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교회-8

공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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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교회-8

비고 개척과 초기의 또 다른 모습

(장렬목사님이 소개하는 서부교회의 초기)


장렬목사님 소개:


1948년 서부교회 첫 개척 교인

1952년 백목사님 부임초기 서부교회 학생들로 고신의 학생신앙 운동


1970년 주일학교 출석 1천명을 넘기며 세계 최대 주교를 향한 첫 부장

1974년 청량리교회를 목회 출발지로 하여, 달산교회, 사직동교회를 거쳐 현

은평교회 담임. 현재 소속은 독립, 여러 신학교 강의,

동년배: 1934년생 신용인, 이동화, 이원일, 박은석 목사님 1년 위가 송종관, 김응도목사님 등



개인신앙:


부: 장낙순, 모: 고삼순, 모친 고삼순권사님. 항서교회로 신앙출발, 일제 때는 신사참배,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 반대 노선의 고신 교단으로 서부교회가 분리 시작될 때 첫 교인. 중학교 2학년 14세였고 이때 고신의 학생들이 불타오르는 신앙으로 교단과 부산 경남을 달구고 있었으며 대표적인 학생신앙운동(SFC)에서 중심 활동. 김병도, 손영준, 이원홍(공보처장관, 전KBS사장), 황창호(20대 거고교감), 한종희 등의 인물들이 당시 학신운동을 통과하던 이들



서부교회의 예배당


1948. 11. 7. 첫 예배 김영준 장로 집에서 16명이 예배, 장로님댁은 현 서부교회 자리였고 건물은 당시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다 8.15이후 철수했던 전형적인 2층 다 세대용 주택. 각층에 2세대씩, 가운데 복도를 두고 좌우로 나뉘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1층 복도 끝에서 그대로 이어져 2층 역시 가운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2세대가 위치. 건물 입구는 현재 화랑초등학교와 서부교회 사이의 이면 도로 쪽이며 현 서부교회 입구와는 정반대.


1층의 우측은 김영준장로님댁, 맞은 편은 신문기자가 살던 집이며 2층이 서부교회 첫 예배당으로 사용되었고 그 맞은 편은 서부교회가 개척나오던 원래 교회의 서장로님 댁이었다. 대단히 예배 보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고 '내 주를 강한 성'으로 모시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앞으로 전진. 1층 김장로님 댁의 작은 방, 다다미 3, 4장 깔던 넓이였으나 조심스럽게 예배를 시작했고 1달 후 2층 한 세대가 비게 되어 예배당을 2층으로 이전.

목수일을 했던 장로님은 보수동에 있는 광복교회 강단을 모델로 하여 강단과 강단용 의자 3개를 제작. 백목사님 부임한 후 오늘까지 사용.


예배실은 동서 방향이 길었으나 출입구가 남쪽이었기 때문에 강단은 북쪽에 위치.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1층 장로님 집을 구입하게 되었고 이곳은 전쟁시 피란 교인들이 사용하였고 김창인 당시 조사님이 부임해서는 사택으로도 사용. 이어 2층의 서장로님 댁을 구입하게 되자 마지막 남은 1층의 기자도 집을 매각하고 이사하게 되어, 결국 2개 층의 4세대 주택 건물 전체는 예배당으로 변환.


교역자 교체


개척을 준비하면서 경남도청에 들렀던 김영준장로님은 손양원목사님의 동생이었던 손의원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청빙이 성사되어 바로 개척 처음부터 목회자를 모시게 되었으나 1년 반이 지나면서 현재 서울충현교회 김창인 당시 전도사님이 후임으로 부임. 손의원목사님은 경주 입실교회를 거쳐 이후 영주동교회로 이동하며 마지막 통합측에서 생을 마침.


김창인전도사님의 부임은 당시 6.25 전쟁으로 밀려 내려오던 피난민의 유입과 맞물리면서 대단히 폭증. 큰 부흥과 함께 큰 은혜가 넘쳤고 설교 도중 힘있게 찬송도 하는 등, 교회의 부흥 모습은 숫자와 예배 열기에서 함께 대단. 교인의 숫자가 400여명을 헤아리게 되자 4세대 가정 주택용 2층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은 붕괴될 위험을 충분히 예상할 정도. 1층에 기둥을 여러 개 보충 조처. 인근 대신교회 홍반식목사님 교회에 소속된 이말출 당시 집사님은 김창인조사님의 은혜 소식에 서부교회로 전입.


그러나 교회의 부흥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피난 교인들에게 기존 개척 중심 교인들이 갈등을 가지게 되고 교역자 배척으로까지 연결되며 교역자 대우 문제도 발생. 김창인조사님이 교역자에 대한 신임투표를 제의하였으나 피난으로 유입된 교인들의 투표권을 인정치 않겠다는 기존교인들의 입장 때문에 투표하기 이전 김창인조사님의 개척이 추진, '동일교회'로 시작.


3번째 담임으로 청빙된 당시 백영희조사님. 첫 부임 후 바로 자체 집회를 가졌지만 교인들은 벽쪽으로 둘러 앉고 예배당 가운데는 거의 공석. 대부분의 교인들이 빠져나간 분위기 문제도 있었지만 전임 김창인조사님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무미건조한 설교였고 모두들 청빙에 이의.

이름 설립 자립 개척 추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