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겸
분류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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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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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1 11:49
1986.3.10.월새
'.....
사도행전 8장의 시몬처럼... 백사겸의 '숨은 보배'라는 책이 출간 되었고, 소경으로서 점을 친 사람. 큰 돈을 벌었는데 알고 보면 전부 거짓말. 명철해서 눈치로 아는 사람. 그러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숨은 보배'라는 책을 출간.
가을이라 가을 바람....백사겸 백남석 부자 이야기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붉은 잎에 분홍 치마 갈아 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우리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동요이다.
작사자는 백남석 당시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 교수이고 1936년 현제명씨가 펴낸 어린이 찬송가에 처음 실린 노래이다.
백남석은 맹인 점쟁이였던 백사겸(1860~1940)의 장남인데 그는 평남 평원군 순안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실명하고, 1년 후 어머니 마저 잃은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 방법을 찾아 당시 맹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인 복술업 즉 점(占) 치는 일을 배우는데 4년만에 승어사(스승보다 나음)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이 준 산통(算筒)과 죽장(竹杖)을 갖고 고향을 떠난다.
가까운 평양으로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동강변에 자리를 펴고 점을 치기 시작했는데 워낙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능해 금방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이천과 원주를 거쳐,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는다.
거기서 이십 년 가까이 점을 치다보니 고양읍 백장님하면 명복이다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양반 집에서 가마를 보내 초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기만하여 돈을 버는 것에 대한 큰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 뒷마당에 제단을 쌓아놓고 매일 첫새벽이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데 18년 동안을 그렇게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작심을 하고 100일기도를 시작하는데 마지막 날 아침, 뜻 밖에 예수교 매서인(賣書人)김제옥이라는 여인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고 인가귀도라는 표지가 빨간 책을 주고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算筒)은 의의 산통이니라. 받아 가거라”
그리고는 은으로 만든 산통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 날 이후 백사겸은 점치는 일을 중단하고 감춰두었던 전도책자를 찾아 아내더러 읽어달라고 하였다.
아내가 읽어주자 그는 소리쳤다.
"내가 꿈에 얻은 산통이 바로 이 책이요. 김제옥이라는 여자를 불러오오. 나도 예수 믿겠소."
1887년 5월 2일,그와 그의 온 가족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후 그는 하루 종일 아내와 어린 아들 남석에게 성경을 읽어달라 하였다.
듣는 대로 외운 그는 마침내 성경을 다 외워 걸어다니는 복음서라는 평을 받았다.
그후 그는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하엿는데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조선의 삭개오라 불렀다.
타고난 재치와 달변으로 그의 설교는 웃음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1899년 정식으로 남감리회 전도인이 되어 장단과 파주를 거쳐 개성 평양 철원 김화 평강 서울 등지에서 전도하였고 말년에는 개성에 정착했다.
개성 남부교회,장단읍교회, 감바위교회는 그가 직접 개척하여 설립한 교회들이다.
남감리교인이었던 윤치호는 1906년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백사겸은 아들 남석을 이 한영서원에 보내었고 남석은 졸업 후 윤치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백남석은 흥업 구락부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주일학교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가을- 이 노래는, 현제명 박사가 아동 찬송가를 편집할 때, 대 선배 교수인 백남석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아동 찬송가 중에서도 백미일뿐 아니라 우리 나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동요이기도 하다.
국정 교과서에 실리면서 2절의 가사가 바뀐다.
가을이라 가을 바람 다시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 같도다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대자연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생명의 양식”이고 최근에는 원래대로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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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의 시몬처럼... 백사겸의 '숨은 보배'라는 책이 출간 되었고, 소경으로서 점을 친 사람. 큰 돈을 벌었는데 알고 보면 전부 거짓말. 명철해서 눈치로 아는 사람. 그러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숨은 보배'라는 책을 출간.
가을이라 가을 바람....백사겸 백남석 부자 이야기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붉은 잎에 분홍 치마 갈아 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우리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동요이다.
작사자는 백남석 당시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 교수이고 1936년 현제명씨가 펴낸 어린이 찬송가에 처음 실린 노래이다.
백남석은 맹인 점쟁이였던 백사겸(1860~1940)의 장남인데 그는 평남 평원군 순안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실명하고, 1년 후 어머니 마저 잃은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 방법을 찾아 당시 맹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인 복술업 즉 점(占) 치는 일을 배우는데 4년만에 승어사(스승보다 나음)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이 준 산통(算筒)과 죽장(竹杖)을 갖고 고향을 떠난다.
가까운 평양으로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동강변에 자리를 펴고 점을 치기 시작했는데 워낙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능해 금방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이천과 원주를 거쳐,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는다.
거기서 이십 년 가까이 점을 치다보니 고양읍 백장님하면 명복이다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양반 집에서 가마를 보내 초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기만하여 돈을 버는 것에 대한 큰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 뒷마당에 제단을 쌓아놓고 매일 첫새벽이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데 18년 동안을 그렇게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작심을 하고 100일기도를 시작하는데 마지막 날 아침, 뜻 밖에 예수교 매서인(賣書人)김제옥이라는 여인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고 인가귀도라는 표지가 빨간 책을 주고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신기한 꿈을 꾼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算筒)은 의의 산통이니라. 받아 가거라”
그리고는 은으로 만든 산통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 날 이후 백사겸은 점치는 일을 중단하고 감춰두었던 전도책자를 찾아 아내더러 읽어달라고 하였다.
아내가 읽어주자 그는 소리쳤다.
"내가 꿈에 얻은 산통이 바로 이 책이요. 김제옥이라는 여자를 불러오오. 나도 예수 믿겠소."
1887년 5월 2일,그와 그의 온 가족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후 그는 하루 종일 아내와 어린 아들 남석에게 성경을 읽어달라 하였다.
듣는 대로 외운 그는 마침내 성경을 다 외워 걸어다니는 복음서라는 평을 받았다.
그후 그는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하엿는데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조선의 삭개오라 불렀다.
타고난 재치와 달변으로 그의 설교는 웃음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1899년 정식으로 남감리회 전도인이 되어 장단과 파주를 거쳐 개성 평양 철원 김화 평강 서울 등지에서 전도하였고 말년에는 개성에 정착했다.
개성 남부교회,장단읍교회, 감바위교회는 그가 직접 개척하여 설립한 교회들이다.
남감리교인이었던 윤치호는 1906년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백사겸은 아들 남석을 이 한영서원에 보내었고 남석은 졸업 후 윤치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백남석은 흥업 구락부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주일학교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가을- 이 노래는, 현제명 박사가 아동 찬송가를 편집할 때, 대 선배 교수인 백남석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아동 찬송가 중에서도 백미일뿐 아니라 우리 나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동요이기도 하다.
국정 교과서에 실리면서 2절의 가사가 바뀐다.
가을이라 가을 바람 다시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 같도다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대자연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생명의 양식”이고 최근에는 원래대로 불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