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면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3109번 Re (위치 이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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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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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 아끼는 마음으로, 외부에 있으시지만 공회에 대한 애정과 우려로 지적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외부에 있으시고 공회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 아시는 분들 가운데 그런 우려를 표하시는 경우를 저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아마 발언자께서도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나 그런 분들의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들을 대표해서 말씀하신 것인줄 압니다. 공회노선에 대해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의 게시판에 이런 입장을 밝혀주신데에는 많은 용기와 숙고가 있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내용 중에 좀 더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 다음과 같이 건의를 드립니다.
1. 기본적인 전제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 진정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대언자로서 성령의 말씀하심을 따라 말하기 때문에) 누구 설교는 더 깊고 높고 낮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하 '설교자'라 함)들이 말씀을 전하는 과정을 좀더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 성령 --> 설교자의 설교
이렇게만 혹은 여기까지만 생각하는 경우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 100% 그대로 설교자의 설교로 나타난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아마 위에서 주장하신 말씀이 옳다고도 여겨집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그 사이에 중간단계가 있습니다.
* 성령 --> 설교자의 영 --> 설교자라는 사람 --> 설교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 설교자의 영까지는 100% 그대로 가겠지만, 과연 그 다음 단계를 거치면은 어떻게 될지? 얼마나 감소가 될 것이며, 또는 성령이 주신 말씀이 아닌 주관이 얼마나 추가가 될 것인지? 혹은 곡해가 있지는 않을런지? 그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지? 또 설교자라는 사람마다 그 정도는 얼마나 차이가 날 것인가? 아니면 백이면 백, 모든 설교자의 신앙이나 성화 정도에 상관없이 자로 잰듯이 똑같은 수치로 나타나니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인지?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고전14:32의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하시는 말씀이 일부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른 분의 말대로 수원지의 물은 같지만 중간단계인 파이프(설교자)에 따라 누수가 되어 중간에 물이 다 새버리는 경우도 있고, 파이프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사람이 먹기에 치명적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고, 가끔 막혀서 물이 나왔다가 안나왔다가 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식을 진정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아무 파이프에서 나온 물이나 구별하지않고 먹이지는 않겠습니다. 어떤 파이프도 정 믿지 못하겠으면 생수를 사서라도 먹이겠지요. 점점 시대가 어두워지고 혼탁해질수록 이런 구별성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2. 설교록 정리작업에 대해서는 일반 교계와 교회 역사를 같이 살피는 객관성을 가지시길
발언자께서는 목회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신학교를 나오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실 때 아마 성경 한 권만을 교재로 삼고 배우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신학교는 양성원처럼 성경자체연구에 비중을 두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지요) 그보다는 장로교 쪽 신학교를 나오셨다면 칼빈주의에 대해서, 감리교 쪽 신학교를 나오셨다면 알미니안 주의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배우셨을 겁니다. 그 외 기독교 역사라든지 조직신학이라든지 많은 것을 배우셨을텐데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서 정리된 교재나 논문을 가지고 공부하셨을 것입니다. 객관성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지금 설교록 정리작업에 대해 정죄하시려면 먼저 신학공부하던 시절에 칼빈이나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정리작업해서 교재로 만드셨던 분들을 정죄하신 다음이 되어야겠습니다. 객관성에 양심을 더해 생각해본다면, 그런 교재를 가지고 한 공부로 졸업을 해서도 안되는 일이었겠지요.
전기 작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성경인물 외의 신앙위인들에 대한 전기를 전혀 읽어보신 일이 없으신지요. 그런 전기를 통해 신앙의 유익과 감화를 받아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객관성을 가지신다면 우선 기존에 나와 있는 신앙위인들의 전기부터 정죄를 하시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이미 출간되어 기독교 서점들에 유통되는 수많은 신학교재, 전기, 간증집에 대해서는 침묵하시고 단 한권 백목사님의 전기나 설교록 정리작업에 대해서만 칼날을 들이대시는 것은 객관성을 잃었다거나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신자들조차도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과 가까운 곳부터 바로잡는 것이 양심이라고 주장합니다. 혹 외부에서부터 공회에 이런 권면을 하시기까지 불신자들조차도 거치는 이런 객관성과 양심의 과정을 거쳐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데도 정상적으로 일반적인 신학교를 졸업하셨다면 엄청난 신앙이시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역사가 있으셨을듯 합니다.
>> 외부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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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봉 목사님과 백영희 목사님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저는 이분들의 가르침 전체를 연구한 사람은 아니지만 (연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중매쟁이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 연결되면 그만이지요) 굳이 비교해 본다면 (이목사님 글이 한쪽으로 치우쳤다 싶어 이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이분들은 공히 둘다 똑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중매쟁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물을 파서 생수를 공급 하든 수도를 연결하여 공급을 하든 공급하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당대를 살면서 당대의 필요를 따라 주님의 일꾼들로서 생수이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공급을 했다는 것입니다 김현봉은 우물파서 덜 세련된 방식으로 공급을 했고, 백영희는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공급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수를 흘러 보냈느냐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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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파이프를 사용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은사의 문제이며 전달 방식의 문제입니다 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아는한 은사의 문제이며 기능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저도 그분들의 글을 통해 나름 확인하는 것은 그분들을 통해 나온 생수가 같다는 것이며,,,,, - 이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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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목사님은 은사의 문제를 마치 사람의 문제 (누가더 깊이 깨달았느냐과 같은)인 것 처럼, 백영희라는 사람 김현봉이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쓰셨는데 이것은 자칫 일반 교인로 하여금 은사의 문제를 사람의 문제로 시선을 옮겨 백영희라는 사람을 추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더나아가 백영희 설교록을 절대시 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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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이목사님은 백영희 설교록을 근거로 일일이 부류 작업을 하여 그 각각의 파이프에 번호를 적는 것과 같이 (국어 사전 편찬하듯이) 사전화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성령의 무한한 영감에로의 접근을 오히려 막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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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에서 이목사님은 평가하기를 김현봉 목사님보다 백영희 목사님이 깊고 체계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식의 말은 지방교회에서 위트니스리가 말히갈 바울이 쓴 글은 다른 사도들의 글보다 더 깊고 심오하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복음(위트니스리가 루터의 말을 인용) 과 같고 구약에 들어가야 할 글이 신약에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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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사도들의 통해 기록한 말씀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통해 기록했으나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설교가 높고 깊고 낮고가 없습니다 그저 대언자로서 성령의 말씀하심을 따라 말하기 때문에 때로는 한번에 들어서 깨달을 수 없는 깊은 말을 전달할 수도 있고 (심지어 설교자도 설교하는 가운데 성령께로서 자신이 처음 듣는 말을 배우며 동시에 깨달아 가며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누구나 알기쉬운 평범한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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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양들의 수준과 형편을 따라 사역자들을 세워 이런 공급도할 수 있고 저런 공급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진정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누구 설교는 더 깊고 높고 낮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자를 통해 교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 어떤 진리를 밝혀 줄 수도 있으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사역자가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붙들고 쓰는 문제이며 사역자가 높고 깊고 심오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가 깊은 깨달음을 갖는 것은 사역자가 깊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깊은 깨달음을 주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역자들을 상대할 때 이사람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모세가 뭐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능력이 나타나던 것이 아니라 그저 광야에서 방황하는 노인을 하나님께서 그저 붙들고 쓰시니까 대단한 모세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실 엘리사도 영감을 받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엘리사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열심히 엘리야를 좇아다니며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섬겨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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