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이해 - 단일론

발언/주제연구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이해 - 단일론

(최홍석) 0 28


권경호 목사님과 같은 결론으로 나가는 총신대 최홍석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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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홍 석 (총신대 신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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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I. 서론

II. 본론

1. 삼분설(de trichotomie)

2. 실체적 이분설(de substantie-dichotomie)

3. 평가 :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과 비교하여

4. 단일론(de monotomie)

5. 단일론에 대한 평가와 성경적 관점

(1) 유기적인 영-육 통일체(Psychosomatische eenheid)

(2) 중간기 상태(Status intermedius)

(3) 성경적 관점

III.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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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전1:9).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구조에 대한 신학적 논의 역시 새로운 관심사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고대교회로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던 주제요, 그에 대한 해석 역시 연륜의 장구함과 더불어 다양한 폭을 가졌고, 한번도 일의적 개념으로 수렴된 적이 없었다. 이처럼 난해할 뿐 아니라, 어떤 신학적 주제들 보다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논의되어 온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신학적 문제들은, 최근 들어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다시금 신학사의 지평 속에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해석의 폭은 좁혀질 줄 모르고 여전히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더욱 깊어지며, 또한 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 간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은 물론 해석 그 자체와도 연관되어 있겠지만, 오히려 해석의 결과에서 더 크게 발견된다. 왜냐하면 해석된 내용은 곧 바로 윤리적 삶의 중요한 전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구조적 본성이 이렇게 해석되느냐 아니면 저렇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윤리적 전제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제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제 이러한 논제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구조적 본성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고찰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교리사의 지평에 나타났던 여러 주장들에 대해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죠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그의 주저, 『신약신학』(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의 인간론'에 관한 항목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의 인간관은 세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1)그 첫째로는, 주로 지난 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삼분설적인 견해요, (2)둘째로는, 헬레니즘적인 이원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을 혼과 몸,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는 견해요, (3)마지막으로는, 몸, 혼, 영과 같은 용어들은 분리될 수 있는 여러 능력들이 아니라, 전인을 언급하는 다양한 표현 양식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로서 최근 학계의 동향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래드가 지적한 바울의 인간론에 대한 해석의 '세가지 방식들'을, 통용되는 조직신학적 술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순서를 따라 삼분설(de trichotomie) 이분설(de dichotomie) 그리고 단일론(de monotomie)으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인간론을 취급하는 여러 경향들에 대한 래드의 평가는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몇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첫번째 의혹은 래드에 의해 소개된 이상의 여러 견해들 중 그 어느 하나라도,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구조적 본성을 잘 반영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요, 다음으로는 래드가 지적한 '두번째 방식'과 어떤 개혁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온 소위 '이분설'은 교호적으로 대치될 수 없을 만큼 상이한 개념이란 사실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이다. 아마도 '이분설'이란 표현 때문에 데카르트적 경향의 반영으로 판단되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 물론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그러나 그 표현으로 지칭되는 사상은 적어도 두번째 방식에 의해 내려진 결론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래드가 지적한 두번째 방식의 사실성을 부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로 17세기 이후, 스콜라주의적인 정통신학 속에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이 침투해 들어 온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런 점에서 래드의 지적은 분명히 옳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문제는 래드가 지적한 방법들이 바울의 인간론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에 의해 소개되지 아니한 방법이 바로 개혁신학의 교의학적 전통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의 논의를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제한하려고 한다. (1) 먼저는 래드가 지적한 바와 같은 방법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구조적 본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며, (2) 다음으로는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입장이 성경적인 진리를 바로 드러내는지를 살피면서, 그와같은 입장이 개혁신학의 교의학 전통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II. 본론






이제 앞에서 지적한 바를 밝히기 위하여 우선 교리사의 긴 지평 속에 등장했던 여러 견해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난 다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전제들과 표방하는 내용들을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평가하려고 한다.






1. 삼분설(de trichotomie)




인성 구조에 있어서, 이른바 삼분설적 개념은 헬라 철학적 배경 속에서 배태되었다. 적어도 고대 기독교사에 등장했던 삼분설에 관한한, 이와같은 이해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해석이다. 이상계와 현상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헬라의 우주관은 인간 이해에 유추 적용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몸과 영의 관계는 신과 물질계의 관계로부터 유추 해석되었는데, 신은 제 3의 중간존재인 로고스( s)를 통하여 물질계에 연결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영은 혼을 매개로하여 몸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매개체로서의 혼은 육과 가까와지느냐 아니면 영과 가까와지느냐에 따라 물질적 존재로 간주되기도 하고,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결국 영육적인(geistleiblich) 성격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같이 헬라의 우주론적 이원론은 인간론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인간이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분설적인 견해에 의하면, (1) 첫번째 요소는 물리적인 육체로서, 인간은 이 물리적인 본성을 동물및 식물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데,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며, 인간은 보다 더 복잡한 물리적 구조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2) 두번째 요소는 혼으로서, 이성과 감성의 근거요, 또한 사회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서의 정신적 요소다. 동물은 초보적인 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처럼 혼을 가진다는 사실이 인간과 동물을 식물로부터 구별시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혼은 동물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종류에 있어서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키는 요인은 인간이 단지 더 복잡하고 발전된 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3) 세번째 요소인 영을 소유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종교적 요소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의 일들을 분별하고 인식하게 하며, 영적인 자극에 반응하게 하는 개인적인 영성의 좌소로서 이 영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특징이 비로소 혼 속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철학적 배경과 내용을 가진 삼분설은 이미 플라톤(Platon:BC.427-347)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Lucretius:BC.94-??) 등에게서 발견되며, 그와같은 경향은 특별히 고대교회 안의 동방교회 교부들에게 전이되었고, 중세기에는 신지학적(theosophische) 노선을 걷던 자들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특별히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소위 19세기 이후에 등장했던 중재파신학자들(de Vermittelungstheolgen)은 대체로 삼분설의 지지자들이었고, 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웥치만 니(Watchman Nee), 솔로몬(Charles R.Solomon), 빌 고타드(Bill Gothard) 등에 의해 이 견해가 옹호되었으며 『스코필드의 주석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도 또한 삼분설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 처럼 묘사되어 있는 성경구절들이나 혼과 영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 처럼 표현되어 있는 본문들로부터 성경적인 근거를 찾고 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이나 히브리서 4장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s s)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외에도 삼분설의 주창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인간의 3가지 구성요소와 연관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바울은 고전2:1-3:4에서 인간을 ① s ② s ③ s로 분류(고전2:1-3:4)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전15:44에서 ① 과 ② 으로 나누고 있는 바로 그 점이 인성 삼분설을 지지하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주장이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지에 대하여는 사실 의문이다. 그 문제에 관하여는 조금 후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2. 실체적 이분설(de substantie-dichotomie)




여기서 다루고자하는 견해는 래드가 지적한 두번째 방식에 해당되는 주장으로서, 소위'이분설'이란 명칭을 사용하기는 했던(물론 명칭에 문제가 있으나) 어떤 개혁신학자들의 견해와 구별하기 위해 '실체적 이분설'이란 제목을 붙였다. 인간이 두 요소, 즉 물질적 관점의 육체와 비물질적 요소인 영이나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견해는 삼분설보다 훨씬 더 폭 넓게 주장되었다. 라오디게아(Laodicea)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성자의 무죄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삼분설을 채택한 이후, 삼분설에 대한 심각한 반대 반응은 점차 증대되어 마침내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이후, 이분설적인 관점은 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이 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이와 같이 삼분설보다 더 보편화된 이분설적 입장은 주로 서방교회의 전통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중세 스콜라신학 속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발견된다. 최근에 등장한 어떤 형태의 이분설에 의하면 구약과 신약 가운데 나타나는 관점은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은 인간에 대하여 단일론적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신약에 이르러 이 단일론적 관점이 이원론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도 문제가 없는 바는 아니나, 그 점에 관하여는 차후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실체적 이분설이 삼분설과의 연관 속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에 있어서 이분설을 변호하기 위한 논증의 많은 부분들은 본래 삼분설적 개념을 반대하기 위해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삼분설을 반대하는 이분설자들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1)만일 삼분설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살전5:23에 나타나는 "혼과 영과 몸"이란 표현에서 로 연결된 세 명사가 각기 분리된 실체를 가리킨다면, 다른 본문과 관련하여 즉시 곤란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곧 주께서 하신 말씀과 연관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s s s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는 본문에서 로 연결된 명사는 넷이다. 만일 삼분설자들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 본문은 서로 다른 네개의 실체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타나는 네개의 실체들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나는 세개의 실체들과 등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귀절 가운데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용어는 단지 "혼"( ) 뿐이다.





(2)삼분설에 대해 이분설자들이 가지는 또 다른 논박의 근거는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영'과 '혼'의 교호적 용례들로부터 발견된다. 예컨데, 이분설자들은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나는 연구법(paralleism)에서 삼분설에 대한 반박의 근거를 찾는다: "내 영혼(문자적으로는 로서 혼임)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문자적으로는 로서 영임)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1:46-47). 사실 이 문맥에서 와 란 용어에 의해 지칭되는 실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두 용어에 의해 지칭되는 실체가 상이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더 많이 있다. 이분설자들은 ①성경 어떤 곳에서는 인간이 육과 혼의 두 요소로 제시되어 있고(마6:25,10:28), 또 다른 곳에서는 육과 영으로 나타나는 경우(전12:7, 고전5:3,5,7:34, 골2:5)라든지, ②인간의 죽음이 어떤 곳에서는 영이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시31:5,눅23:46,행7:59), 또 다른 곳에서는 혼이 떠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든지(창35:18,왕상17:21), 또한 ③곤고함이 영에 있다고 하기도 하고(창41:8, 요13:21), 또 다른 곳에서는 혼에 머문다고 진술하는 경우(시42:6,요12:27)라든지, ④죽은 자들이 혼들로 불려지기도 하며(계6:9,20:4), 영들로 불려지기도 한 경우(히12:23) 등 이 모든 용례들로부터 영과 혼은 두가지 별개의 다른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두 용어일 뿐이라는 결론을 확고하게 내리고 있다. 서로 다른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동일 실체를 가리키는 두 용어일 뿐이라는 결론은 매우 타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의 구조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다 진술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 성경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실체적 이분설의 난관이 놓여 있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이분설의 논거를 살펴 보았다. 이분설의 주창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들이 그렇게도 삼분설의 비성경적 국면들에 대하여 비평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삼분설 가운데 깊이 깔려있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뉴톤 클락(Newton Clarke)이나 헤롤드 더울프(L.Harold DeWolf)의 사상 속에서 우리는 래드가 지적했던 것과 같은 이원론적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분명히 실체적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사상 저변에는 삼분설에서와 동일한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적 전제가 깊게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뉴톤 클락은 그의 『기독교신학 개요』(Outline of Christian Theology)에서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관하여 진술하면서 인간은 분명히 두개의 서로 다른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인간은 영이나 혼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지 몸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몸이 인간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국면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이와 같은 주장은 분명히 실체적 이원론으로 규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헤롤드 더울프도 뉴톤 클락의 사상과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육 이원론을 제창한다. 이러한 종류의 이원론은 혼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행히 몸의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후,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상태를 잠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극단적인 실체적 이분설자들 중에는 간혹 전통적인 육체 부활의 교리를 영혼의 불멸성으로 대치해 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헤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같은 인물이 포함된다. 이와 같은 사상은 분명히 전통적인 성경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성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삼분설적 견해와 그와 연관되어 나타난 실체적 이분설의 여러 주장들에 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이제 논지를 밝히는 일에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하여 이러한 여러 관점들을 평가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3. 평가 :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과 비교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삼분설과 이른바 실체적 이분설 사이에 다양한 관점의 차이가 놓여 있다는 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일치점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주장의 공통 부분은 두 견해가 모두 영육 이원론의 철학적 전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인데, 인간은 복합적이며 서로 분리될 수 있는 여러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헬라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역력히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히브리적 인간관은 헬라적 관점과는 그 본질을 달리한다. 히브리적 관점 속에는 이원론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개념들은 구체적인 개체 사물들이나 개체 현상들로부터 연역된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체 사물들을 내포하는 실제적인 전체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보편개념이 그들의 사유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모압인이란 개념을 떠올릴 때, 유대인들은 먼저 구체적인 개인을 생각하기보다 모압인다운 성질들의 총체 개념인 한 전형을 생각한다. 여기서 개체로서의 구체적인 모압인은 단지 그 전형의 현현일 뿐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개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한 전형의 현현양식일 뿐이며 종류에 대한 개체의 관계는 분리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종류가 드러나는 한 표본일 뿐이다.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톱( )은 선, 선함, 선한 사람을 동시에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다양한 현현양식들을 포함한 선의 개념이다. 따라서 히브리어에는 서로 다른 품사들 사이에 예리한 구별이 없다. 이는 셈족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다.

구약이 칠십인경(LXX)으로 번역되고, 신약이 칠십인 경을 많이 인용하고 또한 의존하고 있으나 신약의 그릭어를 세속적인 헬라사상의 배경에서 볼 수 없고, 히브리사상의 배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은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원칙이다. 이렇게 볼 때, 삼분설자들이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는 여러 본문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 속에 분리될 수 있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예컨대, 데살로니가전서 5:23이나 히브리서 4:12 등에서 그러하다. 이 구절들은 오히려 전인을 언급하는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삼분설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히4:12에서 혼과 영을 분리될 수 있는 실체로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맥의 의미상 혼과 영이 쪼개어질 수 있는 상이한 실체로 간주될 수 없다. 히브리서 4장 전체 문맥을 통해 드러나는 말씀의 성격은 말씀이 심판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 심판하는 능력에 의해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2-3,6절), 또한 동일한 그 말씀의 능력이 불신앙하는 오늘의 기독인들을 장래 천국의 안식에서 제외시킬 것이다(11-13).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2절에 나타난 대로 선포된 말씀이며 따라서 넓은 의미로 사용된 말씀이다. 그러나 심판의 능력을 가진 좌우에 날선 성령의 검이다. 이 말씀이 한편으로는 확신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안식으로 인도하며(2절), 다른 한편 불신앙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멸망시키는 이중 역사를 수행한다. 계시록은 이러한 말씀의 능력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칼로 묘사하였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계19:15). 여기 나타난 말씀은 인격적 로고스인 그리스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칼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칼을 가지고 계신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 말씀이(2절) 불신앙하는 자들을 멸망시킨다(고후2:15-16).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은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심판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검은 마음 속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한다는 12절의 표현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절)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인간 속에 있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도록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말씀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의미이지, 혼과 영을 쪼개어 분리될 수 있는 실체로 만든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혼과 영을 분할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두 단어 사이에 라는 전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전치사가 발견되지 아니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도 마찬가지다. 이 본문도 인간이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아니다. 문맥상 전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종말적인 영광에 참여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그 날까지 온전하여 흠 없이 보전되기를 권면했을 때, 그의 심중에 어떠한 생각들로 가득 찼었겠는가? 아마도 어떤 부분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전국면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맥 가운데 발견되는 "온전히"( s)와 "온"( )이란 단어가 그 점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홀로텔레이스'( s)란 단어는 전체란 의미의 '홀로스'( s)와 최종 혹은 목표란 뜻을 가진 '텔로스'( s)의 합성어로서 "전적으로 완전한" 혹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온이란 뜻의 형용사 '홀로클레론'( )과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의 동사 '테레데이에'( )는 모두 단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전인에 놓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분명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개개인이 전인적으로 주 강림하실 때 주의 면전에 온전히 설수 있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화란의 유명한 주경학자 리덜보스(H.N. Ridderbos)도 그의 주저인 Paulus에서 살전 5:23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 본문이 삼분설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내적 생명을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 '전인적 표현양식'(pleroforische uitdrukkingswijze)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이 구절에서 어떤 특수한 심리학적 의미나 혹은 인간학적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는 중에 바울은 속사람을 다방면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혼과 영을 병행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각각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양자를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또한 지적한 바 있다. 판류우원(J.A.C.van Leeuwen)도 사도는 여기서(살전5:23) 인간이 영과 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의 인간 본질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석함으로써 우리와 입장을 같이 한다.

이처럼 히4:12이나 살전5:23 등은 눅10:27과 더불어 인간의 구성요소에 있어서 다양한 목록을 제시하는 구절들로 간주될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삼분설자들의 성경적 근거는 해석학적 허약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덧붙여 삼분설과 실체적 이분설에 대한 또 다른 비평은 헬라 철학에서 보여지는 영과 육의 이원론적 대립이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진다. 영은 거룩하고 육은 사악하다는 영육 대립의 이원론적 사상은 삼분설과 실체적 이분설이 가지는 근본적인 윤리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영은 의롭고 정결하며, 육신은 불의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르치지 아니한다. 오히려 영혼도 정결해져야 할 것으로 묘사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이 하여"(벧전1:22),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7:1)고 하였고, 또한 주 강림하실 때까지 영도 정결하게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 살전5:23은 기술하고 있다.

히브리적 인간이해는 헬라적 관점과는 그 본질을 달리한다. 이른바 이원론적 긴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몸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바사르'( )는 결코 혼( )에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바사르는 인간과 동물이 다같이 소유하지만 그 일차적인 의미는 인간의 몸을 지칭하며 무한하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로서의 제한된 인간을 의미한다(창6:3,사31:3,렘17:5). 동시에 '네페쉬'도 몸과 대치되는 '보다 고상한 부분'(nobilior pars)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래서 Brown-Driver-Briggs의 히브리어 렉시콘도 '네페쉬'의 여러 용례들 가운데 다음의 의미들을 중요한 것으로 소개하였다. ①인간의 내적 존재(the inner being of man), ②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 인간과 동물 양자에 모두 해당),③인간 그 자신(the man himself; 때로 인칭대명사로 쓰일 경우, 전인적 인간을 지칭). 이렇게 이 단어가 인간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전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들이 혼의 숫자로 계수되고 있다(창12:5,46:27). 영( )은 원래 '움직이는 공기'를 의미하나 숨, 호흡, 바람 등으로도 번역되는 용어로서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사용된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세상에서 일하시며(사40:7), 생명을 창조하시고 지탱케 하신다(시33:6,104:24-30). 이에 대해 인간 속에 있는 '루아흐'는 '네페쉬'와 중복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루아흐'를 인간 속에 분리될 수 있는 어떤 부분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인을 언급하는 또 다른 용어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바울은 네페쉬의 등치어인 푸시케( )란 용어를 신약에서 사용할 때 히브리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을 취한다. ①생명의 원리(life-principle) ②지상적인 삶 자체(earthly life itself) ③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seat of the inner life of man) 등을 의미하는 이 용어로써 바울은 결코 인간 속에 분리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지칭하지 아니하였다. 예컨대 롬11:3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중에 엘리야의 불평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데: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푸시케'도 찾나이다." 여기서 푸시케는 엘리야 자신의 생명 이외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의 푸시케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롬16:4)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생명' 이외 달리 해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푸시케'는 구약의 '네페쉬'와 동일 개념으로 전인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히브리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용례들은 이외에도 더 많이 발견된다. 바울은 푸시케란 용어를 구약의 용례에서와 같이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하며(롬2:9,13:1), 또한 단순히 육신적인 생명을 넘어 사유하고 일하고 느끼는 '인간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살전2:8,빌1:27). 이와 같은 용례들은 복음서에도 종종 발견되며, 또한 동일한 경향은 루아흐의 등치어인 프뉴마( )의 용례에서도 가끔 발견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인간을 지칭할 때, 거의 영으로 번역되며 인간의 육체적 본성보다 내적 차원인 심적 본성에 강조가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프뉴마는 때때로 푸쉬케와 거의 혼용될 만한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데 전인을 언급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 전체성에 비추어 한 측면을 기술하기도 하나 양자 사이에 뉴앙스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래서 래드 같은 학자는 양자 사이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영은 때때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나, 혼은 결코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프뉴마가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나타내며, 반면에 푸쉬케는 인간 편에서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경의 용례 모두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눅1:46,약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일은 여러 용례들 가운데 푸쉬케와 마찬가지로 프뉴마도 인간의 전체성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약에서 인간을 몸과 혼과 영으로 구분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경향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중간 결론을 얻게 된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1)삼분설과 실체적 이분설이 헬라사상의 영육 이원론적 전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과 (2)그들이 인용하는 근거구절의 해석학적 허약성, 그리고 (3)히브리적 관점에서는 결코 이원론적인 긴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아니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두 견해는 모두 성경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4. 단일론(de monotomie)




단일론자들은 인간 존재를 여러 요소들로 구분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불가분적인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위 개혁파 내의 우주법 철학자인 도예베이르트(H. Dooyeweerd), 얀스(Janse), 폴런호번(Vollenhoven)등과 그외 베르카워(G.C.Berkouwer)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 존재를 여러 다양한 요소들의 합성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적어도 히브리사상의 배경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 사실 단일론자들의 주장은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인간 이해에 대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 관점에서 타당성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그 타당성이 가지는 신학적인 의의는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견해에 또 다른 문제점과 한계는 발견되지 아니하는지? 등등의 문제들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단일론의 발생 배경부터 살펴 보는 것이 논리상 순서일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회가 삼분설을 배격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삼분설이 영육 대립의 이원론적 배경을 가졌고 따라서 인간 본성의 통일성을 깨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삼분설 속에서와 같이 인성 이분설 속에서도 여전히 이원론적 긴장이 표출되지 않느냐는 것이 단일론자들의 근본적인 시각이었다. 즉 이분설도 필연적으로 이원론적이어서 결국은 중재의 변증법을 포함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인간 본성의 통일성이 깨져 버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성(duality)과 이원론(dualism)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주적 실체 속에 비록 두 요소 혹은 두 계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여 창조주께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대치관계 곧 이원론적 관계가 되도록 의도하셨는가? 결코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류의 이원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피조적 실체 속에 존재하는 이원성은 조화와 통일을 배재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이원성에 분극적 긴장이 존재하며 그 결과 양자 사이에 통일성을 파괴하는 내적 분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한, 그 이원성은 곧 이원론으로 전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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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삼분설적인 입장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내재하는 분극적 긴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만일 이분설적인 견해 속에서도 영혼과 몸 사이에 이와 유사한 긴장이 유발된다면 이분설도 삼분설과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 단일론자들의 지론이다. 사실 이와 같은 단일론자들의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살아있는 인간을 두 실체(substances)의 합성으로 묘사하는 이분설의 형태 속에는 분명히 성경적으로 비평되어야 할 요소가 내재해 있다. 적어도 성경에 기반을 두어야 할 인간 이해는 인간의 구조 속에 분극적 긴장이 내포되도록 의도된 것이어서는 않된다. 오히려 이원성에도 불구하고 구조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신학에서 논쟁과 비평의 여지가 있었던 이분설의 형태는 데카르트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실체적인 이분설(de substantie-dichotomie))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실체적 이분설의 주창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영과 육 사이의 연관을 주장하고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견해는 통일 속에 존재하는 이원성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그 속에 폐기되지 아니하는 분극적 긴장이 항존함으로써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 구조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단일론이 등장하면서 일어났던 논쟁의 초점은 이원성에 놓여 있다기 보다 이원론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단일론자인 도예베이르트는 실체적 이분설에 대하여 그것은 이원성 이상의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인간 본성의 통일성을 이원론적으로 파괴한다고 신랄하게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성 자체에 대하여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과 '몸' 사이를 구별하였으며, 여러번 그 자신이 이중 계기에 대한 사상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점은 역시 단일론자인 얀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과 관련하여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별하였으며 이를 몸과 마음의 등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의 구조를 둘이나 그 이상의 여러 부분들이 집적(conglomeration)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단일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당시 신학계에 침투해 있었던 이원론적 성향의 플라톤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서, '실체적 이분설'에 대한 단일론자들의 학문적 비판은 일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5. 단일론에 대한 평가와 성경적 관점




우리는 위에서 단일론이 반이원론적 성향을 가진다는 사실과 비성경적인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견해임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단일론적인 견해 가운데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구조에 대한 단일론적 시각은 분명히 성경적 진리에 접근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일론과 관련하여 인간 구조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결코 이로써 종결될 수는 없다. 종말론에서 '중간기 상태'(status intermedius)로 불리우는 부분에 이르러 문제는 다시 발생한다. 여기서 먼저 단일론의 긍정적인 측면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1) 유기적인 영-육 통일체(Psychosomatische eenheid)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구조에 대한 단일론자들의 평가는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Coram Deo-Sein)로서의 인간은 항상 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의 몇가지 점들을 살펴 볼 때 분명해진다.





(1) 첫째, 인간은 창조시부터 전인적으로 파악된 존재였다. 창2:7에 나오는 '생령'( )은 '살아있는 존재'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로서 인간의 전체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이지, 결코 인간 속에 분리될 수 있는 어떤 독립된 요소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성경은 인간을 유기적 통일체 곧, 전인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2)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역시 전인적으로 관련된다. 신적인 요구에 대한 불순종으로서의 죄는 영혼에만 관련된다거나 육체에만 연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 곧, 전인과 관련되는 것이다(롬2:9). 여기서 타락의 성격도 동일한 성질의 것으로 이해된다(고후7:1). 몸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요, 영혼만 부패하는 것도 아니다. (3) 셋째, 구속의 역사도 역시 동일한 성질의 것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종말론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은 몸과 영혼 사이에서 양자 택일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전인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지(롬8:23,고전15:12-27), 구원의 은총이 결코 어느 한 부분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단일론자들의 주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에 관한한, 성경적인 관점에서 타당성을 지니는 셈이다.

인간은 유기적 통일체이다. 그럼에도 물질적 측면과 비물질적 국면의 양면성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다. 이와 같이 하나의 인격체 속에 내재하는 두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이분설'(dichotomy)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원체'(duality)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분설'이란 표현은 성경이 의도하는 내용에 부합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분'이란 말 자체가 헬라 사상적 발상과 깊은 연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디코토미(dichotomy)는 '둘로'라는 의미의 디케( )와 '분할하다'는 뜻을 가진 템네인( )의 합성어로서 두 부분으로 자를 수 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용어는 성경적인 견해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원체나 전인이란 용어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더 나은 표현을 발견해야 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영육 통일체'란 표현이 여러 가능한 용어들 가운데 가장 적합한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인격의 단일성과 구조적 이중성을 동시에 견지하는 장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용어가 필자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죤 머리(John Murray)의 저술 속에 암시되어 있으며, 브로움멀리(G.W.Bromiley)나 안토니 후커마(Anthony A. Hoekema)등에 의해 채택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용어를 찬성하는 이유는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에 가장 부합되는 표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중간기 상태(Status intermedius)




이제 우리는 단일론적 견해가 직면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로서, 이른바 중간기 상태와 관련된 신학적 난제들을 다루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전통적 개혁신학의 종말론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중간기 상태(status intermedius)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 죽은 자들이 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간기 상태와 관련된 세부적인 문제들을 다 거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단일론과 관련된 문제들만을 간략하게 다루려고 한다.

중간기 상태 교리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과연 이 중간기 상태의 기간 동안 인간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존재를 멈추어 버리고 마는가? 아니면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는가? 혹은 부활체를 입기 전이므로 중간상태의 몸을 입게 되는가? 하는 등등의 여러 의문점들이 제기될 수 있다.

단일론자들의 주장대로 하면, 인간은 전인으로 살다가, 전인으로 죽고, 전인으로 부활한다. 그렇다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단일론자들은 주장하는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성경은 적어도 중간기 상태를 존재의 멸절로 말하거나 중간적 단계의 몸을 취하는 상태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 수면상태 곧,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다가 부활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교리사적으로 루터교회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 속에 발견되는 부활을 기대하는 국면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타당성을 지닌다(살전4:16-17, 고전15:51-52, 빌3:20-21). 그러나 이러한 견해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죽은 자들이 과연 수면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진술이 과연 어떠한지를 살펴 볼 수 밖에 없다. 우편 강도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나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고 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죽은 자들이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Cf.,고후5:1-2,히11:16). 이렇게 볼 때, 죽은 자들이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 간다는 사실을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연루된 것으로만 비평하는 태도는 성경의 교훈을 바로 보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상에서 살펴 본 여러 성경적인 자료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들이 단지 수면상태 곧,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다가 부활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받아 들일 수 없게 한다.

단일론자들이 인간을 영육 통일체로서 규명하여, 전인적 존재로 파악한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따라 사색하지 아니하고, 단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절대적 단일론에 빠짐으로써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영혼 수면설적인 방향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 愎? 도예베이르트는 실체론적 이원론을 배격하면서도 두 측면 곧 마음과 기능막(functie-mantel)으로서의 몸을 이원성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중간상태의 기간 동안 인간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적극적으로 존재의 멸절을 주장했다거나 무의식 상태로서 중간기 상태를 설명하지는 아니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부분에 이르러 수수께끼 같은 불분명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해석의 애매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도예베이르트는 육신의 가사성과 더불어 이성적인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실체적 이분설에 반대하여 모든 현세적인 존재는 죽음과 함께 종식을 고한다는 견해를 피력했으며, 사후 영혼에 남겨질 수 있는 기능이 어떤 종류의 것들일지에 대해 "아무것도 없다"(Niets)고 대답함으로써 그를 해석하는 일에 난해함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예베이르트의 대답 때문에, 사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해 진술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se Catechismus, Zondag 22)의 내용을 그가 거부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그의 대답은 답변한 일과 관련된 문맥 속에서 신중하게 논의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그의 진술은 다분히 인간을 가사적인 몸과 불멸적인 영혼의 합성(compositum)으로 보고 영혼이 이성적 성질의 것이기에 육체와 분리되어(anima rationalis separata) 불멸한다고 주장하는 실체적 이분설을 반대하는 맥락 속에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감안할 때,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대답은 안토니 훅크마가 해석한 대로 사후에는 수학적, 공간적, 신체적 육체의 기능들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와 애매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그의 대답으로부터 사후 신자들이 누리게 될 그리스도와의 연합 자체를 부인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에는 미흡함이 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논의된 내용을 중간기 상태에 대한 그의 입장으로 비화시켜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중간기 상태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 도예베이르트는 여전히 불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영혼 수면설자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며,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단일론자, 폴런호번도 신자의 사후 상태를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인정하고 있다.






(3) 성경적 관점




하여튼 영혼 수면설은 성경적 교훈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단일론적 입장이 중간기 상태와 관련하여 존재 멸절론이나 영혼 수면설에 기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한 견해들로 기울어지는 한, 단일론적 견해는 더 이상 성경적 관점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미 우리는 플라톤적 인간관과 성경적 인간관 사이에 혼동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중간기 상태와 관련하여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는 사상은 인간이 죽음의 문턱을 들어 서는 순간, 그 존재가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죽음이 믿는자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지 아니 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죽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존재케 한다.

사후에 육체가 계속 존재한다는 식의 생각을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평하는 일들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희랍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비성경적이라고 해서 사후 계속되는 지속적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후에 지속되는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영혼에 해당되는 희랍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 )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10:28),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 )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이상에서는 혼이란 단어가 사용되었고, 다음의 구절들에서는 영이란 단어가 사용된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 )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 )"(히12:23).

인간은 영과 육의 유기적 통일체요, 그러할 때에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온전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죽음이 이를 때에 몸과 영혼 사이에 잠정적이며 일시적인 분리현상이 일어난다(고후5:1-10, 빌1:20-24, 욥19:25-29, 고전15:). 이러한 사실들은 분명히 성경이 가르치는 명백한 교훈들이다. 이렇게 볼 때 래드가 지적했던 몇가지 방법들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이와 같은 성경적인 교훈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사상을 더욱 잘 반영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를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일론적 견해는 살아있는 현세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와 또한 부활 이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에서 신령한 몸으로 구속받게 될 존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성경적 진리이다. 그러나 단일론적 견해로서는 중간기 상태에 대한 성경적 사상을 온전히 반영하는 일에 미흡함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중간기 상태와 관련된 이와 같은 미비점을 보완하여 '조건적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성경적인 인간 이해로 제시하려 한다. 여기서 단일론적 견해에 '조건적'이란 표현을 첨가한 이유는,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 구조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이 세대와 오는 세대 사이의 연결점으로서 중간기 상태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용어에 의해 함의되는 사상은 이미 서론 부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개혁신학의 교의학적 전통 속에서 발견된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개혁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II권 가운데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부분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고 있다: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계시를 알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철학은 항상 경험론이나 이성주의로 떨어지거나, 유물주의나 유심론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양자를 중재한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나, 그 영혼은 심리적으로 조직되어 본질상 육체에 거하도록 되어 있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도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육체는 감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예술품이다. 또한 영혼과 같이 선하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과 육체가 결속된 것은 불가사이한 것이지만 그것은 기회론이나 예설조화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다. 이 연합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고 물리적이다(zij is niet ethisch, maar physisch). 너무나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본성, 하나의 인격을 이루며 영육의 주체도 하나의 자아이다 ."

애석하게도 인간의 구조와 관련된 바빙크의 사상을 다 소개할 여유는 없다. 그의 진술 가운데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De mensch heeft een )는 표현이라든가, "결속"(vereeniging)이란 말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데서 데카르트적인 경향이 숨어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진술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성경에서 들어왔던 음향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유기적인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

그리고 바빙크의 종말론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간기 상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므로, 이로써 단일론의 약점을 뛰어 넘을 수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따라서 우리는 헤르만 바빙크에게서 '조건적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래드가 지적했던 접근방법들 가운데서는 결코 발견되지 아니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III. 결론




지금까지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해 교회 역사상 등장했던 몇가지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 보면서 몇가지 교훈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첫째, 인간 이해력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도 긴 역사의 지평 속에 드러난 여러 견해들은 시간의 장구함 만큼이나 주장의 폭도 다양하였다. 또한 그 다양함 속에 놓여 있는 긴장은 결코 해소될 수 없을 만큼 배타적 성향을 드러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것이지만, 우리가 가진 이해력의 한계 역시 그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바는, 자신의 주장을 늘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겸손일 것이다. 이러할 때 주 안에서의 화평과 일치를 우리 가운데서 잃지 아니할 것이다.







(2) 둘째, 신학 사상의 흐름 속에서 항상 진리를 향한 역동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늘 깨어 경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미흡하다. 그것은 ①피조성과 연유된 인간의 한계성과 ②타락과 연루된 죄성에 기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와 의식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면서, 말씀에 대한 사랑을 허락하시도록 간구할 수 밖에 없다.







(3) 셋째, 반동으로 나온 사상은 언제나 진리의 전체성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교리사적 교훈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보아온 일련의 흐름 속에는 반동적 성향과 관련되어 나온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진리의 한 면만을 붙들었을 뿐, 여전히 보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반동 성향을 가진 주장은 일단 재고의 소지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 원천이 불변의 성경이란 의미에서 성경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교의가 가지는 가변적 성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 작업이 말씀에 의해 항상 개혁되어야 할 성격의 것임을 겸손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구조적 본성은 ①인격의 단일성과 ②구조적 이원성이 동시에 견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론적으로 살피면서, 필자는 '조건적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이란 용어를 성경적 인간 이해로 제시했었다. 이제 논의의 과정을 통해 내려진 이 결론과 관련하여 이와 같은 신학적 주장이 과연 오늘의 상황 속에 무슨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 잠시 살펴 보려고 한다.





(1) 첫째,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살피면서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받은 인상은 우리 가운데 '인식의 전환'이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그 인식의 전환이란 ?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 들어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영육 이원론적 경향으로부터의 전환이다. 분명히 성경적 세계관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피조적인 물질 세계를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지 아니 한다. 만물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 자체로는 선하며 가치있는 것들이다. 노동도 기도 처럼 중요하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에 속한다. 주일만 중요한 날이 아니다(물론 중요한 날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이 다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성과 속의 개념도 성경적으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성속 개념은 결코 공간적이거나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파악되어야 할 신앙 윤리적인 문제다. 우리는 초자연을 무시하는 자연주의나 자연을 무시하는 초자연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자연을 죄악시하여 이 세상 문화 영역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자연과 초자연을 대립시킨 재세례주의적인 견해를 용납할 수 없다. 개혁신학은 자연과 초자연을 배타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경향을 배격한다. 물론 자연이 죄로 인해 오용되고 부패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우주적인 범위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2) 둘째, 우리의 상황에서 특별히 구원을 전인적으로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적인 조건은 영적이며 심리적인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 독립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영적으로 강건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체적인 운동이나 휴식 같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영적인 일을 살피는 어떠한 일도 인간의 신체적인 조건과 심리적이며 감성적인 상태를 도외시하고는 올바로 수행될 수 없다. 그 점은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고,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나 감성만을 다루려는 태도에서도 동일한 현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영과 육의 종합적인 사역은 인간 존재가 영육 통일체로 파악될 수 밖에 없는 한 불가피하다. 물론 이러한 사역은 목회적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기독교 교육의 차원에서나 임상 의학적 차원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기에 하나의 획일적 원리에 의해서는 결코 그 본성이 풀려지지 아니 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의 서로 다른 국면들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신체적인 국면을 포함한 인간 본성의 다양한 국면들은 영성과 배타적인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전인에 대한 호소여야 할 것이며, 전인을 위한 처방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구속하시기 위해 화육하셨고, 온전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구원의 한 과정인 성화도 역시 동일한 원리 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은 인간 본성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정복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그 본성 전부가 죄의 영향 하에 들어갔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배타적으로 선의 좌소가 될 수 없다. 부패는 전적인 성질의 것이기에 구원 또한 전인을 위해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육체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보고 영혼을 선한 것처럼 간주하는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3) 마지막으로, 기독교 문화관의 정립과 확산이 절실히 요청된다.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화와 문화적 사명이 갖는 불가분성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대개 보수적 성향을 가진 자들은 전자를 강조하였고,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하였으나, 사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요 동시에 취하는 관계도 아니며 어느 것에 우열을 두는 관계도 아니다.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문화명령은 "땅끝까지 가라"(마28:19-20)는 대위임명령과 언약적 차원에서 연결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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