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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n
주제별
전칠홍 장성도 전재린 손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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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절정
주제별
부산이 교리와 신조가 바르고 그 다음이 대구, 제일 못한 곳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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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n
주제별
고신 총회 임원, 사진. 1952-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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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n
주제별
고려파의 연혁 주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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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최후
1988.10.21-6
15가지 정죄한 분, 현 고신이 어두워졌다며 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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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최후
1988.09.24-6
일회 참석 실제 예배출석수는 국내 2위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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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최후
1988.08.11-4
기독교방송/ - 다른 종교 소개하고 통일로 나가는 사회현상 중 통일교 문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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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최후
1988.07.01-5
박해/ - 과거 산 순교자들이지만 교역자 바뀐 뒤에는 일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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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최후
1987.12.
교회 상대 선거운동 방법으로 목회자를 성지순례로 경제지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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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절정
1983.13.
일곱 명 모인 부산지역목양회에서 초청,설교,못 알아 들음,제 자랑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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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절정
1983.07.01-5
고려신학교 고신 교사 강습회 초청 서영준 주교 운영방침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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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절정
1983.03.20
충현교회 월간지 게재, 한국교회 회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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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부흥
1982.13.
84개국 모인 자리에 서부교회 소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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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부흥
1982.02.24
서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 주일학교, 연보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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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부흥
1981.
석원태 재건교회 등에서 통합제의를 거부. 단독 등록할수 있으나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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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부흥
1981.
재건교회와 석원태의 교단통합 제의. 노선문제로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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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부흥
1981.12.22-2
미국교회의 쇠퇴, 한국교회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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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부흥
1981.02.07-6
경북노회 이단정죄 3명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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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부흥
1980.
새일교회 이단 재발, 잡초도 생겨지면 없어지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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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부흥
1980.
박영관의 이단비판은 한종희 미혹에 꼬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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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공회
1969.
합동신학교 건축 비용은 서면 어느 교회 백장로님이 큰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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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공회
1966.
삼각산 선지파 여인,산삼 일곱 뿌리 캐어 청한 목사 중 1인이 양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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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공회
1966.
아현교회는 당시 1천명, 그때 영락, 충현, 초량교회들이 3-4백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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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공회
1962.
참고자료 - 이명재 목사 전기 번역본 및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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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공회
1962.
김치선과 대한신학교 최순직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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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공회
1962.
서울 원남교회 개척. 이명재 미국개척 지원 한인숙 70만원 이인재목사님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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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공회
1961.01.30
이병규 이간으로 김현봉과 백영희의 결별, 성은교회에서 본인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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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공회
1960.12.32-7
이기선목사님의 당부하던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대화, 납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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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공회
1960.
영락 대구제일 신정 부산삼일 초량교회 삼사백 아현교회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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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서부
1959.
우리는 밑에서 집회하고, 위에서는 막 두드리면서 찬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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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부
1959.
고려신학교 공부 때 기적은 잡탱이 신앙이라 학자들이 가르쳐 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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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서부
1959.13.
한명동목사님이 고려신학교를 대학으로 키워가다 실패한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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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서부
1959.13.
고려신학교 학생 중 평양 부자집 아들의 고생 ?
-
81
서부
1959.13.
고신으로 교회를 데려온 것이 박영기조사님이 제일 많고 그다음이 백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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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서부
1959.13.
고신의 유엔군 철수 반대 운동을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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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서부
1959.13.
고신 안에서 따르는 사람들
-
78
서부
1959.13.
장관이 기도하다 병이 낫게 되자 그때부터 광고를 해서 떠들고 마지막에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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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서부
1959.12.32-7
고신 수뇌부의 사모들 때문에 고신이 절단나고 박윤선 백영희 등도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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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서부
1959.12.32-7
신학교가 대학 종합대학 의대로 확장하면서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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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부
1959.12.32-7
장관부인이 교회를 옮기려 하자 울면서 따라 다닌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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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서부
1959.12.32-7
신마산교회 집회 때 총회 공과가 나왔고 양심시대 구원은 공자도 해당 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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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부
1958.
거창 남영환, 구호물자 주일새벽 도착 때문에 3개월 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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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서부
1957.
집회 시 칼빈의 교리에 대한 설교를 사람의 간판으로 평가한 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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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서부
1955.
박태전 전도관 운동에 고신이 제일 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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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부
1954.09.
박윤선과 한상동의 ICCC 참석과 박사학위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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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서부
1954.07.32-7
고려신학교/ - 한명동 사모님이 새벽기도 마치고 제일 끝까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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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서부
1954.06.31-7
우물파기를 반복하면서 주님께 드리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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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서부
1954.06.31-7
옳은 것만 배워서 나머지를 다 배척하고,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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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부
1954.06.31-7
고려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운 것은 오종덕, 제일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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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서부
1953.
해방 전에는 교리와 신조가 어렸고, 해방 후 많은 개혁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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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부
1953.
밥맛 좋아 많이 먹고 강단에 엎드리니 깜깜하게 어두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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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부
1953.08.02
서울 종로 청진동에 중앙교회 전칠홍 파견 개척, 윤봉기에게 빼앗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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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부
1952.07.27-
김창인 조사 동일교회로 분리,사십 명 남음, 김용학 집사와 운동,일곱명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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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부
1952.06.29
서부교회 교인 배척으로 김창인과 74명의 교인이 동일교회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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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전쟁
1951.08.08
전쟁 중 병은 다 낫음,교역자마다 간증,기적을 기록지 못 한 것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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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전쟁
1951.08.08
전쟁 후 거창 건계정 거창지방교역자 수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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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전쟁
1951.01.04
1.4후퇴 때 함양서 집회한 교회, 집회은혜 악용 신신학강사 집회로 교회 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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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전쟁
1950.09.32-7
초량교회에 모여 회개하고 기도하자 후퇴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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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전쟁
1950.06.25-0
전쟁 전 교역자회 때 주목사님이 유다서 암송하도록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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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전쟁
1950.06.25-0
교역자회/ - 전쟁 중 모든 교역자들이 체험 없는 사람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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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전쟁
1950.06.25-0
6.25 전쟁 중 신앙 실패한 사람들은 후에 목회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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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위천
1949.13.
기도하면 이미 이룬 줄로 알아라고 가르쳤는데 남영환목사님이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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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해방
1948.
설립 연혁 인물 등 주요 일정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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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해방
1948.
협천읍교회 정장로, 교회 돈 가지고 뭘 하다 자기 망하고 교회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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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해방
1948.
열 뿔에 대한 잘못된 해석, 거창서 집회 할 때 이상함 느껴 담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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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해방
1948.
실패 교회와 절교,십일조,우상 파괴 문제 때문에 복을 원했으나 성경 모르고 지나쳐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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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해방
1948.13.
?집회하면 사람들이 진동이 되어 떨고 해서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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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해방
1948.13.
신사/ - 옥중에서 대속과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 육의 힘으로 이긴 여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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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해방
1948.12.
?고신의 진리운동, 박윤선 주필의 역사적 문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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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해방
1948.05.27
박윤선 박형룡 박사, 신학교 교장 비교, 고신과 총신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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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해방
1947.04.
?고려파의 학생신앙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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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해방
1947.04.18-5
출발-해방 후 장ㅇ로교의 첫 총회, 손양원 설교, 백목사님 방청 첫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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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해방
1947.04.18-5
?출발-해방 후 장로교의 첫 총회, 손양원 설교, 백목사님 방청 첫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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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해방
1946.13.
?해방/ - 대속은 없고 승리만 있어 걱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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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해방
1946.06.23-0
?46년 6월 23일부터 8월, 진주에서 신학강좌를 시작 63명 수강생 중 개명교회만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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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해방
1946.05.26-0
?출발-도사경회 등 지역 교계의 연합활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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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해방
1946.05.26-0
?출발-고제기독교면려청년회 창설, 회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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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해방
1945.09.00
?9년 걸려 신학교 졸업한 무명, 신사참배 승리 후 전국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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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해방
1945.09.00
?거부하고 자유 가진 사람, 감옥 간 사람, 도망 간 사람, 패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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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해방
1945.09.00
감옥에 들어간 사람, 망명한 사람, 고난도 받지 않고 싸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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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해방
1945.08.21-2
?민주 공산 세력의 분열 대결, 교회의 민주화와 좌익의 공산화를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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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왜정
1945.07.32.7
?환란-6년 옥고를 다 이기다가 마지막 몇 달 놓고 사모님에게 충격받아 실패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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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왜정
1945.07.32.7
?환란-39일 금식하며 끝까지 감옥 밖에서 외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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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왜정
1945.07.32.7
?환란-부산 제일 가구점을 일본이 사업취소 시켰고 부인 반대로 별거했으나 끝까지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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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왜정
1944.
대속이 없는 인물, 일제 때 일본 성자로 사회주의이며 친일 앞잡이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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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왜정
1943.
?환란-실패와 투옥을 반복하다 결국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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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왜정
1943.
?환란-한번 죄를 범하면 그 다음부터는 신앙의 절정에 오르지 못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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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왜정
1943.
?환란-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황급히 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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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왜정
1943.
환란-주님 날 버리지 않았따며 우니까 풀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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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왜정
1942.02.15-0
?환란-싱가폴함락으로 일본은 완전히 자신감을 얻고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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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왜정
1941.13.
환란-거창군에서 제일 심한 곳이 고제주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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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왜정
1940.
?교계 유명한 사람들은 다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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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왜정
1939.
?환란-실패자들은 자신들이 드러날까 해서 신사참배 거부자들 밀고하고 더 앞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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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왜정
1939.13.
정치/ - 신사참배 환란 때 감투 노려 총회장 된 사람은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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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왜정
1939.13.
?환란-유명한 일본의 사회운동 성자 하천풍언이 한국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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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왜정
1939.13.
?신사참배는 이겨도 동방요배를 실해한 사람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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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초기
1938.13.
?환란-거창읍교회 시찰장 박근형목사님의 국민복차림과 천황 사진에 절한 다음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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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초기
1938.10.13
신사참배 국내 상황 전개-2월 평북노회 결의, 4월 거창경찰 압박 9월 총회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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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초기
1938.09.31
?환란-박형룡 박윤선 다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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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초기
1938.09.31
?환란- 압박, 투옥, 박해,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