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교는 나환자의 종교이다
성구(발신/수신) | 눅16:19-31, 시27: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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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미상 | ||||
출처 | 이광일1-01, |
제목: 기독교는 나환자의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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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9~21, 시편 27:10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19~21)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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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태양은 누구의 것입니까?
2. 나병(病)과 죄악의 작용은 동일합니다.
3. 이 병이 들면 부모, 가정, 세상과 절연(絶緣)하게 되니....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4. 금세의 절망자이니 내세의 복락(福)을 꼭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이다
6. 합심합력(心力)으로 믿습니다.
7. 우리의 책임
① 기도합시다.
② 천당의 소유자로 삼읍시다.
[본론]
1. 태양은 누구의 것입니까?
지구는 둥급니다. 태양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만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온대(溫帶)나 아열대(亞熱帶)지방도 그렇지만 한대지방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지에 사는 사람들은 저 태양은 나를 위한 태양이거니 생각하며 무의식중(無意識中)에 그 태양을 그리워하고 그 태양을 떠나서 살 수 없이 됩니다. 어떤 개인이나 민족 중에는 그래서 이 태양을 신격화 시켜서 우상으로 섬기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지만 그만큼 태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것 처럼 기독교는 시간으로 영원히, 공간적(空間的)으로 우주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어떤 시대에나 만민의 종교입니다. 특히 우리 나환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불가결의 필요한 종교입니다.
세상에서는 말하기를
「나환자(癩患者)들은 이곳 병원에서 병이나 치료 할것이지 종교가 무슨 필요이냐」
「문둥이들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주는대로 먹고 입고 그냥 살아 갈 것이지 종교니 신이니 할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는 나환자(患者)의 종교이다」라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 할 수 있느냐? 하는 조목을 들어서 말을 하겠습니다.
2. 나병과 죄악의 작용이 동일합니다.
특히 나환자에게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더욱 필요합니다. 나병을 히브리어로는 싸라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싸라스」라는 말의 뜻은 「두들겨 맞은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벌을 받아서 두들겨 맞은 것을 표시합니다. 이 말은 더렵혀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병에 걸린자는 일반인들이 사는데에서 격리(隔離)하는 규정이 정해졌습니다. (민 5:1~43:10~15) 그래서 격리소(隔離所)부근으로 통행인이 있을 때에는 자기들이 부정하다, 부정하다」하였습니다. 이병만은 꼭 죄 값의 상징이 분명합니다.
(1) 이 병이 들면 부모와 친척과 일반 사회에서 절교를 하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와 천당에서 절교(絶)됨과 같습니다.
(2) 이 병의 나타나는 외형이 대단히 보기에 흉합니다. 꼭 죄가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3) 이 병은 한번 병들게 되면 고통(苦痛)하는 감각이 없으나 점점 그 병이 깊어갑니다. 인간의 짓는 죄의 성장하는것도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성장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 예를 들어 본다면
① 예수님께서 열 문둥이를 고쳐주실 때에 보면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4, 마 8:1~4)하였고.
「낫게함을 받은지라」가 아니고 「깨끗함을 받은지라」입니다. 또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② 병의 유래를 보아도 죄값의 시작인 것을 알고 있으니 죄는 하나님께 안나가고는 미해결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미리암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한고로 해서 문둥병이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 21:1~16, 신 24:9). 역대하 26장에 보면 유대 나라를 52년간이나 다스리던 웃시야왕도 그가 강성(强盛)하여 질 때에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께서 성별(性別)하여 세운 제사장(祭司長)만이 할 수 있는 분향(焚香)을 대신하려다가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또 왕상 5:1 보면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에게 갔다가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서 몸을 씻음으로 병고침을 받은 후에 예물을 드리고저했으나 엘리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이 때를 이용하여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물욕(物慾)이 생겨서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 숨겼다가 엘리사에게 책망을 듣고 문둥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로 보면 미리암의 경우나 웃시야 왕에게 나타난 것이나 게하시에게 되어진 일들은 분명히 죄값으로 이렇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에도 가만히 보면 환자 병세가 분명히 신앙에 좌우되는것 같이 보입니다. 나환자 속에서 살면서도 불감 아동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병은 전염도 아닌것 같고 또 부모가 환자일지라도 자녀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서 이병은 유전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전염인지 유전인지 모르는 이 병이나 그러나 죄값으로 해서 된 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자들의 상태가 신앙상태 따라서 가감되는것 보아서 짐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나병은 죄와 비슷한 점이 많고 또는 죄와 관계되는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기독교는 나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근본 죄 문제 해결해야 영육간(靈肉間)의 구원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 기독교는 나환자의 종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 병이 들면 부모 가정 세상과 절연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막 보고 사는 환심(心)된 자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희락도 없고 또한 심리 상태도 평안함이 없습니다.
① 이렇게 되면 세상의 무엇이나 인간의 무엇이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다만 하늘에 속한것 내세에 속한것, 영원에 속한것만이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② 또한 심리도 새 심령으로 지어 받아야 합니다. 땅위에 인간들이 보통으로 갖는 심령으로 어떻게 감당하지 못합니다. 새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새 영으로 중생해야 합니다.
③ 소망도 내세의 것이라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은 육에 속한 것인데 이 육에 속한것에서 떠났다고 하면 이는 영에 속한 내세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4. 금세의 절망자이니 내세의 복락을 꼭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의 최대 최후의 복은 내세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신자에게도 그렇다면 우리 나병자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이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준 천국을 찾아야 합니다.
우선 요한 14:2~3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고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은 어떤 상상이거나 추상이거나 막연한 상태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글자 그대로의 어떤 장소로 있는 곳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성경 마지막 책 두장에다가 즉 계시록 21장 2장에 그곳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소개했을 뿐입니다. 그곳은「거룩한 성」「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로 시작해서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며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碧玉)과 수정 같이 맑은 곳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城郭)이 있고 열두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열두지파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이 쓰여있었습니다.
그 성곽은 144 「규빗」의 높이로 둘러 쌓인 벽옥(碧玉)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金)인데 맑은 유리 같다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또 많이 그 모양을 기록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한것처럼 무한한 위로와 기쁨을 받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다」한 곳입니다. (22:3~5).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실뿐 아니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올리어 승천하시었습니다. (행1:9). 옛날 엘리야는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에게 들리워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왕하 2:11).
바울사도도 그가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기 14년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신앙의 사람으로 우리의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준비하면 아무리 죄인일자라도 아무리 나병자일지라도 가고도 남음이 있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천국에 가려고는 하여도 여러 가지 조건이 천국에 가도록 되기가 쉽지않습니다. 부모 때문에 처자 때문에 혹은 친척 때문에 세상의 명예 때문에 쉽게 신앙 생활에 들어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재산 때문에, 때로는 지식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여야 하므로 천국 소망을 등한시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병자들에게는 이런 모든 조건이 저절로 나를 좌우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얼마든지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조건까지 없었다면 세상에서 무엇에도 비할수 없는 영원한 낙오자가 되었겠지만 이런 감사한 조건이 있으니 더욱 감사하고 또 이 일에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시 27:10에 보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하였습니다. 즉 우리들은 바로 하나님의 품안에 들어 갈수가 있도록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녀를 버리겠습니까? 어떤 병이 나도 그 부모가 그 병을 낫게 하려고 애를 쓸지언정 그 병으로 해서 자녀를 버리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만은 어느 정도로 치료도 해보겠지만 낫지 않으면 결국은 버리게 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성경 말씀은 우리 나환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나환자의 종교인 것입니다.
① 여호와는 실로 나환자의 아버지이십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병 같은 죄를 대신하시어서 십자가를 져주신 것이 아닙니까?
③ 기독교의 천국은 나환자 같이 금세를 단념하고 내세를 바라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인것입니다.
④ 성경에 있는 거지 나사로는 금세에서 하나님과 동거 동락 동행하던 자임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고 죽은지 4일만에 다시 살리신 나사로는 우리 심령의 부활, 내세(世)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6. 그러하니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믿읍시다. 열심히 믿고 진심으로 믿읍시다.
우리의 육체도 돌아볼 것 없이 세상에 어떤 소망을 둘 것 없이 그저 우리들의 목표 푯대만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운동장에서 다름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다름질 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다름질 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4~27) 하였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4)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아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1~2).
7. 우리의 책임
이제 이처럼 기독교는 우리들의 종교라고 생각했으니 우리 것이라는 권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그 권리에 대한 의무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리는 의무를 동반하는 법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백성이다 할 때에는 대한민국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이 되면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동시에 학교에 대한 의무가 있는 법입니다. 의무없는 권리는 없는 법입니다.
기독교는 역경(逆境)에서 더 큰 진리를 찾게 되는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삼대 모순(矛盾)이 있습니다.
① 살고 싶으나 죽는 일입니다. (生者의 死)
② 선을 행하고 싶으나 죄악이 따릅니다. 罪)
③ 복을 박고 싶으나 화(禍)가 이릅니다.(福者의 禍)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순(矛盾)속에서 어떤 진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자만이 신앙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즉 절망 중에서도 위대한 소망을 별견하게 되는 종교인 것입니다.
「장인(匠人)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된다」 (구역).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느니라.」 (눅 20:17, 행 4:11, 벧전 2:7, 시 118:22)
이 말씀은 건축자들이 볼 때에 쓸데 없을것 처럼 생각되어 내어버렸던 돌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집 모퉁이의 요긴한 머리돌로 쓰게 되었다는 시 118장 22의 말씀의 인용인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로 솔로몬 왕 때에 왕명에 의해서 성전을 짓게 될 때에 그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서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썼던 것입니다. (왕상 5:17).
그래서 많은 돌들이 버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렇듯 버림받던 돌들 중의 하나가 그 집을 다 지어갈 때에 없을 수 없는 「머리돌」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다윗 왕에게도 적용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도 적용이 되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장 적절한 비유인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버림 받은 거 같은 우리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니 세상과 인간에게서 내어 버림받은것 같은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크신 역사를 행하시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① 기도하는자 됩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우리의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들의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시켜 주셨으니 우리로서는 합심 합력을 다해서 전 세계 위해서 우리 한국위해서 한국 교회 위하여 또한 우리일가 친척 위하여 기도 할 수 있는 기도의 공장을 만듭시다. 이장소를 기도의 공장을 삼아서 한국교회를 운전시키는 발전소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사실 손 목사님은 다른 교회에서 부흥집회하실 때에는 꼭 애양원에 기도를 부탁하시었고 변경이 될 때에는 꼭 연락 시켜서 기도하게 하셨다. 편자주)
② 천당의 소유자로 모든 일을 합시다.
기도의 일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무익하던자가 제일 위대한 역사자가 되고 내어 쫓김을 당한자가 도로 요긴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불행한 자가 다행한 자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자 그러니 이제부터는 자포자기 한다거나 자기 인격을 매장하려고 하지말고 다만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대로 충성해야 하고 충의를 다해야 합니다. 천당의 소유자는 벌써 사랑의 소유자이요, 사랑의 소유자는 모든 면에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가령(假)성경 학교를 하나 경영한다고 하면 다른 불신 사회의 어떤 학교와는 달라야 하고 또 무병신자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점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배운다는 것도 그저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살기 위함이고 가르친다는 것도 그대로 지식을 전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즉 우리가 하는 성경 학교를 다른 사회 사람들이 와 볼때에 「과연 와 보니 천당이란 이런 곳인가 싶다」할 만큼 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직업적인 매매상품 같은 그런점이 없이 천국적인 천국의 지점 같은 성도들의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기독교는 나병환자의 종교이며, 우리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