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성경 | 66요한계시록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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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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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11.30 00:00
4) 넷째 인 : 청황마
계6:7-8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 절망 역사
(1) 청황 : 재앙
① 필연
복음 운동은 필연적으로 붉은 말의 분쟁도 검은 말의 배고픔도 따라 오는 법이니 그 다음에는 청황색으로 표시한 상황이 생긴다.
② 공포
청황색은 공포스런 분위기를 말한다. 겁에 질려, 이렇게 끝까지 믿어야 할까 흔들릴 수 있는 문제들이 일어난다. 기독교를 믿으면 조상 제사를 없애야 한다니 수백 년 내려 온 한국의 전통 사회로서는 자신들의 역사와 가치관 전부를 다 버려야 하는데 구한말에 선교사들이 전도를 하면서 어느 가정 어느 사회라도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초기에 시끄럽고 배 고픈 고난을 이겨 낸 이들이 마지막에 교회를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③ 생명의 도
그러나 이 땅 위에 복음 아닌 것은 복음 때문에 마침내 땅에 것을 전부 다 버려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소망을 둔 이들에게는 공포스런 절망이나 죽어야 사는 것이 생명의 도이다.
2) 사망 역사
[사망 역사: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짐.]
(1) 단계
첫째 운동이 지나가며 둘째 단계에서 분쟁이 생기고 그 다음 배고픔이 생겼는데, 이제 점점 복음 운동이 진행될수록 어려움의 정도는 넘치고 마침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2) 사망 운동
① 탄 자의 이름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다. 붉은 말은 그 시작이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그 다음에 서로 죽이는 단계가 왔고 셋째 단계도 배고픔까지만 표시 되어 있다. 이제 넷째 단계는 그 탄 자의 이름이 아예 사망이다.
② 음부
[음부: 사망을 처리하는 곳]
이 사망의 운동, 말씀이 지나가는 현실에서 말씀으로 돌아 서고 고치지 않은 것은 이 현실과 함께 전부 영원히 둘째 사망에 버려 지기 때문에 음부라 했다.
③ 단번의 기회
현실에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 말씀을 배척해도 택자 자체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에서 마련할 천국의 실력과 상급과 자기의 영생 모습은 다시 가질 수 없고, 그 현실에서 말씀으로 바로 살았어야 하는 기능과 요소는 그 현실이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는 살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심신의 기능과 요소와 실력과 기회는 그대로 영원히 음부로 던져진다. 믿는 우리에게는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기회가 그 현실을 지나 간 뒤에 천국으로 올라 갈 것이 되는지 음부로 버려 지게 되는지가 문제다. 이래서 사망 뒤에 음부가 뒤를 따르더라 했다.
④ 심신 요소
▪영생
오늘 교회 가야 할 시간에 교회를 가게 되면 오늘이라는 시간, 걷게 하는 데 사용된 나의 힘, 그 걸음을 통해 교회 출석이 더 익숙해 진 기능, 이로 인해 내 속에 더욱 잘 믿게 되는 나의 심신의 요소는 이 땅 위에서 한 번은 죽어야 할 나의 몸이 죽을 때 그 육체의 죽음과 함께 죽지 않고 모두 영생으로 옮겨진다.
▪영멸
반면에 오늘 교회 갈 주일에 세상으로 죄를 지으러 가면 오늘 그 걸음에 속한 심신의 모든 요소와 힘과 기회는 다시는 살릴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과 끊어지니 이것이 사망이요, 이렇게 현실에 끊어 져 버린 것들은 죽을 때 전부 음부에 버려야 한다. 심신 그 자체는 지옥을 가지 않으나 심신 속에 있는 기능과 요소들은 매 현실마다 차례로 최종 기회를 받게 되고 그 기회에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 것은 영생할 기능이 되고 말씀에 삐뚤어 진 것은 영원히 음부를 통해 지옥으로 보낼 부분들이 되어 진다.
(3) 땅의 1/4의 권세
① 뜻
땅의 1/4의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길러 가신다는 뜻이다. 평생을 통해 매 현실에 다른 기회를 주시며 어제 실패를 경험으로 오늘은 더 나아 질 기회를 주신다. 4분의 1은 쉽게 버릴 수 없는 분량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시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전부가 아니고 절반이 아니다.
② 소망
절반에 절반만을 먼저 거두어 가시는 것은 우리에게 4분의 1을 심판적으로 처리한 듯하나 실은 소망적인 분량이다. 계3:2에서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하신 말씀처럼 죽은 것을 거두어 감으로 하나님은 목적을 달성하는 쓰레기 처리 업자가 아니라 남은 것을 성공 시켜 하늘에 가져 갈 것이 많기를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나팔 재앙에서는 3분의 1을 없애는 역사들이 나타나고 대접 재앙에서는 어느 분량을 분리하지 않고 전멸 재앙으로 지나간다.
③ 길러가는 단계
여기 인 재앙에서는 4분의 1이 먼저 나왔다. 작게 시작해서 점점 길러 가시듯이 책망도 먼저 알리고 그 다음 경고하고 그 다음 작은 징계를 들고 치신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 인간처럼 인정 때문에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은 확실하나 우리를 길러 가는 방법이다. 작은 것을 작게 보지 않는 것이 복이다.
(4) 흉년과 땅의 짐승
① 흉년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인다 했는데 흉년은 흉년과 사망은 이미 앞에서 나왔다. 넷째 단계이므로 여러 가지를 함께 사용하신다. 흉년도 있고 사망도 있다.
② 땅의 짐승
땅의 짐승이란 인간이 인간답지 않을 때,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짐승화 된 상태인데 이런 세상을 통해 둘째 사망의 역사가 일어난다.
□ 독수리의 초월성
넷째 인을 뗄 때의 음성은 넷째 생물의 음성이었으니 4:7에서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했다. 청황색 말은 공포와 함께 절망이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이나 우리에게 이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고 계신다. 밤이 깊어지면 신앙의 마지막 투쟁력이 꺾인다. 그런데 바로 그 때가 주님이 오실 때다. 그래서 밤중은 절망의 절정이면서 소망이 실현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심지어 일곱 대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재앙들이다. 그래서 화, 화, 화가 있다고 했다. 화는 화다. 그런데 누구에게 왜 화가 되는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들어 있었고, 주님의 사활의 대속이라는 무한한 사랑을 가져 오는 출발이었다. 우리의 범죄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되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예정 가운데 복의 시작으로 두셨다. 네 가지 인에 네 가지 생물들을 두셨다. 그 중에 4번째가 독수리와 같다. 독수리로 표시만 해도 되는데 ‘날아가는’이라고 더욱 강조를 해 두셨다. 이 세상, 발로 땅을 밟아야 사는 오늘의 세상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떠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의 대속으로 중생 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그의 인도를 따라 가다 보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들어 올려 버리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이 시대를 초월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휩쓸려 이 시대의 시대적 죄악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우리에게 시대와 시대적 죄악을 초월하여 살 수 있다. 절망의 공포를 우리에게 주시는 넷째 인의 단계에서 주님은 이 단계의 절망은 우리가 초월할 단계로 주셨다고 표시해 주셨다.
(2020년 5월 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