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서 주관의 작용
1. 주관과 객관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이 있다. 줄이면 주객이다. 주인과 손님이라는 말도 된다. 주체와 객체라는 말도 된다. 쉽게 말하면 나와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나는 주관, 나 외의 모든 존재는 객관이다. 주관이란 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 자아라는 뜻이다.
2. 주관의 형성
주관은 객관으로 출발한다. ‘나’라는 존재는 객관인 부모에게서 났다. 부모의 유전자를 타고 난다. 주관인데 객관으로 태생하였고, 형성되는 것도 객관으로 주관이 형성된다. 부모라는 객관이 없으면 ‘나’라는 주관은 없다. 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는 주관은 객관인 부모의 영향을 거의 절대적으로 받는다.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유전자인 태생적으로, 출생 후 환경적으로 그러하다.
아이들 영어 교육용 만화영화에 모글리라는 늑대 소년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인데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졌고 사람과 떨어져 늑대의 손에 길러진다. 사람인데 늑대처럼 자라게 된다. 환경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는 교훈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주관이다. 그래서 어릴 때의 환경과 교육은 너무도 중요하다.
백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흰 도화지와 같아서 그리는 대로 그려진다고 했고, 주일학교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가르치셨고,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를 이루었다. 한국 교계에 그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해도 이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지금도 어린아이들의 환경과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자연 계시이고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객관으로 태어나고 객관으로 형성되는데 그 주체는 주관이다. 객관으로 형성된 주관은 세월 속에 주체적인 주관이 된다. 자아가 되며 정체성이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이다. 주관이 형성되면 갈수록 객관의 영향은 적게 받는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강할수록 객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관이 강한 사람은 고집이 세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이것이 심하면 객관성이 없어서 주변 사람을 참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많다.
3. 신앙생활에 주관의 작용
주관이 객관으로 태생하고 형성되어 주체로 성립되듯이, 신앙생활도 하나님이신 객관으로 시작된다. 택함과 중생은 객관의 역사이다. 주관의 의지와 노력은 무관하다. 객관 역사로 출발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주관 역사로 된다. 교리적으로 객관 역사는 기본구원이고, 주관 역사는 건설구원이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객관 역사이다.
믿음이란, 객관이신 하나님을 내 주관이 받아들여 내 주관이 객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내 주관이 객관화되는 것이다. 진리도 무인격의 이치이지만 객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객관을 내 주관이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객관인 말씀, 객관이신 하나님을 내 주관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자라지 않는다. 당연히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회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참 많이 한다. 설교 중에도 많이 하고 평소에도 많이 한다. 자기는 자기중심과 동일시되고 자기중심은 악이라는 교리 용어로 정의한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고집하면 자기중심 악인이 된다. 교리를 알고 용어를 아니까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는 주관이고 자아이다. 주관이 없으면 죽은 자가 된다. 자아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자이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한다는 뜻이고,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복지부동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합격만 하고 나면 가장 무능한 집단이 된다고 한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 안주하기 위해 복지부동하면서 객관에 순응하고 주관의 작용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 주관은 어떻게 선용해야 할까? 주관이 어떻게 작용해야 할까? 하나님을 상대해 본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을 찾아본다. 생각해 본다. 상상해 본다. 진리라는 객관을 통해서이지만, 실제 작용은 내 주관이 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의지한다, 바라본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함께하신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소원한다. 내가 하나님을 모신다고, 모시고 싶다고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나의 피난처로 삼는다고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동행하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가?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죄가 없어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말씀의 이치에 맞아야 하지만, 이 전부는 내 주관의 소원과 노력에서부터 출발한다.
믿음은 주관이 객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원은 주관이 객관화되는 것이다. 주관은 자기최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자기를 최면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노력하는 데서 객관이신 하나님은 내게 오시고 동행하신다. 주관의 노력이 없이 되는 객관의 동행과 역사는 없다. 주관의 노력 없는 구원은 없다. 건설구원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