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킹 제임스 성경 2. 말씀보존학회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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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1 20:55
4. 질문 : 1. 킹 제임스 성경 2. 말씀보존학회 1139
목사님 한글 킹제임스 성경(말씀보존학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변 : 킹 제임스 성경이란 최고의 영어성경입니다. 문제는‘유일’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1. 우선 일반 방문인을 위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잠깐 소개합니다.
1611년 영국의 '제임스'라는 왕은 영국의 대표적인 성경학자들에게 가장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출판하도록 했습니다. 영국은 기독교가 국교였고 또한 당시는 영국이 신앙으로 아주 건전했던 초기였기 때문에 왕이 국가적으로 지원하여 만든 당시 번역본은 기독교 역사에서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번역성경'이 됩니다. 왕의 이름을 붙여 '킹 제임스(King James) 본/판(Version)' 줄여서 'KJV'라고 합니다.
이 성경은 너무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어성경으로서는 그 이후 300여년간 영어권 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성경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미국에서 여러 종류의 성경들이 새로 번역되면서 지금은 그 종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보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나 또는 성경을 좀 깊이 살피는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말씀보존학회'의 한글판 킹제임스 성경
① '한글 킹제임스 성경'의 국내 소개
2000년 경을 전후하여 기독교 서점에서는 갑자기 '한글판 킹제임스 성경'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별별 성경이 다 나오던 때였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 가장 유명한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소개한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출간한 '말씀보존학회'에서는 여러 성경 중 보다 나은 성경번역본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밖에 없는 성경이라는 입장이며 그외 영어성경이나 현재 한글 성경 전부는 사탄이 만든 것이라는 입장을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한 가지 주장을 과격하게 하는 분들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사안을 전부 단정해버게 됩니다.
질문하신 곳은, 특별히 집중 분석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이미 그분들 스스로 주장하여 우리 귀에 또렷하게 들리고 나타난 몇 가지만 잘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단이나 이단으로 향하는 곳, 또는 자기 신앙의 앞길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아주 간략하게 파악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② '킹 제임스 성경'을 절대 권위로 주장하고는, 틀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의 주장 제 1번이 영어 성경 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만이 옳고, 그다음 한글 성경 중에서는 '한글 킹 제임스 성경'만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은 말만 성경이지 실은 사탄이 만든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근본적으로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은 원본 자체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본이든 그 사본이 얼마나 더 정확한가 라는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대개 오래 된 사본일수록 정확하다고 보지만, 옮겨 적는 사람의 신앙과 성격과 습관에 따라 수 차례 옮겨 적고도 더 정확할 수 있고 단 한번 옮겨 적으면서도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킹 제임스 성경'을 그토록 유일한 성경이라고 하지만 이는 번역본일 뿐입니다. 번역본이란 틀린 곳이 한도 없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영어성경을 다시 한글로 번역을 했다면 원 뜻과는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초보적인 수준이라도 번역의 실무를 알거나 맡아 본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한 문제입니다.
만일 '말씀보존학회'가 킹 제임스 성경이 다른 성경에 비하여 탁월하다고 비교를 한다면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앞장 서서 지지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은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선을 그어버리면, 그 주장 역시 신앙 상식 수준에서 틀렸다고 선을 그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③ 그곳의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너무 쉽게 단정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즉 예정 선택 등을 다 부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장로교가 아닌 곳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우리로서는 대단히 염려스런 주장입니다. 칼빈의 주장을 절대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칼빈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부인하는 정도라면 우리로서는 접할 필요가 전혀 없는 신앙노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빈의 교리가 당대로서 가장 옳고 바르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그 후 5백여년을 지나면서 아직도 칼빈 이상으로 깨달은 교리가 나오지 않은 것도 그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칼빈에 대하여 비판을 할 때는, 사실 칼빈 자신을 두고 비판해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칼빈의 제자들이 더 이상 발전을 시키지 못했다는 면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면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교회마다 발송하는 소개 내용을 접하게 되면, 그냥 역사에 없던 소리 다른 사람이 못한 소리만 골라서 한번씩 고함지른다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뉴스거리는 될지 몰라도 매일 매일 자기 현실에서 말씀으로 또박또박 살아가기에 바쁜 분들로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정도의 내용으로 간추려 기억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④ '말씀보존학회'를 두고,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찾는 분들이 가지셨으면하는 자세입니다.
이 문답방의 4번째 밑에 있는 질문 답변에서 '박옥수목사님'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 천국에 간다고 단정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곳입니다. 또 이번 '말씀보존학회'는 킹제임스성경만이 성경이고 나머지는 사탄이 만든 성경이라고 단정을 해버립니다. 교계에서는 자기들과 틀리면 성급히 이단으로 몰고 가지만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신중한 편입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가 이단으로 단정하는 경우는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기본구원'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정도입니다. 이 외의 것은 여간 크게 삐뚤어져도 조심스럽게 살피지만 앞에서 말한 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는 일단 교리적으로 바로 이단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에 질문하신 말씀보존학회는 교리적으로 그 제일 순위에 있는 '성경'론에 대하여, 이 앞에 한번 질문하신 박옥수목사님의 경우는 '구원'론에 대하여 각각 이단이라고 몰고 가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발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교회들이 교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고 좀 무리하는 수도 있으며, 또는 순수하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다가 자기 말에 자기가 자꾸 말려들어가는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좀더 지켜보셨으면 합니다.
어떤 이단은, 그 속에 무서운 이단의 정체를 숨겨놓고 교계의 눈치를 봐가며 수십년 세월을 걸쳐서 은밀하게 머리를 밀고 나타나는 바람에 교계의 일원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한신대 계통의 기장측이 그런 곳입니다. 그들은 논리가 정교하고 또 한국교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있어 전략을 가진 이들입니다. 지금 이단 중에 첫손에 꼽을 이단인 한신대 기장측 교단을 이단으로 꼽는 곳은 없습니다. 합동측 고신측에서도 그들과 함께 장로교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늘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재질문 :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말씀보존학회’의 원어성경 논리에 대한 반론)
아래의 성경관이 바른깨달음인지 궁금합니다. 바른 성경관을 갖기를 원하는데 목사님께서 바로 인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正體)
박 창 환
(전장신대교수, 신약학)
1. 이 글의 목적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한다. 아니 참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느 성경이 성경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곤란해진다. 많은 신자의 경우 성경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성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대개 번역된 성경에 불과하다. 가령 한국 크리스천의 경우라면, 오늘 흔히 교회 강단에서 읽고, 널리 보급되어 있는 개역 한글판(대한성서공회 1961년판)을 성경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의 크리스천들은 또 그들이 흔히 읽고 사용하는 번역 성경을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통계에 의하면 성경은 2,000여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그 번역들은 조금씩은 내용이 다르고 의미도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그렇게 다른 것은 성경을 번역한 언어가 다르고, 번역자들이 다르고, 번역된 시대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일 큰 원인은 번역 대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삼는 경우라든가, 독일어나, 불어나, 라틴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고 번역하는 등의 중역(重譯)의 경우에도 많은 차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가령 원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고 번역하는 경우일지라도, 원어 성경의 종류가 하도 많아서 그 많은 상이한 원문 성경을 대본으로 한 번역 성경들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존귀한 것으로 믿기에, 힘이 닿는 데까지 그것의 원본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 학자들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구약 원문 성경이 바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cia 제4판 1990)이며, 신약 원문 성경이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신약성경 그리스어(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 1993. 이하 NTG로)와 독일성서공회(Deutsche Bibelgesellschaft)와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 이하 UBS로)가 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The Greek New Testament 제4판, 1993. 이하 GNT로)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는 이러한 최첨단의 비평판(批評版)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성경을 번역했고 또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위에서 말한 가장 정확한 원문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한 것이 표준새번역(1993)이다.
이제 범위를 신약 성경으로 제한하여 생각해 보자. 위에서 언급한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NTG나 UBS의 GNT라는 결정적 비평판 성경이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활자인쇄술이 발명(A.D. 1450)되기 이전의 필사본 시대와 그 이후의 인쇄본 시대로 구분된다(인쇄본 시대에도 손으로 쓴 사본들이 몇 개 있다. 예컨대 소문자 사본 1884, 2318). 신약 성경 원본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며(구약의 경우도 같다), 사본만 해도 5,500여 개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같지를 않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 몇몇 사람이 후기의 몇 개의 사본을 비교하면서 자기 나름의 신약 원어 성경을 인쇄 출판한 것들이 수십 종류 남아 있다. 그 후에 헌신적인 학자들이 여러 곳에서 사본들을 발굴 혹은 발견하여 비교 연구하면서, 또 많은 비평판 신약 성경을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과 역사 속에, 17세기 초의 인쇄업자였던 엘제비어(Elzevir) 형제가 신약 원어 성경을 출판하면서 초판을 1624년에 내었고, 이어 제2판을 1633년에 내었다. 그 때 그 제2판을 선전하면서 자기들이 낸 신약 성경은 "모두가 수락하는 책"(textum …… ab omnibus receptum)이라고 광고를 내었고, 그 때부터 그 신약 성경을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 앞에 나온 것이나 그 후에 나온 여러 인쇄본 성경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82년에 [새흠정역성서](The New King James Version)와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가 트리니티 성서공회(Trinitarian Bible Society)에 의해서 출판됨으로써 스크라이브너(F. H. A. Scrivener)의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according to the text followed in the Authorized Version(Cambridge, 1881)이 새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됐고, 이렇게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가 재판(再版)되면서, 미국을 위시하여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그것들을 대본으로 하여 새로운 번역(1990년에 [새 성경]이 출판됨)을 시도하였고, 소위 '말씀보존학회'라는 단체가 주동이 되어 대대적으로 기존 성경 번역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번역 대본인 [새흠정역성서]와 그것의 신약 성경 대본인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와 그것이 속해 있는 비잔틴 전통의 본문(그들은 그것을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이 유일한 영감된 번역이요 또 본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례가 생겼다. 그래서 필자는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를 밝혀서 그것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신약 원문 성경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얻어보려는 것이다.
2.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의 의미
'텍스투스 레셉투스'라는 말은 라틴(Latin)어 술어이다. '텍스투스'(textus)는 원래 망(網 web)을 의미하고, 따라서 직물(織物), 구조물(構造物)을 기리킨다. 거기서부터 파생되어 생각이 얽히고 짜여 있는 글을 가리키게 됐다. '레셉투스'(receptus)는 레시삐오(recipio)라는 동사의 수동분사로서 '받아진' '수락된' '용납된'(accepted, received)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 두 단어를 합하면 '공인된 글'(Received Text)이라는 말이 될 것이고 좀더 풀어서 '공인된 본문'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술어의 유래
'텍스투스 레셉투스'라는 말은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범한 보통명사지만 그것이 지금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특정 문헌을 지칭하는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미 1번 항목에서 언급한 대로 신약 원문 성경 인쇄본들이 1514년 이래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160여 종류 발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라이덴(Leiden)의 기업적 두뇌를 가진 인쇄업자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e Elzevi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r)라는 두 형제가 베자(Beza)의 인쇄본(1565)을 거의 닮은 인쇄본을 1624년에 출판했고, 1633에 둘째 판을 내면서 그 서문에다가 그 책을 자랑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넣었다.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 in quo nihl immutatum aut corruptum damus."(Therefore you [dear reader] now have the text received by all, in which we give nothing changed or corrupted = 그러므로 귀하 [친애하는 독자]는 이제 모두에 의해서 수락된 성경을 가지게 ?습니다. 우리는 본문에다 변경되거나 잘못된 것을 결코 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엘제비어(Elzevir) 형제가 자기들의 책을 많이 팔기 위하여 상술적(商術的)으로 사용한 말 Textum. . .Receptum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그 텍스트 계통의 인쇄본이 100여 종류가 출판되는 동안, 그 인쇄본들을 "유일한 참 본문"(the only true text) 또는 "표준 성경"(Standard text)이라는 의미로 수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물론 원본 신약 성경이 아니고, 많은 신약 성경 인쇄본 중의 하나를 가리킨 것이며, 1881년 전까지의 구라파의 많은 번역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텍스트 계통을 통털어 '텍스투스 레셉투스'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과연 실질적으로 얼마나 원본에 충실하며, 과연 "유일한 참 본문"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쇄업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출판하는 책이 많이 팔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온갖 그럴 듯한 선전을 하기 마련이다. 1633년에 엘제비어 형제가 제2판 신약 원문 성경을 출판하면서 그것이 많이 팔리기 위해서 거창하게 쓴 선전문의 일부를 마치 하나님이 주신 명사(名詞)인 양 받아들여 온 많은 사람들의 처사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맹랑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선전에 현혹되고 있기에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를 밝혀 그들의 꼬임에서 풀려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많은 성경들 중, 유독 [영어흠정역]만을 유일 무이의 영감된 번역이라고 고집하고, 그 전과 후에 번역들은 하나 같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까지 하나님의 많은 충성된 종들이 이룩한 공로와 노고를 무효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기에, 어째서 [영어흠정역]만이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과 미국인 중, 일부 광신자들의 제국주의적 우월감과, 그들을 맹종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적 신자들의 어리석음이 [영어흠정역]과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우상화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대다수 신자들의 정상적 사고와 판단을 정죄하고 있기에, 정견(定見)을 밝히고, 극단주의자들의 편견과 오해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4. 텍스투스 레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성경이 생겨나기까지의 역사
4.1. 신약 성경 원본 기록과 그 보존 과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여러 사람의 글이 모인 것으로, 그 여러 글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저자들은 각기 교양과 신앙 경력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각기 성경을 쓸 때,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점L(파피루스 papyrus)와 붓과 잉크를 가지고 썼다. 그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이 성경의 일부분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 그들이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며, 점L나 붓이나 잉크는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어서, 특별한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즉 더 비싼 가죽 점L(皮紙 parchment, vellum)를 용지로 사용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만큼 귀중한 글을 쓴다는 의식도 없었기에, 그 당시 보통 얻을 수 있는 용지인 파피루스(papyrus =paper)를 사용했던 것이다.
파피루스라는 점L는 애굽 나일 강 가나 습지(濕地)에서 많이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植物)의 내피를, 펴서, 가로 한 겹 세로 한 겹 놓고, 눌러서 말린 것으로, 그 지대의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흔히 사용하던 필기 용지였다. 긴 글을 쓸 때에는 보통 일 척(一 尺) 평방 가량의 것을 몇 개라도 이어서 긴 두루마리를 만들어, 거기에 쓰고,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서 수신인(受信人)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코이네(koine=?????) 헬라어라는 평범하고도 통속적인 사람의 말로 기록된 동시에, 그 시대의 가장 평범한 필기 용지인 파피루스라는 점L에 기록됐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파피루스는 이른바 초지(草紙)여서, 그리고 한국이 자랑하는 한지(韓紙)와 같이 견고하고 지구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끊어지고 꺽어지고 부스러지기가 쉬웠다.
가령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냈을 때의 일을 상상해 보자. 그 편지는 매 주일마다, 아니 매일 그 교회 회원들에게 읽혀졌을 것이고, 따라서 오래지 않아 그 편지는 때가 묻거나,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해서, 그것을 새 용지에 옮겨 써야 할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것을 옮겨 쓰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서, 원본과 차이가 없는 것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헬라어 문자가 대문자들만 있었고, 띄어쓰기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활자판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어서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 쓰는 사람이 원본을 100%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이 연약한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아무 손상도 받지 않고 그 원본이 고스란히 오늘까지 보존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시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온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편지를 베껴오도록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단계에서만 보더라도 원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필사본이 다르고, 빌립보 교회가 만든 필사본이 또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 27권의 글이 우선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의 필사본이 만들어져야만 했고, 원본들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원본의 대를 잇는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점점 많아져서, 각 교회에서 원본 대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약 성경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신약 성경의 일부분 또는 몇 책이 함께 필사(筆寫)되어(어떤 것은 복음서만, 어떤 것은 바울서신만, 어떤 것은 사도행전만, 어떤 것은 계시록만, 어떤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역시 그 용지의 나약성과 보존 기술의 취약성 때문에, 아깝게도 거의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었다.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2세기 상반기(A.D. 125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P52가 있고, 오늘까지 발견된 9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제2세기의 것이 한두 개(P90 ,P98) 더 있고, 나머지는 제3세기로부터 제8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교회가 이렇게 파피루스 사본을 성경으로 읽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필사본이 만들어지면서 낡은 것은 자연히 사라져간 것이다.
현존하는 90여 개의 신약 성경 파피루스 사본들이 내용에 있어서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소간의 차이와 불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필사자인 인간들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실수와 때로는 고의적 변개(變改)로 인해서 성경은 초창기부터 원본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비록 사소한 것이지만)전달되어 온 것이다.
4.2. 대문자 사본(Uncials)과 소문자 사본(Minuscules)
성경의 귀중성을 깨닫는 교회들은 파피루스 사본들의 나약함과 지구성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구성이 있고 견고한 가죽 점L로 파피루스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제4세기부터는 가죽으로 된 용지를 사용하여 성경을 필사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의 지구성과 편리함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300개나 되니, 그 수효로 보아서도 98개에 불과하는 파피루스 신약 사본보다 훨씬 지구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문자 사본은 용지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좀체로 그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대문자를 가지고 썼기 때문에 단위 지면에 기재되는 내용이 비교적 적으므로 비경제적이었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적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계속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아마도 부유한 교회) 대문자 가죽 사본을 사용하였다.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사본이 공존하는 시대가 제 7세기 내지 제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수가 점점 늘고, 성경을 필요로 하는 교회나 수도원이나 개인들이 급격히 많아졌기 때문에, 소문자와 필기체가 고안되었고, 가죽 점L를 사용하되, 많은 내용을 빠른 시간에 필사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450년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즉 제9세기 이래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소문자 사본이 만들어졌고, 특이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는 많은 소문자 사본들이 필사되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방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이 대거 필사(筆寫)되어, 비슷한 종류의 사본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800여 개의 소문자 사본들은 제9세기 이후의 것들로서, 원본으로부터 따진다면 몇 십대 후손인 사본들을 필사한 것들이며, 서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뿐 아니라, 고대 사본들과 비교한다면 많은 변개(變改)가 있음을 볼 수 있다.
4.3. 성경일표(聖經日課表 Lectionaries)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배의식도 발전하였고, 성경을 균형 있게 봉독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부분을 매일 또는 매 주일로 나누어 읽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루하루 읽어야 할 성경 부분들을 일별(日別)로, 또는 주일별(主日別)로 나누어 기록한 것을 "성경일과표"(聖經日課表 Lectionary)라고 한다. 예컨대 대강절(待降節 Advent) 첫 주일에 사2:1-5; 시122; 롬13:11-14; 마24:36-44를 읽기로 하고 그것들을 한 점L에 모아서 필사본을 만든다. 이런 일과표가 역시 사본의 일점O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과표도 약 2,000개가 남아 있어서 원문 비평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들도 역시 그 각자가 필사되던 시대와 장소에 있던 사본들을 전사(轉寫)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대본(臺本)의 경향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4.4.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church fathers 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사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역시 그가 사용한 사본의 필사본으로서,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에 일조(一助)가 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장소와 시대를 반영하며, 그 지대에 유포됐던 사본들의 성격을 보여주거나 암시해 줄 수 있다.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서 실수로 잘못 전사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4.5. 고대 역본들(Ancient Versions)
성경이 처음에는 원어로 유포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신자들의 모국어 또는 상용어(常用語)로 번역되는 일이 생겼다. 구약 성경이 기원전 3세기부터 애굽의 알렉잔드리아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기원전 6세기부터 구약 성경이 아람어로 옮겨져 타르굼(Targum)이 생긴 것도 그 예이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 전역에 퍼져 나가면서, 자연히 성경이 각 지방의 언어로 번역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선은 선교사들이 각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즉 그들에게 복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코이네 헬라어보다도, 더 친숙하고, 더 알아듣기 쉬운 지방말로 성경을 옮겼던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시리아(Syria)에서 시리아어 번역이 시도되었고, 다음은 라틴어, 그리고 이집트의 콥틱어로 번역되었다. 그 뒤를 이어 고트(Gothic)역, 아르메니아역(Armenian), 죠지아역(Georgian), 에티오피아역(Ethiopic), 고대 슬라브역(The Old Slavonic), 아라비아역(Arabic) 등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런 고대 역본들은 역시 그 번역이 이루어진 시대와 장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사본들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된 것이므로, 그 역본들을 검토하면 그 배후에 있는 사본들의 성격과 경향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고대 역본들은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에 많은 도움을 준다.
4.6. 신약 성경 사본들의 지방적 경향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 각 지방으로 번져 나갈 때, 자연히 신약 성경도 사본이 되어 각 지방에서 읽혀졌다. 교회가 왕성하여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경의 수요(需要)도 늘었을 것이고, 따라서 사본을 만드는 일도 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발전사(發展史)를 개관할 때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북 아프리카(칼테지), 로마, 마게도니아(콘스탄티노플), 소아시아(에베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대별(大別)할 수 있으며, 교회 활동이 그런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고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지방에서 만들어져 사용되던 사본들도 자연히 그 지방에 어울리는 성격을 지니게 됐다고 보인다.
초창기부터 원본 성경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지방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되는 것은 필사자들이 다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필사자의 실수나 고의적 변개에 의해서, 사본들이 예외 없이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 것들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어느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소위 다수 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해서 절대 다수의 신약 사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비잔틴 계통의 사본들도 서로 어느 하나도 꼭 같지를 않은 것이 사실이어서, 어느 하나는 원본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필사한 사본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조금씩은 다 원본에서부터 이탈되고 달라졌다고 말해야 양심적이다.
다만 그 많은 사본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며, 경향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것들을 분류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본문 비평가들의 결론이다.
최근의 결론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약 사본의 본문형태(text-type)가 네 가지로 크게 나누인다는 것이다.
(1)애굽 형(알렉잔드리아 형),
(2)서방 형(Wester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3)(전부터 일컬어) 가이사랴 형이라고 하는 것,
(4)비잔틴 형(Byzantine) 등이다.
엘돈 제이 엡(Eldon Jay Epp)은 다른 기호를 가지고 그것들을 나타낸다. 즉
(1)A-텍스트("수락된" "accepted"= Byzantine),
(2)B-텍스트(Codex B =P75 -B, 혹은 이집트 형),
(3)C-텍스트(B와 D 중간 =P45 -Codex W(점|의 가이사랴 형),
(4)D-텍스트(Codex D, 혹은 서방 형"western")로 분류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A-텍스트(Byzantine)는 제4세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고대 파피루스 사본이나 대문자 사본이 하나도 없다.
즉 제4세기 이전에 필사된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 중 A-텍스트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세 타입의 텍스트들(B, C, D 텍스트)은 A.D. 200년 경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파피루스 사본들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1) 거의 초기부터 신약 성경 사본이 지방에 따라서 특이한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고, 대별하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2) 그리고 B, C, D 형의 본문이 A형의 본문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라는 것, 즉 A 형의 본문은 연대적으로 가장 뒤에 형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 네 가지 형의 본문들 중 어느 하나, 즉 A형은, 일부 무비판적인 맹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원본으로부터 조금도 변개된 것이 없이 순정(純正)하게 남아 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원본에서 이탈했고, 그 변개의 도수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변개가 심한가, 그리고 변개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원본에 가까운 본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성경의 원본을 보존하실 능력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본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일부 맹신자들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당신의 말씀을 무흠하게 보존하셨을 것이고,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 Majority Text)가 바로 그것이라고 억지를 쓴다. 아무런 근거나 증거도 없는 거짓말을 가지고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 사본은 필사자들의 각별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원본으로부터 다소간의 변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서로 다르며, 따라서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대로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사본 형성 과정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는 필사자들이기에, 일부러 어떤 부분을 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실수로 빠뜨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원문 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짧은 읽기(reading)가 긴 읽기보다 우수하다"이다. 그리고 난해한 부분은 필사자나 독자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바꾸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읽기가 쉬운 읽기보다 우수하다"는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그리고 사본은 그 대 수(代 數)가 늘수록 점점 더 원본으로부터 멀어지고 변개가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본의 연대를 무시할 수 없다.
즉 오래된 사본일수록 가치가 더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평 원칙들을 적용하며 검토한 결과 알렉산드리아 형, 즉 애굽 형(Neutral text, ?, B, Sahidic, Boharic 등)의 본문이 가장 권위가 있다는 것이 정평이다. Western text와 Caesarean text도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면서 상당한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지만, 제4세기 이후에 생겨난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는 가장 많은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어서, 최악의 사본군(寫本群)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4.7. 인쇄본(印刷本) 시대
문예부흥(renaissance)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된 구라파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으려는 열심이 생겼다.
1450년 독일인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활자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성경의 사본 시대는 거의 막이 내리고, 인쇄된 성경을 만들려는 경쟁이 생겼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쇄된 성경을 손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세기 기독교가 라틴역 불가타(Vulgata)를 공인된 성경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 사본은 특수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문예부흥의 바람이 불고, 인쇄술이 발명됨으로 인해서, 원어 성경 인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스페인의 주교 히메네스(Francisco Ximenes de Cisneros, 1437-1517)의 창안으로 이루어진 소위 [여러번역대조성서](Complutensian Polyglot)라는 방대한 대조(對照) 성경의 제5권에 신약 성경 헬라어 원문이 실렸다. 그것이 151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레오(Leo) 10세 교황의 재가를 얻은 것은 1520년 이후이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지를 않았었다.
'대조성서'(Polyglot) 속에 실린 신약 헬라어 성경이 어떤 사본들을 배경으로 가진 것인지를 확실히 알 도리가 없다. 히메네스(Ximenes)가 레오(Leo) 10세 교황에게 그 성경을 봉헌하면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사본들을 얻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밝히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헬라어 사본들로 말하자면 각하의 덕택이 큽니다. 각하께서 사도 도서관(Apostolic Library)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매우 오래된 사본(Codex)들을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이 작업에 있어서 그 사본들이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히메네스(Ximenes)는 로마에 있던 사본들을 이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사본들이 어떤 것인지, 몇 개나 되는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등을 알 수 없다.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헬라어 본문이 인쇄본으로서는 제일 먼저 된 것이지만,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발표되지 못했었고, 그 틈을 타서 에라스무스(Erasmus) 헬라어 성경이 먼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됐다.
스위스 바젤의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이 스페인에서 진행 중인 Polyglot Bible 소식을 듣자,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자기가 선수(先手)를 쳐서 신약 성경 헬라어 인쇄본을 출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1514년 8월에 그 곳을 방문 중이던 화란의 유명한 학자요 휴머니스트였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설복시켰다.
상당한 보수를 약속받은 에라스무스는 1515년 6월에 다시 바젤에 가서, 인쇄소의 조판을 위하여 신약 성경 사본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 전체를 포함한 사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몇 개의 부분적인 사본들을 참고하며, 나름대로의 수정을 가하여 인쇄소에 넘겼다.
메츠거(Bruce M. Metzger) 박사의 말에 의하면, 에라스무스가 이용한 사본은 바젤 대학 도서관에 있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두 개의 사본들이었는데, 하나는 복음서 사본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과 서신 사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 12세기의 것들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 밖의 두세 개의 사본들과 비교하면서 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경우는, 그가 입수한 사본이 12세기 것 하나뿐이었고, 자기 친구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사본은 마지막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여섯 절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틴 불가타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그 부분을 역(逆)으로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그가 번역한 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헬라어 사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잘못된 번역이 소위 '텍스투스 레셉투스'에는 오늘까지도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그 마지막 부분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도 역시 불가타를 대본으로 해서 수정을 가하였다. 그것이 인쇄에 붙여진 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1516년 3월 1일에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수 백 개의 오식(誤植)이 발견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많이 팔렸고, 그 제2판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초판(1516), 제2판 (1519), 제3판(1522)에 이어 제4판을 1927년에 냈는데, 그것은 히메네스의 성경이 공식으로 소개된 뒤의 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학자답게 자기 것과 히메네스의 것을 비교하여 다시 약 90여 곳을 수정하여 제4판을 낸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5판이 제4판과 대동소이하게 출판되었다. 그것이 1555년이었다.
결국 에라스무스 성경은 5-6개의 소문자 사본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메츠거의 평가에 의하면 비평적 가치에 있어서는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신약 성경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에라스무스 성경은 비공식적으로 베니스(Venice),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 바젤(Basle), 파리(Paris) 등지(地)에서 30여 종류나 출판되었다.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 성경이 출판된 후에 뒤를 이어서 많은 것들이 나왔지만, 결국 그것들은 다 에라스무스의 것을 몇 군데 고친 것뿐, 근본적으로는 이 저열(低劣)한 형태의 헬라어 성경을 재생한 것에 불과하다.
그 후에 그것이 어떻게 '텍스투스 레셉투스'(공인 성경)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불란서 파리의 유명한 출판업자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라틴식으로는 Stephanus)가 파리에서 세 번(1546, 1549, 1550), 제네바에서 한 번(1551)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의 초판과 둘째 판의 본문은 히메네스(Ximenes)의 것과 에라스무스의 것을 혼합한 것이고, 제 3판은 에라스무스의 제4판과 5판의 본문을 밀접하게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제3판은 매 쪽 난 외에 14개의 다른 사본들과 히메네스 성경의 읽기(reading)를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스테파누스의 제3판은 많은 사람에 의해서, 특히 영국에서, 헬라어 성경의 표준 본문으로 인정되었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친구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성경학자 테오도르 베자(Theodore de Beze, 1519-1605)가 1565년에서 1604년 사이에 적어도 아홉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10판이 1611에 출판되었다. 그는 보다 양질인 베자 사본(Codex Beza)과 클라로몬타나 사본(Codex Claromontanus)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하여 주(註)에다 언급했을 뿐, 본문을 수정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출판한 헬라어 본문은 스테파누스의 제4판(1551)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그 때까지 공인된 것으로 받아온 전통적 본문과 그것들이 너무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들이 보편화되어 마침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고착(固着)시키는 방향타(舵)의 역할을 했다는 일이다.
1611년의 [영어흠정역] 번역자들이 1588-9년과 1598년의 베자 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했으니, 베자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1624년에 라이덴의 야심적 인쇄업자 형제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e Elzevi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r)가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는데, 그것의 본문은 주로 베자의 1565년 판을 취한 것이었다. 그후 1633년에 제2판을 찍으면서 그 서문에다가 자랑삼아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에 의해서 수락된 본문" 즉 Textus Receptus라는 말을 적었다. 이렇게 해서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가 출판한 여러 판의 헬라어 본문이 신약 성경의 "유일한 참 본문"(the only true text)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그 뒤에 나온 판들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영어흠정역]을 위시하여 구라파의 주요 개신교 번역들이 1881년까지 그것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에 대해서 너무도 미신적인 존경을 바치는 나머지, 그것을 비평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마치 신성모독이나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5.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경의 출현
불과 5, 6개의 변질된 후기 소문자 사본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약 400년 동안 횡포를 부리고 있는 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학자들을 통하여 많은 귀중한 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사본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밀(John Mill, 1707),
벤틀리(Richard Bentley, 1720),
벵겔(J.A. Bengel, 1734),
웨스타인(J.J. Wettstein, 1751-1720),
그리스바하(J.J. Griesbach, 1775-1807) 등의 기초 공작을 거쳐서,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본문 비평을 시작한 사람은 락흐만(Karl Lachmann, 1831)이었다.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가 시내 산 사본을 발견한 이래 1841-72에 여덟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트레글러스(S. P Tregelles)가 1857-72에 역시 그의 헬라어 성경을 내었으며, 웨스트코트(B.F.Westcott)와 호르트(F.J.A.Hort)가 합작하여 1881-82에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이라는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확실히 텍스투스 레셉투스 시대의 종언을 가져왔다.
그 이후에 신약 성경 본문 비평학은 확고부동한 고지를 점령하였고 거의 완벽하다고 할 만한 비평판 원어 신약 성경이 출현하였다.
6. 본문 비평학적 견지에서 본 텍스투스 레셉투스
1)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그것을 맹종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으며, 비슷한 것이 많은 것 뿐이어서, 유독 그것만이 영감됐다거나, 그것만이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2)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아주 후기에 만들어진 소문자 사본 5, 6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비잔틴 형의 본문이다. 비잔틴 형의 본문은 4세기 이후부터 유행한 것이며, 2세기, 3세기의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인위적인 많은 변개(變改)가 발견되는 소위 훼손된(corrupted) 본문이다.
3)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에라스무스가 라틴 불가타를 역(逆)으로 번역한 부분(계시록 마지막 6절)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임의로 불가타와 비교하면서 수정한 부분들이 많다.
4)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4세기 이래 필사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잡다한 설명구나 해석을 첨가하여 팽창하고 길어진 본문이다. 1551년 로버트 스테파누스라는 출판업자가,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하여 절 구분을 하였는데, 확대되고 늘어난 본문을 절로 나누어, 절 수를 매겼기 때문에, 원래는 없던 본문에도 절 수가 붙게 되었다.
비평판 성경은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자연히 내용이 짧고 따라서 스테파누스의 절 구분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5) 권위 있는 고대 사본들이나 현대의 비평판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본문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거나 변개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원래는 짧던 본문에다가 사람들의 말을 첨가함으로써, 성경을 흐리게 하였다. 물론 보다 명백히 하려고 선의로 첨가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흠을 낸 셈이다.
6) [영어흠정역]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는 나머지, 그것의 대본이었던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권위가 있고 유일한 가치가 있다고 강변한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기도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누가 번역했든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귀한 것이다. 번역자의 실력에 따라 번역의 질적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아무리 잘된 번역도 100% 정확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어느 하나만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어째서 하필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만이 완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은 영국인이나 미국인 일부와 사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흠정역의 대본인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정확무오하다는 연역적 판단은 매우 졸렬하고, 사실과는 천리 만리 동떨어진 것이다.
7)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며,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많은 사본을 필요로 하는 지방에서, 자유분방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사견(私見)을 사본에 넣으며 필사했을 경우, 그 지방에는 원본과는 크게 상거가 있는 확대된 본문이 대거 유포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거쳐서 확대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이 오늘날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사본의 진위를, 수(數)를 가지고 측정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방법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를 따진다면, 예수님을 죽이자고 한 악한 무리의 수가 진리 자체이신 한 분 예수의 몇 백 배가 아니었던가! 진리는 수가 적어도 진리이다. 아니 수가 하나뿐이라도 진리는 진리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8) 비잔틴본문(Byzantine text, Majority text) 지지파의 거장으로 Dean Burgon, Z. C. Hodges 그리고 Farsta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도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Burgon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신판(新版)을 내려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인데, 그의 조사에 의하면 마태복음에서만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150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례로 나간다면 신약 성경 전체에서는 그 둘의 차이가 엄청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정확하고 믿을 만하고 그것들만이 하나님이 특별히 보존하신 본문이라고 주장하는가 말이다.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제1장, 제8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하신 것이며, 그의 각별한 돌보심과 섭리에 의하여 순수하게 보전된 것이며 따라서 믿을 만하다. 그래서 모든 종교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그것에다 호소하는 것이다.(필자의 사역)
이 교리를 만들 때(17세기 중반)에는 물론 텍스투스 레셉투스밖에 없었다. 그 후에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고, 본문 비평학이 발달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본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텍스투스 레셉투스 지지자들이 그 교리를 앞세워 가며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時代錯誤)가 아닌가.
사람이 만든 교리가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세 교회의 과오를 답습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감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흠하게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바로 그 무흠한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성경 어디에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유일무오한 성경이라고 했는가 말이다.
10) [하나님은 오직 한 성서를 쓰셨다(God Wrote Only One Bible)]라는 책을 쓴 레이(Jasper James Ray)는 162개의 시험 구절을 선발하여, 현대 비평판 헬라어 성경들과 현대 영어 성경 번역들을 비판하였다. 즉 그가 택한 162구절에 있어서 현대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나 영어흠정역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그가 택한 구절들이 현대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택한 162구절 중 31개에 있어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말은 결국, 어느 하나가 배타적으로 권위가 있거나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11)카슨(D. A. Carson) 교수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비잔틴 형 본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꼭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잊어버린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겨우 몇 개의, 비교적 늦은 시대의 사본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즉 비잔틴 전승을 나타내는 사본들이 수천 개에 달하는데 비하면, (너무 소수의 사본을 근거로 했다는 말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비잔틴 전승의 사본들을 근거로 했다는 것과, 그 자체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전승과 퍽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물론 사실이지만, 그 광범한 증거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 자체의 전승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한 본문 전승 안에 있는 가장 친근한 사본들끼리도 한 장(章 chapter)에 평균 여섯 개 내지 열 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만큼 사본들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서로 다르고, 따라서 어느 하나만을 지적하여 그것만은 무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변개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독 텍스투스 레셉투스만 홀로 권위가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12)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영어흠정역의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될 수 없다"는 명제의 말씀들(고후2:17; 마13:25; 계22:19; 신4:2; 잠30:6; 요10:35; 눅16:17 등등)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지지하는 성경은 무흠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른데, 그리고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역시 그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성립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역부족과 연약함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보관하지 못했고 또 사본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어서,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들이 하나 같이 불완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기에 일점 일획이라도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다. 사실 성경 사본들은 세속적 고(古) 문헌들에 비교하면 월등하게 정확도가 높다.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일지라도 교리를 바꾸게 할만큼 심하게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본문 비평학자들의 정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드디어 글자로 표현되었는데, 사람의 언어는 모두 그 구조가 다를 뿐 아니라 불완전하여, 여러 방언으로 기록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결코 서로 완전히 일치하거나 완전히 정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상=말씀이 여러 사본과 번역들 속에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보존되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보다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계속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기독교회의 매우 중요한 유산 중의 하나이다. 영어흠정역도 훌륭한 번역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본이나, 절대 무흠한 번역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답변1 :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유일한 원어성경(‘말씀보존학회’의 원어성경론)
* 성경원어문제에 대하여 극단적인 논쟁을 붙인 곳은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출간한 이송오목사님이라는 분의 '말씀보존학회'입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신학 자체를 대단히 멀리하려고 애쓰는 곳이기 때문에 신학 자료에 대하여는 거의 외면하는 편이지만, 질문이 있었고 또한 질문 내용이 성경 자체에 대한 것인데 이는 성경 위주로 믿겠다는 백영희목회연구회가 최소한 한번은 살펴볼 정도의 내용이겠다고 생각하여 간단하게 극단적인 양론을 함께 소개합니다.
한쪽의 소개는 질문자가 자료를 올리고 질문하셨기 때문에, 답변에 앞서 그 반대쪽 주장을 함께 올립니다. 교계에서는 수없이 반복되는 주장들이지만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찾는 분들에게는 무슨 외계에서 온 글들처럼 느껴질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 글들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한번쯤 마음 정리를 해 두시면 앞날에 마주칠 별별 신앙들을 상대할 때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1994. 4.
이송오목사님 - 말씀보존학회 대표
초대 교회 이후로 사탄은 수많은 거짓 신학자들을 일으켜서 성경을 변개시켜 놓고, 그 성경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여 왔다. 사탄의 추점Z들이 한결같이 변개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변증하며 그들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은 변개된 성경과 변개되지 않은 성경을 놓고, 어떤 성경이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냐고 할 때, 늘 변개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이들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소중함을 인지할 수도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없으므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조명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는 악한 세력들로부터 숱한 박해를 받았으며, 또한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주의 종들이 목숨을 잃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으로 큰 논란 없이 보존되어 왔으나, 신약성경은 A.D. 250년 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아니한 필로(Philo, B.C.20-A.D.50)와 오리겐(Origen, A.D.184-254), 또 그의 추점Z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변개 되었고, 그들에 의해 변개된 성경에서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퉤G 명을 받고 50권의 사본을 복사한 것이 확산되어 변개된 사본의 씨가 되었다.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사본에서 제롬이 라틴 벌게이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카톨릭 성경의 원문이 되었고, 이 변개된 사본들은 주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변개된 후 로마로 들어갔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본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으로 모두 4세기 때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연대는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50권의 사본이 제작된 연대와 같다.
바티칸 사본이 발견된 것은 1481년이었고, 시내사본이 발견된 것은 1844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두 사본이 원문을 전승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은 원문비평학적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바티칸 사본은 전통원문과 비교할 때 무려 5,788군데나 변개되어 있으며, 삭제시킨 부분도 상당 수 있다(마 19:9; 20:16; 20:22; 21:43; 23:19; 28:9, 막 6:11; 9:44; 9:46; 9:49; 10:21; 11:26; 13:14; 15:28, 눅 2:33; 4:4; 4:8; 4:41; 23:38, 요 1:14; 1:27; 3:15; 5:4; 6:69; 9:35, 행 2:30; 8:37; 9:6).
이 사본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481년 이후에야 그들의 성경 사본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초대 교회에서부터 1481년 이전까지 바른 성경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1400여년 동안이나 바른 성경이 없는 교회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켰으며,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렸겠는가? 더욱이 이들 사본에는 외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 두 사본을 근거로 1881년 영국의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희랍어 신약사본을 만들어 출간하였고, 독일에서는 이와 발맞추어 네슬(Nestle)이 1898년에 소위 네슬(Nestle)판을 출간했다.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사본에서 영어 개역본(RV, 1884), 미국표준역본(ASV, 1901), 개역표준역본(RSV, 1952), 새국제역본(NIV, 1978) 등이 나왔고, 네슬판과 미국표준역본(ASV)과 중국 성경에 힘입어 <개역한글판성경>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 성경 변개자들은 최근에도 상업적 목적으로 새미국표준역본(NASV), 새개역표준역본(NRSV) 등을 내놓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의 원문은 사도 시대 이후 주로 소아시아의 지역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산재되어 있었고, 이 사본들이 신실한 성도들의 손에 의해, 믿는 사람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안티옥에서 발칸 반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유럽으로 옮겨졌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들어갔다. 이 원문은 악한 세력들의 성경 변개 시도와 갖은 박해 속에서도 한 번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옴으로써 전통원문(Traditional Text)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 사용된 이 성경은 A.D.157년 북부 이태리 교회에서, A.D.177년에는 프랑스 골 교회에서, A.D.200년 경에는 시리아 교회에서(Peshitta) 사용되었고, 특히 A.D.312-1453년까지 비잔틴 제국 기간 동안에 희랍 교회에서 1천 년 이상 사용되었으며, 에라스무스(Erasmus, 1522), 콜리네우스(Colinaeus, 1534), 스테파누스(Strphanus, 1550), 베자(Beza, 1598), 엘지버(Elzevirs, 1633) 등을 통하여 표준원문(Textus Receptus)으로 편수되었다. 이 원문에서 독일어로는 종교개혁 성경인 독일 <루터성경>이 1534년에 나왔고, 영어로는 <킹제임스성경>이 1611년에 나왔다.
<개역한글판성경>은 외국 선교사들이 와서,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실감하고, 원문비평학적 지식이나 필사본 증거에 대한 식견 등이 미비한 상태에서 만들어 낸 성경이며, 당시 사회적 형편에 비추어 볼 때 그나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관련 인사들의 막중한 사명감과 열정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믿어진다. 이 성경 중 특히 1938년 판이 1956년 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으로 성경의 자리를 지켜 왔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어디까지나 바른 성경이 나오기까지 임시적 성경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성경 번역자가 나오지 못함으로 인해서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 시점에서 이 성경의 미비함을 구태여 들추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밖에 없는 성경이었기에 64번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성경 독자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부득이 쓸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있었다.
한편 대한성서공회는 이 성경을 대체시켜 볼 의욕을 가지고 1977년 개신교와 천주교의 합작으로 공동번역을 내놓았으나, 그것은 차마 성경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여 그들 스스로 <공동번역성서>라 이름붙였고 지금은 천주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쓰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성서공회가 다시 시도하여 1993년 <표준새번역>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 역시 많은 질타의 채찍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바른 성경 없이는 바른 신앙이 없다. 성경 교리를 재는 잣대(Cannon)인데 틀린 잣대로는 교리를 올바로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어떤 조명도 주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개혁을 이루는 것은 변개되지 않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책"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삼상 3:1,7,19,21). 또 성령님은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요 16: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격하시킨 알렉산드리아사본에서 펴낸 변개된 성경들(눅 2:33, 행 8:37, 딤전 3:15),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로 격상시켜 번역한(단 9:27, 사 14:12,15, 계 6:2) 변개된 성경들로는 그분의 뜻을 이루지 않으시며, 그런 성경으로 선교하는 일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경을 보급하는 일도 칭찬하지 않으시며, 그런 성경을 통하여는 조명을 주지도 않으신다. 그런 성경이 성령의 칼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으로 기록된 절대무오한 성경이다. 그러나 어떤 성경이 그런 성경인가? 당신은 그런 성경을 지금 손에 들고 있는가?
이 성경을 번역하게 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하자는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이다. 1988년 사복음서를 <새성경>이란 명칭으로 출간한 것을 시발로 하여 1990년 신약성경 초판을 출간하고 1992년 제4판을 출간했다. 본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신약은 제5판이며 구약은 초판이다.
구약의 번역은 처음부터 히브리 맛소라 원문을 영어로 가장 잘 전수한 <킹제임스성경>에서 번역하였고, 신약은 처음에 희랍어 표준원문에서 직역했으며, 제3판을 <킹제임스성경>과 대조하면서부터 <킹제임스성경>에 철저하게 어휘를 맞추었고, 구약의 어휘는 히브리 맛소라 원문과 비교, 투영시킴으로써 히브리어, 희랍어,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불가피하게 생길 수 있는 언어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굳이 번역의 원칙이라고 내세워 틀을 먼저 짜놓고 끼워 넣는 식의 번역을 탈피하였고, 표현기법에 있어서 이전 것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선택하였다. <개역한글판성경>으로 익숙해져 버린 문화적 및 전통적 통념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성구사전(Young's Concordance)의 어휘만을 획일적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본 성경의 어휘로 새로운 성구 사전을 만든다는 자세를 위하여 어휘의 통일성과 더불어 의미의 전달에도 중점을 두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므로 빛이 있게 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한글로 옮겨져서 발간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루어 주신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마지막 때에 이 성경이 나온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은혜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성경은 양날이 시퍼렇게 선 성령의 칼이다(히 4:12). 이것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장난감 칼과도 비교가 안되며, 재림시에 주님의 입에서 나올 그 예리한 칼이다(계 19:15).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칼로 무장하는 역군이 될 때 악한 영적 세력들은 자취를 감추게 됨을 성도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든 희랍어든 영어든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모두가 외국어이다. 외국어 성경들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어로 잘 번역된 한글 성경만이 쓸모가 있는 것이며, 그 성경만이 하나님의 절대권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삭제되고 변개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절대무오한 말씀이 될 수 없기에, 우리는 이제야 한글로 보존된 성경을 갖게 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우리말로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하였는지 주의 깊게 살펴 봐 주었으면 한다.
이 성경이 나옴으로 해서 지금까지 <킹제임스성경>을 인용하여 기록된 수많은 문헌들이 제한받지 않고 번역되고 출판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런 책들이 나와서 성도들의 손에서 읽혀질 때, 자유주의 신앙도 사라지게 되고, 거짓 목사, 학자들도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 비로소 이 땅에 그렇게 바랐던 참다운 개혁의 물결이 일 것이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될 것이다.
말씀보존학회 성경 교열위원들의 한결같은 열정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또 성경침례교회 성도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또 국내외에 계신 신실한 성도들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이 성경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석 성경을 준비하여 본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을 설명함으로써 기존 성경 주석들이 범해 놓은 오류들을 신학적으로 바로잡아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성경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읽혀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4,35)
1994. 4.
말씀보존학회 대표
이 송오 목사 씀
답변2 : ‘텍스투스 레셉투스’ 원어성경 논쟁에 대한 자료를 읽기 전에 참고하셨으면
1. 신학적 연구는 멀리하는 편이지만, 원어성경 논쟁은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신학적 접근방식과 자료에 대하여는 아주 조심하고 멀리하는 편입니다. 신학은 신학자가 학자로서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의 진리에 대해 수없는 가설과 이설을 만들어 낸 세계이기 때문에 그 해독은 지극하고 그 유익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영희신앙노선은, 성경 하나로 서적의 전부를 삼고 성령 한 분에게 지도받아 자기 현실에서 인도하는 대로 열심히 실행하는 것으로 전부를 삼고 있습니다. 이 입장은 변할 수 없고 변할 리도 없습니다. 어린 신앙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첫 걸음이자 그가 걸어갈 평생 신앙의 전부라고 단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믿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신앙에 전념하는 사람에게 신학이 신앙의 중심인 줄 아는 친구나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성경 밖에 있는 여러 말로 혼동을 주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두고는 몇 가지 추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신학적 연구나 논쟁을 피할 수 없다면, 꼭 핵심적인 것을 중심으로 최소한에 그쳐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성경이 옳고 바른 것이라면, 그다음부터는 성령 한 분에게 매달려 깨닫기를 구하고 또 가르쳐 주시는 것은 아는 대로 실행에 힘쓰는 것이 우리 평생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전면으로든 부분으로든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형편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질문과 추가되는 자료는 예를 들면 그런 것입니다.
피할 수 없이 신학적 주제를 접촉해야 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핵심적 내용 1-2개를 꼭 붙드시고 그다음 그 내용에 집중하시되, 만일 확실하게 판명되는 면이 보이면 그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야 합니다. 뚜껑까지 열어보고 그것이 정화조통임이 확실하다면 얼른 닫아버릴 일이지 그 통 안으로 잠수해서 살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신학은 정화조 통 속에다 연구실을 차리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똥통인데. 이상한 것은 그곳에 오래 머물수록, 그곳에 많이 적신 사람일수록 그 냄새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그 작업을 직업으로 하는 분들이 계셔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편입니다. 오늘 신학을 이렇게 단정했다가는 맞아 죽기 좋으나, 이로 인해 살아날 사람이 더러 있고 이로 인해 그런 곳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더러 있다면 마땅히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외쳐야 할 일입니다.
3. 우선, 이번 자료를 올린 분, 또 관심있는 분들에게 답변에 앞서 과제를 드렸으면 합니다.
① 우선 위에 소개한 두 자료를 보면서 스스로 평가를 내려 보시기를 권합니다.
모든 질문에 대하여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우선 질문하시는 분을 위주로 답변을 하되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찾는 다른 분들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료를 올리신 분만 아니라 누구든지 관심있게 윗글과 위에 제시된 자료를 관심있게 읽으시는 분들에게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답변에 앞서 과제를 하나 드렸으면 합니다.
원어성경 중 하나인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두고 이번에 제시된 두 개의 상반된 글을 읽으면서 어느 글이 옳고 어느 글이 틀렸는지를 판단해 보셨으면 합니다. 한쪽 글이 옳다면 다 옳은지 아니면 일부는 옳고 일부는 틀렸지만, 전체적으로는 한쪽 글이 옳은 것인지? 또 반대쪽 글은 다 틀렸는지, 아니면 결론적으로는 틀렸지만 어느 부분은 옳은 점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양쪽 글 전부가 틀렸고 제 3의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지?
② 평가하실 때, 우선 한쪽의 글만을 읽어보시고 평가한 것이 자신의 실력입니다.
두 글 중, 한쪽 글만 먼저 읽으시고 그 글 안에서 그 글의 모순점을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항상 양측 주장을 다 들을 수 있다면 평가하는 데에는 더 유리하겠지만 한쪽 주장이 수년간 진행 된 후 다른 주장이 반론될 수도 있고, 양쪽 주장이 함께 나왔지만 자기는 한쪽 주장을 접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읽으신 글이 100% 다 옳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으나 그 글에 일부 문제가 있다면, 다른 사람의 반론에 의지하지 말고 그 사람이 그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내놓는 그 자료와 논리만을 가지고도 그 사람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오늘 복잡한 세상에서 간단 명료하게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쪽 글만을 읽고 평가가 끝나셨다면, 두번째 글을 읽으시되 그 두번째 글에서도 그 글 자체만을 가지고 평가를 해 보셨으면 합니다. 물론 앞서 읽은 글에서 들은 내용이 있어 선입적으로 작용이 되겠지만 최대한 그렇게 해 보셨으면 합니다. 신학논쟁 뿐 아니고 교회 생활 중에서 우리는 한번씩 피할 수 없는 양극단 속에 들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해 보신다면 아마 생각못한 세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번 글 중에서는 '말씀보존학회'측이 '텍스투스 레셉투스' 원어성경만이 옳다고 먼저 주장했기 때문에 아직 두 글을 읽지 않았다면 두번째 글을 먼저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③ 양쪽 주장을 살필 때는, 발표된 시점도 중요합니다. 뒷소리가 옳은 듯하기 때문입니다.
원어성경 중 하나인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두고 양쪽 극단적 주장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신학논쟁입니다. 두 글 중 어느 한쪽 글만 읽은 사람이라면, 그 글을 적은 사람의 주장에 다 동조할 수밖에 없도록 자료가 제시되고 또 논리적으로 이해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글을 함께 놓고 보면 금방 어느 쪽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는지 또 어느 쪽의 자료 제시에 문제가 있는지 파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실 것은, 어느 글이 먼저 나왔으며 어느 글이 뒤에 발표되었는지가 또한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면 평생 논쟁을 하면서도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정도로 자료와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④ 재차 당부하지만, 위에 올린 자료 정도에서 원어성경론은 충분했으면 합니다.
또한 양쪽 글을 읽으시면서 이왕 읽게 된 글이므로 몇 가지 상식적으로 알아 둘 내용도 눈여겨 봐 놓으시면 평생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 양측에서 제시한 정도의 자료라면 원어성경학을 두고는 나올 만한 내용이 거진 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두 글에 담은 내용만 해도 정화조에 가득찬 오물입니다. 정화조는 그 뚜껑을 열어보지 않고도 확인이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두 글의 제목만을 보고도 그 속에 내용은 굳이 열어보지 않고 알아야 좋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시한 두 글을 평가하자는 것은 뚜껑을 열어보고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두 가지 신학 자료나 논쟁을 살피고 나면, 이후에는 뚜껑만 봐도 그냥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거름통인지 정화조통인지 하수구통인지.... 뚜껑을 열어놓고 살피다가 그 속에 몸을 잠그는 분은 없었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주의깊게 양쪽 글을 살피신 분이 있다면, 양쪽 글들에 언급된 내용을 좀더 깊이 확인하기 위해 성경신학 관련 서적들을 참고했으면 하는 충동을 자연스럽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계실 때, 자기 뒤에서 정화조 통 속으로 꼭 잠겨봐야겠냐고 말리는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생각해 주셔서 그냥 참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