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13절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너희로 ; 한글개역)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한글개역개정, 한글개역)
베자 헬라어 신약성경은
“12 Ὥστε, ἀγαπητοί μου, καθὼς πάντοτε ὑπηκούσατε, μὴ ὡς ἐν τῇ παρουσίᾳ μου μόνον, ἀλλὰ νῦν πολλῷ μᾶλλον ἐν τῇ ἀπουσίᾳ μου, 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τὴν ἑαυτῶ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 13 Ὁ Θεὸς γάρ ἐστιν ὁ ἐνεργῶν ἐν ὑμῖν, καὶ τὸ θέλειν καὶ τὸ ἐνεργεῖν ὑπὲρ τῆς εὐδοκίας.”
이 말씀은
“12 그러므로 나의 아가페하는 (자들아) 오직 나의 방문 동안처럼 아니라 도리어 지금 나의 부재 안에서도 더욱 많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라 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심이니 선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원하심이라”(종교개혁성경)입니다.
본문에 대하여 베자헬라어신약성경, TR, 비잔틴본문, 네스틀레-알란트 28판, UBS 5판, 웨스트코트-호르트, 티센도르프는 동일합니다(단, 13절의 ‘Ὁ Θεὸς’에서 네스틀레-알란트 28판, UBS 5판, 웨스트코트-호르트, 티센도르프는 ‘ὁ’를 삭제하였습니다).
문제는 번역입니다. 13절에서 한글개역개정역은 불변사로 접속사인 ‘γάρ’(왜냐하면)를 삭제하여 12절의 ‘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τὴν ἑαυτῶ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κατεργάζομαι의 현재, 중간태 · 수동태 : 디포넌트, 명령형)’(두렵고 떨림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라)와의 연결을 단절하여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으며, 나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신칭의’ 곧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종교개혁의 모토인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정반대의 말씀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바로 ‘γάρ’를 해석하지 않아 생길 수 있는 문제이며, 이렇게 잘못된 해석은 펠라기우스, 아르미니우스, 존 웨슬레와 같은 사람들을 나타나게 합니다.
13절의 ‘γάρ’는 우리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라’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개인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γάρ’를 삭제함으로 그 의미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개역개정역은 ‘εὐδοκίας’(εὐδοκία)를 앞에 있는 ‘θέλειν’에 끌고 가서 ‘기쁘신 뜻을’이라고 명사 ‘εὐδοκίας’를 형용사로, 동사 ‘θέλειν’을 명사로 억지로 번역하였는데, ‘εὐδοκίας’ 앞에 ‘ὑπὲρ’가 있으므로 ‘εὐδοκίας’와 ‘θέλειν’을 따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εὐδοκία’는 ‘선의, 호의, 은혜, 기쁨, 의도, 의향’을 나타내며,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 third edition(BDAG)(Frederick William Danker, The University Chicago press, 2000)은 ‘1, good will. 2, good pleasure.’로 기록하고 있으며, Mickelson's Enhanced Strong's Dictionaries of the Greek and Hebrew Testaments는 ‘1, satisfaction. 2, (subjectively) delight. 3, (objectively) kindness, wish, purpose.’로 기록하고 있고, A Greek-English Lexicon, Liddle and Scott, A New edition(Stuart Jones and McKenzie, 1961, Oxford)는 ‘good will’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 번역에 대해 글을 읽다가요... 제가 원어를 혼자 조금 찾아보다 보니까 아무래도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겨서,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목사님께서 개역개정 성경이 'θέλειν(델레인, 원하다)'이라는 동사를 '소원'이라는 명사로 억지로 바꿨다고 가르쳐 주셨는데요. 이 단어 앞에 정관사인 'τὸ(토)'가 딱 붙어 있어서 'τὸ θέλειν(토 델레인)'으로 되어 있잖아요.
제가 아는 바로는, 헬라어에서 동사원형 앞에 이렇게 정관사 'τὸ(토)'가 붙으면 우리말의 '~는 것'처럼 명사로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제가 학창 시절에 배운 짧은 영어 문법으로 생각해보면, 'eat(먹다)' 동사 앞에 'to'를 붙여서 'to eat(먹는 것)'으로 쓰거나 동명사(~ing)로 쓰는 거랑 비슷한 원리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헬라어는 정관사 'τὸ(토)'가 아예 붙어버리니까, 영어의 to 부정사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분명하게 명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바로 뒤에 나오는 'ἐνεργεῖν(에네르게인, 행하다)'라는 단어도 똑같이 앞에 'τὸ(토)'가 붙어서 'τὸ ἐνεργεῖν(토 에네르게인, 행하는 것)'이라는 명사 뜻으로 쓰인 것 같고요.
그렇다 보니까, 개역개정 번역하신 분들이 동사를 억지로 명사로 꾸며낸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헬라어 문법(정관사+동사=명사)을 그대로 살려서 "소원(원하는 것)을 두고 행하게(행하는 것) 하시나니"라고 번역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습니다.
문법 구조 자체를 놓고 보면 동사를 명사로 번역한 게 무리한 억지 번역은 아니지 않나 싶어서요.
혹시 제가 잘 모르고 오해하거나 놓치고 있는 원어의 뜻이 있다면,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우리의 구원이 단번에 딱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갓난아기처럼 계속 자라가 구원에 이르게 됨으로 보면, 빌립보서 2장 12절에 "구원을 이루라"는 내 힘으로 천국에 가라는 게 아니라 이미 천국에 가는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책임을 가지고 이루어 가야 할 구원이 있음을 알려주는 성경말씀 같습니다. 성도가 이루어 가야 하는 구원도 본질적으로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이구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래서 정리해 보면,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어서 1. 이미 얻은 구원(엡2:8~9)이 있고, 2. 천국백성된 구원받은 자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구원과(빌2:12) 자라서 이르러야 할 구원(벧전2:2) 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두 종류의 구원, 즉 1. 믿음과 은혜로 얻는 구원과(엡2:8~9) 2. 책임을 가지고 자라면서 이루는 구원이(빌2:12,
벧전2:2) 있는 것 같습니다.
디오니시오스 트락스(Dionysius Thrax)는 관사를 ‘πτῶσιν ὀνόματος δηλοῦν μέρος λόγου(명사의 격을 표시하는 품사)’라고 하였으며, 정창하 교수는 ‘헬라어 관사는 단지 정관사(명사 앞에 붙어서 지시나 한정의 뜻을 나타내는 관사 : 표준국어대사전)만 있으며, 수식하는 단어와 성, 수, 격이 일치하여야 한다’(최신성서헬라어, 보이스사, p. 4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용사를 명사화 하기 위하여 사용하며, 동사나 명사 앞에 오는 관사를 저는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καὶ τὸ θέλειν καὶ τὸ ἐνεργεῖν ὑπὲρ τῆς εὐδοκίας.’에서 ‘τὸ’가 중성, 목적격이므로 ‘선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라’고 번역해야 되나 ‘τὸ...τὸ..’가 둘 다 목적격이어서 앞의 것을 생략하였으나 지금 보니 넣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글개역개정과 한글개역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자기의’라는 말이 없으며(θέλειν와 ἐνεργεῖν은 부정사로 인칭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저들이 임의로 넣은 것이며, 저들의 방식으로 번역하면 θέλειν과 ἐνεργεῖν 사이에 καὶ가 있으므로 뒤에 있는 ‘행하게’를 ‘기쁘신’과 같이 해석해야 하며, ‘자기의 기쁘신 행하신 뜻을 위하여’로 끝마쳐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의 한글 개역과 한글개역개정역의 번역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는데,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전통 본문에는 없고 현대판 사본인 네스틀레-알란트판에 ‘εἰς σωτηρίαν’라고 있는데, ‘εἰς’는 ‘안으로, 안에, 향하여, 위하여,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저는 ‘εἰς σωτηρίαν’을 오리겐의 위조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조직신학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쉬운 말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간단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다음은 성령께서 그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우리를 견인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견인하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성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주석은 언어학으로 가고, 언어학은 고고언어로 가다가, 어학에 붙들리는 면이 많아서 공회는 주석도 최대한 기피합니다. 무식하다 보니 기피할 것도 없이 주석을 읽을 줄도 모릅니다. 또 읽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뜻은 좋으나 그렇게 하다 보면 번역 성경의 오류에 매여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력도 부족하고 역량과 여건이 되지 않아서 주해 주석 성경신학을 기피하지만 신앙도 있고 실력도 있는 분들이 먼저 연구해서 펼쳐 놓으면, 줏어 듣고 신세를 집니다. 잡화상에 물건이 아무리 많고 재래 시장이 어지럽다 해도 눈치가 있으면 정품 진품을 알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로 박윤선을 통해 물품을 소개 받으면 그래도 일단 신중하게 들여다 봤습니다. 그런데 너무 복잡하여 10여년을 함께 하다 서로의 기준이 다르다 보니 헤어 졌습니다.
교리도 주해도 주석도 신학도 어학도 모두 멀리 하던 이 곳에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을 소개하는 분이 계셔서 이 곳의 수 만개의 글 중에서도 빛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살피는 분을 통해 역시 언어의 한계는 언어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성령만 의지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는 아는 대로 말씀을 실행할 때 비로소 빛을 주기 시작한다는 것이 공회 신앙입니다. 실제로 신앙이란 초대교회부터 다 그러했는데 섞인 것이 많아 혼잡해 졌고 중간에 섞인 것을 비켜 서느라고 애를 먹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역사하시는 것"이나 "원하시는 것"도 결국 동사(역사하다, 원하다) 뒤에 '~는 것'을 붙여서 문장 안에서 명사처럼 쓰이도록 만드신 것(명사구)이잖아요? 마치 제가 말씀드렸던 영어의 to 부정사 명사적 용법(to eat = 먹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개역개정 성경이 θέλειν을 '소원(명사)'으로 번역한 것이나, 목사님께서 θέλειν을 '원하시는 것(명사구)'으로 번역하신 것이나... 결국 헬라어 원어에 있는 정관사 'τὸ(토)'의 역할 때문에 두 번역 모두 우리말로 옮길 때 자연스럽게 명사 형태로 번역하신 것은 똑같은 원리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직접 "원하시는 것", "역사하시는 것"으로 문법에 맞게 명사화해서 번역을 수정해 주신 덕분에, 개역개정 성경 역시 동사를 억지로 명사로 꾸며내어 창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분명하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실제 번역 수정을 통해서 더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속한 공회 측에서도 '견인', '성화', '이신칭의' 같은 조직신학적 한자 용어들이 일반성도들에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신학 용어를 쓰는 대신 방금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신 그 구원의 원리를 "이미 얻은 구원(칭의)"과 "앞으로 이루어 가는 구원(성화)"이라고 아주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은혜로 성화를 이룬다"는 말씀이나, 개역개정 성경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나, 저희가 배우는 "이루어 가는 구원"이나... 표현만 다를 뿐 껍데기를 벗겨보면 모두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셨을 때 국어 문법책을 같이 만드신 게 아니라 한참 뒤인 1800년대 후반에야 처음 문법책이 나왔고, 영국의 영어 문법책도 수백 년 동안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고 쓰다가 1500년대 후반에야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비록 옛날 사람들이 1세기에 직접 쓴 헬라어 문법책은 없어도, 요즘은 파피루스 같은 옛날 문서들이 엄청 많이 발견돼서 전 세계에서 다 인정하고 가르치는 헬라어 문법 기준이 이미 잘 잡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개역개정 번역하신 분들도 그냥 아무 기준 없이 지어낸 게 아니라, 그렇게 다들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문법을 보고 번역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예로 들어주신 '아내의 선물'은 우리말도 똑같이 '어머니의 사진'이라고 하면 그게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사진'인지 '어머니를 찍은 사진'인지 앞뒤 문맥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잖아요. 사도행전 앞뒤 문맥을 보면 그냥 상식적으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번역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것 같아서요.
어차피 헬라어도 옛날 사람들이 쓰던 말인데, 앞뒤 문맥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번역하는 것보단 전체 흐름과 문맥에 맞게 번역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