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교회-3
비고 | 2차보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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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첨부 - 11.6.10.
* 각주는 첨부 자료 참고하실 것
* 1976년 이전까지 초기사만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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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교회사 요약
1. 개요
① 개척 배경
(1937년 )
백영희 조사님의 목회지였던 고제 봉산교회 시절부터 그 신앙 지도를 받아 오던 교인들이 6.25 전쟁 후 거창읍으로 이주하면서 거창읍교회 출석하며, 철공업으로 경제 기반을 갖추자 백 조사님의 지도로 양혜원과 양혜원교회를 설립하며 백 조사님의 신앙 지도를 받아 오던 중
(1959년)
4월부터 소속 교단인 고려파가 백 조사님을 교권에 방해가 된다고 불법으로 치리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거창읍교회는 상기 이주 교인인 이운길 집사를 장로로 예정한 상태에서 백 조사님의 신앙노선을 따를 것으로 보고 신앙의 변경과 함께 양혜원의 소유권을 고려파 교단으로 옮기게 하자 이를 거부했고, 거창읍교회 당회는 3차례 소환을 통해 59.9.20.에 이 집사를 제명 출교 조처하므로 백영희 신앙노선을 원하는 교인들은 더 이상 거창읍교회를 내부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창동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교회 출발.
② 마루 예배 1개 월
비록 1 명에 대한 제명과 출교 조처였으나 실은 거창읍교회를 출석하는 창동교회 교인 전부에 대한 조처였으므로, 창동교회 교인들은 백 조사님의 신앙 노선을 따르기 위해 중앙리 278번지 이운길 가옥의 마루에서 이순길 가정, 변종희 청년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한 달이 지나면서 국농소 강재희 집사님을 임시 주 설교자로 모시고 김상권 집사님 가정도 합류했으며 이후 초기 교인들 대부분은 봉산교회거나 삼봉산집회에서 은혜 받은 신앙이라는 점에서 동일
③ 천막 예배당 1 년
(교인 자체 예배)
이 집사의 마당에 천막으로 임시 예배당을 마련하고 ‘중앙교회’로 첫 이름을 가졌고 설교는 강재희 집사님이 주로 하면서 이운길 이순길 집사도 맡았고 이후에는 서부교회에서 신학을 했던 여 집사님들이 순회.
(백영희 조사님의 집회)
천막 교회가 출발한 직후 백 조사님을 모신 집회가 개최 되자 백 조사님께 은혜 받은 지방의 교인들이 많아 발 딛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는데, 위기감을 느낀 거창읍교회는 경찰 군청 소방서에 불법 건물로 고발하여 천막 예배당을 철거 당할 직전에 갔고, 또 양혜원 탈취를 위해 군청 경찰 검찰 세무서까지 고발장을 제출하여 조사와 감사가 연이어지자 이 집사는 무식하여 포기 상태에 이르렀으나 당시 교인이 아닌 이상길 씨가 모두 방어하여 지킴. 거창읍교회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지만 거창읍교회가 퍼뜨리는 백 조사님에 대한 악성 소문과 여러 소동으로 인해 출석 교인은 핵심 몇 가정으로만 유지 됨.
(한종희 조사님)
1959년 12월에는 한종희 조사님이 서부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첫 목회자로 부임했고, 천막 교회는 1 년 정도 계속 되었으며 이 천막 예배당에서 김현봉 목사님까지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고, 교인들은 소망 가운데 신앙 자유를 가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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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모, 1950년생 8세 때인 1957년 초교1년 8세 입학, 1962년 6월의 화폐개혁 직전 수학여행 취소로 기억. 중앙교회가 천막 치고 있을 때 김형만 선생님이 반사한 것은 확실하고 주교 부장은 김영철 부장선생님으로 기억. 4학년 때 교회를 다녔고 동생이 교회 갈 때 팔을 빠진 기억은 함께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는데 가다가 그렇게 되었고 아버지 때문에 다니지 못했고,
다시 다닌 것은 1965년 12월 중3 졸업 성탄절에 창동교회 출석하고 지금까지 계속. 당시 백영익 목사님이 계셨고 아버지 때문에 학교와 교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백영익 목사님께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자 둘 다 택해라 하심. 그 이듬해 가시고 66년 서울 성은교회로 가시고 후임으로 신용인 목사님 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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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첫 예배당
(흙벽돌 건축)
첫 목회자인 한 조사님의 사택은 이 집사의 뒤채를 사용했고 1960년에 들어서면서 천막 예배당을 대신하여 흙벽돌로 15여 평의 예배당을 건축. 이 집사 댁의 대문 쪽 마당에 양혜원의 원생들이 흙벽돌을 찍어 세웠는데 이는 1955년에 양혜원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집사가 본가를 지을 자재로 양혜원 예배당을 건립한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한 것. 읍내 한복판에서 원생들이 예배당을 건축했으므로 어려움과 조롱도 많았으나 아담한 예배당이 마련 됨. 개척 1 년을 지내며 이 시기 교인은 장년과 아동을 합하여 30여 명.
(송용조 조사님)
2대 목회자인 송용조 조사님은 벽돌 예배당이 완공 된 다음에 부임했고 부임 중인 1961년 11월 13일 월요일 저녁부터 백 조사님을 모시고 다시 사경회를 가졌고, 장차 공회의 중심인 거창 지방에서 중심 역할을 맡게 될 교회에 대한 백 조사님의 관심도 특별.
(이재순 조사님)
1962년 3월 부임한 이재순 조사님은 양혜원 운영에 행정적 어려움을 겪는 이 집사를 백 목사님 지도를 받아 가며 총무직을 맡아 도우며, 한 편으로는 서울의 박윤선 목사님의 개혁신학교와 남산의 대한신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다 1965년 3월에 청량리교회로 부임하고 청량리를 담임하던 신도범 조사님이 부임.
⑤ 현 위치로 이전
(신도범 조사님)
1965년 3월에 부임한 신 조사님은 불과 5개 월을 재임했으나 이 기간에 교회는 30 명 교인이 70 명을 상회하며 예배 시간에 목회자 강단 위에까지 사람이 앉아야 하도록 크게 부흥되어 예배당을 새로 마련해야 할 상황이 됨. 신 조사님 부임 전에 집 주인이었던 이 집사가 개척 당시 양혜원 분쟁에서 받은 상처로 신앙을 중단하고 예배당을 비워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되어 예배당 이전은 이미 교회의 과제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예배당 이전이 추진.
(단독 예배당 마련)
교회 부흥과 은혜 분위기에 확신을 가진 신 조사님은 토지를 구입하고 전면 건축을 기도하는 중 5만 원을 예상했고 주력 교인들은 2만 원에서 3만 원 사이로 연보 결과를 예측하는 정도였는데, 연보는 15만 7천 원이 나왔고 이 돈으로 이운길 집사 소유와 그 일대 중앙리 58번지 현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고, 80 평 규모의 당시로서는 큰 예배당을 목표로 기초를 놓고 우선 40 평을 건축함. 연보한 가정에 복을 받는 모습이 연이어졌고 예배당을 비우라고 했던 이 집사도 입장을 바꾸어 예배당 이전을 막고 교회도 다시 출석한 상태였으나 이미 장소가 좁아서 불가피하여 양혜원 토지를 매입하는 일까지 적극 협조함.
⑥ 거창과 공회의 중심 교회
(백영익 목사님)
4대 목회자 신 조사님에 이어, 서울 사직동교회의 백영익 목사님이 5대 목회자로 부임한 지 6개 월만에 이임하여 창동교회는 좋은 목회자들을 모시고도 단기간에 그치는 아쉬움을 크게 느끼던 중
(신용인 조사님)
제 6대 신용인 조사님이 1966년에 부임. 이미 창동교회는 거창지역 공회 교회의 중심이 되면서 전국 공회의 도평집회를 맡아 전국의 공회 중심 교회가 되고 있었음. 거창은 공회의 발생지며 전국 교회의 중심 교인을 배출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삼봉산집회가 전국 공회의 도평 8월집회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창동교회가 대내외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 컸음. 자연스럽게 목회자와 교인들은 보이는 수고와 함께 숨은 노력도 많아지므로 힘에 겨운 희생과 함께 신앙에 큰 발전을 갖게 됨.
(이진헌 목사님)
1971년 이진헌 목사님의 부임으로 창동교회는 장년 130 명과 주교 200여 명으로 성장
(전성수 조사님)
1972년 부임한 전성수 목사님의 시기에는 장년 200 명을 넘기며 주교도 320 명으로 성장이 계속 되고 있었고 향후 예배당 확장을 위해 대지를 294 평까지 확보함.
2. 통계
① 목회자
개척 59년, 3 가정
한종희 조사님 59.12. 60년, 유아 30 명
송용조 목사님 (60.)
이재순 목사님 62.10. 64년, 30 명
신도범 목사님 65.3. 65년, 70 명, 건축 40 평, 대지 200 평
백영익 목사님 65.11.21.
신용인 목사님 66. 70년, 장년 80 명, 증축 40 평, 대지 230 평
이진헌 목사님 71.(10) 72년, 장년 130 명, 아동 200 명
전성수 목사님 72.(4) 75년, 장년 200 명, 아동 320 명, 대지 294 평
송종섭 조사님 79. 11. 02
전재수 목사님 80. 07. 17 부임
전재수 목사님 83. 06. 12 이동
이재순 목사님 83. 07. 14
이재순 목사님 85. 03. 12 이동
배종일 목사님 85. 03. 12 부임
배종일 목사님 94. 01. 18 이동
문석표 목사님 94. 01. 18 부임
임상렬 목사님
안재남 조사님 84. 07. 10
안재남 조사님 85. 03. 26 이동
신용수 장로님 96. 01. 16 장립
박경순 전도사님 인허 //
김형순, 이옥순 서경숙 권사님 //
오숙자 권사님 97. 11. 02
이정애 권사님 99. 01. 03
신영철 장로님 99. 01. 08
박병은 장로님 01. 03. 05
배분순 권사님 01. 03. 11
장윤석 조사님 01. 12. 13 부임
② 공회 기록으로 본 창동교회
59년, 3 가정 마루
60년, 30 명(장년, 아동) 천막
64년, 30 명(장년) 흙벽 15 평, 무상 임대
65년, 70 명(장년) 건축 40 평, 대지 200 평
70년, 80 명(장년) 증축 40 평, 대지 230 평
72년, 130 명(장년) 아동 200,
75년, 200 명(장년) 아동 320, 대지 294 평
85년, 411명(장년) 중간 131,
주교 492, 대지 520평, 건평 160평
연보 수입 1,724만원(십일조 1186, 일반 536)
86년, 397명(장년, 4월)
88년, 주전 309, 주후 189, 삼일 198, 새벽 44 (장년)
11월 주전 102, (중간)
주전 635, 주후 41, 삼일 25, 새벽 12 (주교)
③ 창동교회 출신 목회자
김영웅 목사님 (서울 난곡동교회) 이도영 목사님 (서울 하계동교회)
김형렬 목사님 (부산 서진교회) 하영식 목사님 (거창 무월교회)
김수복 목사님 (부산 생명수교회) 이치영 목사님 (부산 동천교회)
이신영 목사님 (부산 모덕교회) 이영인 목사 (여수 신풍교회)
장원정 사모님 (부산 학장, 류정현 목사님)
김길제 조사님 (부산 남정교회, 교육) 장재영 조사님 (미국 세인트루이스교회)
>> " 님이 쓰신 내용 <<
:
: (창동교회 초기개척에 대한 기억은 현재 합동교단에 소속된 변종희집사님의 기억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음은 1994.10.19. 10:00-12:00 면담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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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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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영희목사님이 거창에서 직접 지도했던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동교회, 그리고 위천교회 교인들은 백목사님이 부산서부교회로 이동한 뒤 여러 종류의 이주가 있었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백목사님 신앙노선의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 중에 봉산교인들이 거창읍으로 이주하여 주남선목사님이 계시던 거창읍교회를 다녔고 1959년 백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되면서 이들은 거창읍교회에서 거창읍 창동교회 (초기명은 중앙교회)를 세우게 된다.
:
: 거창읍으로 이주한 봉산교회 교인이었던 이진철집사는 6.25 전란에 집과 가산 전부가 불에 타버렸고 또 위천에 있던 백목사님이 부산으로 갔기 때문에 거창으로 내려와서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인 집사는 봉산에 남아 본 강단을 지키자 하고 이 집사는 내려가자고 하다가 결국 거창으로 내려와서 철공소를 시작하였다. 전후 부서진 트럭 등을 고치며 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백목사님이 고제에서 거창을 내려 올 때 거창 읍에 들어오기 전 다리 밑에 나환자들이 움막에 기거하고 있는 곳이 있어 늘 전도하고 거기서 예배도 인도하곤 했는데, 백목사님이 거창읍으로 오신다는 기별이 있을 때마다 이집사 부부는 시내 외곽까지 마중을 나갔고, 그 곳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예배 드릴 기회가 많았다. 한번은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께서 여기 나환자 형제들을 위하여 누가 거처와 예배 처소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설교 중 소원을 하셨고 그날 설교 말씀을 쫓아 이집사가 해보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가산을 팔아 현 양혜원 터를 구입하고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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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부산에서 백목사님이 제명을 당하게 되고 동시에 거창에서는 백목사님의 신앙 지도를 받던 사람들에 대하여 사전 준비 조처를 강구하던 거창교회에서는 이집사를 장로 장립의 1순위로 올려놓고 백목사님 계열 교회가 분립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양혜원이라는 사회 복음사업체, 또 철공소라는 튼튼한 재력 등에 봉산교회에서 받은 신앙의 불 등으로 교회에서 확실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백목사 직계 사람이라 해서 부산에서 백목사님이 제명되면 거창에서 그 영향을 받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양혜원이라는 사회사업 기관을 거창읍교회 직속으로 조처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준비도 있었다.
:
: 당시 양혜원교회에 시무하며 양혜원 업무로서는 총무직을 가지고 있던 천조사님과 거창교회 최의구목사님이 양혜원을 교회 직속으로 돌리는 법적 조처를 밟게 되었고 이집사의 불복으로 소송에 이르게 된다. 관할 모든 교회의 부동산이 노회 소유로 유지되는 연고로 진주노회 송상석, 황철도 등 노회지도부와 정면으로 법적 투쟁이 있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는 집사들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감정문제로 계속 격화되었다. 백목사님은 부산서부교회 제명건의 격랑에 휘말렸었고 거창지방은 자기들 신앙으로 스스로를 지키던 때였기 때문에 이집사는 개인 사유물을 교회에서 뺏들어가는 것은 소송으로라도 지키겠다고 하였고 승소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그 동안 부인집사님은 즉시 개척을 주장하고 이집사는 거창교회내 장로직 등에 연연되어 머뭇거리다가 이런 일로 인해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었다.
: 결국 이집사는 교회 개척의 동기가 깨끗지를 못했고, 또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으며, 훗날 백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역량을 이미 넘어서는 '사회사업'이라고 만류를 했음에도 그 애착 때문에 정리를 못했으며, 그 사회사업 때문에 본인의 신앙 파탄을 가지게 된다. 평생에 다시 헤어나지 못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회개의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
:
: 창동교회의 개척은 어쨌던 이집사의 거창읍 하동 278번지 마루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집사부부, 김형순, 변종희 등이었다. 마루에서 한 달 정도 예배를 보다가 넓은 마당 터에 천막을 치고 중앙교회로 시작을 하였다. 설교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국농소에 있던 강집사를 청했다. 봉산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 하던 분이라 바로 합류가 되고, 이순길은 읍교회에서 바로 나오기가 입장이 좀 그러하다 해서 좀 있다 나왔다. 그리고 강원도에 있던 변종희 부모를 불렀다. 현 창동교회 터도 이집사가 소유하고 있던 터라 그 빈터에 강집사 부부, 변을문 부부 등으로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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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은 되었지만 고신의 박해가 계속되던 때였고 그 박해 중 가장 큰 박해는 부산 백목사님에 대한 중상이었다. 고신 분위기에서 집사 딸이 연애한다고 6개월씩 교회 출석을 금하고 할 때였다. 창동교회 개척이 되면서 한 달이나 있다가 천막을 쳤고 천막을 치자 막바로 백목사님을 모셔서 집회를 했다. 교단적으로는 이미 끊었으나 개인적인 은혜관련 교인이 많았고 천막이 터지도록 많은 사람이 모였다. 원기 김상권집사까지도 합류되었다. 천막에서 1년 정도 예배를 드리던 중 집회를 3번 하게 된다. 천막치고 예배를 드리자 바로 백목사님을 모시고 첫 집회를 가졌고, 그 다음은 김현봉목사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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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동교회 백조사님(당시) 집회는 월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집회가 금요일 새벽예배까지 보도록 되었으나 목사님의 안수 문제로 한시간 일찍 마치고 목요일에 떠났다. 창동교회 본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는 흙벽돌을 양혜원에서 찍어 줬다. 천막예배당으로 1년 정도의 시간이 진행되었다. 강집사님이 주로 설교하고 이집사도 설교하는 등 한참 집사들이 돌아가며 강단을 맡다가 서부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순회로 강단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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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창동교회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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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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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 교회는 1959년 거창읍 하동 278번지 이운길, 김봉선 성도의 가정 마루에서
: 김형순, 변종희 등 몇 몇 성도가 모여 예배드리다가 그 마당터에 천막을
: 치고 중앙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 양혜원 터를 구입하여
: 한 동안 예배 처소를 옮겼다가 지금의 중앙리 58번지로 옮겨서 창동교회로
: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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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희 조사님 (초대교역자)
: 송용조 목사님
: 이재순 목사님
: 신도범 목사님
: 백영익 목사님
: 신용인 목사님
: 전성수 목사님
: 이진헌 목사님
: 송종섭 조사님 1979. 11. 02
: 전재수 목사님 1980. 07. 17 부임
: 전재수 목사님 1983. 06. 12 이동
: 이재순 목사님 1983. 07. 14
: 안재남 조사님 1984. 07. 10
: 이재순 목사님 1985. 03. 12 이동
: 배종일 목사님 1985. 03. 12 부임
: 안재남 조사님 1985. 03. 26 이동
: 배종일 목사님 1994. 01. 18 이동
: 문석표 목사님 1994. 01. 18 부임
: 신용수 장로 1996. 01. 16 장립
: 박경순 전도사 인허
: 김형순, 이옥순 서경숙 권사 취임
: 오숙자 권사 취임1997. 11. 02
: 이정애 권사 취임1999. 01. 03
: 신영철 장로 장립1999. 01. 08
: 박병은 장로 장립2001. 03. 05
: 배분순 권사 취임2001. 03. 11
: 장윤석 조사님 2001. 12. 13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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