


장렬을 앞세워 주교를 세부 관리하는 목사님의 주교 관심은 곧 주교의 폭발적인 부흥에 불길. 1970년 첫해에 처음으로 주교 주일오전 순수 출석이 1천명을 넘었고, 동시에 장년반도 1천명으로 기록.

1952년 부임때 장년 40여명이 1959년에는 6-700명, 1965-6에는 장년 7-800명, 교회를 현재 본관 첫 건축을 해야했던 1970년에는 장년반이 주일학교와 함께 1천명으로 진입


꾸준히 해마다 증가하면서 1975년 2천명, 1980년 8천명까지 이르며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결과. 1962년 일반 주교 체제에서는 반별 40여명이 대형반이었고 1963년 체제 개편이후 7-80여명, 1970년 목사님이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1개반에 100여명 출석반이 등장하게 되었고, 1980년에 이르러서는 한 주일 출석이 300명인 초대형반이 주교 부흥을 선도. 출석 60명을 기준으로 선정되는 1등반이 1970년에는 1-2개, 1975년에는 10개반, 1980년에 이르러서는 2-30개반으로 집계됨. 20여명 반사가 2,500여명 주일학생을 빈손에서 전도로 개척하고 매주 출석하게 하여 주일학교 부흥을 앞섬.


동시에 그때까지 장년반과 주일학교가 각각 맡은 식구들 매주 출석만 집중하던 것을 주일학교를 졸업한 학생으로 중간반 학생으로 올리고, 그들을 반사들의 장년반 구역으로 올려 길러가는 면에 힘을 쏟기 시작하자 장년반이 1970년 500여명에서 1980년까지 2천명, 3천명 그후 5천명까지 수직상승케 되었고 장년반은 주교 교사로 구역식구를 계속 지원시켜 다시 주교 출신으로 자기 구역에 성장되어 올라오는 체제가 반복되게 됨. 일반 대형교회들이 기존타교회 교인들을 주로 흡수하여 고속성장하던 것이 당시 일반적 현상이었으나 서부교회는 주일학교에서 순수하게 길러 올려놓는 식구들로 이어짐.


한해 주일학교 졸업생이 재적으로 1,200명, 출석으로 400여명에 이르면서 1961년에 이성문제 때문에 폐지했던 학생회를 순수 예배모임으로 남녀반 분리 착석 남녀반사 분리 지도의 방향으로 장년반으로 올라가도록 지도하는 중간반을 서영준목사님을 통해 재개. 출석학생이 2천여명 재적 7-8천명의 기록으로 또 하나의 세계 기록을 가짐.



3.교회 일반 모습


1)예배당:


교회개축, 증축으로 강단이 남쪽에서, 그다음 증축에는 서쪽, 마지막에는 동쪽으로 변경.


2)성탄 행사


1956년 행사에는 소니 제품의 릴 녹음기로 최초로 목사님 설교 녹음되고 또 새벽 찬양이 계속되었음. 1960년부터는 성탄축하 행사 자체를 폐지했고, 그다음해 1961년부터는 성탄절에는 떡국이나 국밥을 먹은 뒤에 호별전도로 대체되어 현재에 이름. 새벽찬양은 1970년대에도 등을 들고 행한 적이 있고, 1980년대에는 간헐적으로 새벽찬양이 있을 때가 있고, 그럴 때는 차를 빌려 부산 전역으로 코스를 정함


3)교회의 여러 노선 결정


1956년, 12월의 성탄절을 지나고 제직들과 사진 촬영 후 백목사님 완전삭발

1959년, 고신에서 제명되며 소신 목회를 자유롭게 만들며 여러 비성경적 요소 정리 시작

1960년, 전년도에 고신이 총신과 합동되며 고신의 변질된 신앙노선을 비판하며 주교공과도

통합교단 공과로 전환시키고, 그 동안 일반교회에서 일반화된 헌신예배 등 많은

모습들을 폐지시키면서 한국교회의 속화 가속화를 거스려 오히려 초대교회의 순수

예배중심으로 가속화

그 해 성탄절의 모든 행사를 폐지하고, 점심식사 후 전도하는 날로 변경

1961년, 주일성수에 유리하도록 밤예배를 오후예배로 변경시켜, 오전 오후 2회 체제로 변경

학생회 예배가 오후 3시였으나 주일 오후예배 체제로 편입되며 학생회 자동 폐지

*찬양대 남녀 간 이성문제로 찬양대와 함께 1961년 말에 학생회(중1-고3) 폐지. 당 시 학생회는 주일 10시에 사범회라는 이름으로 예배 모임. 1979년 새로 시작된 서 영준목사님의 중간반 초기체제와 비슷, 심방 없는 예배모임.

학생회 마지막 조직은 1960년 선출된 임원단이었고, 1961년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예배가 장년반으로 합해지면서 종결, 따라서 1962년에 학생회가 완전 폐지되었다고

볼 수 있음. 마지막 회장단은 회장 김훈(부산의대), 부회장 신부옥 (비원교회 신일 성 장로님 누나)


4)금정산집회


1950년대에도 금정산 70인 바위로 기도 등으로 다닌 적은 많았고, 1961년부터는 정식으로 집회가 시작되어 1968년까지 계속되다가 그 이후 대구 주암산에서도 집회, 현 대구 노곡동 기도원으로 집회가 이어져 오늘에 이름.

겨울철에는 주로 교회 내 자체 집회가 있었고 1954년 박복달집사님의 집회 인도가 있었으며 1962년에는 김현봉 목사님의 벧후1: '샛별이 떠오르기까지'라는 양심 주제의 설교가 있었음. 백목사님 안수 직후였으며 김현봉목사님의 집회는 서부교회에서 2회. 당시 집회는 창호지에 붓글로 포스타를 붙이는 것이 일반. 1959년 이병규목사님의 다니엘서 강해, 1963년 이인재목사님 아2:2, 요4: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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