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교회-2
비고 | 변종희의 증언 1. - 백목사님의 봉산교회 / 집회 / 떨어진 불 / 6.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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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을 해 주신 변종희집사님은 현재 합동교파에 소속된 교인이며 봉산교회 초기 교인이었습니다. 1994.10.19. 10:00-12:00 면담으로 정리된 내용이며 동석했던 다른 면담내용이 일부 추가되었습니다.)
봉산교회
1. 봉산교회:
1)설립
변와룡, 김옥출은 집안 시누 올케 사이며, 두 가정이 원기로 교회를 다녔다. 원기교회는 그 설립이 1910년 이전으로 거창읍교회보다 앞섰다. 80여년 넘었다.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지고 거리가 멀어 1936년경 봉산 마을 이진철의 집터에 예배당을 세웠다. 1990년까지 내려오던 예배당이 두 번째 건물이고 첫 예배당은 그 옆에 있었다.
2)신앙
타처의 교인들이 기도의 뜨거운 그 불길을 사모하여 봉산 교회를 많이 찾았다. 백목사님이 집회를 오신다든지 들릴 일이 있으면 어찌 알고 오는지 넘치는 교인으로 북적댔다. 제일 자주 들르는 사람이 거창교회 원집사님이었다. 거기 와서 은혜 받았고 늘 거기 와서 뛰고 굴리며 기도하고 찬송했다.
동네 박해
예배당 지붕이 함석이었는데 예배를 볼 때마다 동네에서 시끄럽다고 돌을 던져 댔다. 던진 돌이 지붕 위에서 돌돌 굴러 내려오는 소리가 차라리 지붕 깨지는 것보다 더 예배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멀쩡한 지붕을 기와로 바꿔야 했다.
예배당 옆쪽에 정이, 원이, 홍이, 창이 네 집이 결국은 예배당을 너무 많이 핍박하니까 정일이네 집은 손(孫)이 없어 끝났고, 창식이네 집은 호열자가 4촌 안에 9명이 걸려 다 죽고 창식이도 결국 폐병 걸려 죽었다. 창이네 집에 호열자로 마구 죽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은 물 길러도, 논 갈러도, 산에 나무하러도 못갔다. 면에서 금계줄을 쳐서 마을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마을 안에 사람들도 바깥 출입을 금한 것이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이 마당에서 죽고 부엌에서 죽고 섬돌에서 죽고 이런 상태에서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있는데 김옥출, 변을문 부부가 나섰다. 그 시체 처리를 한다고 해서 면에서는 소독제를 치고, 교인들은 깊은 골에다 9구 시체를 다 태웠다. 변을문이 앞장서 믿음으로 호열자를 처리하고 나서는 동네의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이런 환란에서, 집안식구들이라도 죽음 앞이라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이 때가 바로 믿는 사람이 빛을 보는 좋은 때인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는 적어도 보이는 핍박은 없어졌다. 그 다음 그 호열자 집에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었는데 동네 웃담에 살던 변을문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은 저주받은 집이라, 귀신나는집이라 겁을 내도 이런 것을 초월한 믿는 사람이 그 집을 들어가는 것도 그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일 때였다.
순교적신앙
6.25에도 전 교인들이 순교를 고대하며 늘 교회를 지켰다. 지금 고신 고신해도 그 때 몇몇 사람들만이 신사에 절하지 않았고 그 몇 사람의 신앙으로 건설한 것이 고신이지 실제로 고신 전체를 두고도 개명교회 봉산교회만큼 전 교인이 불덩이가 되었던 교회는 없었다.
변판원선생
“배우세 배우세 참도리를 배우세 어려서 어서 배우세 풀밭에서 여름을 허송하지 말고” 여름성경학교 교가이었다. 이런 창가를 많이 배웠다. 학생들은 15살, 심지어 19살이라도 초등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일학교로 다녔다.
그 때에 변선생이 믿음이 아주 좋았다. 부장 선생은 임집사였으나 모든 주일학교 활동은 변선생이었다. 학생은 당골부터 여러 곳에서 많이 왔다. 그 때는 안 믿던 만원, 종달이 이런 사람들도 많이 나왔다.
주일학생들이 친구를 전도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변종희와 이영수 둘이서 망태에 꼴을 베어 놓았다가 만원, 종달이 같이 안 믿는 가정에서 교회도 못 가게 하고 주일날 풀 베러 가게 하면 준비해 놓은 꼴 망태를 주면서 교회에 데리고 나왔다. 교회 전도도 계속되어 변판원, 눈찌그리 작은 사람, 수판, 점판이 점쟁이 하던 뒷집 키 큰 할머니, 그런 사람들이 다 출석을 하게 되었다. 변영훈도 교회를 나왔고 필체가 좋아서 찬송 궤도를 썼다.
기도생활
매일 저녁 기도가 있었다. 주일학생도 저녁기도 잠깐하고 나가서 총 놀이를 했지 그냥 나가 노는 수는 없었다. 이백원조사님이셨고 그 사모님 백계순집사님이 저녁 기도를 주일학생들에게까지 시켰다. 단순히 시키니까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주일학생들까지도 불덩이들이었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주일학생 누구든지 “너 예수 믿고 죽을래, 안 믿고 살래” 하면 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상 가진 공산주의 보다도 이 주일학생들의 신앙 불은 더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서는 주초를 금했다. 주일학생들은 담배, 술 심부름도 절대 하지 않았다. 주남선목사님이 계시던 거창교회와 비교하여도 이곳 봉산이나 개명교회 신앙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주일학생 중에 혹 배가 아프던지 병드는 아이들이 있으면 의례껏 교회 와서 기도로서 낳았다. 약은 구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아예 백집사님이 기도해 줘서 나았기 때문에 신앙이 지식은 뒤따르고 체험이 마구 앞서 가던 때였다.
이진철집사의 집이 넓고 좋아서 6.25 초기 마을에 주둔하는 인민군들에게는 본부였다. 인민군들이 예수믿는 사람이나 그 중에서도 지주가 되어 잘 사는 사람은 반동으로 죽인다는 것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 집 방안에 부인 집사, 8살 된 딸 둘이 있는데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추우니까 같이 좀 앉았다가 가겠다면서 들어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나 궐련 말아 피우게 저 책 좀 내려 줄래? 선반 위에 성경책을 가르쳤다. 그 아이는 안돼요. 성경은 안돼요. 학교 책은 뜯어 써도 성경은 안돼요. 인민군이 쳐다만 보고 성경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보통 학생들이 다 이 정도였다. 도무지 두려움이 없었다.
6.25 동란 중 1950년 9월 인민군 퇴각하면서 예배당과 이진철 집을 태웠는데 타는 자기 집은 버려두고 예배당 불을 껐다. 그 후로는 인민군 주력 부대가 퇴각하고 빨치산들만 출현하여 토벌군들이 지역을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동네에 수판이, 점판이 라는 20살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빨래줄로 쓴다고 군 작전 전화줄을 끊어왔다. 공비를 도와 주는 좌익으로 지목되면 현지 사살도 서슴치 않던 전투지역이었다. 토벌군이 설마 알겠냐는 정도에서 큰 생각없이 일을 저질렀지만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졌다. 토벌군들이 온 마을 수색에 나선 것이다. 토벌 일선의 전투원들이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마을 내에 빨치산 협조 세력이 숨어 있다고 판단하고 색출에 나선 것이다.
이 와룡마을은 빨치산들이 주도권을 쥐고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덕유산 일대 적과 교전하는 최 일선 지역이었다. 이런 마을들에는 의례 아군 전투대의 출입 상황을 전하는 빨치산 협조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연락으로 때로는 토벌군인들이 전멸 당하는 때가 허다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이 되자 빨치산 내통세력을 구별하기 힘들었던 토벌작전군이 한 마을 600여명을 전원 몰사시킨 6.25 최대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 바로 거창지역이었다.
일순간 마을에는 살기가 도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동네 바깥으로 전화선을 숨겨 버릴 여유도 없이 마구 수색이 시작되었다. 바로 한 동네에서 형제간, 모자간에도 비정하게 나뉘어져 잔인하기 이를 때 없이 죽은 사람을 봤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일순간 생의 본능이 자기 생명 보호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 형편이었다.
김옥출 집사가 부리나케 자기 큰 아들 종희를 불러 찾았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소곤대고 있었다. “형제를 위하여 죽으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 기억하고 있겠지!” “예, 어머니”“눈치가 보니까 점판이, 수판이가 군인들 쓰는 전화선을 끊어온 것 같은데 네가 그랬다고 그렇게 말해라.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잖아. 대신 죽어도 천국가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친구를 위하여 죽으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잖니? 그러니까 그 형들을 위해서 네가 대신 그랬다고 해라. 그런데 그 형들은... ” 주님 위하여 죽는 순교가 주일학생들에게까지 노래가 되었던 교회의 분위기. 12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군인들이 설치면 울기부터 해야할 철부지가 아닌가? 주저할 것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이 “예, 그렇게 할께요.”“오냐, 그래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죽어도 문제없지만 그 형들은 안믿는 애들이니까... ”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김옥출은 전화선을 끊어다 놓은 집으로 가서 “너것들은 절대 모른다고 해라. 우리 종희가 했다고 그럴께. 말을 잘못하면 다 죽는다. 하나만 죽어야지.”그 집에 숨겨 놓은 전화선을 얼른 자기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종희에게 "나는 교회 가서 기도하고 있을께.” 교회로 가버렸다.
조금 있으니까 김집사 집으로 구장을 앞세워 군인들이 들이 닥쳤다. “전화선 끊어다 놓은 놈 누구야?”“내가 그랬어요. 빨래줄에나 쓸라고요” 바로 이때 삼봉산 쪽에서 “탕, 탕, 탕” 요란한 사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빨치산과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확인도 처리도 할 시간이 없어 부리나케 튀어 나가고 있었다. 아들을 대신 죽이라고 내어놓고 김옥출 집사는 바로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 드렸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두들 교회로 달려 왔다.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져서 그 사람들 정신없이 삼봉산으로 내달려 나갔어요.” 백계순 집사님이 이 소식을 듣고 “그래, 의로운 일에 아들을 내놓으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다고 기뻐하셨다. 이것이 김옥출 집사의 특출한 신앙이 아니라 교회 교인들 전체의 신앙 분위기였다.
주일학생들도 기도에 열심이었고 기도에 소원은 모두들 순교밖에 없었다. 기도하면 모두들 소리를 크게 내고 열심이었다. 한번은 조그만한 아이가 열심히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백계순집사님이 가만히 다가가서 뭐라고 기도하는지 기도 소리를 들어보았다. 여닐곱 밖에 되지 않는 정애가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사람이 다가가도 기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 아빠 천당가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 천당가게 해 주세요. 우리 메리도 천당 가게해 주세요. 우리 아빠 순교하게 해 주세요. 우리 엄마 순교하게 해 주세요. 나도 순교하게 해 주세요. 순교하게 해 주세요. 우리 메리도 천당가게 해 주세요.” "메리도 천당 가게 해주시고 우리 누구도 천당가게 해주시고, 순교하게 해 주시고, 순교하게 해 주시고” 예배당에 메아리치는 어린 소녀의 간절한 기도는 이 교회 전체의 분위기였다. 전부 순교하게 해 달라는 기도밖에 없었다. 순교만이 영광이었고 그것만이 교인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칼바위 기도
봉산교회의 기도는 교훈으로는 백조사님의 힘이었고 기도처소로는 삼봉산 칼바위였다. 동네 바로 뒷산이 1200m 험산이고 그 삼봉산으로 오르내리는 기도의 힘이었다. 호랑이 굴에는 백계순, 다른 두 집사가 늘 살다시피 하는 곳이었다. 그저 시간만 나면 그 높은 삼봉산 호랑이 굴에 기도하러 다녔고, 이진철집사는 사냥을 나가도 반드시 기도하고 나가는 등 신앙이 모두들 굉장했다.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봉산에서는 예배당과 교회, 사택 그리고 동네에서 제일 부자집인 예배당에 붙어 있는 이진철집사 집에 불을 질렀다. 퇴각으로 독이 올라서 예배당과 사택, 이집사집과 쌀창고까지 모두 불을 놓았는데 마침 미군기가 나타났다. 인민군들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피하는데 이진철집사의 부인 집사가 자기 집과 예배당 두 곳에 불을 지른 것을 보자 자기 집과 사택은 놔두고 성전 불을 먼저 끈다며 예배당으로 쫓아갔다. 봉산 집회에 성령의 불이 충천했던 성전, 복음에 신들리듯 신앙에 불을 지펴대던 그 성전에 불이 붙는 것을 보자 소리치는 인민군을 아랑곳도 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불지르는 인민군, 나타난 미군기 때문에 숨기 바쁜 자기들과는 달리 공습 가운데 불을 끄러 달라드는 김집사는 그들의 눈에 “미군의 착취에 앞잡이 노릇하는 교회”를 자기 집도 팽개치고 나서는 광신이었다. 또 철장이 엄마가 같이 나섰다. 예배당 마루 한가운데 막 질러 놓은 불을 빨리 끄지 않으면 손 댈 수 없도록 커진다. 우물까지 갈 시간이 없었다. 제일 가까이 오줌통에 물을 퍼다 부었다. 순간 “탕 탕”소리와 함께 밖에 엎드려 있던 인민군이 예배당 안을 향하여 문밖 쪽에서 불끄는 교인을 향하여 총을 발사했다. 마침 물을 퍼려고 몸을 숙인 순간이었고 총알은 엎드려 쏜 상태에서 머리 위를 지나 예배당 천장 쪽으로 박혔다. 밖에서 소리치는 인민군도, 총을 쏘아 대는 인민군도 아랑곳 없었다. 오직 눈 앞에는 예배당에 불을 꺼야 한다는 한 생각뿐이었다. 다시 한번 사격할 겨를도 없이 공습 중인 적기를 피해서 인민군들은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지 사라지고 두 사람은 예배당 불을 겨우 잡았다. 마을에서 치솟는 불이 퇴각하는 인민군 짓이라고 보였을 미군기의 공습에 정신없이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결국 예배당과 담 없이 붙어 있던 김집사 집은 곳간까지 완전히 전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배당은 마루 가운데 일부 불탄 자국만 남고 온전케 된 것이다.
뒤에 돌아 온 인민군이 그 부인 집사를 그 집 마당에 앞세워 두고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었다. 마을의 인심 등을 고려해서 도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동네 밖 숲이나 산으로 올라가서 사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독이 올랐던지 집 안에서 바로 세워두고 총살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모하던 순교라 전혀 마음 요동 없이 감사함으로 눈을 감았다. '땅' 소리가 났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한쪽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생에 그쪽 귀를 쓰지 못했다. 이미 산 순교자이었다. 교인들의 평균을 이렇게 만든 이가 바로 백조사님의 설교였고, 백계순집사님의 지도였다.
부흥회
백조사님의 불덩이 집회는 이미 거창군 전체를 넘어서 합천, 합양군 멀리 대구에서까지 집회를 참석하려고 오는 교인들이 있었다. 월요일 밤부터 시작되는 집회는 다음 월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산너머 계명교회는 같은 교역자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온 교인이 다 참석을 했다. 개명교회 변집사는 김옥출 집사 집에서 밥 먹고 기거했는데 만삭된 몸이었다. 예수 믿는다고 계명 본 교회에서도 늘 핍박에 대장이었는데 이번에는 못 가게 엄히 일렀는데도 산너머 다른 교회에 까지 백조사를 따라 집회를 한 주간 간다고 집을 팽개쳤다고 생각하니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에 패대고 싶은 사람이 옆에 없으니까 단숨에 산을 넘어 봉산교회까지 잡으러 가는 그 마음에 분은 더욱 이글거리고 있었다.
김옥출 집사 집에 있는데 들이 닥쳐서는 그 집 소 외양간의 소 등에 짐매는 참바를 가져와서 만삭된 부인 목을 홀쳤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잡아 끌었다. 안 끌려 갈려고 버텼지만 새까맣고 작은 체구의 힘이 좋았던 남편은 목에 홀친 끈을 잡아챘고 부인은 땅바닥에 엎어졌다. 이번에는 아예 일어서서 걸을 여유도 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둔터재를 넘어 계명을 가는 길이 땅까시가 깔려 있는 험한 곳인데 겨우 일어서서 걷다가 넘어지면 계속 목을 걸고 있는 줄에 온 몸이 땅바닥과 땅까시에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원래 힘도 좋은 남편이지만 귀신 들려 잡아끄는 그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고 또 목에 감긴 줄에 질식되어 죽을 수 있는 길을 안 죽고 끌려 넘어간 것도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보였다. 결국 아이는 유산 되고 말았다.
끌어 내어 패대면서 목을 홀쳐 끌고 가는 그 장면에 그 집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믿다가 박해받아 순교하는 영광에 참예하라고 손뼉치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남자들이 계명에서 여자 잡으러 둔터재를 넘어와서는 못하는 짓이 없었다.
나타난 성신 역사
성신을 받는 사람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파르르 떨리는데 흉내를 낼 수 없는 신들린 듯한 몸짓이었다. 성신의 역사가 육으로까지 임했다. 성령의 불을 받아 일어나는 역사들이 초대교회의 재현 바로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거창교회에서 참석한 원영봉이 뛰는 것이 제일 심했다. 신앙 없는 사람은 흉내라도 내보려고 해봤자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떨리는 역사였다.
육으로까지 보이도록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의 뜨거운 열탕으로 몰아냈다. 집회 도중 10살 정도 되는 변종희는 밤예배를 마치고 아버지를 따라 삼봉산 산기도를 따라갔다. 그날 아버지 변을문은 바위 옆에 있는 소나무를 잡고 기도하는데 밤새도록 기도하는 기도에 소나무가 뽑혀 버렸고 몸은 바위에 문질러져 피로 범벅이 되었으며 온 몸에 펄펄 끓는 열기가 차가운 고산의 냉기를 끓는 증기 가마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들 종희는 평소보다 유달리 펄펄 뛰는 아버지를 보며 완전히 미쳐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하간 눈앞에 펼쳐지는 믿지 못할 광경을 밤새도록 보았다. 새벽 집회 예배시간이 되어 산기도를 끝내고 예배가 파한 뒤 집에 와서 잠깐 쉬게 되었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옆에 있던 종희까지도 무엇에 사로잡혔다가 제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잠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까지 예수 믿은 지는 좀 지났는데도 담배를 끊지 못해서 몰래 한번씩 담배를 피웠다. 그 아침에도 문득 담배 생각이 났는지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모금 막 빨고 있는 순간 방 아랫목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번개같이 저쪽 벽쪽으로 “쌩 -”하며 날라 가서 “쾅”하는 충돌음과 함께 벽에 사정없이 쳐 박혀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순간적인 충격에 아버지는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종희야, 너 너 ....” 네가 그런 것이 아니냐는 뜻 같았다. “아버지...”종희도 상상 못 할 장면에 말을 잃고 더듬고만 있었다. 그러나 종희의 나이 이제 막 10살, 청년이 몇 달라 들어 집어 던져도 그렇게 쳐 박힐 수 없는 순식간의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성령의 강한 바람이 벽쪽으로 쳐 박아 버린 것이다. 어떻게 죽지 않았는지 그것 역시 기적이었다. 쓰러져 있던 아버지가 벌벌 떨리는 몸으로 겨우 자리에 앉았다. “성령님, 담배를 이렇게도 끊지 못하고 기도에 말씀에 능력으로 보여 주셨는데도 제가 망령된 짓을 하였으니 용서해 주십시오.”(이 후로 변을문은) 완전히 담배를 끊어 버렸다. 서로의 경험담은 다 달랐으나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가 보이는 역사로 나타났다는 내용만은 거의 같았다.
창문에 걸쳐 만든 2층
예배당은 창문 2칸의 작은 마루였지만 강단 뒤로 한 켠, 뒤로 한 켠 두 켠을 늘려냈다. 백조사님이 올 때마다 넘쳐나는 교인으로 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목사님의 집회는 바로 앉아 있을 여유가 있는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몸이 아픈 사람 외에는 전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도 모자라기 때문에 무릎위에 다른 사람이 올라 앉고 몸 무게 때문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한 쪽 무릎이 바닥에 닿고 한참 지나서 그 다음 무릎이 닿는 그런 형편이었다.
이번 집회에는 아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밖에 서있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교회 창문에다 긴 통나무를 걸치고 거기에 덕석을 깔아서 1층 공간에 사이칸으로 2층을 넣은 것이다. 그 위에 빽빽히 올라 앉았다. 그래도 부족하여 이번에는 좌우 4짝씩 있는 창문 바깥에 나무 받침을 해서 창문 밖으로도 사람들이 올라타고 앉아서 안에 있는 강사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온 동네에 구경거리도 그런 구경거리가 없었다.
교제, 봉사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몸으로, 기도로, 치료로 타오르는 교회가 되다보니 그 교인들 간의 관계는 둘도 없는 형제요 자매요 부모 자녀간이 되었다. 육의 핏줄도 물질에 서로 마음이 상하고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게 마련일 것이나 여기는 천국이었다. 바로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으로 새 사람들이 되고 보니 한 몸이 되었던 것처럼 저절로 한 마음, 한 형제가 되어 자신들의 평생 뿐 아니라 후에 고향을 떠나 서로 알지 못하는 그 자손들까지도 진정 제일 가까운 사람들로 지내고 있다.
없는 살림이었으나 교회 가까운 집에 먹고 살만한 집이면 멀리서 오는 교인들의 안방같이 기거했다. 감자고 뭐고 먹을 것은 있는 대로 내어 놓고 삶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더 오면 물 한 바가지를 더 부어 끓이면 한 사람 몫이 더 나오는 것이다. 교역자로 있던 이백원조사님이 방아를 두 곳에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는 귀했던 밀가루로 국수와, 수제비를 했고, 부자였던 이진철 집사 집에는 어린 딸과 두 부부 밖에 없는 식구인데도 메주를 일년에 20짝씩 해 대며 손님을 치렀다. 특히 주일날은 저녁예배를 보고 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안의 큰 잔치처럼 되어졌다.
관리 못하는 불은? :
진리라는 아궁이 속에 관리되는 불은, 불없는 부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아궁이 밖에 나가 버려 관리할 수 없는 불은 쉽게 꺼져 버리던지 아니면 집도, 때로는 온 산도 다 태워 버리는 무서운 화마의 재앙이 된다. 특별한 성령의 은혜가 보이기까지 역사하는 것은 첫 신앙에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진리를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가 되지 못하고 진리에 바로 서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만 주장하다 보면 혹 진리로 관리되지 않는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빠져 자신도 가정도 교회도 다 절단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백목사님는 이렇게 뜨겁게 재현되는 초대교회의 불역사 가운데 봉산교회가 이런면에서 제일 염려 되었다. 삼봉산 칼바위의 기도생활에 호랑이가 밤길을 밝혀 앞을 인도하고 수 많은 기적이 나타나는 속에서 이런 점이 걱정되어 봉산교회에 특별히 백조사님은 “진리에 특별히 연구하고 힘쓰는” 교인들이 되도록 가르치고 또 이제는 보이는 능력의 역사를 간구하는 이 면에서, 보이지 않는 영생과 진리의 세계를 잡고 나가라고 특별히 경계로 교훈으로 엄히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