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래반
분류 | 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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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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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16:25
설명: '그 아들의 아비'란 뜻의 사투리 줄임말
(850326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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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아내에게 슬그머니 어려운 일을 만들어 놓고, 그 아내가 이 일이 어찌 되느냐고 통통통통 거리면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막 그만 통통거리며 '이거 어쩝니까. 어쩝니까' 야단을 지기면 슬그머니 '아, 그거 뭐 그래?' 슬쩍 해 주면, '아이고, 우리 남편이 천하에 제일이다' 이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지 않아요? 이래서, 우리 시골에서는 그런 말이 있어요. 아, 뭐 참 잘 됐으면 아, 참 멋쩍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이라는 말 하는데 뭐 잘 됐으면 '하, 참 가드래반이다' 이러는데 그래 말이 그만 그 말이 돼 버렸습니다. 가드래반이다 이러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고 말만 쓰지 그 말을 모릅니다. 그 제가 그걸 좀 연구를 했습니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그 말이 뭐이냐? 그 아들 아버지다. 그 얘 아버지, 그 얘 아버지라는 말을 그만 빨리 하니까 그애 아버지라는 말이 가드래반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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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여기서는 '그 아들의 아반'이란 말이 줄어 '가드래 아반'이 되었다가 한 번 더 줄어 '가드래반'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아들'이 '가들'이 된 것이나 '아들의 아반'이 '아드래반'이 된 것이나 모두 홀소리끼리 연결되기(히아투스)를 회피하는 현상의 결과로 설명됩니다.
'아들의'가 '아드래'가 된 것을 살펴보면,
토씨 '의'는 다른 토씨 '에'와 15세기에도 본래 분화하지 않고 쓰이던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차츰 지금의 '의'와 '에'로 기능이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표기법으로 곧 시각적으로만. 소리로는 오히려 '에'로 합쳐 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서울말에서나 다른 지방에서나 '나의 살던 고향'은 '나에 살던 고향'으로 발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나 '나으'로 발음하는 것은 문자에 집착하거나 방언 사용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서도 문맥으로 보면 분명히 토씨 '의'로 적어야 할 것이 '에'로 적힌 곳이 아주 많은 것은 그런 실상의 반영입니다. 이를테면 '~ 중의 하나'로 해야 맞는데 '~ 중에 하나'로 한 곳이 성경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곳들이 요새 나온 개역 개정 성경에서 '~ 중의 하나'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토씨 '의'는 '에'로부터 인위적/문법적/문자적으로만 분화된 것이고 '에'로 발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홀소리 '애'가 차츰 '에'로 변하면서 혼란을 일으킨 결과가 '아드레'와 '아드래'의 혼동입니다. 그래서 어원에 대한 의식이 흐려 지면, 자연스러온 말의 변화와 흐름이 그 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애'보다는 '에'가 발음하기 쉽기 때문에 '에'로 흘러 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학문으로도 교육으로도 거스르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따라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위의 경우에 '아들의'가 '아드레'로 되는 것은 이해되는데, '아드래'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뒤에 붙은 '아반'의 '아' 소리 때문에 '에'가 '애'로 이끌린 결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뭏든 뜻으로는 '아들의 아반'이 소리로는 '아드래반'으로 나타난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한양대 / 김정수)
(850326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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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아내에게 슬그머니 어려운 일을 만들어 놓고, 그 아내가 이 일이 어찌 되느냐고 통통통통 거리면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막 그만 통통거리며 '이거 어쩝니까. 어쩝니까' 야단을 지기면 슬그머니 '아, 그거 뭐 그래?' 슬쩍 해 주면, '아이고, 우리 남편이 천하에 제일이다' 이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지 않아요? 이래서, 우리 시골에서는 그런 말이 있어요. 아, 뭐 참 잘 됐으면 아, 참 멋쩍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이라는 말 하는데 뭐 잘 됐으면 '하, 참 가드래반이다' 이러는데 그래 말이 그만 그 말이 돼 버렸습니다. 가드래반이다 이러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고 말만 쓰지 그 말을 모릅니다. 그 제가 그걸 좀 연구를 했습니다.
가드래반이다. 가드래반이다 그 말이 뭐이냐? 그 아들 아버지다. 그 얘 아버지, 그 얘 아버지라는 말을 그만 빨리 하니까 그애 아버지라는 말이 가드래반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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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여기서는 '그 아들의 아반'이란 말이 줄어 '가드래 아반'이 되었다가 한 번 더 줄어 '가드래반'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아들'이 '가들'이 된 것이나 '아들의 아반'이 '아드래반'이 된 것이나 모두 홀소리끼리 연결되기(히아투스)를 회피하는 현상의 결과로 설명됩니다.
'아들의'가 '아드래'가 된 것을 살펴보면,
토씨 '의'는 다른 토씨 '에'와 15세기에도 본래 분화하지 않고 쓰이던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차츰 지금의 '의'와 '에'로 기능이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표기법으로 곧 시각적으로만. 소리로는 오히려 '에'로 합쳐 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서울말에서나 다른 지방에서나 '나의 살던 고향'은 '나에 살던 고향'으로 발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나 '나으'로 발음하는 것은 문자에 집착하거나 방언 사용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서도 문맥으로 보면 분명히 토씨 '의'로 적어야 할 것이 '에'로 적힌 곳이 아주 많은 것은 그런 실상의 반영입니다. 이를테면 '~ 중의 하나'로 해야 맞는데 '~ 중에 하나'로 한 곳이 성경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곳들이 요새 나온 개역 개정 성경에서 '~ 중의 하나'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토씨 '의'는 '에'로부터 인위적/문법적/문자적으로만 분화된 것이고 '에'로 발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홀소리 '애'가 차츰 '에'로 변하면서 혼란을 일으킨 결과가 '아드레'와 '아드래'의 혼동입니다. 그래서 어원에 대한 의식이 흐려 지면, 자연스러온 말의 변화와 흐름이 그 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애'보다는 '에'가 발음하기 쉽기 때문에 '에'로 흘러 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학문으로도 교육으로도 거스르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따라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위의 경우에 '아들의'가 '아드레'로 되는 것은 이해되는데, '아드래'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뒤에 붙은 '아반'의 '아' 소리 때문에 '에'가 '애'로 이끌린 결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뭏든 뜻으로는 '아들의 아반'이 소리로는 '아드래반'으로 나타난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한양대 / 김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