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942년 1월 30일
성구(발신/수신) | 발신:손동인, 수신:손양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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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1942.01.30 | ||||
출처 | 손양원의 옥중서신(2015)-08 | ||||
저자 | (사)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임희국,이치만 |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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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 14:56
1942년 1월 30일
편지 원본 167쪽
발신 : 손동인
수신 : 손양원
아버지께 올림
하나님 은총 가운데 아버지의 기력과 체력은 여전히 건강하신지요? 저는 잠자리와 먹는 것에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산에서 여러 번 드린 저의 편지는 잘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1월 27일에 평양으로 보내신 '동인(東仁)에게 부탁'이란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참으로 반갑게 받았습니다. 수영(水營)¹⁾에 있는 박인순(朴仁順) 씨 동생의 결혼식 청첩장은 보셨을 줄 압니다.
제가 부산으로 오기 전 여수에 있을 때 두 번 부친 책을 아버지께서 당연히 받으셨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버지께서 받지 못하셨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책은 여수의 동신(東信)에게 찾아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아버지께서 받지 못하신 책을 어찌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못 찾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은 이층에 잘 두고 왔습니다.
애양원 원장은 지금 공석이고 언제쯤 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애양원은 늘 평안합니다. 부산의 교회도 평안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못 만납니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곳을 큰댁으로 삼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가구점 아저씨와 철공소 형님은 평안히 지냅니다. 부민정(富民町)²⁾교회는 권남선(權南善) 목사가 목회하십니다. 윤창신(尹昌信) 씨도 만났습니다. 구(具) 조사(助事)³⁾ 할아버지도 평안하고 우리 가족도 무탈합니다.
저는 백남주(白南主) 장로님의 상점에 일자리를 얻어 1월 10일에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월급은 잡비로 쓰라고 월 20원⁴⁾을 준다고 합니다. 동신(東信)이도 4월에 이곳으로 데려오려 합니다. 부산은 매우 따뜻합니다. 제가 일하는 상점은 며칠 안에 세관 쪽으로 옮기게 될 것 같습니다. 평양에 계신 할아버지께 편지를 띄워 이곳에 오시게 하여 해운대에서 잠깐 휴양하시도록 하고, 아버지 면회하러 광주에 가시도록 권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도 평안히 잘 계십니다. 드릴 말씀은 많으나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1942년 1월 30일.
아들 동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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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부산 수영구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地名).
2) 현재 부산 서구 부민동에 위치.
3) 초기 한국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고 교인을 돌보던 평신도 교직자.
4) 1940년 당시의 손 목사의 월 사례비는 70원이었다. 당시 물가를 이해하기 쉽게 한국은행이 발간한 <알기 쉬운 경제지표 해설>(2004)을 참고하면, 1940년에 쌀 한 가마니(80kg) 가격은 22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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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원본,활자화)손양원 옥중서신_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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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옥중서신_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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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옥중서신_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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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원본 167쪽
발신 : 손동인
수신 : 손양원
아버지께 올림
하나님 은총 가운데 아버지의 기력과 체력은 여전히 건강하신지요? 저는 잠자리와 먹는 것에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산에서 여러 번 드린 저의 편지는 잘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1월 27일에 평양으로 보내신 '동인(東仁)에게 부탁'이란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참으로 반갑게 받았습니다. 수영(水營)¹⁾에 있는 박인순(朴仁順) 씨 동생의 결혼식 청첩장은 보셨을 줄 압니다.
제가 부산으로 오기 전 여수에 있을 때 두 번 부친 책을 아버지께서 당연히 받으셨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버지께서 받지 못하셨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책은 여수의 동신(東信)에게 찾아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아버지께서 받지 못하신 책을 어찌 찾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못 찾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은 이층에 잘 두고 왔습니다.
애양원 원장은 지금 공석이고 언제쯤 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애양원은 늘 평안합니다. 부산의 교회도 평안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못 만납니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곳을 큰댁으로 삼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가구점 아저씨와 철공소 형님은 평안히 지냅니다. 부민정(富民町)²⁾교회는 권남선(權南善) 목사가 목회하십니다. 윤창신(尹昌信) 씨도 만났습니다. 구(具) 조사(助事)³⁾ 할아버지도 평안하고 우리 가족도 무탈합니다.
저는 백남주(白南主) 장로님의 상점에 일자리를 얻어 1월 10일에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월급은 잡비로 쓰라고 월 20원⁴⁾을 준다고 합니다. 동신(東信)이도 4월에 이곳으로 데려오려 합니다. 부산은 매우 따뜻합니다. 제가 일하는 상점은 며칠 안에 세관 쪽으로 옮기게 될 것 같습니다. 평양에 계신 할아버지께 편지를 띄워 이곳에 오시게 하여 해운대에서 잠깐 휴양하시도록 하고, 아버지 면회하러 광주에 가시도록 권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도 평안히 잘 계십니다. 드릴 말씀은 많으나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1942년 1월 30일.
아들 동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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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부산 수영구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地名).
2) 현재 부산 서구 부민동에 위치.
3) 초기 한국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고 교인을 돌보던 평신도 교직자.
4) 1940년 당시의 손 목사의 월 사례비는 70원이었다. 당시 물가를 이해하기 쉽게 한국은행이 발간한 <알기 쉬운 경제지표 해설>(2004)을 참고하면, 1940년에 쌀 한 가마니(80kg) 가격은 22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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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원본,활자화)손양원 옥중서신_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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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옥중서신_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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