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계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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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4 15:26
(02.01.01.초안, 03.05.22. 1차교정, 04.03.29. 최종 출간본문)
계시론
1. 계시의 의의
2. 계시의 종류
3. 특별계시
1. 계시의 의의
(1) 계시의 정의
계시는 ‘열계(啓)’ ‘보일시(示)’라는 단어이니 덮어 감추었던 것을 열어서 꺼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계1:1). 하나님에 대한 세계는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시면 인간이 알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공개하지 않으면 인간이 스스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법은 2가지이니, 일반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자연계시(롬1:19-20)와 믿는 사람에게만 알려주시는 성경과 영감이라는 특별계시가 있습니다(딤후3:16).
인간이 아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공개하고 또 알도록 하니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리서 본론의 첫 내용은 ‘계시’를 다루게 됩니다.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계시는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계시 중에서도 일반 자연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것을 제외하고 성경으로 요약해 주신 특별계시이니, 앞으로 ‘계시’라고 표현할 때는 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우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
① 논의 자체가 필요 없는 문제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는 모든 조직신학서에서 대단히 비중 있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누가 물어 보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 자문자답하게 되어 있고 또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향해 늘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조직신학자들이 주로 상대하는 부류가 불신자 철학가들이다 보니 이 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폐단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행17:21-22).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계시’라는 방법을 내놓으셨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전혀 알 수 없으므로 안 믿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불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도뿐입니다(고전1:21).
② 하나님을 아는 길은 ‘계시’
인간과 하나님은 그 존재하는 형식도 활동 범위도 또 인식체계도 아주 다릅니다. 마치 눈이 마음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했으니 그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세상 모든 종교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시도’를 해보았다는데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는 기독교뿐이고, 기독교 외에는 전부 하나님을 찾으러 나갔다가 하나님은 찾지 못하고 착시현상으로 엉뚱한 허깨비를 봤든지 아니면 추론으로 여러 가지 신들을 만들어 본 것입니다(행17:23).
③ 일반 종교는 수제품
계시론을 바로 알게 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믿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알리시므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전부가 인간이 만든 수제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한 지역에서 한때 통용되는 정도의 소규모 종교는 미신이라 하고, 여러 시대를 걸쳐서 많은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한 다국적 기업 정도가 되면 종교라고 합니다. 수도 없는 미신 중에서 시대와 인심에 맞아떨어진 몇 개만 종교가 되는데, 종교가 되고 나면 지방 대리점들이 그 동안 익힌 경험으로 독자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이름이 나타납니다. 그런 이름은 과도기에 붙는 이름인데, 사업이 번창하면 원불교처럼 종교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미신들 속으로 다시 떨어지기도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없는 미신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으므로 그 파악이 대단히 복잡하지만, 계시라는 시각으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전부 사람의 추론입니다. 사람의 착상과 고안으로 만든 것입니다. 미신이든 종교든 제대로는 힘들여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알려주지 않으시니까 마지막에는 자기 소원과 취향과 추론을 뒤섞어 하나님께로 가는 도로건설에 나선 것입니다. 그 도로는 사람의 피땀이 들어가 있으므로 전부 유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만일 무료로 운영하게 만든다면 그냥 휴전선 안에 방치된 도로처럼 폐허가 되는 것이 일반 모든 종교들입니다.(사44:15-17).
(3) 계시와 인간의 자세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는 세계, 즉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계시를 대할 때 우리가 가질 자세와 의무는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신앙’이라는 단어와 같은데 순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인간이 할 일은 오로지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리 알고 살면 되고, 주일을 지키라면 그리 알고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은 12가지 속성을 가진 분이라고 성경에 기록해 주시면 그렇게 알고 외우고 또 그런 분으로 상대하면 됩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든 나의 생각, 나의 취향, 나의 판단은 완전히 없애고, 오로지 말씀하시면 그렇게 알고 따르는 것을 ‘믿음’이라 ‘신앙’이라 합니다(히11:3).
따라서 ‘신앙’이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을 상대할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신앙’이라고도 말하는 이 믿음 아니고 다른 방법은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믿음 외에 인간의 어떤 의견이라도 섞었다 하면 그 순간부터는 정답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삼삼은 구(3 X 3 = 9)’ 라는 구구단을 가르쳐 주면 무조건 그렇게 알고 외워야 하지 ‘9’에다 ‘1’을 더하든 ‘2’를 더하든 더하면 더하는 순간 정답은 나올 수 없습니다. 더하게 되면 답이 ‘9’로 나오지 않고 ‘3 X 3 = 10’이나 아니면 ‘3 X 3 = 11'로 나오게 됩니다.
인간 지식을 상대할 때는 의문도 가져 봐야 하고, 제안도 해보고, 대안도 내보고, 반론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일반 종교를 상대할 때는 신앙만 가질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을 섞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크게 속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대하면서 만일 신앙 대신에 인간 지식으로 상대한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계시를 접하고도 그 계시를 외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 지식을 많이 배운 사람의 불행이 큽니다. 머리 속에 한번 넣어둔 인간 지식이 하나님 지식을 대할 때 불쑥 나타나서 별별 소리를 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말이 많은 사람은 자기 지식 때문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고, 세상 배운 것이 없어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마11:25)
2. 계시의 종류
계시의 종류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므로 일반계시라고도 합니다. 특별계시는 우리 믿는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주신 구원도리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계시론’은 주로 특별계시가 그 주 내용입니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설명해야 할 분량이 많으므로, 계시론 전반을 설명하는 이 앞부분에서는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아주 간단하게 특별계시를 설명한 뒤, 뒤에 따로 한 항목을 만들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 주시는 방편에 따라 -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① 자연계시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 정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세상 자연에 속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계십니다. 자연을 통해 알린다고 해서 ‘자연계시’라고 하고, 이 자연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알리시는 것이라 해서 ‘일반계시’라고도 합니다.
▪ 범위
자연계시의 범위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자연만물과 인간의 심신과 그 역사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자연’이란 자연 만물의 구조, 모습, 동작 전부를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특히 인간의 심신과 역사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은 영물이 아니고 물질이며 이는 자연에 있는 동물의 마음과도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신의 구조와 활동 및 인간의 지난날의 모든 역사까지도 전부 자연계시에 포함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영물이라고 보는 일반 이분론에서도 마음의 활동을 자연계시에 포함을 시키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 영물이라면 불신자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계시에 포함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계시의 의미는 불신자도 알 수 있는 물질계 만물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조직신학 제3장 ‘인간론’의 ‘인성 구조'에서 또 다른 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어쨌든 자연만물은 인간의 심신에 비하여 외부적으로는 그 범위가 넓고 그 종류가 많으므로 대개 자연만물을 통해 아는 것이 인간을 보고 아는 것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심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신 자연계시의 거의 전부라 할 만큼 그 범위가 넓고 그 종류가 많다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역할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는 인간이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가림 없이, 정확하게, 또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세상은 변질되었고 또 인간의 시력자체가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충의 짐작 정도입니다.
따라서 타락 후에는, 구원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오로지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고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들에게 보조 역할만 하게 되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특별계시가 없으므로 자연계시를 통해서 무엇이든 대충 짐작만 할 뿐이고, 구원에 도움 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자연계시가 특별계시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또 모형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특별계시가 없으면 절대 안 되고 또 자연계시가 없어서는 많은 불편과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② 특별계시
자연계시에 비하여 특별계시는 믿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특별계시는 인간 지식을 초월한 것이어서 인간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고 또 알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특별계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성경으로 기록하여 주신 ‘문서계시’와 신앙양심을 통해 성령이 감화와 감동으로 은밀하게 알려주시는 ‘은밀계시’ 또는 ‘영감계시’가 있습니다.
▪ 문서계시 - 성경
롬16:26-27,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문서계시는 ‘성경계시’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신 계시입니다. 천하에 쌓아두어도 쌓을 곳이 없는 무한한 내용을 신구약 66권에 간추려 주셨습니다. 이 내용은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도록 조절하였으며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데 없으면 안 되는 내용들입니다(요20:30-31, 21:25).
문서계시는 일단 66권 성경에 기록된 내용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성경 기록 외에 따로 기록해 주신 문서계시는 없기 때문에 그것이 설교나 주석으로서가 아니고 만일 성경권위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이단에 속합니다. 기독교의 모습은 교파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절대로 달라서는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다르면 곧 바로 이단이 되거나 타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는데, 그 중에 첫째가 바로 66권 성경 이외에 다른 성경 즉 다른 문서계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 은밀계시 - 영감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은밀계시는 믿는 사람 마음속에 개별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문서계시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행동 원칙이라고 한다면, 은밀계시는 그 원칙을 따라 각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개인 각자에게 구체적으로 따로 명령하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주로 진리라고 표현하고, 성령의 개별 명령은 영감이라고 표현합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적용되면서 동시에 변치 않는 이치라는 면을 강조해서 표현했고, 영감은 진리에 따라 각 개인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개별적으로 알려 주신다는 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교리로 요약을 할 수 있고 영감은 그 사람 본인만 알도록 은밀하게 역사합니다.
(2) 받는 형태에 따라 - 하나님지식 인간지식
① 지식 구별의 필요성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알려 주시느냐에 따라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자연계시로 알리시든 특별계시로 알리시든 그 방법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인간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연계시로 알려주시든 심지어 성경으로 알려주시든 자기가 자기 생각으로 지식을 선별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지식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지식’이라 하고, 두 번째 경우는 ‘인간지식’이라고 합니다. 지식의 출처와 판단의 주체를 두고 분류하는 법입니다(딤전4:6-7).
이렇게 분류를 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은 무조건 필요하고 좋다는 지식제일주의가 세상에 창궐하여, 교회 내에도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인간이 만든 지식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9:27). 지식싸움에 이겨서 하나님지식으로 무장을 한다 해도 그 지식대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지식싸움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므로 바른 복음운동은 찾아 볼 수도 없다 할 만큼 되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 신학조차도 그 목표는 성경지식이지만 그 내용은 인간지식이 너무 침투하여 심지어 성경까지도 하나님지식으로 대하지 않고 인간지식으로 취급하고 인간지식으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지식과 인간지식으로 모든 지식을 이분하여 이 두 지식의 혼동을 막는 것이 교회 보수의 첫 걸음이고 또 일반 성도의 신앙생활과 일반생활에서도 그 중요성은 너무도 크다 하겠습니다. 지식은 넘쳐나는데 바른 교훈을 찾아 갈급한 심령으로 천하가 기갈을 당한 때입니다.(암8:11)
② 인간지식
타락 전에 인간이 가진 지식은 전부 하나님지식이었습니다. 자연 만물을 만들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또 그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타락 전에 사람이 가진 지식은 전적 하나님지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연 속에 살고 있는데도, 그 자연을 보고 그 자연을 아는 지식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대로 알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으므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은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자기 두뇌로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여 자연을 보며 자연에 대한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만들어 인간에게 넣어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지식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 지식의 이름은 모든 사람이 가장 알기 쉽도록 ‘인간’지식이라고 했지만, 그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 대신 악령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 노릇을 하며 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사람에게 지식까지 넣어주고 있으니 이는 악령의 지식입니다. 악령의 이 지식은 본질적으로 다 거짓입니다.(요8:44)
선악과로 예를 든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사약으로 보였습니다. 선악과는 ‘사약’이라고 보여지고 느껴지던 그때 그 지식이 바로 하나님지식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담이 오로지 이 한 가지 지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생활이 단순하고 맑고 깨끗했습니다.
그러던 아담에게 선악과는 하나님이 되는 ‘특효약’이라며 또 하나의 다른 지식을 가지고 왔으니 바로 악령이었습니다. 물론 뱀을 뒤집어쓰고 나왔지만 그 속에는 악령이 하나님지식 말고 또 다른 지식을 가지고 아담에게 들이밀었습니다. 그 지식을 거부했더라면 아담 이후 오늘까지 우리는 하나님지식 하나만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므로 죄로 인하여 발생되는 더러움도 복잡함도 어두움도 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롬5:12).
뱀이 하와에게 ‘먹어보라’고 한 것은 하나님지식이 아닌 지식도 가져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있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자 아담이 그만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지식, 곧 하나님지식 이외의 지식을 받아들여 그 지식의 눈으로 다시 한번 선악과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그에게 ‘독약’이 아니고 보배 중에 보배고 특효약 중에 특효약으로 보였습니다. 지식이 바뀌자, 하나님이 만든 자연만물 전체는 이전과 꼭 같은데도 달리 보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변질되었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접하는 자연 만물 전체를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은 막히게 되고 이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짐작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상태로 오늘까지 생활해 오고 있습니다.(창3:6)
참고로, 인간지식을 크게 2가지로 나눈다면
인문사회지식이 하나 있고, 이공과학지식이 하나 있습니다. 인문사회지식은 그 자체도 틀렸고 그 사용도 잘못되었으며, 이공과학지식은 그 지식 자체의 이치는 맞는데 그 사용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에 것은 완전거짓말이고 뒤에 것은 반거짓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지식
하나님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을 자기 지식으로 삼았을 때를 말합니다. 자연만물을 만들어놓고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 자연계시를 관찰한 끝에 진화론을 내놓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만들고 또 보여주시는 자연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봤다면 그 지식은 하나님지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적으시고 우리에게 넘겨주신 특별계시입니다. 그 성경을 신신학자들도 읽고 보고 그 성구들을 수도 없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성경에 대하여 가진 지식은 하나님지식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인용하는 그 단어나 표현이 성경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은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고 또 성경은 예수님만 구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들이 가진 지식은 비록 성경에 관한 지식이라도 하나님지식이 아니고 인간지식이 됩니다.
지식을 하나님지식과 인간지식 두 가지로 나누는 이유는, 첫째 그 지식 자체의 권위와 가치와 정확성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어느 지식을 주인으로 삼고 어느 지식을 점8로 삼아 대하느냐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평생은 신앙건설을 위해 존재합니다. 신앙건설은 행위에서 나오고, 행위는 지식을 따라 갑니다. 하나님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지식으로 행동하여 하나님을 향할 것이고, 인간지식을 가진 사람은 인간지식으로 행동하여 결국 멸망할 인간을 만들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이요 하나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따라서 지식을 먼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호4:6)
④ 두 지식
▪ 두 지식의 필요성
타락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지식만 필요했고 그것만 가지면 아무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오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지식과 함께 인간지식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땅을 파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먹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기본으로 더해 주신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을 인간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에덴동산에서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 타락한 후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지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에덴동산에서는 새로운 것을 하나 알고 가져도 하나님께서 먼저 알리시고 넣어주셔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뒤에는 하나님께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시고 그 대신 인간이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노력하고 움직여서 이런 저런 지식을 주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타락 후 세상에 나온 지식들은 전부 인간지식이라고 일단 분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그 인간지식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노력해서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이지 타락한 후 존재하도록 세상에 배정해 두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가지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은 것을 인간이 만들어 가진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는 말은 성경의 폐기를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타락한 우리에게 인간지식이라는 것은 필요하다는 점을 먼저 확실히 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을 어떻게 상대하고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마4:4, 딤전4:4).
▪ 두 지식의 위치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지식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 복잡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지식을 가져야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세상환경이 바뀌었으므로 하나님지식과 인간지식 이 둘을 어떻게 상대하고 사용하느냐는 것이 인간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첫 조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지식은 주인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지식은 점G 자리에 서야 합니다(눅16:13). 최종 판단을 하고 명령을 하는 것은 하나님지식이 하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심부름을 하는 것은 인간지식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질 두 지식의 위치입니다. 만일 이 위치가 잘못되면 그 사람은 지식 때문에 반드시 그 뒤의 행동은 볼 필요도 없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가 중심에 서고 도덕이 점G 위치에 선다면, 그 나라는 돈벌이 되는 것을 위해서는 무조건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도덕이 주인자리에 서고 경제가 점G 위치에 선다면, 돈벌이가 된다고 무조건 버는 것이 아니고 벌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지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사용하는 것도 경제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용할 곳이면 있는 대로 다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가 중심에 서면 도덕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고, 도덕이 중심에 서면 경제가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지식이 중심에 서면, 듣지도 말아야 할 인간지식도 있고, 듣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 인간지식도 있고,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인간지식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지식이 중심에 서면 예수님만 믿어야 천국 간다는 성구는 번역을 새로 해야 할 것이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구는 한도 없이 사용될 것입니다. 인간지식이 중심에 서면, 하나님지식은 완전히 해체를 당하고 그 중에 몇 대목은 징발되고 나머지는 폐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말은 성경의 폐기를 의미합니다.
▪ 두 지식의 가치
하나님지식은 우리를 성화시켜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인간지식은 세상 살아가는 기간에만 일부 이용될 뿐입니다. 인간지식은 오늘은 맞고 내일은 틀렸고, 여기서는 맞고 저기서는 오류가 되고, 그 자체는 맞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단계에서 전부 우상이 되거나 하나님과 맞섬으로 자멸하게 되는 지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지식은 진리요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인간지식은 거짓이요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인간지식에 가치성이 있다면 하나님지식에 점L 되어 붙들려서 이용당할 때, 그 이용가치로서만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채소의 가치는 그것이 사람에게 먹혀 사람의 피가 되고 살이 될 때 가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꼭 같은 채소가 소에게 들어가면 소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채소 자체의 가치는 따로 계산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지식이 그렇습니다. 인간지식은 타락한 세상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냥 두면 그렇게 굴러가다가 마지막에 다 불태워 쓰레기처리가 될 것이지만, 만일 세상이 계속되는 기간에 하나님지식에 붙들려 종노릇을 하게 되면 그때는 사람에게 먹힌 채소와 같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실력이 되거나 활동이 됩니다.(고후5:4)
▪ 두 지식의 사용기간
하나님지식은 개인이 죽든 세상이 끝나든 상관없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지식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인간지식은 오늘 이 땅 위에서만 존재하다가 세상 마지막이 되면 아담의 타락 이후 변화된 모든 환경과 함께 영원히 제거됩니다(고전13:8).
3. 특별계시
(1) 문서계시 - 성경론
계시를 가장 일반적으로 구분할 때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눕니다. 자연계시에 비하여 특별계시는 믿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특별계시는 인간 지식을 초월한 것이어서 인간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고 또 알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특별계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성경으로 기록하여 주신 ‘문서계시’와 신앙양심을 통해 성령이 감화와 감동으로 알려주시는 ‘은밀계시’가 있습니다.
조직신학의 계시론은 ‘특별계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계시론의 본론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① 성경의 정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문서로 기록하되,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확정지어 주셨으니 이를 성경이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표준입니다.
② 성령의 성경 기록
▪‘유기적 영감’의 기록
성경을 기록한 분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성경을 기록할 때는 사람을 통해서 기록했는데 성령이 사람 속의 자기의식을 무시하고 펜처럼 사용했다는 ‘기계적영감설’이 있고, 또 하나는 성령이 성경을 기록하는 그 사람의 의식을 무시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의식을 통하여 기록하도록 했다는 ‘유기적영감론’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견 중에서 유기적영감론이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이 하나님 같은 인격자를 만드는 것이고 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자유성입니다. 이 자유성 때문에 인간에게 타락도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시는 일도 있었고 지금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는 일에 그 사람의 평생이라는 기간을 통해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하도록 두고 보시는 것이 다 자유성 때문입니다. 자유성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유기적 영감으로 역사했으며 또한 성경의 모든 기록에서도 이를 볼 수 있습니다.(벧후1:21).
▪ ‘축자적 영감’의 기록
성령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경 내용의 어느 범위까지 영감으로 기록했는지를 두고 신신학의 반론은 항상 있었습니다. 원래 성경기록은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교훈 영감설’과 ‘부분 영감설’이라는 이단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훈 영감설은, 성경으로 가르치려는 사상만 성령이 성경기록자에게 영감으로 알렸다는 학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진리지만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동원된 여러 표현과 단어들은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성경기록자들이 알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의 표현과 단어들은 오류가 많다는 주장입니다.
부분 영감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영감으로 기록되어 정확무오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성경 기록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기록하여 여러 오류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느 부분이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어느 부분이 기록자들이 주관으로 기록한 것인가? 인간이 생각할 때 모순이면 기록자의 주관기록으로, 또 인간이 생각할 때 수긍이 되면 성령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현대 과학의 발달과 인문주의의 창궐로 인하여 성경에서 비과학적이거나 반문명적인 것 또는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은 전부 부분 영감설에 의하여 성경 기록자들의 주관적 기록이라고 분류되어 성경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 대세입니다.
성경은, 다 기록하려면 천하에라도 둘 수 없는 양이지만 우리 구원에 필요한 내용만 간추려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기록해 주셨으니 성경 내용은 그 표현까지 그 단어 사용까지 그 문맥과 전체 흐름까지, 어느 한 부분도 인간 단독의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가 전부 성령으로 기록되었으니 이를 ‘축자영감론’이라고 합니다.(마5:18)
③ 성경의 특성
▪ 권위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발표되었으나, 발표된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지만물은 그 진리로 움직이고 마지막에 그 진리로 불에 타서 없어지고 또 그 진리대로 된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을 만들고 다스리고 처리하는 인간의 주격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진리를 통해 진리로 나타납니다. 마치 전선을 따라 전선 안에서 역사하는 전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는 그 한 말씀 한 말씀 앞에 엎드려 하명을 기다리되, 성경은 명령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순점; 하되 우리의 목숨도 평생도 또 마음 하나 행동 하나도 그 말씀으로 산 것만 영생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집니다(히11:3).
신앙생활에 이 권위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할 몇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 ‘성경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책’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담고 있는 서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신앙이 어린데 어린 신앙은 성경‘책’을 조심해서 상대하는 자세와 태도 없이 성경 ‘권위’를 바르게 상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어리면 어리기 때문에 성경을 담고 있는 성경‘책’까지도 조심해서 대하는 것이 유익하고 만일 자신의 신앙이 장성했다면 어린 신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세상에 있는 것 중에는 성경‘책’을 제일 조심해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성경 번역에 있어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진리로서 권위성을 가지므로 번역하면서 첫째 조심할 것은 정확성입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뜻이 같다면 그 표현을 성경이 가지는 권위성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번 확정된 번역은 전반적인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일부 오류 때문에 성경 전체를 재번역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한번 번역된 것은 그 표현을 변경하지 않고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상적으로 번역된 성경에 만일 문제점이 지적된다면 이는 사실상 오류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애매하거나 약간 거리감이 있는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새로 번역을 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해석을 통해 그 번역문의 원뜻을 바로 알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첫 번역이 서툴렀다 해도 성경 표현은 성경 전체에 의하여 그 의미가 새로 형성되므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참고로, 언어는 생물과 같이 변동과 변화가 많기 때문에 그 변하는 언어 환경을 따라 새로운 기준에 맞는 번역을 하려면 성경의 권위성을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첫째로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령이 최종 권위입니다.
성경은 인간세계를 완전히 초월한 권위를 가집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이 세상과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과 인간은 말씀이 없는 데에서 만들었고 그것들은 말씀 아래에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경 안에 역사하는 성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성경은 자기 속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만 깨닫는 것입니다(눅24:45). 이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지식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연구하여 신학이 인간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행 신학의 체계와 방법과 인식으로는 성경의 권위는 전면 부인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연구를 두고 ‘성경의 권위성’에서 생각할 것은 성경연구는 성경과 성령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 정확성
성경은 정확무오합니다.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고 변동이 없으며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합니다(요17:17).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할 때는 세상 어느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의 수도 없는 잣대에 다 맞도록 기록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되, 그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진리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볼 때는 성경기록에 착오도 많고 또 틀린 곳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 세상이 일시 어두워서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인인간의 이치인 도덕과 물질의 이치인 물리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습니다. 도덕은 인간의 타락으로 그 본질이 비틀어졌고 또 세상은 저주를 받아 원래 진리를 수종들던 위치에서 떨어져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통해 주시는 구원을 전부 쏟아버리게 되고 또 정확무오를 세상 여러 다른 기준으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면 수도 없는 오류가 나오게 됩니다.
다시 한번 이 정확성 문제를 두고 조심할 것을 예를 든다면
첫째, 성경의 정확성은 세상기준에 맞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숫자나 이름 또는 사건 기록 등에 여러 가지 잘못이 발견됩니다. 이런 오류 때문에 현재 성경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정확성의 기준을 잘 몰라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볼 때 착오로 보이는 것은 그 인간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숫자나 이름이나 과학적 사실을 기준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이나 착오는 성경을 그렇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하나님께서 기록했으니 왜 그렇게 기록이 되어졌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 기록의 목적과 이유를 살피지 않고 성경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것은,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성경의 정확성을 따지려면 우선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이 어떤 안경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시145:3)
둘째, 성경은 그 기록이 구원목적입니다.
성경을 정확무오하지 않다는 이들은 대개 성경이 구원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여 그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낳은 가인과 아벨의 창세기 4장 기록을 인류역사 초기의 호적등본으로 생각한다면, 가인이 하나님께 쫓겨나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은 당시 천하에 퍼져나가던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발생한 2가지 신앙노선의 접촉과 갈등만을 따로 뽑아서 특별하게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4장의 기록은 그 기록 자체가 사실이고, 동시에 그 기록에 관련된 모든 상황은 전부 정확무오하게 하나님께서 기록한 진리입니다. 이 내용을 두고 그 어떤 면으로 비판을 하든지 이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지해서 그렇습니다(딤후3:15-16).
셋째, 성경의 정확성은 성령이 최종 담보 확정 짓습니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기록이라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종종 제기됩니다. 대개 신학에서 고고학적 자료와 철학적 논증법으로 이를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성경의 정확성은, 성경을 읽을 때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성령이 읽는 사람 마음속에 증거하는 이 증거야말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면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성경 연구는 신학이 전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교회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연구를 책임 맡고 나선 신학은 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 대신 세상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객관적 자료와 확인 가능한 검증을 필수로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정확성을 가지고 신학이 여러 면으로 변증을 하고 있지만 이는 전부 헛수고입니다. 오히려 성경을 사람으로부터 멀리 떼 놓는 결과만 만듭니다.
성경은 성경이 성경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이고, 그 성경이 성경은 성령의 기록이며 정확무오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의 기록이 참이냐는 증명은 그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말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증명까지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시각에 객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고 세상 것입니다.(눅24:32)
▪ 보편성
보편성이란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환경에 있다 해도, 자기 신앙양심을 써서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또 다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할 때 그렇게 되어지게 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실행해 보면 깨닫게 되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서로가 출생과 성장의 형편이 제각각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런 인간적 제한과 차이에 따라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절해 놓으셨습니다. 성경 내용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진리지만, 누구나 닿을 수 있도록 해 두셨다는 뜻입니다(롬10:11-13).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은 인간 세상에 있는 권위와 정확성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한계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오히려 그 권위와 정확성을 왜곡시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을 대할 때는 하나님 차원에서부터 늘 상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편성’은 성경을 대할 때 인간이 인간 수준과 인간 범위에서 대하도록 주신 성경의 특성입니다.
성경은 비록 그 본질과 내용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마지막 표현은 우리에게 평범한 인간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진리의 겉옷을 보편성으로 입혀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그 인간 언어를 통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시작하면 비록 시작에서는 인간의 일상사에서 누구나 알고 접하고 사용하는 하찮은 표현을 접하게 되지만 그런 표현 속에 담아 두신 진리를 접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실 것은
첫째, 성경해석에서 원어를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은 히브리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 원어를 바로 알아야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이 현 교계에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주로 신학자들의 직업문제와 연관이 많고 또 원어 전문가들이 자기 존재를 지나치게 과시하려는 것도 그 이유나 배경입니다.
성경은 보편성이 있어,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사본으로 전해지며 문자적 오류가 발생할 것도 아셨고 또 번역이나 통역으로 성경을 읽고 접하게 될 외국인들도 미리 아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된 원어를 사용하지 않을 성도들에게 전해질 것도 아시고 성경 언어를 택하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는 데 있어 일반 사람이 일반적 방법으로 알고 사용하는 그 이상의 특수한 언어적 환경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도록 성경을 기록했다는 대 전제입니다.
특수한 언어 환경이나 비상한 재주로 원어를 익힌 사람들이라야 성경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가 현재 교계에 너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성경 보편성의 원리로 이를 단호히 정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보편성의 원리를 잘 지키는 것이 특별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신 형편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양심을 쓰면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일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보편성입니다.
급격한 세계화와 함께 외국어 사용이 강조되면서 신학교에서 성경도 원어로 읽어야 한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의 기획역사 중 보편성의 원칙이 있으므로 원어는 단순하게 참고만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합니다.(마28:19-20)
둘째, 성경해석에 고고학적 접근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은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기록된 언어의 문자적 이해와 함께 그 언어가 사용되었던 그 시대의 제반 환경을 재구성해야만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에서 원어에 대한 해설과 성경 고고학적 자료를 생략한다면 성경 주해가 불가능하다 할 만큼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보편성을 망각하고 무시한 결과입니다.
이런 모순은 신학이 세상 학교 편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그들 세상 학문 중의 하나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세상 사학과 일반 고어는 당시 생활과 분리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일반 교인이 자기 평상 생활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양심을 쓴다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도록 보편성의 원칙으로 기획하고 기록을 했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성경의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여 오히려 원래 성경해석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고고학 방법으로는 성경을 정확하게 볼 수도 없지만, 만일 고고학적 방법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혹 있다 해도 이는 복된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요20:29)
셋째, 성경의 보편성은 평범하지만 충성을 요구합니다.
원어도 성경고고학도 필요 없다는 점을 앞에서 먼저 강조하는 것은 오늘 교회를 혼동시킨 주요 전염병 중 하나가 그곳에서 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은 앞서 말씀드린 2가지를 조심하는 동시에 그 보편성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방편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면을 조심해야 합니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나태와 무지 자체가 성경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충성을 다하고 양심을 쓴다면, 깨달음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되 그 대신 있는 힘을 다해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산 제물로 바쳐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실행해야 할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롬12:1-2)
▪ 충족성
성경기록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했으니 이를 성경의 충족성이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를 살든 또 어느 형편을 만났든 성경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편에 대하여 그가 만난 그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각 내용이 겉으로는 각각 별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성경 어느 말씀이라도 그 말씀은 모든 성도의 모든 현실에서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하는 충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전체 말씀이 단일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계명은 그 외부 기록이 주일문제를 특별히 가르치기 위해 기록하신 것 같지만, 4계명은 그 속에 모든 믿는 사람들의 어떤 문제든지 다 지도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 그 성구와 문자 속에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고, 또한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으로 역사하여 구원에 관하여는 어떤 면으로도 부족이 없게 주신 기록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은혜는 그 제일 외부에 성경 한 권이면 충분합니다. 그 말씀 속에 모든 것은 다 들어있습니다.(딤후3:16-17, 사34:16)
신앙생활에서 이 충족성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는
첫째, 성경만 알면 다른 인간 지식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다른 지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입니다. 다른 지식을 가지되 만일 잘못 가지게 되면 그 해독은 그 사람의 평생을 다 망쳐버립니다. 따라서 지식을 바로 가지면 좋으나 그것이 어려우므로 성경의 충족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고, 꼭 필요하여 세상 지식을 가질 때에는 성경의 충족성을 잘 깨달아 성경 지식을 보좌하고 심부름하는 지식으로만 가질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은 하나님 백성이 점8로 이용만 할 때는 필요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세상 풍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 거민을 완전히 전멸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려 두었을 때, 그들을 조심해서 이용하라고 했으나 결국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된 것은 거의 없고 그들에게서 묻어나온 세상 풍습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멸하게 되는 면을 기억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지식 문제가 그런 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신20:17-18).
둘째, 성경에 대하여 몇 가지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충족성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살이에 필요하여 피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지만, 최소한 성경을 모든 책보다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기는 성경만으로 전부를 삼는 것이지만, 그렇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을 일찍 가지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런 분을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성경의 충족성을 깨달았다면 앞으로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책을 대할 때마다, 결국은 성경 한 권으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세상 것은 성경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고 성경지식을 써먹는 일에 하나의 도구로 소속을 시켜 이용하는 것으로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새기는 일을 세상 어떤 지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도록 해야 합니다.(신6:6-7)
셋째, 성경 연구는 한 구절과 전체를 연결시켜야 합니다.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존재하지만 개별 말씀도 각각 충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고 살필 때는 한 성구를 가지고 전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고, 또 한 성구를 해석할 때는 전체 성구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충족성을 성경 전체와 성경 각 내용으로 나누어 배치시킨 것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성경 전체와 개별 성구를 통해 달리 접근하면서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은 그 자체가 단일성의 진리이므로 어디서 출발해도 모든 말씀과 전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대할 때마다 여기에 우리의 세상과 영계의 영생이 다 들어있다고 믿고 삼가 충족성 앞에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요6:68)
④ 성경의 종류
▪ 진본과 가본에 따른 구분
a. 정경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성경은 신구약 66권입니다. 이 66권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진본이고 그 외에는 성경이 없습니다. 이 66권 성경에 더하여 주신 것이 있거나 이 66권에서 빠질 성경이 있다고 한다면, 정경을 부인하는 이단이라고 서슴없이 정죄를 하게 됩니다.
물론 정경의 진본은 그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사본만 남아 있고 또 오늘은 여러 지방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경 안에서 다시 살필 문제이고, 여기서는 어느 성경이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진본이냐는 것만 살펴봅니다.
이 정경문제는, 기독교냐 아니냐를 구별할 때 제일 먼저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조직신학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그 항목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렇게 기독교에서 배제가 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교리 문제가 되는 것은 불과 몇 개 정도입니다. 정경문제의 가장 핵심은 성경은 신구약 66권만이 성경이라는 점입니다. 이외에 더해도 이단이 되고 여기서 빼도 이단이 됩니다.
b. 외경
정경 66권과 함께 성경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책을 외경 또는 가경이라고 합니다. 외경은 구약으로 분류해야 할 것 15권과 신약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 약 70여권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천주교가 정한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기독교는 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외경의 종류로 구약은 ‘제1에스드라서’ ‘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 있고, 신약은 ‘바울행전’ ‘베드로복음’ ‘바울계시록’ ‘베드로수난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외경은 그 출처로 나눌 때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어지럽게 하려고 만들 때부터 조작을 한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일반 신앙서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이 성경으로 혼동할 정도가 되어 성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경우입니다. 앞에 것은 만든 것도 또 성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 마귀 운동이고, 뒤의 경우는 성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그 운동이 마귀 운동입니다.
여기서는 이 둘을 외경과 가경으로 각각 이름을 붙여 성경에서 제외된 것을 외경으로, 그리고 가짜 성경을 가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외경은 그 내용은 신앙에 유익된 것이나 다만 성경에는 제‘외’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외경’이라는 말이 좋겠고, 가경은 그 내용 자체가 조작된 ‘가’짜라는 의미로 ‘가경’입니다. 물론 외경과 가경을 통틀어 말할 때는 일반 교리 용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냥 외경이라 하겠습니다.
c. 정경과 외경의 구분
정경과 외경을 나누는 구분은 여러 가지 기준이 제시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기억할 것은 ‘성경 자체의 증거’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성경이라고 하기 때문에 성경이고, 다른 책은 그 책이 그 책을 성경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책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알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성령이므로 성경이 성경을 성경이라고 말하는 증거를 성령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라면 그 속에 성령이 내재 영감 역사로 알리실 것이므로 읽는 사람이 그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성령과 믿는 사람 마음속에 역사하고 지도하는 성령이 동일한 성령이기 때문에 성경을 확정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천하에 우스운 일이 될 것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서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는 정확한 결론입니다.
과거 초등학교 운동회 때 점심시간이 되면 한꺼번에 전교생 학생 전부와 그 학생들의 전 부모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하게 서로 엉키게 됩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 놓고 부모들을 운동장 둘레에 널어놓으면 모든 사람은 2가지로만 구분됩니다. 특히 옷이 귀하고 한복을 많이 입던 건국 초기 자료들을 보면 체육복을 입고 띠를 두른 학생 한 그룹이 있고 부모들은 전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엄마들과 한복이나 양복을 어설프게 입은 아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개성 있게 입고 꾸미지만 이전에는 전부가 꼭 같은 복장이고 외모였습니다.
꼭 같이 생기고 꼭 같이 입고 꼭 같이 행동하는 그 수많은 학생들 속에 자기 자녀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는지요? 또 그 많은 부모들 속에 섞여 있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는지요?
수백 마리 소를 섞어놓으면 그 얼굴이 너무 닮아서 우리가 볼 때는 어느 소가 어느 소인지를 모르지만, 제 새끼는 제 애미를 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애미도 제 새끼를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 많은 부모 학생들이 자기 부모 자기 아이를 찾을 때, 신분증을 대조하고 지문을 조사하며 유전자 검색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남의 자식을 구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또 요즘 같이 제 부모가 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식으로 살아가는 신식 부모들 같으면 부모 자식이 서로 만날 때마다 신원조회를 하기 위해 많은 절차와 객관적 검증방법을 동원할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성령이 기록해 주신 성경으로 확인하는 일은, 정상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구별하는 일에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 정확성에 따른 구분
a. 원본성경
원본성경이란
정경인 66권 성경은 처음 기록될 때 선지와 사도들이 성령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최초 기록한 성경을 ‘원본성경‘이라고 합니다. 이 원본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 남아 있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해도 어느 것이 원본성경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원본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다 없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할 때, 또 성령이 직접 기록했다고 할 때는 바로 이 원본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원본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원본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원본성경을 없앤 이유는
원본성경을 후시대에 전하지 않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어서 눈으로 봐야 하고 손으로 만져야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직접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일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앙에 관련된 모든 것을 신약시대에는 전부 없앴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일체의 흔적과 성경 원본과 성전과 그 내부 성물 등 신앙에 관련된 것 중에 신약에도 성물로 이용되거나 취급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원본입니다. 이는 기독교는 보이는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b. 사본성경
사본성경
사본성경은 원본성경을 보고 베껴 적어 내려온 성경입니다. 따라서 원본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본성경은 그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로 주신 성경은 오류가 있는 성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본성경만 남겨두신 이유
옮겨 적은 사본성경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이유는, 성령이 아니고는 성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내신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타락 전 에덴동산은 언제나 아무 노력 없이 그 안에 살 수 있었으나 타락 후부터는 화염검이라고 하신 성령의 인도가 아니고는 전혀 접할 수 없게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성경책으로만 상대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모르게 하고, 성경을 대할 때 성령으로 읽는 사람은 성경에 오류가 있어도 그 성경을 기록한 성령으로 그 오류를 넘어서고 원본성경을 기록하신 뜻과 목적이 그에게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를 알아야 비로소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으므로 신학자들은 대개 성경을 접하지는 못하고 성경책을 상대로 세상 공부를 하는 위험에 빠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본학
바로 이런 위험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사본학’입니다. 성경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학문이 원어와 고고학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를 더하여 사본학 역시 성경신학의 기초가 됩니다. 어느 사본이 원본에 가까운지를 두고 수많은 연구가 있지만, 이 연구는 원어에 대한 일반 상식만 가진 사람이면 그 학문을 위해 필요한 학문적 준비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상식 수준에서 파악한 다음에는 전체 성경과 그 성구의 앞뒤를 살펴 어느 성경이 더 옳고 바른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다른 역사적 고문 판단에 동원되는 방법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사본학은 아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신학으로 치달을수록 사본에 대한 근본적 이의 제기나 새로운 방법론 또는 신기술이 제시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미혹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은 성경은 그 저자가 성령이고 원본은 일부러 감추시고, 사본만으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에 필요한 진리를 깨닫도록 했다는 점을 우선 전제하고 굳게 잡으면, 특별한 학문이나 어려운 방법으로 제기되는 제안에 대하여는 애당초 상관도 할 필요가 없도록 구별할 수 있습니다.
c. 번역성경
번역의 필요성
번역성경은 성경의 보편성에 그 근거를 둡니다. 하나님께서 구약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구원을 한정하고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일상 언어가 성경언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신약에서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에게 그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각 나라와 백성과 각기 언어를 달리하는 이들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약교회에게는 성경의 번역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번역성경의 정확성
번역은 그 내용이 어떤 경우에라도 정확할 수 없습니다. 근사치로 평가할 문제이지 정확성으로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번역성경에도 성경의 특성인 권위성 정확성 명료성 충족성이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본성경에 그 4가지 특성이 해당되는지를 살펴보므로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부 내용에 착오가 있어도 사본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의 모든 특성이 살아 있듯이 번역성경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모든 특성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단 성경의 그런 특성은 성경책 자체에 주어진 것이 아니고 성경 진리에 주어진 것이므로 번역성경은 그 정확성만큼 성경이 원래 가지는 그 특성이 있을 것입니다. 번역이 더 정확하면 그 특성은 더 강해질 것이고 번역의 정확성이 떨어지면 그 특성 역시 또한 감해질 것입니다. 번역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역시 성령의 역사는 함께 합니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은, 원어성경이 아니라 우리처럼 번역성경만을 성경으로 가지는 교인들은 모든 면에서 불리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할 것은, 비록 원본성경을 대한다 해도 그 성경을 대하는 사람이 성령의 감화 없이 인간 자체로만 성경을 상대하면 성경에 내재된 4가지 특성은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착오가 있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번역한 성경을 대하면서 그 모든 불리한 것만큼 성령의 인도를 더욱 구하게 되면 성령에 얼마나 붙들렸느냐에 따라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성경의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훼손된 부분을 복구합니다.
표준 번역성경
원어성경은 그 필사과정의 착오문제만 제기될 뿐입니다. 그러나 번역성경은 언어 변환과정을 거치면서 항상 번역성경의 표현이 변동될 수 있는 요인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 원어 표현 자체는 고정되어 있으나 번역할 언어는 생활의 변동과 함께 꾸준히 변화되고 있으므로 어느 시점에 변역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또한 언어 변환과정에서 동일 원어를 번역할 수 있는 단어나 표현 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언어환경으로 동시에 번역을 한다 해도 번역자에 따라 꼭 같은 가치를 가진 여러 번역본이 가능합니다.
번역의 이런 특수성 때문에 번역성경을 두고 한 가지 미리 확정 지워 둘 것은 표준번역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표준번역본을 정하는 원칙은, 정통 교회의 가장 권위 있는 첫 번역본으로 번역성경의 기본을 삼고, 한 번 확정된 성경번역본은 언어환경의 변화를 따라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되, 실제로는 언어 환경이 수백 년 이상 변화를 한다 해도 그 표준번역본은 변화될 필요가 없도록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번역성경은 천주교에서 개혁한 16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님 재림이 임박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미 번역된 성경은 끝까지 변경 없이 지켜야 할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표준번역본과 관련하여 확인해 둘 원칙 중 하나는 성경의 필사원칙입니다. 성경의 필사원칙은 기록 당시의 언어환경이 이후 변화된다 해도 성경필사에는 변화된 언어환경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록 당시의 성경 표현은 언어환경이 변화되는 후시대인들에게는 기록 당시와 다른 뜻을 가지게 되면서 점차 변하게 됩니다. 즉, 원본성경을 기록할 때 당시 사람들이 그 성경표현을 대하며 이해하던 것과 이후 변화된 언어환경에 살아온 사람들이 기록 당시 성경표현을 대하며 이해하는 내용은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필사본원칙은 기록 당시 원본성경의 표현이 담고 있는 뜻을 후시대에 전하기 위해 후시대가 사용하는 후시대식 표현으로 바꾸어 필사하지 않고 이해에 착오가 있는 이전 시대 표현 그대로 필사하여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시대 변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착오는 후시대 사람의 이해력을 원본성경에 맞추도록 요구하지 원본성경의 표현 자체를 바꾸어 후시대 사람의 이해력을 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역성경도, 첫 번역 당시의 표현을 이후 변화된 언어환경에서 이해한다면 그 뜻이 변하기 때문에 새로 번역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연히 모순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 서적과 성경을 같은 수준에 놓고 성경 자체의 권위를 인간지식 중 하나로 만들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과 힘이 닿는 데까지 충성을 해서라도 번역성경을 필사본 원칙을 따라 그 첫 번역본을 지키는 것이 특별히 필요한 시대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2) 은밀계시 - 영감론
① 영감의 정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영감’이라고 합니다(딤후3:16). 넓게 말할 때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영감이라고 하며, 가장 좁은 범위에서 말할 때 영감은 성경기록을 위해 성경기록자들에게 역사한 영감만을 영감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② 성경과 영감역사
일반 신학에서 ‘영감’이라는 표현은 성경을 기록할 때 역사했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역사를 가장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영감’은 ‘성령의 성경기록역사’와 같은 단어로 사용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너무 좁게 관찰한 결과입니다. 지난 시대가 어리고 어두워 가장 외부로 표시가 잘 나타난 것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비록 성경기록 역사에서 가장 쉽게 확인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것으로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감화’와 ‘감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영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영감의 가장 중심적 활동을 성경 기록과 관련하여 찾아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통로이며 또한 교리의 근본 구성 체계가 구원론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우리가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말씀 순종에서도 영감역사가 바로 그 말씀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③ 영감의 성질
▪ 개별성
성경으로 기록하신 진리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넓은 면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영감은 각자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하고 개별적인 진리로 우리를 좁게 인도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성경으로 기록해 주신 진리이니 이는 모든 시대 모든 믿는 사람 전부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주일날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목회자와 주일학생을 가르치는 반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은 각자에게 전혀 다른 행동을 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믿는 사람은 그 타고난 체질과 입장 그리고 살아온 평생 그리고 현재 처한 현실 환경이 다 다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만들어 달리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중생 되는 그 순간부터 성령이 각자에게 감화와 감동을 통해 그 사람만이 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인도를 평생 하고 있습니다.(요일2:27)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성화성
영감역사는 항상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성결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죄로 더럽혀지고 고장난 우리 인격과 행위와 생활을 하나님께서 원래 만든 하나님의 모형으로 복구시킵니다. 물론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비용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그 자본과 진리의 법칙에 따라 성령은 매 현실에 해당되는 우리 속에 있는 한 요소요소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명령을 합니다. 순종하면 성화가 되어지고, 자기 신앙양심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요구를 거부하면 그 부분은 다시는 되살릴 수 없는 둘째 사망으로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이름은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므로 그 이름을 성령이라 합니다(롬1:4). 깨끗하게 하는 방편은 구별입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삐뚤어졌으며, 어느 길은 가야하고 어느 길은 잘못인지를 늘 알려주시고 그 둘 중에 옳은 것을 택하고 옳은 행동을 하게 역사합니다. 그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순종하면 그 순종하는 만큼 성령화 되어집니다.
참고로, ‘깨끗’은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거나 쥐가 고양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검은색으로 만든 것은 검은색이 깨끗한 것이고, 그 본질을 원래 흰색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흰색을 유지해야 깨끗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시고 만들어가려 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그 모습을 되찾는 만큼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면을 책임 맡은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성령입니다(고전6:11).
▪ 내면성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할 때는 우리 내면의 신앙양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신앙양심은 우리 인간에게 속한 요소이며 특히 이는 물질로 된 마음의 한 부분이지만, 이 신앙양심은 우리에게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와 같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에게 성령을 대하는 부분은 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을 대신하여 신앙양심을 말하는 이유는, 영은 중생된 이후에는 걱정할 것도 없이 항상 성령과 동행하고 성령과 나뉘어 존재하는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영에게 항상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 영을 통과한 다음 우리 마음에까지 들어와야 하는데 마음에 들어오는 이 단계에 고장이 있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까지 들어와야만 이제 우리 죽을 몸과 마음의 요소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영을 통과한 성령이 마음에 들어오는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신앙양심’입니다. 영은 중생되는 순간 기본구원으로 완전 해결이 되었고, 중생된 이후 우리가 평생 노력하는 것은 심신을 살려내는 것이고 이 심신을 살려내는 것은 바로 신앙양심에 그 모든 성패가 다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 된 이후 평생 노력하는 것도, 노력하며 느끼고 투쟁하는 것도,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바로 신앙양심 문제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우리 심신 전체에게 그 명령대로 살기를 재촉하는 심신 내의 가장 밝은 존재입니다. 동시에 끝까지 성화되어 천국가기를 거부하는 옛사람의 요소가 영과 성령을 직접 상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양심을 상대로 분풀이도 하고 또 이 양심을 꺾음으로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양심은 성령이 우리 심신을 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산성의 문빗장과도 같고, 밤길을 안내하는 내부 안내자와도 같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내면적으로 또 개별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항상 은밀합니다. 드러나지 않고 확인되지 않으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때서야 우리 눈 어두운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비로소 또렷하게 확인하게 되는데 그때는 대개 이미 모든 상황이 끝이 나고 ‘지난 역사’가 된 정도입니다.(계2:11)
▪ 자유성
성령 하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절대 주권자시며 영존하신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는 이 과정에서 가장 아끼고 조심하는 면은 바로 우리 심신의 자유성입니다. 자유성이 죽지 않고 자유성이 약화되지 않으며 이 자유성을 온전하게 살린 상태에서 성화를 시켜야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자유성이 훼손된다면, 마치 부모 모습을 쏙 빼다 닮은 동상이나 인형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 외모가 아무리 닮아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한 요소밖에 없다면 이는 하나님의 신격의 상대가 되는 인격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 역사는 늘 우리에게 우리의 자유성을 살려 우리가 깨닫고 원하고 좋아서 따라오게 합니다. 혹 우리가 성령께 강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라고 부탁을 한다 해도 성령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모든 역사는 항상 자유성으로 나타납니다.(계3:20)
▪ 생명성
성령의 성화 역사는 단순히 옷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성결의 역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그 연결을 통해 하나님으로 움직이게 합니다(롬8:2). 따라서 그 과정과 그 결과를 보면 깨끗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결국 성화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 성화를 이루어 내는 그 내면을 살펴보면 항상 생명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우리 성도를 비교하면 우선 겉으로는 교적부를 가지고 확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믿는 사람은 생명이 있어 그 신앙에 체온이 있고 동작이 있으며 성장이 있기를 마치 살아있는 생체를 상대하며 생체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관찰됩니다. 그러나 타 종교를 믿는 이들은 그 외모는 우리와 거의 흡사하지만, 손을 대보면 송장이어서 냉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잠깐 관찰해 봐도 그 속에 생명적 활동과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에게 중생 후 평생토록 성령의 역사가 늘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성령을 거부하고 악령에게 붙들려 수십 년 세월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는 성령으로 되돌아와서 성령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본구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언제라도 우리가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역사에 접하게 되면 그 즉시 우리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내증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근본은 외증이 아니라 항상 이 내증에서 확정됩니다. 뜨거운 회개의 역사, 뜨거운 충성의 역사, 자라가는 신앙, 다 바치지 못해 안타까운 그 모든 심정 등이 다 생명의 증거들입니다.(갈5:22)
④ 성경과 관련된 영감의 종류
▪ 성경 기록영감
신구약 66권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이 성경기록자들을 붙들고 역사하셨으니 그 영감을 ‘성경기록영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 저자가 바로 성령입니다. 이 ‘성경기록’ 영감의 특별한 점은 66권 성경기록자에게만 역사했지 그 외 다른 사람에게는 역사하지 않았고 또 성경기록이 완성된 이후에는 반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 심신의 성화나 다른 성령의 역사를 두고 ‘영감’이라는 표현을 쉽게 하는데, 이 표현을 사용할 때 항상 ‘성경기록영감’의 재현이라는 오해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 기록영감은 특별히 논란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3가지 정도로 입장을 정리하여 관련 논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기록시대와 그 이후 시대는 구별해서 살펴야 합니다.
성경 기록영감과 관련해서 성경 기록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영감역사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범위를 넓게 잡으면 구약은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이고 신약은 완성된 성경 66권을 우리가 받아서 생활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신약 초기 성경을 기록하던 잠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잠깐의 시기는 구약의 영감역사가 그대로 역사하던 시기이므로 비록 시기로는 신약이지만 성령 역사의 형태로 보면 구약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은 성경을 기록해 나가던 시기이므로 성령의 역사는 한편으로 구약 전체 교회에게 성경을 기록해 주셨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기록되지 않은 성경진리가 필요한 그런 성도들에게는 성령이 직접 역사하여 장차 성경에 기록될 성경 진리를 대신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외견상 성령의 역사가 성경과 상관없이 별도로 역사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역사가 허다했기 때문에 정도를 걸어가던 성도들의 걸음은 그 걸음 하나하나가 전부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비의 역사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경이 완성되어 66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구원도리를 요약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령 역사는 성경에 기록하신 진리 범위 안에서 역사하지 성경을 제쳐두고 성경 외부에서 성경 기록 외적 역사를 하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을 새로 기록하는 것은 이단으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성경기록 역사는 초대교회에까지 이르며 66권으로 완성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는 66권 성경으로 기록하신 진리 범위 안에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경을 기록하는 역사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책 이름을 ‘성경’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성경만이 가지는 ‘권위성’ ‘정확성’ ‘보편성’ ‘충족성’ 등 4가지 특성을 인정하는 책이 있다면 이는 성경을 추가하는 이단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몰몬교나 천주교와 같이 외경이나 몰몬경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정식으로 추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지도자의 저서를 성경과 같은 권위에 올려놓는다면 이 역시 성령의 ‘진리내부 역사성'에 의하여 단죄해야 합니다.
셋째, 기타 여러 신비한 언행들을 감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자기에게 감동하여 말하게 했고 또 행동하게 했다는 주장이 있을 때 성급하게 이를 정죄하는 것도 크게 위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도 꼭 같은 죄가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그 역사 자체가 개별적이므로 그 사람 내면에서 어떻게 역사했는지 외부인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의 ‘진리 내부역사성’에 의하여 만일 성경에 없는 언행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판단하여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성경을 모르고 예언을 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기행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혀 놀랄 것 없이 구별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벧후1:21)
▪ 성경 내재영감
성경은 그 기록된 내용 속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함께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의 글자만 읽을 것이 아니고 성경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내재적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또 성경으로 신학을 하는 과정에서 흔히 우리가 성경 내용만 상대하지 그 속에 성령의 역사가 내재하며 그 내용 속에 영감으로 인도하는 내면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성경과 불경이 같은 서적으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록한 책은 그 책의 내용 속에 그 글의 임자가 가진 느낌과 활동이 녹아져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인간의 것이 아니라 만유주 하나님,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의 감화와 감동이 내재되어 있는 줄 알고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요16:13)
▪ 영의 중생영감
비록 성경이 그 기록과 그 내용에 성령이 역사하고 내재하여 계신다고 해도 중생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상 책이나 성경책이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입력 전선이 끊어진 사람에게는 발전소에서 자기 집으로 오는 도중의 도로변 전선이 끊어져 있든 연결이 되어 있든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기록하고 그 내용 속에서 그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영감으로 역사하시지만, 동시에 안 믿던 우리의 영을 중생시키는 역사를 합니다. 우리 영이 중생된 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이를 영의 중생영감이라고 합니다.(요3:6)
▪ 마음 조명영감
성령은 우리 영을 중생시킨 다음,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조명역사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믿기 전에 죄와 사망과 악령으로 어두워져 진리에 대하여는 전혀 듣지도 알지도 못한 흑암의 상태였습니다. 이런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 빛을 비추어 마음을 밝혀주십니다.
성령이 비추어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없다면, 인간의 마음은 그 어떤 수양과 타고난 재질이 있다 해도 물질로 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계로 인도하는 성경을 깨닫거나 알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밝혀 깨닫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요14:26)
▪ 현실 실행영감
성령이 우리 마음에 어느 것이 옳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낱낱이 밝혀 가르쳐 주신다고 해도, 우리는 세상 임금인 악령이 죄로 지배하는 이 사망의 세상에서 성경 말씀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이 말씀 순종생활을, 성령이 우리를 붙들고 그 말씀대로 실제 살도록 합니다. 이 성령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세상 어떤 현실에서도 우리가 말씀대로 행한 것이 있다면, 인간이 보기로는 그 사람이 죽을 각오로 노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성령이 그를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신앙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 실행영감’이라고 합니다(행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