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참고2)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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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자 | 김명환 | ||||
직분 | 목사님 | ||||
소속공회 | 부산Ⅱ | ||||
전화번호 | 043-647-3471 | ||||
교회주소 | 27172 충북 제천시 용두천로8길 9 | ||||
지방 | 10충청강원 | ||||
세부 | 73년 남천교회 국기배례사건 - 박희금 |
일시: 06.3.25.10:00-12:00
제목: 박희금집사님 면담(남천교회 박의근장로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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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참고자료(/초기화면/연구실/일반자료/1948번/)
*관련 참고자료(/초기화면/총공회/일반자료/283-337번/)
*관련 면담 기초자료(/초기화면/백영희/인물사/원본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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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족관계
①부모: 父-박의근, 1918년생, 남천교회 첫 장로님/ 母-김복록
②가족: 5남 3녀 중 4째이며 박집사님은 둘째딸로 55.1.24.년생, 제천에서 미술학원 운영
③가계:
-선천: 부친은 평북 선천 출신.
북한에서 삼판 일하던 소년 때 고통 중 꿈에 계시를 보고 하나님을 만나 믿고
-월남: 1.4후퇴 때 부부 함께 월남. 서울 거주 중 같은 집 거주 전도사님 따라 천안 정착
-천안: 본인은 천안에서 출생하고 장로님은 천안에서 교회 개척 수고
-제천: 1960년 이전 제천 이주 ‘제일미싱상회’ 경영, 천막교회 시절 기억, 이후 목조예배당
2.신앙생활
-남천교회 주교 선생님 이종득목사님, 강태호집사님, 고장환목사님 기억
-1970년 중3 때 김삼암조사님 시절 주교 반사 시작, 중학교부터 집회 다닌 기억
-1962년 동명초, 68년 제천여중, 71년 제천여고 입학
3.국기배례
①학교생활
-고3이던 1973년
-매 월요일 애국조회, 운동장에 학년 반별로 학생 도열, 전체 대열 앞에 연단 1개
교사들은 연단 좌우로 학생 도열 앞쪽에 따로 서고 그 중앙에 교장선생님
-고3 3월 전교생 애국가 지휘 학생으로 임명받고 교사 대열에 함께 서는 유일한 학생
-애국조례순서는 ‘국기배례’ ‘애국가제창’ 순서로 진행, 지휘 때문에 단 바로 옆에 대기
-지휘 임명은 음악교사 이정애선생님, 남천교회 출석하던 분, 피아노 레슨 등 인연
학교에서 미술 방면으로 대외 수상 등 활약을 많이 하여 자연스럽게 지휘까지 맡음
②국기배례사건
-평소 교회 학생들의 분위기
국기배례 우상행위로 배웠으므로 인식은 확실했고 그래서 늘 하지 않았으며
가끔 학생들끼리 ‘하니? 안해야 돼!’ 이런 분위기 대화
주일 스켓치 때문에 미술부 학생들 행사가 있어도 가지 않았고
수학여행도 주일을 끼기 때문에 초등 중등 때 가지 못하고 고교 때만 기회가 되어 참가
학교 내 교회 다니는 학생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반반 정도이며 성결교도 있었고
교내 학생 써클이 없을 때여서, 학생들 학교 외 단체 활동은 교회 학생회 뿐인 정도
-국기배례 순서 때 교사 대열에서 한번도 절을 하지 않았으나
-교장 교사 전체가 부동자세로 국기만 응시하기 때문에 국기배례거부 발견되지 않음
-여학생이므로 초교 때부터 고교 때까지 계속 오른손을 왼가슴에 얹는 것으로 표시
-어느날 국기배례 거부 학생 조사와 호출 등 소란이 시작
-음악선생님 교장선생님 생활지도부장 등 순서대로 다 불러들여 책망
-너무 큰 문제니까 오히려 말로만 난리였지 폭행 등은 없었음
-고3에 사건이 발생했고 남천교회 학생 6-7명 정도가 학교와 경찰까지 출두
-당시 여호와증인도 함께 문제가 되었으나 학생 숫자는 미미
③경찰과 법원
-다른 학생들은 경찰에 한번 정도 출석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박희금만 1개월 정도 계속 경찰서 출두, 아침에 학교 가면 가방 두고 바로 경찰서로
-전체 교사와 학생들은 박희금을 볼 때마다 전염병 환자 대하듯 멀리하고
-평소 교사들에게 아낌을 많이 받았는데 모두 태도 돌변으로 충격
-학교에 가방 놓고 경찰서로 갈 때마다 얼른 빠져나와야 할 심리
-조사는 매일 몇 시간 계속. 경찰이 원하는 답변을 받아내기 위해 수많은 질문
-교회에서 시켜서 국기배례를 거부하게 되었다는 유도 심문이 끝없이 이어지고
-나 자신 신앙양심에 할 수 없어 하지 못했다는 답변으로 1개월 계속 수사 진행되자
-조사 담당 경찰은 아주 지독한 지능범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지리한 공방
-‘설교 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아니요, 그렇게 설교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일관된 태도와 답변은 ‘학교와 나라 사랑했고, 국기배례만 하지 않았을 뿐’
-법원 재판 때에도 학생으로 유일하게 법정 발언, 관심사건이어서 방청객 많았고
-그때 국기사건을 되돌아보면 그때 하나님을 직접 체험
-법원 진술 때 알아듣지 못할 단어로 묻는데도 뒤에 답변을 잘 했다는 말을 들었음
-1번과 2번 중 어느 것이냐? 물어보는데 자기 힘으로 대답하지 않았고 배후 기도의 힘
4.사건 이후
-개인적으로 충격이었고, 사건 때문에 앨범사진도 스스로 빠짐
-졸업 후 청주사범대미술학과 진학
-교사 교생실습을 제천여고 지원, 이전 기억 남아있지 않게 해서 간 것.
-교생으로 여고방문했을 때 아직도 자신이 그렸던 시화 그림 남아 있어 큰 감동
-폐허가 되다시피한 미술실을 다시 꾸미고 적극 활동하여 교생평가 제일 우수 성적
-과거 기억을 나쁜 것으로 남지 않게 다 치료해 주신 것 감사
-06년 3월 21일 국기배례 관련 면담 요청 전화 받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 정도
-지금 미술학원 26년 계속하면서도 학생들에게 국경일 국기게양과 국가행사 작품을 내주며
나라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바, 당시 형사에게 한 말 때문에라도 국가와 태극기 사랑 교육
5.현재
-1989년 결혼, 제천제일감리교회 출석했다 주일성수 등 여러 문제로 교회 복귀
-백목사님 사후 충북교회가 남천교회에서 분리개척 되고 그 첫 장소가 학원 2층
-결혼관은 세상조건 필요 없이 신앙만 보고 가겠다고 평소 내심 약속
-청주대학 진학으로 청주중앙장로교회(74-77년)를 다니면서 타진영 관계 신앙 혼란
-78년부터 미술학원 계속
-본인의 타진영 출석 등에 관련없이 남천교회는 옛날부터 늘 그 분위기
-남편은 연극인, 감리교 부흥회 때 5-10분의 스킵드라마 순서가 일반화 되어 있고 활동
6.평가
①사건의 방향
-공회의 73년 국기배례 사건이 ‘제천’에서 발생하고 대법원까지 가게 된 하나님의 섭리
-72년 유신과 국가적 위기감을 정면으로 맞서야 한 현실, 평화시의 극단적 환란여건 조성
-신사참배 거부한 고신과 재건과 총공회만의 사건
-초중고 전체 사건이 한 교회와 관련 가장 크게 터진 것은 제천과 남천교회
-거창 부산 등 이미 환란을 넘긴 곳이 아니라 공회적 신앙의 역량을 기르던 제천의 사건
-신앙적으로 세상법적으로까지 모든 면으로 승리한 사건
-이 사건으로 공회는 노선 전체 승패 시험에서 통과하고, 이후 세상 외부 환란은 종결
②사건의 현장
-조사하는 검찰은 학생들로부터 교회의 교사를 자백받아 교회차원에서 처벌하려 했으나
-핵심 학생의 단호하고 장기간 인내로 세상법적 판단에까지 완벽하게 그 의도 차단
-학생의 법적 판단이나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붙들고 보여주신 역사
-어린 학생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사건
-환란은 당할 자에게 이길 범위로 진행된다는 것만 확정하면, 본인 힘만 다하면 어떤 환란도 상관없음을 보여줌
-이 사건으로 공회는 당시 정권에 의하여 전면 사상 검토를 받게 되고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됨
③학생 본인
-총공회 가장 귀한 노선의 중심에 섰던 한 학생
-훗날 노선 외부로 나간 것은 아까운 일
-과거 이 노선에서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세상 복은 분명하게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