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회복의 교회론 2차 보완- 문답식(2-1)

주의 회복의 교회론 2차 보완- 문답식(2-1)

주님사랑 0 16



이제 무명 2님의 글 내용 중에서 주의 회복에 관하여 해명 내지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을 짚어가면서 나름대로 간략하게 답글을 적어보겠습니다. 겸하여 후반에 총공회측 교회론 언급 부분에 약간의 토를 함께 고려할 사항으로 달아보겠습니다.


1. 교제의 가능성

“우리 대에서 지방교회와 건전하게 서로의 장점을 배워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응: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가운데 지금까지는 매우 유익한 교제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한 몸 안의 지체들로서 몸을 세우는 교제를 추가로 나눌 수 있기를 저도 소망합니다.


2. 이상과 현실의 간격

1) 사람의 거듭난 영-이미 하나가 있음

“대표적으로 거듭난 형제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여 가기에 모두 하나의 교회라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것이 금생의 역사 교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면을 인정하시지 않는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각자 주님을 닮아가는 면으로는 하나의 교회, 참된 교회이지만, 나라는 한 객체 안에서 조차 하나의 교회로 일치되지 못하고 둘로 나뉘는 옛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조금만 넓히면 생명을 걸고 걸어가야되는 핵심 교리에서 조차 형제와 다른 부분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현실적으로 또 양심적으로 어찌 저들과 같은 교회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갔습니다.”

해명: 본질적으로 또 우주적인 방면에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가 하나다 라고 할 때 그 하나의 실체(본질)은 즉 우리 안에 영접된 생명되신 주님 자신이십니다. 곧 골1:27이 말하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라고 할 때 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 교회의 하나의 실체입니다. 또는 엡1:3의 표현대로라면 ‘평안의 매는 줄로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 고 할 때, 여기 나오는 그영(the Spirit)이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 하나의 실체(실재)는 지금 거듭난 모든 이들의 영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의 영과 하나된 한영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교회의 하나가 있습니다(계십니다).

그러므로 금생에서는 교회의 하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은 우리의 변화가 아직 안 된 혼(soul)의 상태를 보면 맞지만,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는 이미 이 하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가 사실은 새예루살렘임으로 우리가 우리의 거듭난 영안으로 돌이킬 때 이미 지금 여기서도 새예루살렘이 묘사하는 그 모든 것들의 실재(보좌, 생명강, 정금길, 진주문, 벽옥의 성벽, 성전 등등)를 맛볼 수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는 거듭난 믿는 이들인 우리가 이미 새예루살렘(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12:22). 이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이미 그렇다는 말입니다.


2) 사람의 혼의 처리- 분열 현상에 대한 시각 차이


“물론, 주님 보시기엔 한 진리와 성령과 피와 일치된 주님 닮은 부분만 추려서 한 교회로 보실수 있지만, 저희는 주님과 같은 전지전능 자가 아니고, 아직 현세에서는 가리워진 수건이 다 벗겨지지 않았으므로, 분명히 다른 노선이 존재하며, 개별 매 사안마다 각각의 그 길은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그르든지, 아니면 모두가 잘못된 길이든지 이 두 경우뿐일 텐데, 어찌 단일교회라는 면만 부각시켜 얼버무리시고 지나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 지방 교회론 적용자분들이 걷는 노선과…각자가 성경에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노선을 양심껏 걷기로 했으니 이름을 달리하여 구분하자는 노선이 있다면 실제로 전자와 후자가 무엇이 다를 것이며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데, 왜 다르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되풀이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해명: 앞의 답변처럼 이미 거듭난 우리의 영 안에는 단일교회의 실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방교회론 노선과 그렇지 않는 노선의 차이는 각기 다름이 존재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마땅히 이 시대 안에서 최대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지’의 차이입니다. 즉 교회내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열의 현상들을 어찌하지 못할 자연현상으로 인식할지 아니면 회개하고 책망받고 최대한 해결해 나가야 할 현상으로 볼 것인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분열을 책망이 대상으로 보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믿는 이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고전3:3). 더 적극적으로는 “믿는 이들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게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라’고 간청합니다(고전1:10). 에베소서에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의 예로 화평의 매는 띠로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4:1, 3). 그 외에도 하나를 권하고 나뉨을 금하거나 책망하는 구절은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런 권면은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게 우리가 귀 담아 듣고 최대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현세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다음 세대에나 봅시다 라고 대하는 것과 현재의 말씀과 경고로 받는 것은 그 결과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소극적인 본

“또, 초대 교회를 근거로 자주 제시하시는데, 바나바와 바울도 갈리웠고, 씨를 심고 물주는 아볼로의 역할과 바울의 역할이 다른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부러 외면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였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모든 믿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기록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자체가 단일교회를 향하신 저작자 하나님의 글입니다. 성경을 적으신 그 분에게서는 감리교니, 장로교니, A교파니,B교회니 이런 구분 자체가 필요없으므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 하노니'라는 성구를 들어 지방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 이해에 오해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세 역사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을 구분하여 상대한 기록이 분명히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이곳에 소개된 지방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도 단일교회를 염두에 두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여 상대하셔서는 안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무관심 하신 듯이 보이셔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해명: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 중에는 그렇게 본 받으라고 적은 것이 있고 그렇게 따라 하지 말라고 적은 것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 이면에는 마가라 하는 요한과 바나바의 친인척 관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다툼 이후 바나바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 사역했습니다. 소극적인 사례를 통해 그렇게 하지 말하는 본으로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리고 ‘게다가..’이후의 글 내용은 논점이 선명치 않아서 일단 그냥 인용만 하고 해명은 보류하겠습니다.


4. 목자와 형제- 목자도 양도 다 한 가족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에 분명 너희는 동역자요 형제라는 가르침도 있지만,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언급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양을 치라고 명령하신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언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형제라는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시는 것도 의문 이었습니다.”

해명: 형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성직과 평신도를 나눔으로 계급적인 높고 낮음을 따지는 현재의 관행에 대한 반작용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 주의 회복 안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많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보살피듯’(살전2:7) 목양하는 부분에 대한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에서 목양을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것으로 말하며 ‘기저귀의 권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즉 목자가 얻는 권위는 양의 배고품을 해결해 주고 불편한 부분을 해결해 줌으로 얻는 것이지 그 위치나 지위 자체가 권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목자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라고 말합니다(11절). 이렇듯 양을 치는 목자(목사)와 양의 관계는 한 가정 안에서의 가족관계입니다. ‘랍비라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한 분이시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23:8).


5. 초기교회와 신언

“게다가, 아무리 초대교회라 할지라도 성경이 귀하디 귀한 그 시절에, 평생가야 성경 한권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한 형제들이 많았을 그 시기에, 모두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배우고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공급할 조건도 실력도 없을 그 시기에 지금의 지방교회처럼 모두가 신언을 하는 그런형태로 예배가 진행되었다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근거로 자주 예를 드는데, 그들은 대부분 동급 실력의 동역자들이었고 문을 열러 나온 계집 아이가 신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누가봐도 명확한데 왜 이를 그렇게 까지 강하게 주장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그 계집 아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라는 참말을 한 것을 신언이라 한다면, 그것은 꼭 예배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발언의 기회와 경청할 수 있는 자세를 허용하는 제도와 교훈으로 충분히 수용할수 있다고 봅니다.”

해명: 초기교회의 특징은 네 가지를 실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1) 사도들의 가르침, 2) 사도들의 교통, 3. 떡뗌, 4) 기도입니다(행2:42). 그 당시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 예수님께 배운 것들을 가르쳤고 그것을 지켜 행했습니다(마28:20). 밖의 쓰여진 말씀은 희귀했을지라고 살아 있는 말씀이 그들 안에 또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있었기에 그들은 모이면 할 말이 있었고, 또 신언의 말을 통하여 서로 격려받고 목양받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일시적인 모임이었고, 그후 이 집 이 집에서 자주 모였습니다(행 2: 46-47). 계집 아이가 모였던 집회는 신언집회가 아니라 베드로가 옥에 갇힌 현실때문에 모인 기도모임 이었습니다. 기도모임과 신언집회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실행되고 있습니다.



6. 신언집회에 대한 오해


“다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형제간에는 성화의 정도가 다르기에 비록 어제 나온 초신자라 할지라고 목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상대들이 있으며, 또 수십년을 넘게 다닌 신도라 할지라도 어떤 형제들에게는 양의 위치에 있어야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방교회와 같이 예배시간에 모두가 돌아가며 신언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속의 옛사람의 마귀 말이 공급되는 면의 부작용은 차제하더라도 젖을 주는 어머니와 젖을 먹어야만 되는 갓난아이라는 관계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질서를 인간이 만든 제도로 헤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 대한 적용에 있어서는 지방교회가 너무 한 면만 보고 걸어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해명: 신언 또는 신언집회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다’ 라는 성경의 권면을 따라 설교 강단을 1인 목회자로부터 모든 지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신언 실행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고 각 사람이 그런 지체의 분량에 따른 기능발휘를 통하여 몸을 건축하는 것(엡4:16)이 궁국적인 목표입니다. 모두에게 기회를 주더라도 어짜피 믿음의 정도에 맞게 신언을 할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 시간여의 집회시간 동안에 실질적으로는 집회에 참석한 모든 지체들이 다 신언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계산이 안 됩니다. 따라서 한번에 어디는 열 댓명, 어디는 삼십명 각지 지방교회 상황에 따라 다 다릅니다. 또한 새신자가 어설픈 말을 해 냄으로 인해 있을 수 있는 진리적인 혼동이나 무질서에 대한 대책으로 서두와 말미에 분량이 있는 지체들이 방향을 잡아주고 결론을 마무리하는 실행을 하는 곳이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재의 상황은 여전히 저희가 본 그 이상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시를 따라 이 길을 갈 때 갈수록 확신이 넘치고 또 그 열매들의 진보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이 길이 맞다고 보았기에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단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7. 공회의 실행-성경근거

“공회에서는 반사, 보조반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또 권찰, 구역장 제도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형태가 지방교회가 그렇게 원하는 형제간의 신언의 가장 모범적이며 구비한 제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면도 담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건의 사항: 저희도 일단 마음을 열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자 합니다. 워치만 니 이후 줄곧 저희는 단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런 근거나 사례가 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그런 면에서 각 실행들에 대한 성경적인 기초(근거)를 무엇으로 보고 계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려 봅니다.


8. 교단별 명칭이 더 성경적이다-그 길을 계속 가시기를

“…왜 그래야만 되는지에 대한 입장과 이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럼에도, 저와 공회는 교회 혹은 교단별로 명칭을 가져가는 것이 더 성경적이란 입장입니다.”
견해: 사람이 교회라는 관점은 공감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 하나 하나가 각기 독립된 교회다 라는 부분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한번 더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한 알의 밀알에서 흘러나온 밀가루는 한 떡에 합류되어 있으되 그 떡의 일부일 뿐 떡 전체는 아니라는 구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책에서 ‘믿는 이들’과 ‘지체’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죄지은 어떤 사람에게 처음에는 한 사람이 가고 그 다음에는 한 둘이 더 가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각 사람 교회론>은 혼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미 처음간 사람도 교회이고 거기다 한둘이 더해졌으면 이미 더 견고한 교회인데 왜 성령은 이 두 세 사람에게 재차 그 ‘교회에게 말하라’고 권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논의되는 <한 지방 교회론>은 이 지역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책임을 지고 처리하는 실행적이고 행정적인 방면의 필요를 고려한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는 ‘각 교회별로 장로들을 선택하여 세웠다’(14:23)고 말하고, 디도서는 ‘각 도시에 장로들을 세우게 한다’(1:5) 고 말합니다. 장로들을 세우는 범위는 각 도시를 범위로 하는 교회이고 그 장로들을 세우는 목적은 마태복음 18:17처럼 교회 내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처리하는 행정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 교회론> 과는 다른 차원의 교회를 어떤 범위로 볼 것인가..하는 것이 현재의 쟁점입니다.


9. 신언에 관한 제반 사항-.우선 간략하게

간략히 다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① 신언의 정의
② 신언의 목적, 취지
③ 신언의 사례, 형태
④ 신언하는 장소
⑤ 신언하는 시기
⑥ 신언의 다른 형태
⑦ 신언할 수 있는 자격
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에 있어서, 신언 이외에 다른 방법들 소개와 가치 및 효용 비교

해명: 우선은 참고문헌을 소개해 드리고, 별도 글로 시간을 내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신언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 18-20과(329-363쪽), <그릇을 예비함> 24과(401-407쪽), <교회집회에서 신언함>(개요)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0. 여자의 위치

“원칙적으로 저희 공회도 주님 사랑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다만, 그 적용 현장에 있어서는 공회 교회론에 입각하여 유연하고 지혜롭게 순리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help1 님의 글을 참고해 주십시오. 후에 복잡한 글들을 적으면서 제가 잊을까 하여 이 소제목을 적어 놓는 것 입니다.”

추가: 설명 잘 들었습니다. 설명하시는 취지는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여 함께 묵상해 보고 싶은 대목은 1.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사례, 2. 디모데 전서가 소개하는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장로의 자격입니다. 지금 논의의 초점은 <교회 행정과 자매들의 관계>입니다.


11. 가족분들의 위치

“워치만 니 목사님의 사례나,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사례, 그리고 주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라고 하신 사례 들의 근본 취지나 근본 원리는 혈육보다 진리가 먼저요, 혈육보다 순종이 먼저라는 것으로 성경을 읽은 배경이라 생각합니다.

가족이라 하여 특별한 대우나 권위가 주어져서도 안되겠지만, 가족이라 하여 부당한 대우나 부당한 권리 양보를 주장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기에 본인들은 더욱 조심해야 되기도 하겠지만, 순리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맞추어 자유할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즉, 혈육을 그 가치 이하로 무시하는 것도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명령 대로, 중생된 이후 저희들의 신앙여정에는 지방정실, 동류정실, 혈육정실이 그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될수 없습니다. 만약 방해가 될 경우에, 하나님과 혈육 둘중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만 된다면, 본토, 친척, 아비 만큼 신앙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봅니다. 혈육은 혈육만큼만 대우하면 되는 것이지, 구지 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의 밥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닮아가는데 먹고 자라고 이용하는 밥이요 세상입니다. 더럽지만, 그 세상 속에 우리를 두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주의 회복의 경우: 워치만 니의 경우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아내되시는 자매님이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경우는 자녀가 8명이나 되었습니다. 교회지원도 거의 없고 가장은 교회과 사역의 일로 며칠 씩 몇달씩 집을 비울 때 그 아내되시는 자매님이 때꺼리와 자녀 교육의 짊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역자의 가족들의 희생은 주님의 보상을 요쳥할 만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교회 생활 초기에 가정의 필요를 많이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즉 사역자가 가정을 소홀히 함으로 대적에게 틈을 주는 일도 어찌보면 불가피 할수 있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으되 모두가 그렇게 따라야 할 좋은 본이 아니라는 내적 외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딤전3:4). 즉 그들도 가족으로서의 특혜는 못 받더라도 성도들 중 일부로서 성도들이 받는 만큼의 사랑과 목양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의 회복의 경우는 최근 들어서 그 이상으로 오히려 교회 일도 부지런히 돌보면서 가정도 잘 돌보는 지혜를 찾고 있고 또 대만에 있는 교회들의 경우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도 이런 앞선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2. '그 영'과 '성령님'과 '사람의 영'의 구분- 별도로 설명

“이 세가지의 구분은 교회론과는 별도의 주제로 생각됩니다. 사회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교회론과 별도의 주제로 뽑아주셨으면 합니다.”

해명: 신언을 설명드릴 때 이 부분을 겸하여 설명드릴까 합니다.


13. 자세한 주석 사이트- 없는 듯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라이프 스터디 사이트는 찾았습니다. 워치만 니 목사님의 한글 주석 혹은 주해 사이트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명: 위트니스 리는 신구약 66권 전권에 대한 주석(라이프 스터디)를 썼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워치만 니 형제님이 1950년 대에 투옥되심으로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보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경우 마태복음, 계시록 등 일부 주석이 있으나 웹싸이트 형태로 소개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직 그렇게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대신에 영어로 된 싸이트는 워치만 니 저서 전체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앞서 소개한 자료들에 들어 있습니다만….













>> 주님사랑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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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영을 알고 거듭난 이후 장차 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믿는 이들이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가르치는 면에서 주의 회복과 총공회측은 큰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는 언제나 유쾌하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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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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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지방교회 내부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이곳에서 논의된 범주는 1. 성경에 한 지방 한 교회를 실행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2. 이들은 일부 항간의 일부의 주장처럼 이단인가, 아니면 같은 생명을 받은 한 몸 안의 참된 지체들인가? 하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정도의 대화가 오고간 상태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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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만일 <한지방 한 교회>를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자 했다면, 1.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주님의 마지막 간구 내용을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합당한가 (요17:21)? 2. 성경이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 라고 할 때, 그 하나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 하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와 구체적인 방법론은 무엇인가 (엡 4:2-3)? 3. 지역교회의 성경적인 범위는 무엇인가 (계1:11)? 4. 지역교회 내에서의 분열과 분쟁은 왜 생기며 어떻게 평가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롬16:17.고전3:3)? 하는 문제들을 주님의 얼굴 빛 아래에서 충분히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는 위 4 항목 중 3번 하나를 다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교회론에 포함되어야 할 본질적인 부분들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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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회복이 추구하는 교회론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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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총공회 측에서 익히 알고 계시는 내용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런 다 아는 진리들을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다룹니다. 그 이유는 머리로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교훈때문이고, 참으로 빛가운데 알기 위해서는 믿음의 들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두서 없이 그러나 ‘교회론’이라는 범주에 해당될 말들을 몇 가지 소개드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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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주와 건축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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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신혼 부부가 앞으로 자녀들을 낳으면 함께 살 집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고려와 자문 끝에 지을 집에 대한 구상을 마친 후 건축업자를 불러서 자신이 짓고자 하는 집의 자세한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후 그 건축업자는 주인이 주는 땅과 건축자재, 그리고 일에 대한 수고비를 넉넉히 받아가면서 각 분야의 일꾼들을 부려서 마침내 그 집을 완공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 건축업자는 자기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지은 집이지만, 사실은 그 집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않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백영희는 일종의 건축업자입니다. 그들이 어떤 부분을 맡아 수고하였지만, 그 집 주인은 주님 자신 이십니다. 그 분이 집을 짓는데 필요한 일체를 다 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집을 '내 교회'라고 하실만 합니다(마16:18, 딤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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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집의 특정 부분을 짓는데 참여했던 일꾼들이 자신들이 작업한 그 벽에, 그 굴뚝에, 그 툇마루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고, 더구나 그 부분의 소유권까지 주장하려 한다면 그 집 주인을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예가 왜 우리가 교회 앞에 특정 명칭을 붙일 수 없는지를, 그리고 교회는 그냥 교회이고 정 구별이 필요하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정도로 바울이 말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것을 너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집 소유주의 마음을 너무 헤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팔아 그 교회를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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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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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인 주님의 몸은 또한 '소제'로 예표됩니다(레2:4). 즉 그분의 몸인 교회는 소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확장과 증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소금과 유향은 있으되, 꿀과 누룩은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변화된 고운 인성과 성령(the Spirit) 그리고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그 구성 성분으로 합니다. 또한 어떤 죄된 것이나 옛사람에 속한 천연적인 애정과 선함은 소제 안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이 소제가 예표로 제시되고, 신약 서신서에서는 이 소제가 그 순도를 점점 더해 가는 과정에 있고, 요한 계시록의 새예루살렘은 이 소제의 떡이 온전히 완성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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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을 사는 우리의 눈은 완성된 소제인 새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보며, 현재의 불순물들을 버릴 것으로 대할지, 아니면 끌어 안고 갈 대상으로 대할지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죄와 세상을 분별하는 것은 그래도 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되어야 할 자아 그 중에서도 특히 개인주의적 성향, 종교성, 특별한 민족성, 특별한 문화를 분별하여 걸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등에서 이런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이물질들을 분별하고 걸러내는 것들을 놓고 단호하게 싸웠습니다. 한번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한 동역자 형제님이 한국 교회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러 왔을 때 어떤 본문을 다루면서, '한국에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들이 문제다' 라고 했습니다. 소제 안에 그리스인, 수구디아인, 유대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참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교회를 소제로 아는 사람입니다. 다양한 민족들과 언어들이 한데 어울려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역사가 50여년 이상된 주의 회복 안에서는 이에 대한 체험이 적지 않습니다. 총공회 안에서 이런 인종과 문화와 언어문제는 현재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부분들이 교회 안에서 왜 문제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실감하실 날이 올 수 있습니다(행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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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들과 한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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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그분이 오신 것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많은 밀알들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다 이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참되게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떨어져 죽은 밀알과 그로 인하여 나온 많은 밀알들은 그 생명 그 본성에서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밀알들이 생명과 본성에서 죽은 한 알의 밀알과 똑같다 는 말을 들을 때 우린 아멘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총공회측 성도님들만이 이 말을 참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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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제 한 알의 밀알을 통해 산출된 이 많은 밀알들이 할일은 무엇인가? 각자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대함으로 영양분을 빨아들여 각자의 밀알들이 자신들의 등치를 제 각각 부풀려 가는 것인가? 이것은 밀알들이 한 단계 더 전진하여 갈려지고 빻아져서 한 떡이 되는 이상을 볼 때 저절로 의문이 풀릴 수 있습니다(고전10:17). 이 한 떡은 많은 밀알들에게서 나온 것되, 성만찬 상 위에 놓여진 것은 많은 밀알들이 아니라 한 떡입니다. 각 개인이되, 각기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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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서의 네 생물(사람, 소, 사자, 독수리)이 사면으로 향하여 있고 각기 떨어진 것이 아님으로 독수리가 앞을 보고 나아갈 때, 다른 셋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옆걸음과 뒷걸음으로 그 독수리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이 떡은 그런 한 떡입니다. 한국 사람 떡이 다르고, 미국 사람 떡이 다르고, 워치만 니 떡이 다르고, 백영희 떡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매주 나누는 성만찬의 떡이 어느 범위까지를 포함하는가가 그가 몸을 본 정도를 가늠케 합니다. 우주가운데 몸은 하나입니다(엡4:4). 우리가 성만찬시 상 위에 놓인 한 떡을 볼 때, 그 떡은 이 유일한 한 몸을 의미하고 그것을 대표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도 교회론입니다. 저희들은 매주 성만찬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저희들의 주일을 지키는 주된 목적은 성만찬에 참여하고, 또 모두가 신언함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말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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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맏형님, 많은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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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구주시요, 우리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맏 형님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이 우리의 맏형님이시라는 고백을 불경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말이 성경에 있기에 적극 반대는 않지만 뭔가 어색해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고백을 달콤하게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2장 11-12절은 매우 심오합니다. 즉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만 있으신 독생자 즉 제 2격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고, 여기에 구원론과 교회론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이듯이, ‘모두 한분에게서 났으므로’가 서로가 형제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입니다. 형이 동생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그는 또한 교사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 관계는 교사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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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것은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맏형처럼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롬8:29). 즉 우리가 맏 형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 지금하고 계신 일이고 사도 바울을 포함한 주의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갈4:19). 물론 그분의 경배받는 신격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으며 그것은 그분의 고유영역입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는데, 같은 피조물들끼리인 지체들끼리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임을 일깨워 줍니다. 가족 중에 어떤 형은 힘도 세고 말도 잘하고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려 동생들을 잘 돌봅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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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역자와 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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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치만 니가 하루는 교회 인도자들을 모아 놓고 교회 행정을 돌봄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간섭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 방 안에 있던 봉사자들은 다 알았습니다. 워치만 니는 어머님의 회심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고 주님께 이끌렸습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가 사역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서 그의 어머니에게도 행정에 관여할 분깃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공과를 함께 통과한 이후 주의 회복 안에는 사역자의 친인척 문제에 대해서 선명한 선이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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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죽음을 그 이후의 부활영역입니다. 그러한 교회 또는 각 지역 교회들의 행정과 관리는 머리의 지시를 받는 대리권위 즉 복수의 장로들의 손에 맡겨진 것입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 사후 현재 주의 회복의 인도는 철저하게 영적 분량이 검증된 일단의 '형제들'의 어깨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이 머리 앞에서 기도하며 서로 교통(교제)하며 한 마음 한 뜻 가운데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역 교회이든 사역이든 친인척 특히 여자가 행정에 관여하는 경우는 일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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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의 경우에도 사역자의 가족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보상은 장래에 있을 것입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현재 위트니스 리의 미망인 자매님이 생존해 계시지만 그분이 사역이나 교회 행정에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영적 사례들을 지켜보았고 영적 공과를 통과한 그 분량과 분깃은 수 많은 자매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고 또 한 자매로서 다른 자매들을 온전케 하는데 그 고유한 분깃을 잘 발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 행정에 있어서는 사역자의 가족이기 때문에 갖는 지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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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매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몸 안의 한 지체로서 누린 그리스도를 말할 수는 있지만, 교회 행정에 관여하는 일이 일체 없는 기준으로는 총공회측의 다음 언급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총공회분들은 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또 성경에 맞게 실행하시는 것으로 알기에, 경솔한 판단을 자제합니다. 아울러 교회론과 관련된 것이기에 아래처럼 말씀하시는 배경을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문의를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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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번 선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4층 사모님이 서부교회를 또는 서성교회 사모님이 총공회를 과거처럼 지도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을 보이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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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것 그리고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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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 길을 가다가 교회를 보았습니다(행9:4). 즉 몸과 머리가 하나로 연결된 새사람을 본 것입니다(엡2:15). 그후 그는 자기가 본 ‘하늘의 이상’(heavenly vision)을 거스리지 않기를 힘썼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하건 몸을 세우는데 이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하고, 몸을 손상시키거나 더럽히는 것은 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쓴 14(13) 서신의 압축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같은 성경을 보아도 사실은 바울이 본 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단지 힌 종이 위의 검은 글씨를 읽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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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아시는 주 예수님과 그들의 대화는 늘 동문서답일 때가 많습니다 (요8:55, 57).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말로 전했을 뿐 아니라 또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몸을 보고 몸을 알게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워치만 니는 어느 날 자신에게 훈련을 받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자기가 몸을 본 것을 말해 보라고 요청한 후 이리 저리 말을 하면 그후에 당신은 몸을 보지 못했다고 말해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요청한 후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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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후 워치만 니가 왜 누구는 몸을 보지 못했다고 말헀는지, 또 몸을 본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공감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몸을 본 사람은 결코 개인주의 또는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몸을 보아도 그렇습니다(고전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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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치만니-그리스도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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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워치만 니가 쓴 <그리스도의 몸>(한국복음서원, 2006)이라는 책(134쪽)의 목차 만을 이곳에 소개드리고 잠정적으로 교회론의 개괄적인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무명2님의 질문에 답변 하는 식으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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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비밀/그리스도의 몸/ 믿는 이와 지체의 분별/몸의 공급/몸의 보호와 제한과 사역/ 몸의 권위/몸의 기름 부음/ 몸의 규율/몸의 원칙/몸의 풍성/몸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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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2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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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형제님께서 우려하신 사항은 두가지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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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언 시간에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것은 우려하신 것 처럼 폐단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한 면이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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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총공회라 해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를 맹목적으로 설교시간에 반복한다며 이는 성령의 현재적 말씀이 아니라고 여기 포도가지님을 비롯하여 많은 다른 분들이 반대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저희 교회에서는 재독이 죄라며 교회를 떠나신 분들도 계십니다. 오해와 조심없음에서 비롯된 결정들이라 생각됩니다.
: :
: : 백목사님의 설교는 그분이 돌아가신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반복할 수 있으며,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경우는 그리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모순되기에 저희 공회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 :
: : 그럼에도, 저는 백목사님의 설교를 총공회 목회 현장에서 아직은 계속되어야 하며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변절이요 수정주의이며 변질, 타락이라는 입장입니다.
: :
: : 따라서,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설교를 신언 시간에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지방교회 지도부나 핵심측에서는 그렇게 주장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 :
: :
: : 2.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
: : 수학이라는 학문에는, 집합, 방정식, 미분, 적분 등등 각각의 발전 분야와 단계가 있었습니다. 시대 시대 마다, 천재들이 나와 각 분야를 개척하고 집대성하여 발표하여 주었습니다. 어떤때는 같은 시기 안에서도 몇 개의 분야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경우도 있었으며, 또 어떤 때는 몇 백년동안 정체된 듯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 :
: :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현재의 수학은 죽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심지어 수학자가 눈에 도통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수학의 생명은 창의성인데, 더 이상 미분, 적분 과 같은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말은 일면 맞지만, 일면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 :
: : 산수선생님, 수학선생님, 수학 교수님 등등 이런 분들이 학생들에게 수학을 열심히 가르치기도 하고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도 하며,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데 편하도록 연구하여 공백 부분을 채우기도하며, 또 배운 그 학생들은 수학을 배워 일상에 적용도 하고 각기 다른 학문 분야에 적용하여 물리학, 전자공학, 논리학, 심지어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수학 자체에서는 새로운 분야가 개척이 안되었기에 진정한 수학자가 없고 고목나무와 같다는 주장이 맞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 :
: : 그러나, 수학 세계는 여러 분야에서 또 수학 자체 안에서도 더욱 구비하고 더욱 응용되고, 더욱 적용되어 가는 면으로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에 이 시대에 수학자가 없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 :
: : 저희가 피타고라스나 데카르트나 가우스와 같은 수학자가 되어야만 할수도 있지만, 그들과 같은 수학자가 나올수 있게끔 이름 없는 그들의 초등학교 산수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또, 그들이 소개한 그 수학 원리를 경제학에 적용하여 미시경제학을 개척한 사람이 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그 수학 원리를 전자공학에 적용하여 에어컨을 만든 사람이 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 : 그러나, 결국 그들이 기초로한 수학 원리의 연장선 상에 있지 이와 배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 : 저희가 배운 백영희 목사님의 교훈은 이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교리나 교훈이 과연 우리 대에서 나올수나 있을까 할 정도로 뛰어나고 높고 깊고 여러면으로 구비하다고 봅니다.
: :
: : 이런면에서는 발전을 못하고 새로운 움싹이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총공회가 죽었다는 표현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백목사님의 교훈을 폐하여야 할까요? 아니면, 그가 한발 내딛어 열어준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탐험하고 연구하고 구비하고 여러면으로 누려야 하는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요? 마치 미적분이 처음 발표된 이후 당시의 수학자들이 그 미적분의 원리를 수백년 동안 여러면으로 구비시킨 것처럼 말이지요.
: :
: : 게다가 더욱, 힘써 가르치고 이 교훈이 또 하나의 백영희 목사님이 될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나를 포함하여)들을 향하여 나아갈수 있도록 해야 되는게 저희들의 임무일 수 있습니다.
: : 그렇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현재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내 현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도록 또 순종할 수 있도록 나와 교인을 진리로 양육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
: : 왜냐하면, 수학에서 2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공식과 증명과 원리를 가르치는 것 자체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현실에서 여러 문제들을 통하여 풀어 나가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지, 선생님의 몫은 아닙니다.
: : 공회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님의 교훈을 아직은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수학원리를 가르치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공식을 가지고 각자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문제 출제자이신 성령님과 문제를 풀어야될 학생 즉 교인들 각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목사님이 새로운 교훈과 교리가 없다하여 수학원리가 아닌 소설을 가르친다면 그는 국어 선생님이지 수학 선생님은 아니시듯이, 그가 백목사님의 교훈을 설교시간에 반복하여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는 공회 목회자가 아니요 그냥 일반 교계의 목회자로 나가시는 것이 양심적이라 봅니다. 수학 선생님이 소설을 가르쳐 놓고선 또는 포도가지님 처럼 수학시간 자체를 폐하여 놓고선 또는 학교를 뛰쳐나가 옆의 음악학교에 입학시켜 놓고선 학생들에게 수학 시험장인 현실에 나가서 다양한 2차방정식 문제를 풀어 합격하라고 하면 안되겠지요.
: :
: : 저는 지방교회 지도부에서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가르침을 신언 시간에 반복하는 제도를 유지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 :
: :
: :
: : 3. 다만, 주님 주신 상황과 입장에 따라 유연하고 지혜롭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
: : 형제님께서 우려하신 그 폐단은 지방교회 일부에서 유연하게 적용할수도 있는 제도를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엄격히 지키시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까지 강하게 고집할 제도는 아니었는데, 원래의 교훈에서 변질되는 많은 사례를 보고 겪으면서 유연성과 원래 취지을 잃었다고 봅니다. 공회에서는 백목사님의 교훈을 변질됨 없이 그대로 전하면서도 유연하고 지혜롭게 적용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지방교회에서도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교훈을 더 나은 교훈이 나오기까지 변질됨 없이 그대로 후대와 형제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유연함을 유지하는 방편을 제도적으로 갖추셨으면 해서 그 방법(정상적인 예배, 새벽예배, 5월 8월 집회, 재독, 실시간, 권찰회, 구역장 제도, 반사제도, 교역자신임투표, 진리전원일치 제도, 성경헌법제도 등등)을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 :
: : 물론, 저희 총공회 안에서도, 본인 교회의 교인 구성원들의 귀는 트이지 않았는데도 재독만 고집하시는 목사님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는 신앙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무례하고 과격하며 무식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그 설교에 귀가 트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시면 안되는 것은 불신 세상에서도 상식입니다. 이런면에서는 총공회의 제도도 완벽하다고 볼순 없으며 그러한 폐단이 커진다면 원 취지와 본질적인 교훈을 해치지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제도를 개선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지방교회의 폐단을 없애는 데는 현재 공회의 제도가 유용하게 참고가 되실수도 있다고 보기에 소개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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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원래 저는 'help1님의 정리본'에 형제님이 우려하신 그 부분에 대한 것 까지 포함하여 공회의 지방교회 교회론에 대한 입장과 아쉬움과 소개와 대안과 기대가 포함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 :
: : 우선 급한대로 이 정도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실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시간이 없어 여기서 마치고 나머지 부분은 정리본에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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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다음 글이 이어지기 까지 지방교회 분들의 지적과 보완의 글을 기대합니다.
: :
: : 저의 이전 글에 대하여, 주님사랑 님의 해명 여지 의사가 있으셨습니다. 이번에 적은 이 글에 덧 붙여서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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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가지 말씀을 적어주신다면, 다음에 제가 드릴 글에 서로를 잘 몰라 실수할수도 있는 불필요한 부분을 줄이고 서로에게 많은 유익한 대화가 될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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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 한 지체 안에 여러 직분이 있음과 그 정당성을 강조하신 성경이 있음에도 이를 어떻게 읽고 적용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 : 또, 주님사랑님이 알려주신 주석 사이트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고 산만합니다. 오래전에 워치만 리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서를 사서 일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책도 여러면에서 내용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진의와 생명을 파악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이런 정도의 주석 책이나 사이트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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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글이 올라오기 전이라도 지적하실 부분이나 저의 오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주님사람 님을 비롯하여 형제님 그리고 LA님 그외에도 많은 지방교회 핵심 내부 교인 분들께서 미리 글을 적어 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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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혹시나 해서,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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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시라도 형제님께서 더 나은 성경이 있는데도 위트니스 리 교훈이 꼭 필요하냐는 주장으로 까지 나가실까봐 덧 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주기도 했지만, 설교의 정당성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경이 직접적인 복음이 되겠지만, 특정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형제도 있습니다. 현재 지방교회 지도부에 계신 많은 분들은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저나 형제님이 백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접하는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를 경험하고 계신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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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신자나 지방교회 일부 분들이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고서 지도부와 같이 아직 진리와 영감을 경험하지 못하신다면, 그것이 반드시 제도상의 문제만은 아닐 것으로도 추측되어 집니다. 이에 대한 이해도 부탁드립니다. 제도말고 어떤 다른 점이 원인일지 혹 생각 나신다면 상술하여 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은 중에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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