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더욱 가까와지고 있는가
항상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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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7 00:00
하나님과 더욱 가까와지고 있는가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가
나를 바로 알고 사람을 알고 교회를 바로 알아가고 있는가
만물을 바로 알고 있는가
보충하면 .
받은 은혜가 적은 사람은 적은 은혜로만 가치를 두고
받은 은혜가 많은 사람은 그 은혜 통해 한량없이 받은 은혜 감사찬양하고픈데
은혜의 기관도 감사하고 그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한 일이듯
바로 깨닫지 못해 엉뚱한 길에서 헤메고
이리속고 저리속고 지내온 세월에서 바로 찾은 진리하나, 노선하나
너무 어리고 약하여 감당치 못할 때가 많으나 자라가고 배워가기에 바쁜 일인데..
저 모퉁이 너머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보배가 있는지
저 모퉁이 너머 알려주고 보여준 이 사람을 감사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 어찌 감사하는 것이 심부름한 종에게 감사하는 것인가
종을 보내어 알려주고 책임을 지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것인가
바른 감사 바른 가치는 그 감사와 은혜의 기관을 통해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여 가까와지는 것 이것이 아닐까
단언코 은혜의 기관을 감사치 않으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세우신 뜻 잘 새겨
당신을 알아가고 배워가고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 공회인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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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시는 분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지만,
: 후배가 얼마나 칼빈주의에 정통하신 권위자이기에 그 후배의 말을 인용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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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문답방 글을 보면 기독교 신앙이 '칼빈'을 강조하다 '칼빈'에 갇혀지게 되는
: 잘못을 범했다는 글들이 많이 있으니 참고하시고
: 백목사님조차 '칼빈'에 갇힌 교계를 책망하신 것이 설교록에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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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가 종교개혁과 그 후에 기독교를 바로 세우는데 많은 일을 했고
: 후대의 사람들이 '칼빈' 자체를 받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카톨릭의 잘못된 사상에서
: 성경대로 믿을 수 있게 '칼빈'에게 도움을 받고 '칼빈'과 같은 입장에 선다는 것 때문에
: 카톨릭쪽의 사람들로 하여금 '칼빈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말은
: 칭찬이 아닌 조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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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칼빈주의자'라는 말이 '칼빈'과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그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 칼빈주의자들은 그 말을 매우 거북하게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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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과 동시대에 무명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게서 칼빈과 비슷한 사상과 문건들이 존재했었습니다. 칼빈 혼자만의 독특한 깨달음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칼빈도 초대교회 이후 어거스틴까지의 수많은 교부들의 글을 정리한 수준이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와 그의 신학이 옳음을 증명코자 수많은 교부들이 자신의 뜻과 같음을 일일히 찾아 보여주고 증명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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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를 잘 모르는 분들은
: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 '칼빈'만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개혁파'안에서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가급적 쓰지 않고 멀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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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라는 말이 생긴것은 '칼빈'이 조금 유명했을 뿐입니다.
: '칼빈'은 16-17세기 유럽의 다양한 나라와 도시에서 일어났던 '개혁신학'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일일히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만 신경써서 공부해 보시면 칼빈 이전에 이미 칼빈보다 뛰어난 이들이 있었고 신학사상에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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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칼빈주의자' 자신들은 '칼빈주의자'라고 불려지기도 싫어했고 그러한 사람이 되기도 싫어했습니다. '칼빈주의'가 아닌 '개혁주의', '개혁파'라고 불려지길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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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신학과 모든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부터 알고
: 한 사람에게 얽매이거나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은 '칼빈'이 다 담지 못한 하나님을 다른 분에게 배움으로써 후대에 더 '성경적'인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외부에서 개혁파에 속한 많은 분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즉 개혁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본래 그 사상이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없습니다. 그 태생이 교황이라는 인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것이기에 본능적으로 인물을 드러내는 일을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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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사람마다 조금 천한 개혁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칼빈만 옳다', '가장 칼빈이 위대하다', '칼빈이면 충분하다' 등등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안에서는 이런 사람을 어리게 보거나 천하게 생각해서 거리를 둡니다. 어린 아이가 손에 든 막대사탕을 제일 귀하게 보는 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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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이곳 홈페이지를 보면
: 개혁주의를 편협한'칼빈주의'로 잘못이해하고 오해할 수 있게 적은 글들을 보게 됩니다. 일반 장로교가 '칼빈'을 따르는 것을 보니 공회가 '백영희'를 높이고 '백영희주의'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격의 논리를 펴는 것을 봅니다. 잘못입니다.
: '칼빈주의'라는 말을 멀리하고 천하게 생각하며
: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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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건은 백목사님과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어느정도의 가치로 두느냐에 있는것이 아니라
: '백영희'를 어떤 사람으로 볼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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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툴리안,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백영희, ..............
: 백영희 이전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주장을 보충, 증보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명과 무명의 차이일 뿐입니다.
: 소위 '개혁주의' 혹은 '개혁파'라고 불려지는 사람들, 또 그렇게 불려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도 않고 한 사람만으로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 아마도 외부에서 글을 쓰신 분은 그 외부적 성향으로 지적을 하신 것 같습니다.
: 공회는 공회적 성향으로 말씀하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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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목사님 전기를 쓰냐 안쓰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 위대한 신앙인들의 전기를 통해 우리는 벌써 많은 유익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 쓰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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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한가지 우리 공회가 되돌아 봐야 할 것은,
: 터툴리안, 어거스틴, 루터, 칼빈, ...... , 주기철, 손양원등등의 많은 신앙인이
: 전기를 통해 소개되었을 때 그것이 반대 되지 않았고 '우상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왜 '백영희' 전기는 그렇게 인식되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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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보수 장로교는 '칼빈'에게만 배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 공회는 '백영희'에게만 배우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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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보수 장로교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싫어하고 실천하며 '개혁파'로 고쳐나갑니다.
: 공회는 연구소 홈페이지 이름조차 'THE PAIKIA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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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 주석을 가지고 매년 두번씩 집회를 하고
: 칼빈 주석이면 충분하고 더 나은 깨달음을 본적도 없다고 말하며
: 칼빈 주석외에는 대충 간략하게만 보고 눈도장만 찍으라고 하는 중에
: 칼빈 전기를 만든다고 한다면.
: 그 작업을 두고 우리 모두 칼빈을 우상화한다, 지나치다 라는 말을 꺼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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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싫어했습니다.
: '타장로교'는 '칼빈주의'라는 말 대신에 '개혁주의'로 불려지길 원합니다.
: '공회'는 '칼빈'의 신학이 아닌 칼빈'주의'를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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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인 개념의 차이가 있어서 서로의 발언에 평행선을 달릴것 같아
: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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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영삼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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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영희목사님이 우리시대의 `칼빈`이라면...
: : 백영희목사님의 설교록이 우리시대의 `기독교강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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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보다 더욱 더 백목사님을 높이고, 설교록을 더 열심히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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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가 아는 후배가 총공회신앙노선을 `칼빈주의의 완성`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 : 장로교에서 `칼빈주의의 완성`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가치가 너무 높다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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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건은 백목사님과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어느정도의 가치로 두느냐에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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