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준 목사님의 '중생론' 구성 (제-관)

발언/주제연구      

김석준 목사님의 '중생론' 구성 (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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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목사님조직신학 구원론 중 중생에 관해 일부 발췌해서 올립니다.(체계신학과는 별개내용입니다)

六. 중생의 성격.
중생의 성격이란 중생한 사람의 성격을 말함이 아니고 영의 성격을 말함이다. 영 속에서 생동력을 가지고 활동할 때 그 성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성격의 잠재성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성격, 천사에 대한 성격, 마귀에 대한 성격이 있다. 종별에 있어서 성격이 다 있다.
중생의 성격을 알지 못하면 중생자와 미 중생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착각하고 속단을 내리기 쉽다. 중생자는 중생된 부분이 있고, 미 중생부분이 있다.

1. 신자(神子)의 격(格)(히12:9, 롬8:11-16, 갈4:6)
신자의 격은 단순히 호칭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호칭을 안 해도 신자의 격은 무시하지 못한다. 이것을 증명키 위해 호칭을 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동등 동격의 관계요,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성격적으로 이질성이 없다.

(1)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고.(마6:8, 32, 엡1:17)
‘아버지께서 아시고’ 라는 말의 ‘아신다’는 말이 경험적으로 아신다는 말은 γινωσκω, 초경험적으로 안다는 말은 οιδα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안다는 이 말은 경험적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이라기보다 친밀적 애정적으로 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는 중생의 그 성격이 하나님의 아들의 격을 가졌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와 자식의 성격 때문에 능동적으로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그 사람과 나와 안다는 말은 γινωσκω.
남남은 사랑하다가 안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관계에도 그런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려고 애써서 되는 사랑인가? 사랑 안 하려고 하면 안 해 지는가?
중생이라 할 때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이 아니다.

(2)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에 응답하심.(마6:6)
중생을 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가 그 하나님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거절하심이 없이 구하는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는 이상의 것, 구할 바를 알지 못해서 구하지 못한 면까지도 허락해 주시기로 되어 있다.

※ 기도를 하면 어떤 부분만 주는가? 다 주는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그 면도 있고, 아직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안된 부분도 있다. 중생된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 기도할 때도 있고,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 기도할 때도 있다.(야고보)
중생한 사람이 구하면 무엇이던지 다 준다? 중생한 새사람 속의 중생된 영이 구하면 다 준다? 중생된 영의 소원과 아버지와는 대립이 되는 것은 없다.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준다’고 하는 이것은 영을 보고 하는 말인데 이 때 육이 좋아 할 수 있다.
벧전2:11에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을 향해 말하노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고, 롬8:7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라고 했는데 이 때의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 자가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 부활한 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부분이 없다.

(3)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수애자(受愛者)(요14:21)
우리 속의 중생된 자는 중생의 성격을 가졌으니 이 중생의 성격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줄 알고 받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사랑은 받지를 않는다. 어떤 인적인 사랑도 다 거절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든지 다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중생의 그 성격은 아버지의 아들인고로 사랑을 받아 느낄 수 있다.

2.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요일5:1)
외형상으로 보면 나사렛 예수는 하나의 평범한 목수 요셉과 그 아내인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출생해서 나사렛 촌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인간이 볼 때 이 나사렛 예수는 특수하게 혹은 초자연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당시에 세속화되고 부패된 유대의 전통적인 종교를 항거하고 그들의 부패성을 만인들에게 폭로하는 하나의 종교개혁자로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율법과 의식과 제도와 율례와 규례를 무시하고 새로운 나사렛 예수교를 창설하여 포교를 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존재를 인류의 구세주로, 혹은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예수를 자기의 구세주로 믿게 되는 것은 지식이나 변론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예수가 구세주로 믿어지는 것은 그 사람이 중생을 하게 될 때 중생의 그 성격으로 해서 구세주로 믿어지는 것이다. 믿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고 안 믿을 수가 없어서 믿게 되고, 또한 믿어지는 것이다. 중생함이 없이는 예수가 구세주로 믿어지지 않는다.

※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아도 구세주로는 믿지를 않는다. 병든 사람은 예수를 의사로 믿느냐, 구세주로 믿느냐? 병자가 의사로부터 바라는 것은? 구세주로 믿는 것은 중생자라야만 된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나 구세주로는 믿지 않고 믿다가 실망을 했다. 유대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건국해 주실 그 예수로 믿었다. 중생을 못한 자는 이 예수로 믿는다. 속죄주로는 믿지 않는다.
중생의 성격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포교운동은 잘 하지만 구원운동은 빈약하다. 사업성공으로 예수 믿는 것은 육 운동이지 영 운동은 아니다.

(1) 예수를 대속의 주로 믿어.(엡1:7, 히9:22)
요일1:7 -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어떻게 다 사하는가? 자백한 것만 사해주는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는가?
중생의 성격은 우리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죄인인데 이 죄를 크게 나누면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게 되고, 자범죄에 있어서는 내가 아는 죄와 알지 못하는 죄가 있다. 이렇게 많은 죄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중생의 성격이 믿게 하는 것이다. 곧 이 속죄를 믿는 것이 중생의 성격이다.
이 속죄성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고해성사나 혹은 예수님 외에 어떤 속죄제물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만이 완전 정결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으면 이 피공로를 입은 사람은 죄를 지을 성분마저 제거된다는 말은 아니다. 속죄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법인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이 사면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사면을 받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무죄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지공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무죄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 예수님을 대속의 주로 믿는다는 말은 오직 예수님만이 대속의 주 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중생치 않으면 예수님을 대속의 주로 믿지 못한다.

(2) 예수를 신자(神子)로 믿어.
예수님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또한 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쉽게 할 수 있고 글로도 옮길 수 있으나 자기의 깊은 속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기란 인간의 노력이나 지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가 신자로 믿어지는 것은 중생의 성격이다. 환언해서 말하면 자신이 중생 했는지 안 했는지 하는 것은 이로써 알게 된다.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임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의 증거이다.
인간육신의 동작과 활동은 억지나 강압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나 믿음이란 무형적 동작이요 이성의 결정이니 이 이성이 중생된 영과 연결되지 못하거나 영이 죽어 있는 상태라면 예수가 신자임을 믿지 못한다.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지는 것은 중생의 성격이다.

(3) 예수를 부활의 주로 믿어.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병정들도 시인을 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몸은 영체이지만 부활 이전에는 시체로 있었으니 이 시체는 곧 물질이요 유형성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을 했다고 하기 때문에 죽은 예수를 지키고 있던 로마군인들은 유형성인 시체가 없어짐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시인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다.
인간의 이 경험적 지식은 때로는 믿음과 대립이 될 때가 많다. 이것이 강하면 경험적 지식에 반대되는 사건은 다 부정하거나 불신하기 때문에 이것은 중생의 성격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중생한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부활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능동적인 부활이라고 하면 그 예수를 부활의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수동적인 부활을 하는 것이니 이 사건이 믿어진다는 것이다. 중생의 성격은 이런 무형적인 것이 경험 이상으로 믿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시인하는 것이 중생의 성격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시인하는 것이 중생인가?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시인했다. 경험적 사실로 인해 시인했다. 보지 않았더라면 시인을 아니했을 것이다. 이처럼 유형적인 사실로 인해 시인하는 것은 중생의 성격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믿어지는 것, 예수님께서 부활을 안 했더라면 우리도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우리를 부활하게 한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중생의 성격이다.
부활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이성+중생을 못 했거나, 중생을 안 했거나 이다.

(4) 서로 사랑함.(요일3:11)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서로 사랑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상대적 조건적 사랑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분이 동일성분이지만 쌍방이 영이 주격이 되지 못하고 육이 주격이 되어 있을 때는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또한 중생한 사람 쌍방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미움을 주고 받을 때는 중생된 영이 그러는 것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 속에 있는 육이 그러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방편은 없지만 예를 들면 중생된 영 대 중생된 영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동질성인고로 사랑치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중생된 사람으로서 중생된 영이 주격이 되어 있을 때는 아무런 이유나 조건이 없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신인적인 사랑에서 인인관계의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속에 중생의 성격이 없다면 서로 사랑이라는 이 사랑이 없을 것이니 이 사랑이 없으면 무궁세계에서 영원히 인인관계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 중생의 성격은 사랑을 받아 느낄 줄 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줄줄 모르는 자로 살면 매우 불행한 자이다. 이 느낌성은 글로 말로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 받은 자밖에 모른다.

시애자: 중생된 영과 이성이 결합.
수애자: 중생된 영과 이성이 결합
이렇게 되면 서로 통한다. 아가페로서 무조건 절대적 인인관계의 효력성을 가지게 된다.

3. 불변성.(벧전1:4-23)
중생의 성격은 불변성을 가졌으니 불변성이라는 말은 어떤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전부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또한 이 불변성이라는 말은 전혀 반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발전적 성장적 불변이라는 말은 아니다. 얼마든지 불변에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불변은 하나님의 불변성처럼 영원히 불변성이다.

(1) 자체적 불변성.
중생된 새사람의 그 전부가 자체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격자.

(2) 전체적 불변성.
이 말은 성분이나 성질이나 상대적이나 혹은 하나님의 자격(子格)이나 자성(子性)이나 신인간의 애정성이나 인인 간의 애정성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전부는 가변성적이다. ‘시간에 따라 언제 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안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중생의 성격은 전부가 불변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어느 면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변하면 이는 중생은 아니다. 애정성이 변해지는 것은 중생의 성격이 아니다. 중생의 성격은 불변성인고로 그렇다.

(3) 비 오염성.
중생 되지 못한 사람(부분)은 다 오염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의 영혼도 중생 이전에는 오염성을 가졌기 때문에 타락되었고, 죄에 오염되었다. 마음 이성 사상 뜻 전부는 오염성을 가졌다.
중생의 성격은 비 오염성을 가졌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절대로 오염되지 않는다. 극단의 예로 이성과 몸이 죄의 소굴에서 죄를 짓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생된 것은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 어떤 곳에 갔다두어도 오염되지 않는다. 중생된 영이 오염성을 가졌다면 안심이 안 된다.

※부흥회 때마다 중생을 몇 번씩 하느냐? 중생은 찰나적 단회적이다.

(4) 비 혼합성.
만일 중생된 영이 혼합성을 가졌다고 하면 혼합은 곧 변질성이니 중생된 영은 변질성이 있는 것이겠지만 이 중생된 영은 비 혼합성인고로 어떤 것과도 혼합이 안 된다. 인간세상에서 인간들이 선이라고 하는 선과도, 도덕성과도 혼합이 안 된다. 이 중생된 영은 그 성격적으로 비 혼합성을 가진 단순하고 단일성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은 혼합성을 가졌다. 선과 악, 진과 의가 혼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성이다. 그러나 중생된 영은 진과 의가 비 혼합성인고로 어떤 것과도 혼합이 되지 않는다.

(5) 세상을 이기고.
이 중생의 성격에는 패배성이 없고 전부는 승리성이니 중생된 영 자체는 세상을 이김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성이 중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인간의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중생을 한고로 중생의 성격은 승리성이다. 고로 영이 주격이 되어 있을 때에는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모든 투쟁에서 이긴다는 말이니 영이 주격이 되어 세상과 싸우면 그 상대를 다 정복하고 만다.(정복적 투쟁) 내가 오염되느냐, 오염을 시키느냐? 잡아먹느냐, 잡아먹히느냐?(오염적 투쟁) 승리성을 가진고로 모든 투쟁에서 승리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도 영이 주격이 되지 못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한다. 이것은 중생한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4. 불범죄성.(요일3:9, 5:18)
중생한 사람은 범죄할 수 있으나 중생된 영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살아났으므로 살아난 그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혹자들은 중생한 사람과 중생한 영을 착각하기도 하는데 ‘중생한 사람’ 이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의 영과 이성과 본능과 신체 등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한 사람(새사람)의 중생된 영’ 이라고 할 때는 이성과 본능과 육은 제외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단회적으로 입은 그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영론에서 혼돈하여 인간을 물질과 비 물질로 분리하여 육은 순 물질이라고 하고, 영은 비 물질성 전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 물질성에는 이성과 양심과 본능이 있는데 여기서 또 세밀적으로 구별하면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욕, 육신의 정욕, 본능 등으로 분리할 수도 있으니 이런 것들도 다 비 물질성이다.
고로 명사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던지(명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성이다, 영이다’ 하는 이 명사를 자신이 사용하는 그 개념에 속박시키지 말고 성경에다 절대성을 두고 성경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구별해야 하니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본다면 비 물질성 전부를 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반학자들은 비 물질적인 영과 물질적인 육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너희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했으니 ‘육신의 정욕’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영혼과 정욕과는 엄연히 구별이 되고 있다.
이성이란 영혼 외에 본능 양심만이 아니라 비 물질성 전부를 총칭하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영혼은 양심도 포함되지 않았고, 정욕도 본능도 생각도 사상도 포함되지 않았다. 스데반이 하나님 앞에 마지막 운명기도에서 ‘영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하지 않고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영혼은 인간의 죽음과 동시에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운명을 할 때도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라고 했다.
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분명히 영혼이 있었는데 일부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영혼이 없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곧 영혼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혼은 부모로부터 받은 영혼이 아니고 아담의 영혼처럼 새로 지음받은 영혼이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함은 영혼과 육이 분리됐다는 말이다. 육과 결합체로 있다가 육(소마-신체 이성 정신 육에 소속된)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문제는 실은 그렇게 난제가 아니다.
중생된 영이 범죄한다고 하는 학자들은 이성을 영으로 보기 때문인데 이들은 이성을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성적 영혼(비 물질성 전부를)이라고 하며 그 이성을 영이라고 지칭한다.
이들의 말대로 라면 그 영은 범죄하는 영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하는 말이 ‘그 영이 그리스도의 완전 구속을 입고 생명에게 붙잡혀 결합된 부분은 범죄치 않는다’ 라는 단서를 붙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학자로서 이중적인 말을 한다고 하는 지적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영혼론에 있어서 대개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영.
② 영혼.
③ 이성적 영혼.
④ 비 물질성인 영혼.
영에 대한 뚜렷한 혹은 단일된 개념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도 ‘영이다, 영혼이다, 이성적 영이다, 비 물질적 영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각이한 주장들은 다 영혼론에 있어서 자기의 주관적 개념으로 정의를 내린 것이다. 따라서 영혼론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기만 한다면, 즉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할 때의 영혼에 대한 견해가 일치성을 이루게 되면 ‘범죄치 않는다’고 한 말의 범죄치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일치성을 가지게 된다.
영혼론이 일치되지 못하고 각양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은 범죄치 않으나 영혼은 범죄한다’ 또는 ‘영도 범죄한다’ 라는 등등의 이론이 대립이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먼저 영혼의 분리를 정확히 해야 한다.
영혼론의 정확한 개념이 이처럼 중요함에도 학자들이 영혼론에 대해 그렇게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조직신학에서 미비한 점이 적지 않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신앙인으로서 이 조직신학(신론, 기독론)을 다루기가 퍽 송구스럽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 유한된 학을 가지고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다 저렇다’ 하며 논할 수 있겠느냐? 칼빈도 일찌기 이 신학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도 역시 관으로(기독관, 천국관 등)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에서 영혼론을 별로 다루지 않았고, 내세론도 거의 취급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고 보니 2천년 역사에 이 영혼의 정의를 뚜렷하게 내려놓은 것이 없다.

※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중생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영육 이원론.
그노시스(바스틱): 물질은 죄이고 악이고 영은 깨끗하다.
헬라적: 계악설-이원론: 인간이 별개세계에 살 때 죄를 지어 육체 속에 수감(감옥).

기독교에서 영과 내세를 빼버리면 현실주의로 돌아간다.
‘중생한 영이 범죄한다, 범죄하지 못한다’ 하는 것을 분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을 정확히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강단에서 삼분설을 주장해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가 주장을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영: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이성: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옛사람의 인격“ 독립적.
새사람의 인격: 독립적.
입고 벗고(이성): 독립적
삼분으로 보인다.
구절이나 단어를 가지고 씨름하지 말 것.
우리는 이분설을 주장한다.(영+육의 결합체)
영: 독립적인 인격체.
혼: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다. 생동력이다.
벧전4:19의 영혼: 하나님의 새생명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라고.

‘중생된 영(영혼)은 범죄치 않는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진리가 일치되어야 할 것이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됐으니 깨끗한 이 영혼이 범죄할 수 없고, 또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있는 영혼은 범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에 이성을 포함시킨다면 성경에 맞지 않으니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라고 할 때의 ‘허물과 죄로 죽은 자’는 영혼을 말함이지 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미 중생한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나지 못했으니 그 영은 죽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어 있다는 말은 영만 죽어 있지 이성은 죽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미 중생자 속에도 이성과 본능과 양심은 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고로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에 이성을 포함시키는 것은 성경에 맞지 않는다.
허물과 죄로 죽은 그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이 영이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니 이 살아남은 곧 영이 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살아난 것은 인간이 죽을 때 천국으로 가게 되고, 살아나지 않았던 모든 것은 다 함께 죽는 것이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엡2:1 - ‘허물과 죄로 죽었던’

※ 영에 이성과 영혼을 포함시킬 수 없다.
중생 못한 자.
죽은 자: 영.
죽을 자: 모두.

중생자.
살아난 자: 영-안 죽을 것.
죽을 자: 이성. 육.
이성은 영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죽을 때 죽는다. 성화된 것만 신령체로 부활한다.
요일3:9, 5:18 - 중생한 영은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한다.

(1)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요일2:29, 3:9)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니 부모님의 혈육으로 난 것이 아닌 영이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중생한 것을 하나님께로 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오해하면 중생한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중생한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말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대속을 단회적으로 입고 살아난 것을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한다. 즉 자연생명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은, 또는 자연생명의 영향력이 미치는 부분은 부모로부터 난 것이요,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생동하고 있는 부분만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중생된 영, 즉 하나님께로 난 자가 확실히 구별된다.

※ 하나님께로 나기 이전에 생동력을 가지고 있는 그 부분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분류법.
본래적 생명: 육의 생명이 있을 때도 있다. 마음 양심 자연생명이 살아있을 때 끊어져 버리면 다 끊어지고 중지된다-육이다.
영의 생명: 요일2:29, 3:9.
영의 생명이 들어오기 전에는 생동력은 모두 육에 소속이다.

(2) 주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요일3:6)
‘중생된 자가 그 안에 거한다’ 라는 말은 육신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중생된 영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 안에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고 하면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죄를 지으니 ‘그’ 라는 그도 죄를 짓는다는 말이니 곧 주님도 죄를 짓는다는 말이 나온다.

※ ‘그 안에’ 라는 말은 계속적 진행을 말한다.

(3) 성령과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요14:16, 고전3:16, 6:19)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상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혹자는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라고 하는 말이 영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은 죄에 상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중생한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부터 생명을 얻어 살아난 그를 말하는 것이니 그가 곧 영이라는 말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살릴 때 단순하게 새생명만 입주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함께 임하여 내주해서 상주하고 계심을 말한다.

※ 중생된 영은 성령과 공존(영의 주체)하니 이는 성령이 영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의행의 활동을 하고 있다. 여기에 이성을 접하면 영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이성보고 하는 말이다.

(4) 하나님의 씨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요일3:9)
하나님의 씨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과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 그 부분, 그 영향권 내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생명력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권으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만일 이것이 죄를 짓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씨도 죄를 짓는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죄의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죄란 무엇이냐?
① 위법이 죄다.
② 불법이 죄다.
③ 하나님의 뜻에 탈선이 죄다.
④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 죄다.

※ 누구라도 법을 어기면 죄냐? 하나님께서 모세의 법을 어길 수 있느냐? 하나님은 선의 절대인고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선이요 의요,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입법자로서 법 위이다. 법 아래가 아니다.
죄의 정의는 하나님으로부터 하지 않은 것. 사람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붙잡혀 한 것은 죄가 아니고 선이다.
모세의 성문법은 절대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이다.

(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생명권 내에서는 지를 지을 수 없다.(요5:21, 요일3:14)
성경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과 육 전체를 포함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중생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죄 아래 팔려 있다는 말이다.(롬7:14) 우리의 몸(소마)은 죄와 사망권 아래 머물고 있고, 영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 생명권 내에서는 범죄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이 생명권 내에 들어간 자는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권 내에서는 생명적인 의행만 할 수 있지 죄행은 할 수 없는 것이다.

(6)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죄가 이를 강제적으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롬6:18, 22, 8:2, 계1:5)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죄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죄에서 해방이라는 이 말은 단회적이요 영구성을 가진 말이다. 일시적으로 해방됐다가 다시금 죄의 속박 아래로 들어갈 수 있던가, 죄가 이를 정복한다던가 한다는 말이 아니다.
죄에서 해방이라는 이 말은 단회적 완전적 영 전인의 뜻을 가졌다. 고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죄를 짓는 것은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때, 죄의 지배하에 있을 때 짓는 것이지 해방되고 나서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7) 성령이 지키심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
성령이 지킨다는 말은 외계에서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영과 결합된 상태에서 범죄치 못하도록 지킨다는 것이다.
외계의 것이 이를 만지지도 못하도록 지키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 나쁜 것, 더러운 것이 와서 접촉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죄를 짓지도 않고, 지을 수도 없다. 피동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성령이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8) 영이 하나님의 양자가 됐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롬8:15)
중생된 영은 본래적인 영으로나 또는 단순한 원상회복 상태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
만일 인간의 영혼의 중생이 원인(原人)의 영으로의 원상회복이라고 하면 중생된 이후에도 얼마든지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원인의 영이 범죄하여 죽었기 때문에 원상회복이라면 또 그렇게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은 원인의 영혼으로 원상회복이 아니고 그 이상이다.
원상회복이라는 말은 본래 영이 피조적 생명으로 가범성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그 상태로 된다는 말인데 중생된 영은 피조적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고, 또 양자의 영을 받아 중생 했기 때문에 절대로 범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 한다고 하는 것은 영론에 있어서 무식한 증거요, 또 중생된 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까닭이다.

※ 우리는 개인이 개인을 정죄하는 것을 삼가 해야 한다. 껍데기만 보면 사무엘을 정죄하게 된다. 루터 칼빈을 정죄하니 개혁에 지장을 준다.
죄를 짓는 자는 무엇인가?

一. 기독자의 3대 요소.
①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중생)
②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미래)
③ 영영 하나님이 아들이 될 수 없는 자.
성화부분은 오염이 안 된다.

二. 죄의 9대 요소.
① 죄를 짓는 자(롬7:20).
② 육체의 정욕(벧전2:11): 싸우는 두 쌍방이 누구든 주격이 되면, 즉 이성 이 영에게 피동 되면 의를 행하고, 이성이 정욕에게 피동되면 죄를 짓게 된다.
③ 육체의 소욕(갈5:16): 온갖 더러운 것, 비 생명적인 것, 비 선적인 것, 비 의적인 것, 육적인 소속에서 나타나는 부분은 각양의 죄를 짓고 있다.
④ 육신의 생각.(롬8:7): 비 의적인 생각, 비 선적인 생각. 영의 생각과는 반대다.
⑤ 옛사람.(엡4:22, 골3:9): 타락 후 이성을 잡고 범죄케 하는 주체성.
⑥ 인간성(눅9:23): 부패된 자기.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좇지 않으면 점점 오염.
⑦ 마귀에 속한 자(요일3:8-10).
⑧ 죄의 종(요8:34): 자유권이 없고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서 죄의 억압 하에 있는 것.
⑨ 죄를 짓는 자는 불법자(요일3:4): 성문법 이상의 은밀법 의지법을 말한다. 신의 법에 적중시키기를 싫어한다.
죄는 이 9가지가 주격이 되어 짓는다.

三. 중생된 영의 불사성.(불사성의 생명)
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요5:24, 요일3:14): 전인이다. 중생된 영은 사망계에서 생명계로 탈출. 사망이 생명계로 올 수 없고, 생명이 사망계로 갈 수도 없다.
② 예수님께서 책임지셨다(요6:17, 딤후4:18): 죽음이 또 다시 올 수 없도록 책임을 지셨다. 사망권세를 이겼기 때문이다.
③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요5:24, 6:47, 51, 54, 58, 19:5-26).
④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다(고전6:15, 12:27, 롬12:5, 엡4:13): 그리스도는 머리요 성도는 지체. 지체는 중간부분만.
⑤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롬8:2): 죽음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四. 중생의 필요성.
왜 중생을 해야 하나?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안 죽었다면?
범죄→ 타락→ 죽음은 필연적 직결이다. 그래서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범성적인 인간이 불범성으로,
가사성적인 인간이 불사성으로,
불완전적인 인간이 불변성으로.
일반적인 중생의 답변은 타락했기 때문이다.

五. 원인성(原人性)과 중생.
원인은 진리적 계약적 연결로만 있었다. 생명적 결합적 관계는 아니었다. 고로 중생이 필요하다.
이성은 느낌적으로 느끼고, 육은 촉감적으로 느낀다. 영 자체로는 누리고 느끼지 못한다. 고로 중생을 시켜야 한다.
1. 영혼은 피조물(창1:26, 엡2:10, 신32:5, 6, 시100:3): 영혼은 비 물질성.
2. 인간의 육체는 물질: 신령계를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3. 비 완전자: 바른 노력 바른 목적에서 지혜지식적 향상, 도덕적 향상, 능 력적 향상. 이 노력은 일생 동안.
① 정확성. ② 투자성. ③ 투쟁성. ④ 수입성.
이 노력을 함으로 완전을 향하게 되어 있다. 바른 뜻, 바른 목적, 바른 소원으로. 싸우되 향방 없이 싸우지 말라!
4. 가사자(죽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 원인의 상태는 비록 범죄는 안 했어 도 언제나 죽을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존재.
가사성자로 지은 것은 기본목적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하기 위해, 즉 인간의 대내전을 위해 이렇게 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죽여야 할 인간과 죽을 인간이 있다.

六. 신신학의 오류.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많은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지만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나은 신이 나오면 그 바톤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두뇌에 맞추어진 하나님이다.(발트)
이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젊은 처녀) 부인을 하지 않는 것 같으나 부인한다. 성경의 일부만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마귀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현재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도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사도들로 통해 왜 기록케 했는가? 노아홍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함인가? 주일날 설교는 누구의 말을 듣기 위함인가?
철학계의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호응에 의해 결정된다. 기독교의 진리는 자체적 권위, 독권적 권위를 가졌다.
기독교라는 한 배 안에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화투치는 사람, 책보는 사람, 얘기하는 사람, 먹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등등이 있는데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느냐?
성경에는 말만이 아니고 행동과 활동도 기록되어 있다. 행동으로도 말을 하고 있다.(의사표시) 성경은 기준이다. 그런데 제각기 알고 있다. 여기서 주관적 기준이 나올 수 있다. 기준은 둘이 될 수 없다.(66권 자체가 말하는 그 기준)
신신학은 인간의 두뇌로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지 않는다. 하나님도 과학에 양보하라는 식이다. 앞으로 보다 나은 신이 나오면 양보하라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이지 못하도록 왜 막지 못했나? 성경에 활동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인간들은 말 대신 연극을 한다. 하나님도 나귀의 말을 통해서도, 노아홍수 등등으로 말할 수 있다.
이단은 7대 기본교리를 부인한다. 자기가 구원자다 심판자다 하는 것은 사교이다.

七. 타락과 중생.

1. 인간의 전적 타락과 중생.
인간은 부분적 타락이 아니고 완전 전적 타락이다. 따라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 영은 즉시 죽고 사망에 포박이다.
① 영혼은 완전히 사망해 죄와 사망에게 속박된 것을 말한다. 영육을 실제로 분리하지 못하지만(결합체인고로) 이론상 분리할 수 있다. 육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영생.
② 인간은 육체도 완전히 사망권 내에 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침몰되고 있는 것이다. 육이 중생된 영의 혜택을 입고.

2. 인간의 영생과 중생.
① 인간은 임시적인 존재가 아니다.
② 영육의 영생과 중생.
③ 인간의 인격성의 영생과 중생.
3. 천국(신령계)과 중생.
① 천국과 몸과 중생.(요3:3)
② 천국입국과 인간의 중생.(요3:5)

4. 생명의 부활과 중생.
인간은 영원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영원 불멸성에 있어서 초생자로서 계속 성장하면서 영원 불멸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선을 넘게 되어 있다. 사선 이 편에는 공존의 세상이기 때문에 선과 악 등 모든 것이 공존하며 혼합되어 있으나 사선 너머에는 구별된 세계인고로 공존할 수 없으니 생사가 분리되고 선악이 분리된다. 중생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는 생명계로, 또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지 못한 자는 사망계로 분리된다. 이 분리는 영원한 분리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존재하다가 사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선에서 분리가 되니,
① 자기 자체로서 영과 육의 분리: 영은 생명계나 사망계로 가게 되고, 육 은 그 원료가 땅에서 생겨진 것이니 잠시 흙으로 돌아가라!
② 소속에 따라 생명계로 가는 분리와 사망계로 가는 분리.
이렇게 갈라진다.
여기서 인격의 주체성인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사망계로 간 자는 사망계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이 죽음의 선 다음에 또 하나의 순서가 있으니 곧 부활이라는 것이다. 이 부활에 있어서도 두 가지 부활이 있다. 이 부활의 순서는 사망선 이전이 아니고 사망선 이후인고로 부활에 있어서도 생명적 부활과 사망적 부활이 있다.
중생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활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육체가 죽음의 선에서 영과 영혼과 분리된 상태로 있다가 거기서 심판주의 재림 시에 중생자는 먼저 부활하고, 미 중생자는 그 때 함께 부활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을 하기는 한다. 이 부활을 가리켜서 생명계로 들어갈 부활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하고, 사망계로 들어갈 부활은 사망의 부활이라고 한다.
생명의 부활이란 그 신체가 살아서 활동을 하는 것이거나, 사망의 부활은 그 신체가 죽은 상태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용어 자체로 본다면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생명계로 들어갈 부활, 또는 생명계에 소속된 자의 부활이라는 말이다.
이 부활은 인간의 도덕생활의 조건에 따라서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로 구별되지 않고 다만 중생이 조건이 된다. 그의 일생을 준법생활을 못하고 범법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객관적 보편적으로 도덕생활을 못했다 할지라도 중생자는 그 심신이 생명의 부활을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종교수양과 모세의 율법인 그 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도덕생활을 철저히 했다 할지라도 중생을 못한 비 중생자는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부활은 중생하는 것이 절대 조건이 된다.
중생을 한 자는 새생명이 내재해 있고, 소속적으로는 생명의 원천인 그리스도에게 소속이다. 결과적으로는 생명계에 가야할 자기인고로 생명의 부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과 중생은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③ 사선 이편에서는 전부 공존이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등등이 공존한다.
모든 인생은 죽음의 선에서 영육이 분리된다. 1차적 분리는 육신은 흙으로 영혼은 천국으로, 2차적 분리는 생명은 생명계로 사망은 사망계로.
생명의 부활은 살아있는 부활, 사망의 부활은 죽음의 부활이라는 말이 아니고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생명계로 들어가는 부활과 사망계로 들어가는 부활이 있다. 인조도덕적 선행으로는 안 된다. 중생의 조건이 없이는 생명의 부활을 못한다.

七. 인간의 영원 불변성과 중생.
우리 인간은 외래적인 어떤 침범이나 침해를 받지 않으려 하고, 자체적으로도 어떤 변동성 변태성이 없이 행복한 인생으로 영원히 영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중생 이전, 혹은 비 중생의 인간은 이 현존세상에서 수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생자는 영원히 불변적인 존재이다.
중생자가 변할 수 없는 것은 중생자는 자체적으로는 불변성으로 되어졌으니 변할 수 없고, 또 대외적 상대적으로 외계의 어떤 침해를 받지 않으니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원한 불변성 때문에 중생이 절대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1. 자체적 불변성과 중생.
우리 인간이 유형성은 한 인간이지만 중생자에게 있어서는 가견적 육적인 한 인간이 있고, 새생명으로 사는 또 다른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한 인간이다. 한 인간이면서 생명이 둘이요, 뜻이 둘이요, 성분이 둘이다. 그러나 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견적인 인간은 그 자체가 변할 수 있고, 변해가고 있지만 중생한 그 인간은 자체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교훈을 잘못 생각하게 되면 이원론적 인간론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인본적 이원론적 인간론이 아니고 가식적인 인간과 불가식적 인간, 중생한 인간과 초생한 인간, 가변적인 인간과 불변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인격은 단일(하나)인격이요, 그 인격을 움직이거나 느끼게 하는 것은 두 요소라는 말이다. 이렇게 한 인간이 가변적인 자체가 있고, 불변적인 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초생자는 가변적인 인간, 중생자는 불변적인 인간. 미 중생자는 아직 불변적인 인간이 그 속에 내재해 있지 않다.

※ 가변적인 자기 불변적인 자기, 가식적인 자기 불가식적인 자기, 초생적 자기 중생자 자기 이 모두는 인격은 하나지만 요소는 둘이다.
일반적으로 변화를 중생으로 본다.(알미니안 계통) 한국교회는 변화를 중생으로 착각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종교도 변화할 수 있다. 변화는 정통교회보다 사이비나 이종교에서 많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많이 요구하는 것은 주로 변화다. 이 변화는 마귀 힘으로 되고, 자기 힘으로 되고, 예수 힘으로 되고. 그러나 중생은 성령이라야 된다.
사울은 순간 순간 변화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다윗은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신비주의 영웅주의에서 변화를 바란다. 이 때는 성령보다 마귀 악령이 먼저 온다.
갑보다 을이 낫다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다. 낫다를 붙일 필요가 없다.

2. 성질적 불변성과 중생.
모든 인간은 출생으로부터 기존적 성질을 다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성질은 아니다. 인간차원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선악의 차이도 있고, 또 미덕의 차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초생자(여인에게서 난 자)는 다 그 성질이 가변적이다.
초생자는 그 성질이 인간차원에서 아무리 좋은 성질이라 할지라도 생명계에 들어갈 성질도 아니고, 만고 불변적 성질도 아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성질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으로 중생한고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불변성이듯이 이도 불변적 성질이다.
중생자 자체에만 있던 이 성질이 점차적으로 이성과 몸에 건너가면 중생자는 중생과 동시에 이 성질을 소유한 자요, 이성과 몸은 중생자로부터 이 성질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이 성질이 이성과 몸에 덧입혀짐에 따라 점점 그 사람의 성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두 성질을 가지고 산다. 초생자는 가변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중생한 영혼은 불변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불변적 성질이 이성에 전가될 때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질이 점차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초생자의 성질은 수시로 변해지지만 중생자의 성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3. 심신의 불변성과 중생.
우리 인간의 몸은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자타가 공인한다. 유아에서부터 노쇠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체구조는 변해가고 있다. 체력 감각성, 홍안소년이 노쇠로 변하고, 행복이 불행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초생자의 마음도 늘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상대적 동화적 가변성과 자체적 사색적 탐구적 가변성이 있으므로 환경이 와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얼마든지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동화적 가변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중생한 새사람이 심신에다 불변적인 이성을 입혀 놓게 되면 이것으로 입어진 심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 불변성은 마음의 불변성이니 이 마음은 상대적 불변성이며 마음 자체도 역시 불변성이다. 또 중생된 그 환경을 입어 부활한 몸도 모든 감각성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신의 불변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절대성을 입고 가자!

八. 중생의 효력.
중생이란 원상복구라고 할 수 있을까? 중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재활 혹은 재생과는 다르다. 중생이라는 말 자체는 두 번째로 태어났다는 뜻을 짙게 가지고 있다.

γεννηθῇ: 난다, 낳다-중생. 위로부터 한 번 다 넣는다는 뜻을 가졌다.
말은 꼭대기로부터, 꼭대기로부터.
From to:
From the begin the again.
겐나오: 난다.
1차적 출생은 육신이 여자로부터 출생했다. ‘여자로부터’ 라는 말은 육신으로부터(From body) 출생이라는 말이다. 곧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3:6) 다시 제 2차의 출생은 영이 출생한다는 말이니 이는 영이 이미 우리 인간의 육신과 결합체로 있었는데 그 영을 살려서 그 새생명이 육으로부터, 혹은 여인으로부터 출생한다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자연생명은 육으로부터 여인으로부터 출생을 했고, 영의 생명은 영으로부터 왔으니 이것을 출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엄격히 말하면 생(生)이라는 면에서 ‘초생이라 중생이라’ 할 때 육신의 생명인 자연생명과, 또한 이 자연생명과 함께 생존하고 있는 전부는 초생 혹은 육으로부터 여자로부터 출생한 것이고, 영혼을 살려놓는 그 새생명은 부모로부터 유전 받은 것이 아니고 영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이를 중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재생 - 원상회복 - 재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하나님의 씨 - 영원히 존재할 자이다.
여인으로부터 온 것: 육의 씨 - 없어질 것.
영혼이 살아난 동작은 중생. 성령은 영혼을 살림. 영혼을 살려놓는 것이 성령으로부터 왔다.
육신으로부터 난 자를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 성화 시킨다. 육신, 육의 것 그대로 두면 마귀에게 이용감이다. 사망 심판이다.
중생자는 성령으로(하나님으로)부터 온 자.
중생한 사람: 중생한 사람.
중생한 새사람: 중생한 영.
중생을 안 한 사람도 변화는 올 수 있다. 십자가의 강도에게서 변화적인 행동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도사에게서는 변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생은 안 됐다.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 동작이다.
중생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
중생한 영혼: 살려놓는 것.(결과)

인간이 이 세상에 출생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은 여자로부터 출생하여 이 물질계를 경험 통치 지배 활용 활동 사용 체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출생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지 않고는 신령계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 물질계를 경험케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신령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목적인고로 이 신령계를 경험하게 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도덕이나 수양 따위로써는 절대로 이 신령계를 경험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난 이 자가 죽은 상태로 있는 영혼을 살리고, 새생명으로 살아난 이 영이 주격이 되어 이성과 몸이 이 능력을 입게 될 때 신령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여자로부터 출생을 해야 이 세상을 경험하듯이 천국 신령계를 경험하려면 중생을 해야, 성령으로부터 난 자라야 경험할 수 있다.

1. 처음의 출생은 육신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다 여자로부터 나는 것이니 여자로부터 나는 이것은 육이다. 이 육은 신령계에 들어갈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육신은 육신으로 났으니 물질계에 적응이 되고 물질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물질계의 경험에 있어서 만인이 일률적이거나 동등은 아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즉 육신으로부터 난 자가 물질계를 경험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가 신령계를 경험한다는 것이요, 또한 다 같이 육신으로 출생을 했어도 이 물질계를 경험하는데는 동등이거나 일률적이 아니고 차등성을 가진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도 신령계를 경험하되 차등이 있다는 것이다.

※ 물질로 났으니 물질계를 경험. 성령으로 나야 신령계를 경험한다. 물질계에 속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게 되어 신령계를 경험한다.
여자에게서 났어도 경험률이 각각 다르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도 신령계의 경험은 차등이 있다.
여자로부터 난 자가 왜 이렇게 힘쓰고 날뛰느냐?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계를 많이 경험하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수만 계시가 아니고 일반성 보편성도 계시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 전부는 계시로 볼 수 있다. 성경은 나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다. ‘그 시대 그 나라는 그렇게 지나갔지만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1) 물질성이 출생.
육신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물질로부터 났다는 말이니 물질로부터 난 것은 곧 물질이다.

(2) 물질을 감각할 수 있는 감각성.
물질로부터 난 것은 틀림없이 물질이다. 그리고 물질로부터 나게 하신 이는 단순하게 물질만을 준 것이 아니고 그 물질을 감각할 수 있는 감각성을 물질 속에 있게 하여 물질을 감각하도록 한 것이다.

(3) 물질을 식별하는 이성.
이성은 비 물질성이라 해도 이는 성령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과 함께 포함되어 육으로부터 난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이성은 비 물질이지만 성령으로부터 나게 하지 않고 물질로부터 나게 한 것은 물질인 신체가 이 물질계를 식별하게 하기 위해, 즉 정신적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 육신으로부터 나게 했으니 육이라는 말이다. 고로 우리는 영과 육의 분리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성을 지은 이유는 물질을 식별키 위해서이다. 자연생명은 초생적 생명이다. 육은 부모로부터이다.
① 자연생명은 땅에서 났고.(이성까지)
② 위로부터 영 전체 중생이다.
영혼 선재설: 풀라토. 유전론 창조론주장.
창조설: 출생과 죽은 영혼의 결합.
영혼 선재설: 희랍철학.
유전설: 영육결합. 부모로부터.
창조설: 시간적으로 동시.




>> (천헌옥)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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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코람데오닷컴(고신 언론)
: 일자: 2012.5.18.
: 쓴이: 천헌옥(코람데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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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분설이냐 3분설이냐는 신학교 시절부터 늘 해결되지 못하고 평생 숙제인양 얼버무려왔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2분설을 지지하지만 간혹 3분설을 주장하는 분을 만나면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
: 그러나 그것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발전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즉 3분설을 주장하는 분들에 의하면 대개 몸과 혼(마음)은 죄를 짓지만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는 극단적으로 나아가 단체 자살이나 범죄를 죄의식 없이 행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
:
: 필자는 어떤 분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
: 몸과 혼이라 할 때 '혼'은 마음을 말합니다. C 목사님 평생 설교 중에 '혼'이라는 표현은 10% 미만입니다. 거의 전부는 '마음' '생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는다. 이 마음을 전통 교리에서는 영혼이라 혼이라 영이라고 표현한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는다. 그런데 마음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마음과 영은 다르다. 마음은 죄를 짓고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고,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이 사람의 주격이며 영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삼분설이다. 박윤선 목사님은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가 있다고 말한다. 박 목사님은 죄를 짓지 않는 그 생명의 씨와 마음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나온다."
: 박윤선 목사님이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을 마음의 어느 한 부분으로 봤고, C 목사님은 바로 그 부분을 '영'으로 표현하고 그 영은 마음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 앞에 법적으로는 우리는 완전 의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죄를 짓는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우리는 죄와 싸우고 죄에게 졌을 때는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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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편지 내용을 두고 독자들(특히 신학교수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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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몸과 마음(혼)은 죄를 짓는다. 그런데 마음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있다. 마음과 영은 다르다. 마음은 죄를 짓고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부분인데 과연 이러한 3분설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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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합당하다면 3분설론자들의 회개는 전인적(인격적)인 회개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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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박윤선 목사님은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가 있다고 말한다. 박 목사님은 죄를 짓지 않는 그 생명의 씨와 마음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분에게 직접 배운 적도 없고 또한 그러한 주장의 글을 읽은 적도 없다. 혹 우리 선배 어른들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분이 있어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에 대해서 어떤 해명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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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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