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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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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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요한계시록06:09
서기 0 99

5) 다섯째 인: 제단 아래 영혼
[순교의 신앙, 자기 부인의 신앙]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 호소 역사
(1) 말
말은 그 존재의 힘에 따라 효력이 달라진다. 힘없는 자의 말은 말이 전부다. 힘 있는 자의 말은 그 힘이 그 말을 강하게 만든다.

(2) 심판 호소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하나님 앞에 선 종들이 피 흘려 복음 운동을 했던 그 제단 아래 엎드려 하나님 앞에 심판을 호소하고 있다. 생전의 종들은 실수도 있고 기도에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선 종들의 영혼은 온전하게 된 상태다. 거짓과 착오와 자기중심이 없다.

(3) 역사 진행
이들의 호소는 하나님께 바로 전해지고 하나님은 이 기도를 가지고 이 땅 위에 모든 역사를 직접 진행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앞 서 간 성도들의 제단 아래 기도다. 제단이란 말씀 때문에 자기를 바쳤다는 뜻이다.

(4) 신앙의 세계
히11:4에서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말한다 했는데 죽은 아벨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에서는 죽은 자의 말이란 상징적 의미밖에 없으나 하나님이 아벨의 영혼에 호소를 가지고 직접 역사를 해 버리면 아벨의 말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전부로 안다. 신앙의 세계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전부로 본다.

(5) 영혼의 호소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제단 아래 영혼의 호소다. 이 호소도 말이요, 하나님의 역사는 아예 처음부터 말씀으로만 모두 성취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절대 완전의 세계이므로 말씀이 말로 끝나지 않고 말씀이 천지를 만들고 운영하고 심판하고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6) 말씀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능치 못하심이 없는 능력으로 오늘도 역사한다는 점을 히4:12에 적었다. 그래서 성경의 말은 말로 보지 않고 실효적 실상으로 봐야 한다.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생겨 진다. 하나님의 말씀 세계는 이렇다.

(7) 기도의 능력
하나님 앞에 선 성도의 기도라도 약5:17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으나 능력이 다르다. 다섯째 인에서 나오는 호소는 생명을 바쳐 충성한 순교자의 기도인데 이들의 순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죽은 이들이다. 말씀을 따라 갔고 그 말씀이 그들의 행위와 인격을 통해 외부에 전해 졌고 이로 인해 죽었다. 하나님 때문에 죽은 이들은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 이들의 호소는 인간적 요소가 잘못 가감 된 것이 아니라 전부 하나님께 붙들린 호소다. 그런 요소만 낙원에 간다. 이들이 큰 소리로 부른 것은 하나님이 듣지 못할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거리가 먼 신앙 없는 이들의 소리라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없는 역사로 진행 된다는 뜻이다. 주님의 최후 재림이 마치 조용히 오지 않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매 현실에 오시는 주님이 말씀과 그 말씀 생활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 이들의 호소는 하나님과 그 성도 사이에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있어야 마6:8에서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 아시는데 오늘 강퍅하고 둔탁한 우리에게 이런 하늘의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 조심을 시키려고 기록했다.

(8) 대주재
호소를 할 때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로 시작을 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만 되는 하나님과 틀린 것을 바르게 잡아 놓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거룩이지만 우리가 죄로 삐뚤어 졌고 혼잡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말씀으로 우리의 인격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 된다. 이 면으로 노력할 때 우리는 수 없이 호소할 일이 많은데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참 되신 하나님이며 대 주재시니 참이라는 하나뿐이며 주재는 모든 것을 주권 운영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수 없는 면과 활동 중에 어떤 면으로 적느냐에 따라 바로 그 면으로 호소하라는 것이다. 모를 때 알려 주시라는 호소는 ‘전지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고, 전쟁에 밀릴 때는 ‘만군의 하나님’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지금 이 호소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9) 긍휼
아직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각자에게 주신 증거 생활을 하는 종들을 피흘리는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하고 있다. 증오에 찬 보복심일까? 생전에 그 생애를 겪어 본 형제들이 아직 세상에서 그런 고난을 겪는 성도를 위한 응원이며 격려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미 지난 날 말씀 때문에 자기를 포기해 보고 자기의 아끼는 면을 희생 시켜 본 이들은 먼저 성화된 그 요소들이 그 고난의 과정을 돌아 볼 때 그 고난이 싫거나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다시 겪어야 할 요소들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또 먼저 낙원에 간 성도들은 지금도 살아서 세상 속에 고난을 겪는 이들을 긍휼의 마음이다.

(10) 주님의 심정
벧후3:8에서 고난을 겪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심정을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다. 성도가 말씀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는데 하늘나라에 계신 주님은 아랑곳없이 다른 일을 하고 계실까? 대신 해 줄 수 없어 지켜보며 우리가 중간에 마음이 바뀌거나 실패할까 우리보다 더욱 마음을 졸이면서 우리가 겪는 고통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주님이다. 바로 이런 주님의 심정으로 지난 날 겪어 본 고난을 당하는 이 번 현실을 거치는 성도들과 자기 속의 요소들을 향한 마음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아니면 이런 마음이 되기까지 회개하고 자기를 바꾸어 가야 한다.

(예) 엘리야와 요셉
엘리야가 왕상19:4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10절에서는 나만 남았는데 나를 죽이려 한다며 죽기를 구했다. 요셉이 창40:14에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석방 되면 나를 빼달라고 청탁을 했다. 이 때 나갔다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일정은 헛일이 된다. 하나님이 재고 계시는 그릇은 아직도 2년을 조금 더 남기고 있던 때다.

2) 주님의 조처
(1) 주님의 노력
주님은 그 심정을 알지만 그런 긍휼과 동정의 사랑을 가졌지만 동시에 이 땅 위에 예정된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고난을 모두 겪고 천국에 와야 하며, 한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각자가 이 땅 위에서 공부해야 할 것은 다 배워야 하고, 익히고 고치고 연단을 받아야 할 것을 다 채워야 비로소 영원한 하늘나라가 제대로 시작 될 것이기 때문에 절대자 불변의 하나님으로서는 고난을 겪어 본 성도들의 호소를 듣는 동시에 그 호소를 가지고 우리가 이룰 과제를 마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주신다. 고교 3학년의 대학 입시 준비 기간 때문에 부모가 애를 태우는 6월에 아이가 고생한다고 퇴학을 시키고 집에서 쉬라 할 수도 있고, 아직 11월 시험까지 몇 달이 더 남았고 다시 없는 기회니 애를 태우는 마음으로 남은 공부를 후회 없도록 더욱 밀어 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얕은 동정으로 큰일을 망치지 않는다. 사랑도 지극하시나 목적을 달성하는 집념 역시 지극하다.

(2) 흰 두루마기
① 세상, 현실 통과
호소하는 앞 선 성도들, 애가 타는 신앙의 성화 된 내 속에 경험을 향해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쉬고 기다리게 하신다. 한 번 세상에서 끝이 났으면, 한 번 현실을 통과하며 말씀으로 그 기회를 바로 잘 배웠으면 다시는 그 사람, 그 기능에게는 고난이 없고 사망의 세력이 손을 댈 수 없다. 한 현실에서 바로 통과하면 그 현실과 관계 된 나의 요소는 중생 된 영처럼, 부활한 몸처럼 이제는 세상과 마귀와 사망을 넘어 선 존재가 되었다.

② 소망
이것이 현재 당하고 있는 지상의 성도와 내 속에 투쟁 중인 나의 요소들에게 주는 소망이다. 이 소망 때문에 오늘을 참고 견딜 때 더욱 힘이 된다.

(2020년 5월 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