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라고 하는 '사람'
1. 예수님은 ‘사람’이셨다.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하셨고,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었다. 그가 원래 소경이고 걸인이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떻게 눈이 떠졌는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묻는다. 소경의 대답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 보게 되었노라 그가 어디 있느냐 …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소경의 대답 중에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그랬다. 이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교리적 해석으로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라고 한다. 이때 참 사람이란 새사람의 의미가 아닌 섞임 없는 순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성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인양성일위.
사람을 사람이라 하면 모를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 이 소경이 보고 아는 그대로 예수님은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전부가 아는 그대로 예수님은 ‘사람’이었다. 사람이어서 사람이라 했고, 사람이어서 사람으로 상대했고, 사람이므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자기들 하고 싶은 말,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말을 했고 그렇게 대했다. 소경도 그랬고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결과는?
사람이어서 사람이라고 했고, 사람이어서 사람으로 대했는데, 이 소경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이유는 예수님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하나’라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았고, 그래서 그 말을 귀 넘어 들어도 되는 말로, 예사로 들어도 되는 사람의 말로 들어서 무시했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이 소경은 사람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에 한 사람은 사람인 예수님을 사람으로 알고 조롱했고, 같은 입장 같은 처지였던 한 강도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궁극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현상에서는 본인들의 판단이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며, 결과를 보고 과정을 아는 원리에 의해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을 조롱한 강도는 같은 부류였고, 그들은 진실이 없는 외식의 사람으로 단정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으므로 사람으로 오셨다. 성경과 교리를 조금 알면 상식이다. 사람으로 오셨으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면… 설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으로 오셨는데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으니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으므로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예언하셨고, 예수님께서 직접 많이 알리셨다.
문제는, 많은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사로 넘겼고,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시며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그들의 귀에 직접 알아듣도록 말씀하셨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인간적인 기존지식의 선입관만 가진 그들의 귀에는 이 말씀들이 들리지 않았고 믿어지지 않았다. 실상은 부러 믿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의 교권을 다 내놔야 한다. 예수님 밑으로 들어가서 배워야 한다. 한낱 나사렛 목수의 아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배운다?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불가능하다. 절대다수는 그렇게 못 하고 하지 않는다. 교계가 그랬고 공회가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밑으로 들어가서 배운다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무시할까, 얕잡아 볼까, 함부로 대할까?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라는 표현이 설교록에 나온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심정을 아는 상식대로, 그런 세계를 들어가 보지 못하고 올라가 보지 못했고 그렇게 해 보지를 않았으니, 인간들의 이심전심으로 저거가 그러니 예수님도 그런 줄 안다. 세상이 그렇고 인간이 그렇고 인간 역사가 그렇고 작금의 공회가 그러하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시며 구주시다. 어릴 때는 모를 수 있다. 몰라서 좋을 것은 알 필요가 없다. 알아야 할 때가 되어도 모르면, 그때는 죄가 된다. 게으른 죄, 무식한 죄가 된다. 죄의 값은 영원한 사망이다. 예수님을 몰라봤던 죄, 알 수 있었는데 알지 아니한 죄, 일부러 모른 죄는 그 죄에 더하여 예수님을 못 박았고, 그 자손들은 2천여 년 세월을 유리포박 하며 비참했고, 영원토록 부끄럽고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2. 천사도 ‘사람’이었다.
소돔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아브라함에게 알리실 때 천사를 보내셨다. 천사가 왔는데 아브라함의 눈에는 사람이었다.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었고, 아브라함이 영접했다. 영접하고 보니 천사였다. 이삭의 출생을 말씀했고, 소돔 고모라 멸망을 알렸다. 그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소돔에 갔고, 롯이 그 사람들을 영접했다. ‘사람’이었다. 소돔 악인들은 못 보던 사람들이 오니까 나쁜 짓을 하려 했고 롯이 말렸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천사였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사람을 영접했는데 천사였고, 천사를 영접하여 아브라함을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롯은 결과적으로 비참했지만 소돔에서 멸망은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너무 높으시고 크시고 영화로우셔서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다. 태양에 가까이 가면 녹아서 없어진다고 한다. 하물며 피조물이 하나님을 보거나 만나면?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세상의 운영도 그렇게 하신다. 직접 역사하시지만, 인간이 접하는 것은 간접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천사인데 사람으로 나타난 것처럼.
잘 믿는 고관대작 부자가 집에서 식사하는데 웬 남루한 옷을 입은 냄새 풍기는 거지가 밥 동냥을 왔다. 높은 어른이 식사하는데 웬 거지가 들어오느냐고 고관대작 부자가 호통을 쳤다. 그날 밤 그 고관대작이 기도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꾸짖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멸시할 수 있느냐고. 이해 못 한 고관대작이 묻는다.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늘 내가 거지 차림으로 네게 가니까 네가 그렇게 박대해서 쫓아내지 않았느냐? 예화이지만, 참고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 비유를 말씀하시며,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렸다.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백 목사님의 해석은, 그것이 그렇게까지 주님에게 직접 하고 하지 않은 것인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오늘 눈에 ‘사람’으로 보이는 그 사람이 옳은 진리를 전하면 그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 사람의 말에 순종은 곧 하나님께 순종이다. 그 사람의 말을 거역하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알면 두렵다. 모르면 용감하다, 하룻강아지처럼.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인데 천사일 수도 있다. 사람인데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일 수도 있다.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알리고 또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핑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