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대인의 문화적 배경을 알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는 성구 4가지 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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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대인의 문화적 배경을 알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는 성구 4가지 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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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질문 : 유대인의 문화적 배경을 알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는 성구 4가지 3243

책을 읽다가 의문점이 있어서 질문합니다. 총신대교수가 집필한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열쇠` 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다른 내용들은 거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글들과 맥락은 비슷합니다. 물론 깊이 면에선 많이 아직 부족하지만요. 이 책 중에 성경을 해석할 때 배경을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건들은 어떤 특정한 역사의 때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적인 배경, 주로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예를 몇 가지 들고 있습니다.

예1) 열왕기하2장9절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라고 했을 때 두배의 성령을 뜻하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당시의 배경, 즉 신명기 21장17절의 문화적 배경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장자의 상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엘리사가 간구한 것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해달라는 말이다.'

예2) 누가복음9장23절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이 말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십자가에 처할 때 죄수에게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문화속에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예3) 사무엘상12장17절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먼저 본문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우리나라의 배경으로 본다면 밀을 베는 때, 즉 여름에 비가 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풍토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비가오지 않는다. 따라서 밀을 베는 계절인 사월 중순에서 오월 중순까지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비를 오게 하신다면 그것은 진노의 표시인 것이다. 사무엘의 기도는 이 배경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4) 마가복음11장12~14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를 저주한신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우리의 배경에서 본다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떻게 철도 아닌데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좋은 무화과나무는 절기가 아니라도 전에 맺었던 몇 개의 열매쯤은 달려 있는 법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셨을 때 하나님의 열매도 없었다는 것은 쓸모없는 무화과 나무라는것을 말해준다.'

이런 부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앞의 ‘예1,2'를 보면 그 배경을 성경에서 찾은 것 같기도 합니다. '예1'은 신명기 21장17절에서 찾았고 '예2'도 누가복음23장26절의 시몬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을 배경으로 해석이 가능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3'이나 '예4'는 성경의 배경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의 배경을 인용해서 성경을 해석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예1,2,3,4' 모두 다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총신대 교수님이 해석한 방법도 일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반적인 앞의 예들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 성경의 문화적 해석에 대한 비판

1. 서평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열쇠'라는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너무 옳고 너무 상식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이 현 교회에서는 거의 사문화되었다는 것이 탄식입니다.

소개하신 책자가 질문하신 분이 정확하게 요약해서 소개했다면, 이 책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제목만 바로 되었고 그 속의 내용은 전혀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그 책에서 예를 든 성구가 질문에서 소개한 4가지만은 아닐 터인데, 소개한 4가지는 전형적으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 대표적 경우들입니다.

오늘도 대부분 목사님들이 주일성수를 부르짖고 있지 주일을 어기라고 설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들의 주일성수는 바쁘지 않으면 주일예배를 참석하라는 것이지 이곳처럼 생명을 걸어도 주일을 지키라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곳처럼 말하면 그들에게는 유대인의 율법주의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 신사적으로 점잖게 여가 생활을 활용하라는 정도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고 옳기 때문에 그 제목 자체를 두고 반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두고 각론적으로 비교를 해보면 현재 소개한 책을 비롯하여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원어나 성경고고학 또는 문화적 배경을 '참고'가 아니라 '필수'로 거론하는 경우는, 이곳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시각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2. 예로 든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1) 왕하2:9의 ‘갑절의 영감'은 신21:17의 ’장자의 2배 상속'이 문화적 배경이라는 설명

① ‘왕하2:9'을 ’신21:17'로 해석한 것을 문화적 배경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표현의 문제

소개하신 책에는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을 ‘문화적 배경'이라고 표현하면서 신21:17을 소개했는데, 이렇게 왕하2:9을 신21:17로 해석할 때는 '문화적 배경'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표현할 것이 아니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표현했어야 합니다.

장자의 상속이 2배라는 내용이 비록 이스라엘 문화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해도, ‘예1)'의 경우는 일단 신명기에서 그렇게 하라고 기록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왕하2:9의 ’갑절'을 이스라엘 상속법의 ‘두 몫'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입니다. 굳이 신21:17에 기록된 것을 두고,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사를 따로 연구하여 그곳에서 ’장자의 두 몫'을 발견하고 그 내용으로 왕하2:9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문화사 배경적 해석'이 됩니다. 성경해석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성경을 문화적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해석의 보편성에 의하여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②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의 의미

예를 들어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신 갈6:7의 해석을 창세기의 롯과 아브라함으로 살펴본다면 롯이 심은 소돔 선택과 소돔에서 얻은 유황불비의 추수에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여름에 놀고먹던 배짱이가 겨울에 얼어 죽었다는 세상우화까지 덧붙여도 이를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소한의 요약이기 때문에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성구 해석에 필요한 최소한을 압축한 것입니다. 각 개인이 자기 신앙현장에 그 성구를 적용할 수 있도록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도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표현이 되어지려면 성경에 명문으로 기록된 것 외의 내용을 덧붙일 때는 먼저 성경에서 소개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 방향에서 연결시켜 나가고 뻗어나간 것이라야 합니다. 즉, 씨를 하나 뿌렸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천지만엽으로 뻗은 그 수많은 논리와 표현들은 전부 한 알의 씨앗에 연결되고 자라나간 것입니다.

심어서 자란 살아있는 소나무와 꼭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사람이 여러 목재와 재료를 이용해서 또 하나의 소나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것은 솔씨 하나에서 자라나갔기 때문에 그 무성한 나무의 가지들과 잎사귀 전부가 솔씨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재와 다른 재료로 조립한 인조 소나무는 겉모습은 같아도 솔씨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내면 속성도 본질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책으로 알려 주셔야 할 내용을 최대한 간추려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솔씨와 같습니다. 그 솔씨 하나를 가지고 성령과 자기 신앙양심으로 차분하게 살펴보고 실행해 보면 그 솔씨 하나에서 뻗어나가 자라가는 것이 무성한 소나무처럼 세상살이를 하며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진리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③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는 경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말씀을 가지고 오늘 교회들이 세상 언어 사전에서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사랑으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설교하고 또 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세상 사전과 세상 철학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로 ‘어학’에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 원어를 살펴보는 문법적 해석에 철저한 것을 두고 흔히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자세라고 보는데, 한글 성경을 한글사전으로 해석하면 세상 해석이 되듯이, 원어로 적힌 원어성경도 원어사전으로 해석해 버리면 그 원어사전은 세상학문으로 세상 사람의 생각과 세상 사람의 상식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해석은 전혀 엉뚱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④ 저자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왕하2:9과 신21:17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했다고 본다면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은 이스라엘 문화와 역사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 질문자가 소개한 그 책의 설명입니다. 즉 이스라엘에는 장자에게 ‘두 몫’을 주는 관습이 있었으니 엘리사가 입에 ‘갑절’을 담은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에서 밑으로 무엇을 물려 줄 때 다른 사람보다 한 몫을 더 받는 경우가 있어 이런 문화적 습관이 배경되어 엘리사가 ‘갑절’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신21:17에서 장자에게 ‘두 몫’을 주도록 한 역사가 있으니 이를 이스라엘의 문화사로 파악했고 이 문화사 배경이 엘리사 당시까지 이어졌다면 엘리사 입에서 나온 ‘갑절’은 자기 출생과 성장환경에서 ‘남보다 두 배’라는 개념이 미리 입력되어 있어 스승에게 영감을 물려받을 때 ‘갑절’을 표현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왕하2:9의 ‘갑절’을 이스라엘 문화사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표현하면 그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고, 왕하2:9을 성경에서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수많은 성구 중에서 신21:17의 성구가 왕하2:9을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에 해당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정확하게 연결을 찾았는지는 별개 문제입니다. 현재 답변자 생각에는 성구 중에서 왕하2:9을 보충 설명하는 성구로 신21:17을 제시하는 그 책의 저자는 어떤 면을 보고 그 성구를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저자가 너무 높은 수준이어서 이곳 답변자가 도저히 감도 잡지 못하는지, 아니면 그 저자가 갑절의 영감에서 ‘두 배’라는 표현이 나오자 구약의 문화사적 표현 중에 ‘두 배’라는 것이 있는지 살피다가 신21:17에 이르러 ‘두 배’를 발견하고 성급하게 제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자가 ‘문화사적 배경’이라는 것을 선호하다가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을 성급하게 적용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 해석은 다른 성경에 의하여 금하는 선을 넘어가지 않으면 함부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 좋은 해석이라 또는 좀 어린 해석이라는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질문자가 예로 든 내용은 그 양이 많지 않아서 답변자가 대충 짐작만 하겠습니다만, 두 성구를 연결시킨 것은 아무래도 ‘성경의 문화사적 배경’이라는 면을 너무 강조하다가 실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하면 바로 표현한 것인데 그렇게 표현했다면 그 표현에만 집중하면 좋을 것인데 왜 문화사적 이해라는 면을 가지고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유일의 신학과 문화사적 설명이라는 두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까,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섣불리 조합하여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면이 있습니다.

⑤ 이곳은, 왕하2:9의 갑절을, 바울이 딤전1:15에서 죄인괴수라고 본 내용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은 한 구절이 그 나머지 성구 전부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연결이 되지 않고 1차적으로 연결이 되고 그다음 2차적으로 연결이 되어가며 차례로 연결이 됩니다. 일단 왕하2:9에서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엘리야에게 구한 것은 한 몫을 더 받을 수 있는 장자의 상속분량 같은 개념이 적용되었다고 보는 것보다, 딤전1:15에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자신을 살펴볼 때 남보다 더 큰 죄인이고 부족한 면이 많아서 주님께서 더 강하게 붙들어 주지 않으면 엘리야가 앞서 감당한 사역을 자신으로서는 이어나갈 수 없는 자기 부족을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물론 이곳 해석이 맞 다고 주관적으로는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을 알지 못하고 문화사적 배경이 중요하다 하여 왕하2장 이전 이스라엘 역사를 저자가 찾다가 신21:17에서 ‘두 몫’이라는 숫자를 발견하고 그곳에 바로 연결시킨 것은, 비록 성구를 인용했기 때문에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했다고 하겠지만, 이는 껍데기로만 해당되는 주장이고 실제로 적용시킬 성구를 적용시키지 않았다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가죽껍데기 안에 적힌 글을 인용했다 해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했다고 한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 역시 너무도 많은 부분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 된다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⑥ 문제는 어떤 성구가 그 성구를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하며 또 바로 인용된 성구이겠는가?

이것은 자기 신앙 수준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신앙이 올라가 본 만큼, 자기 신앙이 걸어가 본 만큼, 자기가 직접 보고 살펴 본 세계만큼 해석하고 인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사상이 옳고 그 중심이 바로 잡혀 있다면 비록 낮은 수준에서 해석을 했다 해도 그는 자기가 해석한 대로 현실에서 행할 것이고 실제 행해 보면 잘못된 것은 고쳐지고 또 약한 부분은 자라게 되면서 이후에 장성한 신앙이 될 것이므로, 굳이 그 해석을 두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시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워 그 얼굴이 일그러졌을까 하면서 고통에 겨워 못 견디는 모습을 그림에 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얼마나 그 십자가 고통이 기쁘고 감사했겠는가 하면서 말로 표현 못할 만족의 얼굴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 십일조를 내면서 아까워 죽겠지만 할 수 없이 내는 사람은 전자의 경우이고, 십일조를 내면서 너무 좋고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 감격에 겨운 사람이 그린다면 후자의 경우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을 해석할 때, 한 사람이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 해석이 틀렸다고 할 수도 있고 또 그 해석이 아직 그의 신앙이 구원 위한 희생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를 모르는 정도의 어린 신앙이라고 표현해도 됩니다.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을 두고, 말씀대로 차분하게 실행해 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양쪽 해석을 두고 판단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소개한 책의 저자가 소개한 것도 그가 생각하는 어떤 면으로는 일리가 있을 수 있으나 있다고 해도 그 신앙 수준은 아직 어린 수준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좀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고 해놓고 성경을 문화사적 배경으로 해석하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성경은 그 성경 기록 이전의 모든 과거를 다 훑어보며 연결을 찾게 되어 있으니 그냥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더라면 더 좋았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음에 설명드릴 다른 3가지 예에서 ‘문화적 배경’이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있어 너무도 위험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2) 눅9:23에서 십자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로마의 사형제도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① 저자는 십자가란 어려움이 아니고 ‘죽음’을 뜻하는 것이 당시 십자가형이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을 것이라고 눅9:23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질문자가 소개한 저자의 설명은 오늘 설교자들이 이 성구를 가지고 어려움을 겪어도 주님을 따르라고 해석을 하는데 이 해석은 로마의 십자가 형벌제도에 대하여 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온 오해라고 합니다.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죄수에 대한 처형이기 때문에 십자가란 바로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면에 대하여 굳이 로마의 십자가 처형제도를 전문가 수준으로 알지 못해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한 과정을 세세히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그 과정을 그 정도로 알려준 것이면 로마의 사형 제도를 더 알 것도 없이 우리는 성경을 깨닫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자는 십자가는 바로 처형이라고 단정하지만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는 ‘십자가 = 어려움‘이었지 ’십자가 =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예는 그 저자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지 ’십자가 =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저자가 말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제도를 로마의 문화사에서 깊이 찾아 들어가다 보면 처형의 참혹함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처형된 통계도 나오는 등 그 면도 어느 한 사람이 연구하려면 자기 평생을 다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문화사적 배경이 성경 해석에 절대적 전제라 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모든 문화사를 다 살펴보되 그 문화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려면 우리 모든 성도는 전부가 성경 문화사 또는 고고학의 수준 높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됩니다.

이런 주장은 주로 성경 기록 시대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그만 실언을 해서 뱉으면 안 될 표현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원어교수들은 원어를 모르고는 신앙의 A B C 도 알 수 없다고 강조하고 교회사 교수는 교회사를 또 조직신학교수는 조직신학을 그리고 목회학박사는 실천신학을 강조하는데, 이는 마치 세상 전문가들이 자기 학문에 도취하여 방향감각을 잊어버리고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십자가’를 로마문화사를 근거로 ‘죽음’으로 단정한다면 눅9:23은 이를 반대로 가르칩니다.

논란을 논란으로 상대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으나, 말이 아닌 말이 너무 심하게 나올 때는 일반 세상에서 토론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을 한번씩 꺼내들 때가 있습니다. 만일 저자의 말처럼 ‘십자가 = 사망’이라는 등식을 로마 처형 법을 근거로 제시한다면,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이 눅9:23 성구는 그 성구 안에서 십자가는 사망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 오라는 눅9:23은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날마다’ 지고 갈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은 십자가는 죽음이라는 의미를 누구보다 강조하는 곳이며 이곳에서 소개하는 설교만큼 매일 매순간 생사를 걸고 주님을 따르도록 구체적인 안내를 이렇게 하는 곳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사적 배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진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약간 넓은 공간으로 나와서 지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본문은 이미 이 성구가 말하는 ’십자가‘란 세상에서 어떤 제도이며 어떤 배경을 가졌으며 그 단어의 뜻이 사전에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을지라도, 이 성구에서 말하는 바로 그 ’십자가‘만은 ’죽음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고 가야 하는 계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단어가 세상에서 죽음으로만 사용한다 해도 성경이 죽음이 아닌 고난으로 사용했다면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성경 기록이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재론할 것도 없는 철칙입니다.

③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고 달리 죽었을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죄 값을 해결하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라는 것은 혹시 로마 사형제도에서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혼만 내고 고문만 했다가 도중에 죽기 전에 내려놓은 예가 혹 있다 해도,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란 죽음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문화사적 배경을 배격해야 할 이유이고, 이것이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 죽음’이라는 등식이 되어야 한다면,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 = 죽음’이라는 등식이 나오는 것이지, 로마사형제도의 처형법 절차를 문화사적으로 파악한 결과 때문에 ‘성경의 십자가 = 죽음’이라고 등식을 놓는다면 성경해석의 초보조차 오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약컨대, 십자가는 로마 처형제도를 고찰한 결과 때문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십자가를 죽음의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십자가는 죽음이라고 해석해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혹, 문화사적 배경으로 해석하거나 성경기록 자체만으로 해석하거나 결과적으로는 같지 않느냐고 반론할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냈으니 십자가는 죽음인 동시에, 성경은 십자가를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이 면은 로마 문화사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소 뒷발차기처럼 결과적으로 우연히 맞을 수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십자가를 한 인간에게 적용시킬 때 그 인간이 세상에서 생을 끝맺는 최점G 모습을 죽음이라 하고 그 죽음을 십자가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경의 십자가는 그 사람이 최점{으로 죽기 이전 평소 매일 생활 속에서 자기 전체 생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이 매 현실에서 차례로 그 분자들의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는데, 바로 그 개별 분자들의 개별적 최후를 십자가로 표시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요한처럼 목 베임을 받아 최후 순간을 맞는 것도 십자가라고 표현하는데, 이때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사망을 뜻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매일 생활 속에서 어느 하루라는 시간을 주님 앞에 내놓는다든지 아니면 자기 인생의 일부를 주님 앞에 완전히 포기하는 경우, 또는 자기의 어느 한 일부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어 그 부분을 최점{으로 주님께 내놓는 경우, 우리는 이런 것을 부스러기 십자가, 또는 부분적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적 십자가는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이 부분적으로 최점; 맞게 되는데, 그 일부분의 포기 때문에 그 사람 전체가 죽는 것은 아니니 이런 부분적 십자가는 그 사람 전체를 놓고 볼 때는 하나의 고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15:31에서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는데, 이때 바울이 죽는다고 한 것은 로마 사형제도에서 말하는 ‘사형 집행’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로마 처형제도 상의 사형집행은 십자가로 죄수를 죽이는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그 죄수는 호적등본에 ‘사망’이라는 도장이 찍히고 다시는 이 땅 위에서 그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15:31에서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한 이 사망은, 오늘 주를 위해 죽었는데 내일 또 바울은 살아서 움직이고, 내일도 죽었는데 모레도 또 살아서 돌아다니는 그런 죽음을 말합니다.

이 바울의 죽음은 죽을 각오로 매일 산다고 해석하는 분도 있고, 그날 바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기 요소 전부를 주님 뜻대로 순종하다가 다 소비했으니 실제로 바울을 구성하는 부분적 요소들을 매일매일 주를 위해 죽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신앙세계를 더욱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매일 매일을 죄로 살든 의로 살든 그날에 해당된 요소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살다가 그날 해당된 요소가 없어지듯이 우리도 그렇게 말씀대로 살다가 이왕 없어질 요소가 없어졌으면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 뜻대로 살다가 그날 하루에 없어질 요소가 허비되었으면 그래도 그 요소가 죽기는 죽었는데도 십자가로 의미되는 죽음이 아니고 죄로 죽는 강도의 십자가가 됩니다.

이제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 나가게 되면, 질문자가 소개한 책에서 말하는 ‘십자가’나 ‘죽음’의 의미는 이곳에서 설명하는 의미와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른 곳으로 나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④ 책을 직접 보지 않았으므로 질문자께서 인용하신 표현만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이곳에서 의미하는 차원을 파악하고 충분히 설명하였으나 질문자께서 그런 부분을 누락시키고 성경을 너무 수박겉핥듯이 대하는 표현만을 옮겼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일반 교계에서 알고 있는 성경해석법은, 건설구원의 기능구원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해석도 바로 나올 리가 없다고 이곳은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곳 짐작이 아니라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곳 짐작이 틀렸다면 우리 교계는 이미 백영희신앙노선의 성경해석법으로 성경해석의 근본 시각이 바뀌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 교계가 이대로 유지 되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3) 삼상12:17은 문화적 배경으로 해석해야 하는 아주 좋은 예라하지만, 사실 그 반대입니다.

① 본문은 4월에서 10월인데, 이스라엘에서는 건기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우기라고 합니다.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라는 본문 말씀에서 ‘밀 베는 때’라는 것은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비가 자주 오는 시절이고 이스라엘의 기후조건은 밀을 베는 계절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현상으로도 자주 비가 오는 것이니까 사무엘이 기도해서 비가 온다 해도 별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이므로 사무엘이 기도해서 비가 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노한다는 표시가 되므로, 사무엘의 본문 기도는 이 기후 환경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②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우기와 건기에 대하여도 필요한 것은 이미 알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기와 우기에 대하여는 오늘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에 건기와 우기를 우리가 알아야 성경을 깨닫는데 필요하다면 성경에 어떻게 표시를 해도 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전혀 표시해 두지 않았다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전혀 표시해 두지 않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때는 이스라엘의 풍토와 문화를 직접 공부해서 알아야 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시고 그냥 우리 귀에 들리고 보이는 정도의 자연 이치를 가지고 알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 따로 적지 않는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성경기록의 보편성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성경 명문에 없는 내용은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양심으로 자기 주어진 주변에서 세심히 살펴보면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데는 조금도 불편이 없도록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소개한 책자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밀 베는 시기는 건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시기에 봄비를 자주 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시기에 비 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특별한 표정이라고 보는데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인용하고 있는 삼상12:17 본문 내용 자체가, 인간이나 자연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 자체만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의 기후지리학적 전문 지식이 없어도 이스라엘의 밀 베는 시기는 우리나라와 달리 비가 없는 시기인가 보다라고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안에서도 큰 고개 하나를 두고 기후와 일기가 확연하게 나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나라가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정도를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형편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안다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은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기와 우기를 이스라엘 지경 밖에 있는 교회들이 모를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의 기후를 본문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밀 베는 시기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이다’라고 본문이 적어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적다 보면 성경은 천하에 쌓아도 둘 곳이 없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성경이 알리려고 하는 내용을 깨닫는데 필요한 것은 성경 본문 어디에서 참고해서 알아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본문 내용에서 사무엘이 기도하던 밀 베는 시기가 우기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기후지리학을 문화적 배경으로 알아야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본문이 스스로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입니다.

③ 한 가지 덧붙입니다. 기후지리학적 전문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밀 베는 시기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성경 본문이 기록되던 삼상12:17 시대의 기후는 오늘과 꼭 같다 할 수 없습니다. 기후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도 또렷하게 차이가 나지만, 기후라는 것은 시대가 흘러가면서 상당히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대 지리 기후 환경을 전혀 모르지만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던 때도 있었지만 흙먼지만 날리는 박토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어떻게 정확히 변해 왔는지 현재 과학기술로서는 소경 코끼리 더듬듯이 짐작만 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현재 10여년 사이 우리나라의 대기와 기후환경은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답변자가 어린 시절과 현재의 차이를 두고 말하려 한다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삼상12:17을 문화적 배경으로 이해하고 이를 성경 해석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대충으로는 안 되고 정확하게 당시 환경을 추적해야 하는데, 수천 년 내려오는 동안 그 환경 자체가 오늘로서는 알 수도 없을 만큼 변했을 수도 있고 또 별 차이가 없다 해도 바로 그 성경을 기록하던 그 주변 수년 내의 환경동안은 급격한 변화가 있어 사무엘이 이렇게 발언하게 된 배경이 조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화적 배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없을뿐더러 비록 가능하다 해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해석해야 할 것들은 전부 구비시켜 놓았는데 왜 구태여 고생스럽게 세상 인간 지식이 가감되어 그 실체도 불명확한 문화적 배경으로 해석을 하려고 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4) 막11:12-14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 맺을 때를 두고 설명한 것도 너무 좁은 견해입니다.

이제 앞에서 3가지를 자세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4번째 경우는 각자 답변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을 철이 아니라도 전에 맺었던 몇 개쯤이 달려 있는 법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과목들의 열매 맺는 패턴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성구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해석해서 들어가면 오히려 성경 자체가 알려 주시려고 잡아 놓은 방향이 엉뚱한 데로 뒤틀어지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드시러 갔는데 가 봐야 열매를 한 개도 먹을 때가 도저히 아닌 때를 골라서 일부러 가시고, 그리고 열매를 요구했습니다.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환경 그런 시기 그런 입장에서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 성도에게 순점; 요구하실 때, 알고 보면 인간으로서는 순점; 해 드리고 싶어도 환경도 시기도 형편도 어떤 면으로도 도저히 순점; 할 수도 없는 그런 코너에 몰아놓고 순점;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 불구하고, 시기 불구하고, 생사 불구하고 주님이 원한다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만 우리 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일부러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 리가 없는 때를 골라서 그 형편을 아시고 가신 것입니다. 혹 일반 다른 무화과나무들은 열매 몇 개라도 있을 수 있는 때라 해도,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신 그 나무만큼은 열매가 한 개도 있을 때가 아닌 상황에 가신 것입니다.

(5) 백목사님이 늘 애용하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원어 좋아하고 문화적 배경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에게 대한 반론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는 문제를 두고 신신학계 쪽에서는 늘 시비가 많은데, ‘처녀’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을 두고 그 처녀라는 단어를 원어에서 무엇이라고 정의하든, 성경에서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날 것을 말한 ‘처녀’라는 단어의 성경적 정의는 눅1:34로 단정합니다. 남자 없이 여자 혼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바로 ‘처녀 잉태’입니다.

아이를 몇 명 낳았다 해도 호적상 결혼 사실이 기록된 적이 없으면 처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남녀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아이만 낳지 않으면 처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연애한 사실은 있어도 깊은 관계가 없었다면 처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할 때 그 처녀의 의미는 마리아가 결혼을 몇 번 했다가 실패했던 과부였을지라도, 예수님을 가졌을 때는 남자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천주교가 오해하듯이 마리아가 얼마나 깨끗한 여자였느냐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없이 여자 몸만 빌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기독관을 알지 못하고 원어만 살피고 문화배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한다면 마리아가 ‘처녀’였고 예수님은 처녀 몸에 출생했다는 사실을 두고 ‘처녀’라는 단어에서 말꼬투리를 잡기 시작한다면 어떤 신신학도 다 나올 수 있습니다.

좋기는 성경 해석을 두고 수도 없는 경우를 일일이 다 설명하려면 이 또한 세상에 다 쌓아두어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한두 가지 예를 가지고 깊이 따져 본 뒤, 잘못된 면이 나오면 그 이상은 따라가지 말고 전부 차단하는 지혜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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