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회복의 교회론 2차 보완- 문답식(2-2)
주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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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00:00
무명2님이 몇 곳에서 질문 또는 요청하신 것들 중 미처 답변 못 드렸던 항목들을 모아서 이 글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1.“(무명2)그외에도 많은 지방교회 핵심 내부 교인 분들께서 미리 글을 적어 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해명: 이 부분은 부득이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의 회복은 교회의 간증이 놀아웠던 초대교회 기간 이후 즉시 교회가 하락(헬라파 과부 유대파 과부 문제 등)된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타칭 지방 교회는 1920년대 워치만 니가 이끌었고 1930년대 초반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를 영적 아비처럼 모시며(사실상 두분은 2살 차이임) 가장 가까운 동역자로서 그에게서 배우고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의 공산화와 종교탄압을 예견한 워치만 니가 1949년에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그 무렵 대만에서 약 400여명 정도였는데 5년 안에 5년 안에 2만 명(어디는 5만명)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위트니스 리는 주님의 강권하심으로 1962년 경에 미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1997년에 92세로 주님 품에 가시기까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사역했습니다. 따라서 워트니스 리로부터 ‘직접’ 온전케 된 동역자들은 주로 대만과 미국에서 배출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총공회의 경우에도 백목사님과 지근거리에서 직접 양육을 받은 경우와 그냥 백목사님 설교만 청취하는 경우가 다를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사후, 현재 주의 회복은 그런 배경을 통해 배춛된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 백명의 동역자 그룹이 이끌고 있습니다. 앞서 잠시 소개드린대로1년에 세계적인 모임만 7차례나 있습니다. 지난 해 12월에는 일주일째 계속된 ‘다니엘서와 스가랴서 연구’ 집회에 전 세계 약 40여개 국가에서 5천여명이 참석했습니다. 그외에 수 많은 성도들이 각지 교회에서 비디오로 그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주의 회복 안의 ‘핵심’ 내부 교인이 이 일에 관심을 갖기에는 전세계 안에서 더 크고 더 긴급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소개받았고, 저희들의 진리와 실행에 대한 질문 겸 총공회측의 귀한 신앙을 소개받으면서 주님 안에서 매우 귀한 분들임을 알게 된 정도입니다. 저의 위치는 현재 위 수십 명의 핵심 인도그룹에 의해 온전케 된 전 세계 수 백명 내지 수천 명 중 한 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저의 위치와 저의 분량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영을 받은 자이고 주님의 몸 안에서 받은 분깃이 있음으로 총공회 내의 또 다른 지체들과 열린 마음으로 교제하고 서로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무명2)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 한 지체 안에 여러 직분이 있음과 그 정당성을 강조하신 성경이 있음에도 이를 어떻게 읽고 적용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해명: 다양한 은사와 기능의 차이입니다. 몸 안에서 받은 은사대로 기능을 발휘하도록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질서하지 않고 절제와 조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인 몸을 세우고 공급하고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병고침이 성경에 있지만 그것을 정도 이상으로 너무 강조하게 되면 몸 안에 눌림을 가져오고 건축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돕고 다스리는 것도 다 몸의 유익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체들은 몸을 전제한 것이고, 고전 12장 전후 문맥 또한 몸의 문제를 다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보지 못하고 몸의 제한을 무시하면 성경에 근거가 있는 실행으로 몸을 손상시키고 지체들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교계의 이런 저런 혼잡과 역기능들은 몸을 고려하지 않은 후유증들입니다.
3. “(무명2)신언 실행의 제반을 소개해 달라.”
1)신언의 정의
고린도 전서 14장이 말하는 ‘신언’(申言, prophecy)은 쉽게 말해서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문이 갖고 있는 의미인 예언을 포함하나, 주된 요점은 그 말 안에 생명과 빛되신 그리스도가 담겨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 회복 안에서는 “(신언은) 하나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말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말해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분배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2) 신언의 목적, 취지
신언의 목적은 고전 14:4 본문 그대로 “교회를 건축함”입니다. 참고로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성경처럼 ‘덕’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움’ 이 아니라 ‘(신언은) 교회를 세움 (또는 건축함)이 신언의 목적이자 취지입니다.
3) 신언의 사례, 형태
가장 기본적으로는 초대 교회 때 처럼 ‘사도의 교통’(행2:42)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사례는 예루살렘 교회가 날마다 각 가정 안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서 떡을 떼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복음을 증거함으로) 구원받는 무리들이 날마다 더해진 것을 들수 있습니다. 그외에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온 교회가 “한곳에 함께 모여…모든 사람이 신언하는 것”(고전14:23-24)을 들 수 있습니다.
좀더 넓게 보면, 신언의 사례들로서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하는 모세의 말을 대언한 형 아론(출7:1), 2) 이사야(왕하 19:2) , 3) 예레미야(렘1:1, 4, 마2:17), 4) 엘리사벳(눅1:41-45). 5)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눅1:46-55). 6) 침례 요한의 아버지인 스가랴(눅1:67-79) 등을 들수 있습니다.
(성경출처 표시에 대해서는 무명2님의 요청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면 글이 너무 길어질 수 있어서 간략하게 출처표시를 하는 방식을 겸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신언하는 장소
고전 14장이 말하는 신언하는 장소는 주로 교회 집회에서 수행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믿는 이가 하나님 말씀을 해 내는 그 모든 장소가 신언하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시장바닥이 될 수도 있고, 버스 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신언하는 시기
가장 기본적으로는 교회가 함께 모일 때, 더 쉽게 말해서 목사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일 때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분량껏 각기 다 작은 목사님이 되어 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하셨으니 모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 신언의 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신언의 다른 형태
아마도 신언을 짧은 ‘설교’ 내지는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시고 그 외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먼저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신언과 방언을 대비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방언이 신언이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찬송이든 기도의 형태이든 아니면 찬송 가사를 선포하는 형태이든 생명과 빛이 담겨 있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건축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말”(고전14:3)이라면 그런 형태들도 신언의 범주에 든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엡5:19도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동안 이런 것들을 함으로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면, 신언의 다른 형태로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 신언할 수 있는 자격
신언은 사람이 생명과 빛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해내는 것임으로 일단 주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모든 지체들(자매들 포함)은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하십시오’(고전14:1)라는 말씀에 비춰볼 때 거듭났다고 다 신언이 되는 것은 아니며, 합당한 훈련과 자격조건이 갖춰질 때 즉 신성한 생명이 신언의 내용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신언다운 신언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훈련항목과 자격조건인지는 이 신언 항목 맨뒤에 부록처럼 소제목만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8)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에 있어서, 신언 이외에 다른 방법들 소개와 가치 및 효용 비교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은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서 생명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가려면 그 만큼 생명을 우리 존재 안으로 더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네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라’(엡3:17)는 말씀이 바로 생명되신 주님이 우리 존재 안에서 더 자라가시는 것의 성경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냥 말을 한다고 다 신언이 아님으로 생명의 말씀을 말해내는 것인 신언은 생명과 진리의 장비의 과정, 자기부인의 과정, 합당한 때에 합당한 방식으로 말해내는 기술 등 매우 다양한 경건의 훈련의 요소들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어찌하든 생명은 결과적으로 복음전파이든, 설교이든, 성경공부이든, 주일집회에서 신언함이든 ‘말’이 주된 수단이고 다른 것들은 신언다운 신언을 하기 위한 예비 내지는 보조수단이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9) 현재, 지방교회의 신언집회 현장의 모습에 대한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
이 단락은 추가질문이신데,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한곳에 함께 모여…모든 사람이 신언하고 있는데” 라고 한 고전14:23-24,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는데..”라고 한 고전 14:31,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라고 한 엡4:16을 들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 주의 회복 내의 신언집회 상황은 <모든 사람이 신언하고 있는데> 혹은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는데>라는 말씀처럼 일단 1인 설교자만 강대상을 독점하던 것으로부터 누구든 합당한 영의 인도와 질서를 따르기만 하면 신언할 수 있도록 구조적인 틀을 바꾸는 단계는 거의 정착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신언의 내용의 질이 모두 참으로 생명을 듬뿍 담아 전달하고, 듣는 사람은 그로 인해 “건축되고 격려와 위로”를 받으며(14:3), “”모든 사람이 배우는”(31절)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번 말씀드렸듯이 여기까지 오기에도 많은 시행착오가 댓가지불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점점 더 신언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이제 부록의 자료들을 소개드립니다. 참고서적은 앞서 소개드린 <하나님이 정하신 길> 제19과 입니다.
# 신언을 풍성하게 할 수 있도록(고전14:1) 갖춰어야 할 진리 항목들(22가지)
하나님의 인격, 2) 하나님의 창조-사람은 세 부분으로 창조됨,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함, 사람은 배필을 얻어 증가됨, 3) 사람의 타락, 4) 하나님의 구속, 5) 그리스도, 6) 그리스도의 구속, 7) 성령의 거룩케 하심, 8)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심, 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으롭다 하심, 10)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케 됨, 11) 그영이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함, 12)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13) 그영이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고, 새롭게 하고, 변화시킴, 14) 믿는 이들의 같은 형상이 됨과 영화롭게 됨, 15) 그리스도의 몸, 새사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 16) 하나님의 경륜과 신성한 분배, 17) 믿는 이들의 휴거, 대환란, 주님의 재림, 18) 그리스도의 심판대, 장차 올 왕국에서의 믿는 이들의 보상과 징계, 19) 왕국, 천년왕국, 복원의 시대, 20) 새 예루살렘, 새하늘 새땅, 21) 성경의 원칙들, 진리의 말씀을 곧게 자르는 법
# 생명의 체험 관련 항목들(22가지)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2) 회개하고 죄들을 자백함, 3)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죄들을 씻음, 4)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칭의 , 5) 칭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됨, 6) 그영의 거듭나게 하심, 7)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8)구원의 확신과 과거를 청산함, 9) 그영에 의한 위치적인 성화와 기질적인 성화, 10) 그영의 새롭게 하심과 변화시키심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심,11) 죄, 세상, 육체,자아, 천연적인 생명, 천연적인 힘을 처리함, 12)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죽음의 죽임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분배하심, 13)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주님과 교통하며 그영의 인도를 받음, 14) 본질적인 영의 내적인 충만과 경륜적인 영의 쏟아 부으심(외적 충일), 15) 영에 의해, 영을 따라 살고 행동함, 16) 기도와 중보, 17)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이해하며 성경에서 빛 비췸받음, 18)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겉사람이 부서짐, 19) 그리스도의 몸을 알고 체험함, 20) 한 지방에서의 교회생활, 21)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의 네 단계를 실행함(복음, 양육, 가르침, 신언). 22) 대환란 전에 휴거되도록 깨어서 준비하며 샛별같은 주님의 비밀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예비함.
# 신언시의 외적인 훈련
1)당신의 영을 훈련하라, 2) 당신의 입(혀)과 목소리(음성)를 훈련하라, 3) 말하는 속도를 훈련하라, 4) 제스처를 훈련하라, 5) 억양을 훈련하라.
#신언할 때 생기는 각종 문제에 대처함
1)하나님의 경륜과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음(딤전1:4), 2) 머리가 되지 않고, 어떤 지위도 취하지 않으며, 독점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음, 3) 파벌을 형성하지 않음(고전1:12), 4)단독으로 인도하는 것을 피함, 5) 집회에서 길게 말하는 것을 피함, 6) 집회의 분위기와 흐름을 주의하지 않는 것을 피함, 7) 자신의 취향에 맞는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고르지 않음, 8) 집회에 전달되는 즐거운 느낌을 주의함, 9) 다른 사람들이 함양되는 것을 관심함(습관적으로 행치말고). 10) 그영을 긴밀히 좇음, …이런 요점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나와 무엇이 합당치 않고, 적절하지 않은지 볼 수 있기 바란다. 우리는 집회에서뿐 아니라 교회생활과 가정생활 안에서 합당치 않은 모든 것들을 피해야 한다…(이하 생략).
6.”(무명2) 형제님께서 문의하신 '그 영'과 '성령님'과 '사람의 영'의 구분
이 세가지의 구분은 교회론과는 별도의 주제로 생각됩니다. 사회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교회론과 별도의 주제로 뽑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안에서도 이 부분은 교회론과 달리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들이 많고 또 교회역사상 가장 미개척분야로 남아 있는 부분들 중 하나임으로 정말 이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려면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즉 과거에 교계인사들과 토론한 바에 의하면, 평가받는 쪽은 물론 평가하는 쪽에도 많은 미흡과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일단 현 단계에서는 간단한 소개와 문제제기 정도로 이 주제를 다루는 선에서 정리했으면 합니다.
1) 사람의 영- ‘하늘을 펴시며,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 안에 영을 지으신 하나님’(슥12:1) 이라는 말씀처럼 사람의 영과 혼을 구분하고 그 중에서 사람의 영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성경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마도 백영희 목사님이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지금처럼 깊게 성경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던 것도 이 사람의 영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조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 불어 넣어진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창2:7).
타락시: 사람의 영은 타락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엡2:1).
거듭남: 그영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거듭남이후: 그영과 사람의 영이 한영으로 연합되어 구원받은 사람의 존재와 삶을 주관함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니라’(고전6:17).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고전2:15). 여기서 영적인 사람은 자아(혼)를 부인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점유되어 활력을 얻은 거듭난 영이 자신의 온 존재를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사람입니다.
2) 그 영- 성경에서는 ‘the Spirit’이 제 3격 성령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계2:7,11…), ‘그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길’(계22:17) 처럼 꼭 제 3격만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위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일곱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살아 있는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라고 고백한 분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이 말씀을 다 하신 후에는 “그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심으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그영으로 말씀합니다.
주의 회복에서는 편의상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요7:39)에 따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영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많은 분들의 오해처럼 2격=3격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삼위는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어느 한 위격을 지칭하더라도 다른 두 위격이 포함된 개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으면 아버지, 아들, 성령을 각각 1/3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관점이 기준이 되면 성경적인 관점이 마치 이단적인 사상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다음 두 세가지 쟁점을 소개하고 훗날을 기약하고 교회론 주제를 다루는 이곳에서는 자제토록 하겠습니다.
1)삼위를 분리시키는 관점의 복음전파의 오류
복음은 주 예수님의 죽음(십자가의 피)과 부활(부활하신 주 예수님 자신)을 그 핵심요소로 합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복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죄인된 여러분을 위해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후 이 분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이 분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셔드리셔서 구원받으십시오. 그런데 바로 이 싯점에서 사람이 영접하는 주체가 과연 삼위 중 어떤 위격인가가 모호합니다. 보통은 예수님(2격)은 부활 후 하늘로 승천하시고 보헤사 성령(3격) 께서 우리 안에 오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 2격 주 예수님을 영접한 것인가 아니면 제 3격 보혜사 성령을 영접한 것인가..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보통은 제 3격인 성령님이 오셨지만 그분이 제 2격을 ‘대리’하여 오셨으니 2격과 3격이 오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대리’ 이론은 칼빈의 해석이지 성경이 말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하는 요일3:24도 본문을 오역한 결과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그영을 통해 안다는 문맥인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고 잘못 이해한 후 ‘아들을 대리하는 성령의 내주’ 이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라고 말함으로 성령으로 대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들 자신이 생명으로서의 내주하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요일5:12).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말씀(골1:27)도 동일합니다. 만일 여기서 이 구절들을 적당히 설명하려고 성령이 곧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시라고 말하면 즉시 양태론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난제들을 풀수 있는 대화가 이뤄진다면 참으로 유익할 것입니다.
2)요7:39의 “그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해석문제
이 구절은 고신대학교 신대원 변종길 교수님이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을만큼 난해한 구절입니다(이분의 박사학위 논문이<성령과 구속사>(개혁주의신행협회)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됨). 이 구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그 당시까지 성령이 안 계셨다는 의미이다.
2) 성령이 사람 안에 안 계셨다는 의미이다.
3) 그영(3격과 구별되는) 자체가 안 계셨다는 의미이다.
4) 성령의 역사의 강도가 부활 전보다 부활 후에 강해졌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개혁주의 신학자는 자신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에서 여기서의 ‘그영’(the Spirit)을 다만 3격 성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 예수님 자신, 즉 그분의 신성뿐 아니라, 입으신 육신(인성)까지도 영화롭게 된 분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시) 영광받으신 사건은 그분의 인성이 (죽을 몸에서) 죽지 않을 몸으로 영화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 즉 그영은 <신성, 인성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변종길 교수님은 위 책 결론부분에서 이 영을 “영광받으신 예수(또는 영광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222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은 어떤 영인가..하는 심도있는 논의를 이 공간에서 지금 다루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3)삼위의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배제시키는가 아니면 포함시키는가?
성경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분(God is one)이시다 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롬3:30). 그렇다면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을 완전히 분리시킨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 사람이 세 분리된 사람들인 것처럼 세 하나님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위격(예를 들어 아버지 하나님)을 성경이 지칭하더라도 그 성부만을 배타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위격인 아들과 성령이 포함된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삼위 사이에는 ‘구별’이 있으십니다. 이런 균형잡힌 삼위일체론을 가진 로레인 뵈트너의 경우 주기도문에 나오는 아버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삼일성의 세 위격들이 동일하게 똑같은 숫적인 실체(substance)와 본질(essence)을 소유 하시고, 그 속성들은 본체 또는 본질 안에 내재되어 있고 본체 또는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신성한 속성들 모두는 세 위격들 각자에 의해 마찬가지로 소유되셔야 하고 또한 세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동체이시고, 동등하시며, 동일하게 영원하셔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각각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동일한 능력을 행사하시고, 신성한 영광에 동일하게 참여하시며, 동일한 경배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 주님의 기도의 예에서처럼, 우리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배타적으로 삼일성의 첫번 째 위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영 어 원문)Since the three Persons of the Trinity possess the same identical, numerical substance and essence, and since the attributes are inherent and inseparable from the substance or essence, it follows that all of the Divine attributes must be possessed alike by each of the three Persons and that the three Persons must be consubstantial, co-equal and co-eternal. Each is truly God, exercising the same power, partaking equally of the Divine glory, and entitled to the same worship.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만일 위 해석이 맞다고 한다면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고 할 때 대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주 예수님도 함께 내주하시다고 하는 것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2격)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지만, 다른 두 위격들이 그 안에 포함되고, 요7:39본문처럼 죽음과 부활 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쟁점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입으신 인성이 부활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시 바로 이 부분이 영광을 받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아담(신성,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님자신)이 생명주는 영(신성과 영화롭게 된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님 자신)이 된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방면은 행13:33(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롬1:4(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등의 구절들과 함께 섬세하게 살펴보고 그 어느 곳도 모순됨이 없는 해석을 찾아내야 하는 난 코스입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또한 그럴 준비가 된 분들이 있으시다면 추후 이 세 가지 젱점들에 대해서 서로 배우고 온전케 되는 목적아래 더 심도있게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7.”(무명2) 일전에 부탁드린 자세한 주석 사이트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라이프 스터디 사이트는 찾았습니다. 워치만 니 목사님의 한글 주석 혹은 주해 사이트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명: 다른 글에서도 소개를 드렸지만, 워치만 니는 한글 주석과 주해를 미처 하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마태복음/계시록/아가서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자료가 웹싸이트에 올려져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영문은 두분 저서 전체가 웹싸이트에서 소개가 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사랑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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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무명 2님의 글 내용 중에서 주의 회복에 관하여 해명 내지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을 짚어가면서 나름대로 간략하게 답글을 적어보겠습니다. 겸하여 후반에 총공회측 교회론 언급 부분에 약간의 토를 함께 고려할 사항으로 달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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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제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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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에서 지방교회와 건전하게 서로의 장점을 배워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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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응: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가운데 지금까지는 매우 유익한 교제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한 몸 안의 지체들로서 몸을 세우는 교제를 추가로 나눌 수 있기를 저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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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상과 현실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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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의 거듭난 영-이미 하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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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으로 거듭난 형제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여 가기에 모두 하나의 교회라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것이 금생의 역사 교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면을 인정하시지 않는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각자 주님을 닮아가는 면으로는 하나의 교회, 참된 교회이지만, 나라는 한 객체 안에서 조차 하나의 교회로 일치되지 못하고 둘로 나뉘는 옛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조금만 넓히면 생명을 걸고 걸어가야되는 핵심 교리에서 조차 형제와 다른 부분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현실적으로 또 양심적으로 어찌 저들과 같은 교회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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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본질적으로 또 우주적인 방면에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가 하나다 라고 할 때 그 하나의 실체(본질)은 즉 우리 안에 영접된 생명되신 주님 자신이십니다. 곧 골1:27이 말하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라고 할 때 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 교회의 하나의 실체입니다. 또는 엡1:3의 표현대로라면 ‘평안의 매는 줄로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 고 할 때, 여기 나오는 그영(the Spirit)이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 하나의 실체(실재)는 지금 거듭난 모든 이들의 영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의 영과 하나된 한영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교회의 하나가 있습니다(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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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금생에서는 교회의 하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은 우리의 변화가 아직 안 된 혼(soul)의 상태를 보면 맞지만,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는 이미 이 하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가 사실은 새예루살렘임으로 우리가 우리의 거듭난 영안으로 돌이킬 때 이미 지금 여기서도 새예루살렘이 묘사하는 그 모든 것들의 실재(보좌, 생명강, 정금길, 진주문, 벽옥의 성벽, 성전 등등)를 맛볼 수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는 거듭난 믿는 이들인 우리가 이미 새예루살렘(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12:22). 이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이미 그렇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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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람의 혼의 처리- 분열 현상에 대한 시각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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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주님 보시기엔 한 진리와 성령과 피와 일치된 주님 닮은 부분만 추려서 한 교회로 보실수 있지만, 저희는 주님과 같은 전지전능 자가 아니고, 아직 현세에서는 가리워진 수건이 다 벗겨지지 않았으므로, 분명히 다른 노선이 존재하며, 개별 매 사안마다 각각의 그 길은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그르든지, 아니면 모두가 잘못된 길이든지 이 두 경우뿐일 텐데, 어찌 단일교회라는 면만 부각시켜 얼버무리시고 지나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 지방 교회론 적용자분들이 걷는 노선과…각자가 성경에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노선을 양심껏 걷기로 했으니 이름을 달리하여 구분하자는 노선이 있다면 실제로 전자와 후자가 무엇이 다를 것이며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데, 왜 다르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되풀이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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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앞의 답변처럼 이미 거듭난 우리의 영 안에는 단일교회의 실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방교회론 노선과 그렇지 않는 노선의 차이는 각기 다름이 존재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마땅히 이 시대 안에서 최대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지’의 차이입니다. 즉 교회내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열의 현상들을 어찌하지 못할 자연현상으로 인식할지 아니면 회개하고 책망받고 최대한 해결해 나가야 할 현상으로 볼 것인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분열을 책망이 대상으로 보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믿는 이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고전3:3). 더 적극적으로는 “믿는 이들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게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라’고 간청합니다(고전1:10). 에베소서에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의 예로 화평의 매는 띠로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4:1, 3). 그 외에도 하나를 권하고 나뉨을 금하거나 책망하는 구절은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런 권면은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게 우리가 귀 담아 듣고 최대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현세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다음 세대에나 봅시다 라고 대하는 것과 현재의 말씀과 경고로 받는 것은 그 결과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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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소극적인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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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초대 교회를 근거로 자주 제시하시는데, 바나바와 바울도 갈리웠고, 씨를 심고 물주는 아볼로의 역할과 바울의 역할이 다른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부러 외면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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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성경은 모든 믿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기록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자체가 단일교회를 향하신 저작자 하나님의 글입니다. 성경을 적으신 그 분에게서는 감리교니, 장로교니, A교파니,B교회니 이런 구분 자체가 필요없으므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 하노니'라는 성구를 들어 지방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 이해에 오해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세 역사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을 구분하여 상대한 기록이 분명히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이곳에 소개된 지방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도 단일교회를 염두에 두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여 상대하셔서는 안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무관심 하신 듯이 보이셔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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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 중에는 그렇게 본 받으라고 적은 것이 있고 그렇게 따라 하지 말라고 적은 것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 이면에는 마가라 하는 요한과 바나바의 친인척 관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다툼 이후 바나바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 사역했습니다. 소극적인 사례를 통해 그렇게 하지 말하는 본으로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리고 ‘게다가..’이후의 글 내용은 논점이 선명치 않아서 일단 그냥 인용만 하고 해명은 보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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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목자와 형제- 목자도 양도 다 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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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는 성경에 분명 너희는 동역자요 형제라는 가르침도 있지만,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언급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양을 치라고 명령하신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언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형제라는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시는 것도 의문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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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형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성직과 평신도를 나눔으로 계급적인 높고 낮음을 따지는 현재의 관행에 대한 반작용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 주의 회복 안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많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보살피듯’(살전2:7) 목양하는 부분에 대한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에서 목양을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것으로 말하며 ‘기저귀의 권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즉 목자가 얻는 권위는 양의 배고품을 해결해 주고 불편한 부분을 해결해 줌으로 얻는 것이지 그 위치나 지위 자체가 권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목자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라고 말합니다(11절). 이렇듯 양을 치는 목자(목사)와 양의 관계는 한 가정 안에서의 가족관계입니다. ‘랍비라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한 분이시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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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초기교회와 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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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아무리 초대교회라 할지라도 성경이 귀하디 귀한 그 시절에, 평생가야 성경 한권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한 형제들이 많았을 그 시기에, 모두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배우고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공급할 조건도 실력도 없을 그 시기에 지금의 지방교회처럼 모두가 신언을 하는 그런형태로 예배가 진행되었다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근거로 자주 예를 드는데, 그들은 대부분 동급 실력의 동역자들이었고 문을 열러 나온 계집 아이가 신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누가봐도 명확한데 왜 이를 그렇게 까지 강하게 주장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그 계집 아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라는 참말을 한 것을 신언이라 한다면, 그것은 꼭 예배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발언의 기회와 경청할 수 있는 자세를 허용하는 제도와 교훈으로 충분히 수용할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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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초기교회의 특징은 네 가지를 실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1) 사도들의 가르침, 2) 사도들의 교통, 3. 떡뗌, 4) 기도입니다(행2:42). 그 당시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 예수님께 배운 것들을 가르쳤고 그것을 지켜 행했습니다(마28:20). 밖의 쓰여진 말씀은 희귀했을지라고 살아 있는 말씀이 그들 안에 또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있었기에 그들은 모이면 할 말이 있었고, 또 신언의 말을 통하여 서로 격려받고 목양받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일시적인 모임이었고, 그후 이 집 이 집에서 자주 모였습니다(행 2: 46-47). 계집 아이가 모였던 집회는 신언집회가 아니라 베드로가 옥에 갇힌 현실때문에 모인 기도모임 이었습니다. 기도모임과 신언집회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실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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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신언집회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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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형제간에는 성화의 정도가 다르기에 비록 어제 나온 초신자라 할지라고 목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상대들이 있으며, 또 수십년을 넘게 다닌 신도라 할지라도 어떤 형제들에게는 양의 위치에 있어야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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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지방교회와 같이 예배시간에 모두가 돌아가며 신언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속의 옛사람의 마귀 말이 공급되는 면의 부작용은 차제하더라도 젖을 주는 어머니와 젖을 먹어야만 되는 갓난아이라는 관계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질서를 인간이 만든 제도로 헤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 대한 적용에 있어서는 지방교회가 너무 한 면만 보고 걸어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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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신언 또는 신언집회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다’ 라는 성경의 권면을 따라 설교 강단을 1인 목회자로부터 모든 지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신언 실행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고 각 사람이 그런 지체의 분량에 따른 기능발휘를 통하여 몸을 건축하는 것(엡4:16)이 궁국적인 목표입니다. 모두에게 기회를 주더라도 어짜피 믿음의 정도에 맞게 신언을 할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 시간여의 집회시간 동안에 실질적으로는 집회에 참석한 모든 지체들이 다 신언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계산이 안 됩니다. 따라서 한번에 어디는 열 댓명, 어디는 삼십명 각지 지방교회 상황에 따라 다 다릅니다. 또한 새신자가 어설픈 말을 해 냄으로 인해 있을 수 있는 진리적인 혼동이나 무질서에 대한 대책으로 서두와 말미에 분량이 있는 지체들이 방향을 잡아주고 결론을 마무리하는 실행을 하는 곳이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재의 상황은 여전히 저희가 본 그 이상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시를 따라 이 길을 갈 때 갈수록 확신이 넘치고 또 그 열매들의 진보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이 길이 맞다고 보았기에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단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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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공회의 실행-성경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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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회에서는 반사, 보조반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또 권찰, 구역장 제도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형태가 지방교회가 그렇게 원하는 형제간의 신언의 가장 모범적이며 구비한 제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면도 담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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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의 사항: 저희도 일단 마음을 열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자 합니다. 워치만 니 이후 줄곧 저희는 단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런 근거나 사례가 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그런 면에서 각 실행들에 대한 성경적인 기초(근거)를 무엇으로 보고 계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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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교단별 명칭이 더 성경적이다-그 길을 계속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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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래야만 되는지에 대한 입장과 이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럼에도, 저와 공회는 교회 혹은 교단별로 명칭을 가져가는 것이 더 성경적이란 입장입니다.”
: 견해: 사람이 교회라는 관점은 공감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 하나 하나가 각기 독립된 교회다 라는 부분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한번 더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한 알의 밀알에서 흘러나온 밀가루는 한 떡에 합류되어 있으되 그 떡의 일부일 뿐 떡 전체는 아니라는 구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책에서 ‘믿는 이들’과 ‘지체’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죄지은 어떤 사람에게 처음에는 한 사람이 가고 그 다음에는 한 둘이 더 가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각 사람 교회론>은 혼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미 처음간 사람도 교회이고 거기다 한둘이 더해졌으면 이미 더 견고한 교회인데 왜 성령은 이 두 세 사람에게 재차 그 ‘교회에게 말하라’고 권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논의되는 <한 지방 교회론>은 이 지역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책임을 지고 처리하는 실행적이고 행정적인 방면의 필요를 고려한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는 ‘각 교회별로 장로들을 선택하여 세웠다’(14:23)고 말하고, 디도서는 ‘각 도시에 장로들을 세우게 한다’(1:5) 고 말합니다. 장로들을 세우는 범위는 각 도시를 범위로 하는 교회이고 그 장로들을 세우는 목적은 마태복음 18:17처럼 교회 내에 일어나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처리하는 행정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 교회론> 과는 다른 차원의 교회를 어떤 범위로 볼 것인가..하는 것이 현재의 쟁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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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신언에 관한 제반 사항-.우선 간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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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히 다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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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신언의 정의
: ② 신언의 목적, 취지
: ③ 신언의 사례, 형태
: ④ 신언하는 장소
: ⑤ 신언하는 시기
: ⑥ 신언의 다른 형태
: ⑦ 신언할 수 있는 자격
: 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에 있어서, 신언 이외에 다른 방법들 소개와 가치 및 효용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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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우선은 참고문헌을 소개해 드리고, 별도 글로 시간을 내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신언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 18-20과(329-363쪽), <그릇을 예비함> 24과(401-407쪽), <교회집회에서 신언함>(개요)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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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여자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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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적으로 저희 공회도 주님 사랑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다만, 그 적용 현장에 있어서는 공회 교회론에 입각하여 유연하고 지혜롭게 순리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help1 님의 글을 참고해 주십시오. 후에 복잡한 글들을 적으면서 제가 잊을까 하여 이 소제목을 적어 놓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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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설명 잘 들었습니다. 설명하시는 취지는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여 함께 묵상해 보고 싶은 대목은 1.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사례, 2. 디모데 전서가 소개하는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장로의 자격입니다. 지금 논의의 초점은 <교회 행정과 자매들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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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가족분들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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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치만 니 목사님의 사례나,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사례, 그리고 주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라고 하신 사례 들의 근본 취지나 근본 원리는 혈육보다 진리가 먼저요, 혈육보다 순종이 먼저라는 것으로 성경을 읽은 배경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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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라 하여 특별한 대우나 권위가 주어져서도 안되겠지만, 가족이라 하여 부당한 대우나 부당한 권리 양보를 주장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기에 본인들은 더욱 조심해야 되기도 하겠지만, 순리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맞추어 자유할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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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혈육을 그 가치 이하로 무시하는 것도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명령 대로, 중생된 이후 저희들의 신앙여정에는 지방정실, 동류정실, 혈육정실이 그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될수 없습니다. 만약 방해가 될 경우에, 하나님과 혈육 둘중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만 된다면, 본토, 친척, 아비 만큼 신앙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봅니다. 혈육은 혈육만큼만 대우하면 되는 것이지, 구지 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의 밥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닮아가는데 먹고 자라고 이용하는 밥이요 세상입니다. 더럽지만, 그 세상 속에 우리를 두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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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회복의 경우: 워치만 니의 경우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아내되시는 자매님이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경우는 자녀가 8명이나 되었습니다. 교회지원도 거의 없고 가장은 교회과 사역의 일로 며칠 씩 몇달씩 집을 비울 때 그 아내되시는 자매님이 때꺼리와 자녀 교육의 짊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역자의 가족들의 희생은 주님의 보상을 요쳥할 만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교회 생활 초기에 가정의 필요를 많이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즉 사역자가 가정을 소홀히 함으로 대적에게 틈을 주는 일도 어찌보면 불가피 할수 있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으되 모두가 그렇게 따라야 할 좋은 본이 아니라는 내적 외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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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딤전3:4). 즉 그들도 가족으로서의 특혜는 못 받더라도 성도들 중 일부로서 성도들이 받는 만큼의 사랑과 목양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의 회복의 경우는 최근 들어서 그 이상으로 오히려 교회 일도 부지런히 돌보면서 가정도 잘 돌보는 지혜를 찾고 있고 또 대만에 있는 교회들의 경우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도 이런 앞선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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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그 영'과 '성령님'과 '사람의 영'의 구분- 별도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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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가지의 구분은 교회론과는 별도의 주제로 생각됩니다. 사회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교회론과 별도의 주제로 뽑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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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신언을 설명드릴 때 이 부분을 겸하여 설명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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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자세한 주석 사이트-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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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트니스 리 목사님의 라이프 스터디 사이트는 찾았습니다. 워치만 니 목사님의 한글 주석 혹은 주해 사이트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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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 위트니스 리는 신구약 66권 전권에 대한 주석(라이프 스터디)를 썼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워치만 니 형제님이 1950년 대에 투옥되심으로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보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경우 마태복음, 계시록 등 일부 주석이 있으나 웹싸이트 형태로 소개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직 그렇게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대신에 영어로 된 싸이트는 워치만 니 저서 전체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 필요하시면 앞서 소개한 자료들에 들어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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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사랑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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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영을 알고 거듭난 이후 장차 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믿는 이들이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가르치는 면에서 주의 회복과 총공회측은 큰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는 언제나 유쾌하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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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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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위 지방교회 내부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이곳에서 논의된 범주는 1. 성경에 한 지방 한 교회를 실행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2. 이들은 일부 항간의 일부의 주장처럼 이단인가, 아니면 같은 생명을 받은 한 몸 안의 참된 지체들인가? 하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정도의 대화가 오고간 상태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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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만일 <한지방 한 교회>를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자 했다면, 1.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주님의 마지막 간구 내용을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합당한가 (요17:21)? 2. 성경이 ‘그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 라고 할 때, 그 하나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 하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와 구체적인 방법론은 무엇인가 (엡 4:2-3)? 3. 지역교회의 성경적인 범위는 무엇인가 (계1:11)? 4. 지역교회 내에서의 분열과 분쟁은 왜 생기며 어떻게 평가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롬16:17.고전3:3)? 하는 문제들을 주님의 얼굴 빛 아래에서 충분히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는 위 4 항목 중 3번 하나를 다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교회론에 포함되어야 할 본질적인 부분들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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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의 회복이 추구하는 교회론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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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총공회 측에서 익히 알고 계시는 내용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런 다 아는 진리들을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다룹니다. 그 이유는 머리로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교훈때문이고, 참으로 빛가운데 알기 위해서는 믿음의 들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두서 없이 그러나 ‘교회론’이라는 범주에 해당될 말들을 몇 가지 소개드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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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주와 건축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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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신혼 부부가 앞으로 자녀들을 낳으면 함께 살 집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고려와 자문 끝에 지을 집에 대한 구상을 마친 후 건축업자를 불러서 자신이 짓고자 하는 집의 자세한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후 그 건축업자는 주인이 주는 땅과 건축자재, 그리고 일에 대한 수고비를 넉넉히 받아가면서 각 분야의 일꾼들을 부려서 마침내 그 집을 완공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 건축업자는 자기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지은 집이지만, 사실은 그 집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않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백영희는 일종의 건축업자입니다. 그들이 어떤 부분을 맡아 수고하였지만, 그 집 주인은 주님 자신 이십니다. 그 분이 집을 짓는데 필요한 일체를 다 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집을 '내 교회'라고 하실만 합니다(마16:18, 딤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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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그 집의 특정 부분을 짓는데 참여했던 일꾼들이 자신들이 작업한 그 벽에, 그 굴뚝에, 그 툇마루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고, 더구나 그 부분의 소유권까지 주장하려 한다면 그 집 주인을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예가 왜 우리가 교회 앞에 특정 명칭을 붙일 수 없는지를, 그리고 교회는 그냥 교회이고 정 구별이 필요하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정도로 바울이 말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것을 너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집 소유주의 마음을 너무 헤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팔아 그 교회를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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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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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인 주님의 몸은 또한 '소제'로 예표됩니다(레2:4). 즉 그분의 몸인 교회는 소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확장과 증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소금과 유향은 있으되, 꿀과 누룩은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변화된 고운 인성과 성령(the Spirit) 그리고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그 구성 성분으로 합니다. 또한 어떤 죄된 것이나 옛사람에 속한 천연적인 애정과 선함은 소제 안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이 소제가 예표로 제시되고, 신약 서신서에서는 이 소제가 그 순도를 점점 더해 가는 과정에 있고, 요한 계시록의 새예루살렘은 이 소제의 떡이 온전히 완성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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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을 사는 우리의 눈은 완성된 소제인 새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보며, 현재의 불순물들을 버릴 것으로 대할지, 아니면 끌어 안고 갈 대상으로 대할지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죄와 세상을 분별하는 것은 그래도 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되어야 할 자아 그 중에서도 특히 개인주의적 성향, 종교성, 특별한 민족성, 특별한 문화를 분별하여 걸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등에서 이런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이물질들을 분별하고 걸러내는 것들을 놓고 단호하게 싸웠습니다. 한번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한 동역자 형제님이 한국 교회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러 왔을 때 어떤 본문을 다루면서, '한국에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들이 문제다' 라고 했습니다. 소제 안에 그리스인, 수구디아인, 유대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참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교회를 소제로 아는 사람입니다. 다양한 민족들과 언어들이 한데 어울려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역사가 50여년 이상된 주의 회복 안에서는 이에 대한 체험이 적지 않습니다. 총공회 안에서 이런 인종과 문화와 언어문제는 현재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부분들이 교회 안에서 왜 문제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실감하실 날이 올 수 있습니다(행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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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알들과 한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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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은 그분이 오신 것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많은 밀알들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다 이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참되게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떨어져 죽은 밀알과 그로 인하여 나온 많은 밀알들은 그 생명 그 본성에서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밀알들이 생명과 본성에서 죽은 한 알의 밀알과 똑같다 는 말을 들을 때 우린 아멘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총공회측 성도님들만이 이 말을 참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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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이제 한 알의 밀알을 통해 산출된 이 많은 밀알들이 할일은 무엇인가? 각자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대함으로 영양분을 빨아들여 각자의 밀알들이 자신들의 등치를 제 각각 부풀려 가는 것인가? 이것은 밀알들이 한 단계 더 전진하여 갈려지고 빻아져서 한 떡이 되는 이상을 볼 때 저절로 의문이 풀릴 수 있습니다(고전10:17). 이 한 떡은 많은 밀알들에게서 나온 것되, 성만찬 상 위에 놓여진 것은 많은 밀알들이 아니라 한 떡입니다. 각 개인이되, 각기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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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겔서의 네 생물(사람, 소, 사자, 독수리)이 사면으로 향하여 있고 각기 떨어진 것이 아님으로 독수리가 앞을 보고 나아갈 때, 다른 셋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옆걸음과 뒷걸음으로 그 독수리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이 떡은 그런 한 떡입니다. 한국 사람 떡이 다르고, 미국 사람 떡이 다르고, 워치만 니 떡이 다르고, 백영희 떡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매주 나누는 성만찬의 떡이 어느 범위까지를 포함하는가가 그가 몸을 본 정도를 가늠케 합니다. 우주가운데 몸은 하나입니다(엡4:4). 우리가 성만찬시 상 위에 놓인 한 떡을 볼 때, 그 떡은 이 유일한 한 몸을 의미하고 그것을 대표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도 교회론입니다. 저희들은 매주 성만찬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저희들의 주일을 지키는 주된 목적은 성만찬에 참여하고, 또 모두가 신언함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직접 말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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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맏형님, 많은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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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구주시요, 우리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맏 형님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이 우리의 맏형님이시라는 고백을 불경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말이 성경에 있기에 적극 반대는 않지만 뭔가 어색해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고백을 달콤하게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2장 11-12절은 매우 심오합니다. 즉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만 있으신 독생자 즉 제 2격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고, 여기에 구원론과 교회론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근거이듯이, ‘모두 한분에게서 났으므로’가 서로가 형제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입니다. 형이 동생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그는 또한 교사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 관계는 교사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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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것은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맏형처럼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롬8:29). 즉 우리가 맏 형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 지금하고 계신 일이고 사도 바울을 포함한 주의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갈4:19). 물론 그분의 경배받는 신격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으며 그것은 그분의 고유영역입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는데, 같은 피조물들끼리인 지체들
세부목록
- 공회 교회론 정리 발표시 부탁
- 확인 감사, 같은 자세 부탁
- 교회론 관련 확인 부탁 -백목사님 자료로
- 요7:39의 그영(the Spirit) 관련 참고자료
- 부탁하신 백목사님의 언급
- 개인교회를 지지하는 성구 1-1
-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의사진행 발언)
- 총공회 교회론 소개글- 감사드립니다.
- 에클레시아(교회)의 하나인 면과 증거(표현)하는면
- 이와 관련하여 확인된 공회 내부의 언급
- 신언의 목적과 효용 등 몇가지 문의드립니다.
- 박만수님 글의 출처 부탁
- 몇가지 더 부탁드립니다.
- 주의 회복의 교회론 2차 보완- 문답식(2-2)
- 주의 회복의 교회론 2차 보완- 문답식(2-1)
- 주의 회복의 교회론 1차 보완- 일반
- 다음 글이 이어지기 까지 지방교회 분들의 지적과 보완의 글을 기대합니다
- 몇 가지 말씀드립니다.
- 부탁과 방향
- 몇가지 고려할 사항
- 관리자님과 주님사랑과 무명2님께 드리는 글
- 아침부흥책자와 워치만 니 인용, 부탁
- 대동소이라는 말씀-추가 해명
- 지방교회 내부에서 제안하는 자료 - (지방교회 내부 입장)
- 대동소이라는 말씀
- 해명에서 빠진 내용 -추가 해명
- 해명에서 빠진 내용 (제-관)
- 지방교회가 뼈 아프게 들어 봐야 할 권면 - 해명의 글
- 지방교회가 뼈 아프게 들어 봐야 할 권면
- '지방교회'에 대한 공식 입장 - (〃)
- 지방교회 역사와 한 교회주의 - (〃)
-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선즉...
- 주님사랑님께 한 번더 말씀드려 봅니다.
- 공회 교회론 정리 발표시 부탁-자료제공
- 정리 절차 (3435번)
- 몇 가지 더 보충하였습니다.
- '형제'분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 주님사랑님께 몇 가지 질문 및 요청
- 여자의 위치와 성만찬 횟수-주의 회복의 입장
- 여자의 교회 내 위치 문제만
- 이렇게 잠정적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 공회 교회론 정리 부탁 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