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생명 - 육식, 안식일
분류 |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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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우리에게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 짐승이 받는 특별한 대우 3가지 |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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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7:44
동물보호운동의 과도한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식물의 생명은 왜 아끼지 않느냐며 반론한다. 이 반론은 그들이 동물을 자연의 이치 차원에서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망치는 내면을 반대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그들과 상대할 것 없이 자체적으로 동물의 생명은 특별히 아끼는 것이 맞다. 식물 역시 아낀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모두 아끼는 차원이다.
크게 보면 만물은 사람과 나머지로 나눈다. 만물은 구원의 활용품일 뿐이다. 그러나 짐승은 만물일 뿐이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인정을 하면서 짐승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첫째, 범죄 없는 세상에는 짐승의 생명도 보호 된다.
범죄 전 에덴동산과 부활 후 천년왕국에서 동물의 생명은 해하지 못한다. 창1:29에서 식물만 음식으로 주셨고 천년왕국의 경우 사11:7에서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물을 먹게 했다. 식물은 먹어도 동물은 먹지 못하게 했다. 동물이 동물을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 식물은 먹을 수 있으니 식물의 생명은 생명 대우를 하지 않는다. 그냥 만물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조심하고 아껴 쓸 일반 자연 은총 중에 하나다.
22.3.10.
둘째, 안식일에 짐승의 생명이 위험하면 구해 준다.
안식일에는 신앙의 일 외에 세상 일을 할 수 없다. 제사장은 제단의 일을 할 수 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을 도살하는 것이 주 업무여서 노동의 강도가 컸다. 안식일에는 걷는 것도 제한을 시켰다. 그러나 마12:11에서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구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생명에 관련 된 것이어서 응급 조처가 된다.
세째, 니느웨 심판에서도 육축을 아꼈다.
요나 4:11에서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했다. 홍수 후에 육식을 주셨기 때문에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공연히 죽이지 않는다. 일도 시키고 죽여서 가죽도 사용하고 음식으로도 먹는다. 그러나 그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 짐승의 생명은 특별히 아꼈다. 신25:4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했고 출23:19에서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지 못하는 자비를 주셨다. 신22:6에서 어미새와 새끼를 함께 가져 오지 못하도록 절제를 시켰다. 땅에 대한 레25:5의 안식년과 레25:11의 희년 또 나무에 대한 신20:19에서 나무의 작벌을 조심 시킨 것은 나무 하나하나에 대한 자비가 아니라 사용의 남용을 금했다. 짐승의 생명과는 달라 보인다
크게 보면 만물은 사람과 나머지로 나눈다. 만물은 구원의 활용품일 뿐이다. 그러나 짐승은 만물일 뿐이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인정을 하면서 짐승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첫째, 범죄 없는 세상에는 짐승의 생명도 보호 된다.
범죄 전 에덴동산과 부활 후 천년왕국에서 동물의 생명은 해하지 못한다. 창1:29에서 식물만 음식으로 주셨고 천년왕국의 경우 사11:7에서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물을 먹게 했다. 식물은 먹어도 동물은 먹지 못하게 했다. 동물이 동물을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 식물은 먹을 수 있으니 식물의 생명은 생명 대우를 하지 않는다. 그냥 만물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조심하고 아껴 쓸 일반 자연 은총 중에 하나다.
22.3.10.
둘째, 안식일에 짐승의 생명이 위험하면 구해 준다.
안식일에는 신앙의 일 외에 세상 일을 할 수 없다. 제사장은 제단의 일을 할 수 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을 도살하는 것이 주 업무여서 노동의 강도가 컸다. 안식일에는 걷는 것도 제한을 시켰다. 그러나 마12:11에서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구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생명에 관련 된 것이어서 응급 조처가 된다.
세째, 니느웨 심판에서도 육축을 아꼈다.
요나 4:11에서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했다. 홍수 후에 육식을 주셨기 때문에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공연히 죽이지 않는다. 일도 시키고 죽여서 가죽도 사용하고 음식으로도 먹는다. 그러나 그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 짐승의 생명은 특별히 아꼈다. 신25:4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했고 출23:19에서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지 못하는 자비를 주셨다. 신22:6에서 어미새와 새끼를 함께 가져 오지 못하도록 절제를 시켰다. 땅에 대한 레25:5의 안식년과 레25:11의 희년 또 나무에 대한 신20:19에서 나무의 작벌을 조심 시킨 것은 나무 하나하나에 대한 자비가 아니라 사용의 남용을 금했다. 짐승의 생명과는 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